70화. 실종 (1)
낭왕이 깨어나고 하루 뒤.
그동안 잘 먹고 잘 쉬면서 밤낮으로 운기요상을 한 낭왕은 빠르게 건강을 되찾았다.
전력을 되찾은 건 아니지만, 빙궁으로 돌아가는 것 정도는 문제 없을 만큼 회복한 것.
그렇게 낭왕과 빙오선 그리고 설혼대까지 합쳐 십수 명에 이른 일행은 빙궁으로 돌아갔다.
성문을 지키는 무인들이 다급히 예를 갖추었다.
“소궁주님과 장로님를 뵙습니다!”
“수고 많아. 그간 별고 없었어?”
“역도들의 처형식 때문에 주민들이 좀 떠들썩하긴 합니다.”
광명마교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일부 배신자들은 내일 광장에서 처형될 예정이었다.
이미 도시 전역에 퍼진 상태였기에 주민들이 이 일로 시끄럽게 술렁이고 있었다.
야율산산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어쩔 수 없지. 본보기를 보여야 하니....”
차후 이런 일이 없게끔 하기 위해서라도 만인이 보는 앞에서 확실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렇게 무사들의 인사를 뒤로한 일행은 곧장 빙궁으로 가서 빙궁주와 만났다.
“어서 오시오, 낭왕. 내가 아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본궁의 손님께 폐를 끼쳤구려.”
“궁주께서도 고생하셨다고 들었소. 나 못지않게 얼굴이 쪽박이 되셨소이다.”
“동맹건은 강 무사와 논의했소. 구체적인 건 뜻을 맞춰가야겠지만 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소.”
의뢰가 거짓인 걸 떠나서 광명마교라는 공공의 적을 두었으니 손을 잡을 수밖에.
일부가 탐탁치 않게 여길지라도 지금 시점에서 빙궁주의 뜻을 거스를 자는 없는 바.
“한 것도 없는데 보상받는 기분이군.”
“하하, 본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시지 않았소? 그리고 강 무사는 낭인전의 사람이니, 이는 곧 낭왕 그대의 인복이나 다름없지.”
잠시 빙궁주의 시선이 강엽을 향했지만, 강엽은 낭왕의 옆에 앉은 채 말없이 차만 홀짝였다.
머쓱해진 낭왕이 물었다.
“그 괴물은 뭘 하고 있소?”
“...얌전히 있소. 광명마교가 잘한 게 딱 하나 있다면, 그 괴물을 봉인시킨 일일 것이오.”
낭왕이 일월신교주와 싸운 이후, 팔사도를 비롯한 광명마교의 무인들이 법구를 들고 갔다.
“미쳐버린 사람을 잠재우는 공능을 지녔더군. 나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소.”
빙궁주가 손짓을 하자 뒤에 있던 무인이 작은 금적(金笛 : 금피리)을 가져와서 공손히 바쳤다.
“강엽, 어떤 것 같으냐?”
“주력이 느껴지는군요.”
강엽이 피리를 만져보며 말했다.
“다만 그냥 쓰는 건 아니고, 특정한 음공의 가락에 맞춰 써야 효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문외한이 억지로 불어봐야 그냥 소리가 조금 청아하게 날 뿐 제대로 효용을 끌어내진 못하겠지.
빙궁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같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악공들에게 맡겨봤는데 하나같이 고개를 젓더군.”
“팔사도는 뭐라고 그럽니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네.”
배다른 누이가 언급되자 씁쓸한 기색으로 대답하는 빙궁주의 얼굴엔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빙궁의 핍박으로 인해 운명이 뒤틀린 누이가, 이젠 빙궁을 뒤집어엎은 대적이 되었다.
빙궁주로서 냉철하게 처신하는 것과는 별개로 동정심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 아이를 대할 건 아니지. 딸이 있는 데서 할 얘기는 아니지만....”
“전 괜찮아요, 궁주님.”
여럿이 모인 공석이라 차마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궁주님이라 부르는 야율산산이었다.
“저도 이제 마냥 아이는 아니에요. 궁주님이 그 여자를 모질게 대한다고 해도... 아니, 제가 궁주님의 입장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잠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된 빙궁주는 이내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리곤 강엽을 돌아보았다.
“내 솔직히 말함세. 자네와 산산이 빙궁을 떠난 동안 난 그 아이를 문초했네. 단순히 저 피리를 쓰는 법을 알아내기 위함만은 아니었어.”
광명마교가 비밀리에 만든 석탑.
일찍이 마의가 모용세가에서 만들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석탑이 북해에도 있었다.
“알아낼 게 많았지. 석탑의 정체와 공능, 파괴하는 방법까지... 하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네. 광신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어.”
“육신의 고통은 먹히지 않을 겁니다. 약이나 섭혼술을 이용한 심문도 마찬가지겠지요.”
패해서 무공을 봉인당했다고 하나 명색이 사도의 정신력이 범부와 같을 리 만무.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광명마교를 배신하진 않으리라.
“진짜 문제는 석탑입니다.”
모용세가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좌중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한참이 지나서야 빙궁주가 침음처럼 중얼거렸다.
“으음, 믿기 힘든 말이지만....”
“사실 우려했던 건 자리를 비운 동안 적들이 기습할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강엽 역시 만약을 대비해서 석탑 주변에 술법진을 쳤다. 적들을 잠시 제지시키고, 그 틈에 신호를 보내는 술법진을.
“하지만 그렇진 않은 것 같군요.”
가능성은 둘이었다.
하나는 사도들이 당장 팔사도를 구하러 올 수 없을 만큼 바쁘거나, 아예 북해의 상황을 모를 가능성.
‘팔사도가 위기에 몰렸을 때 교주는 강림하지 않았다. 그게 이쪽의 상황을 몰랐기 때문이라면....’
당시엔 심검이 봉인된 영향으로 원영신을 펼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지만, 그걸 넘어 아예 북해의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면?
‘한번 시험해볼 가능성은 있겠어.’
그러려면 팔사도를 만나야 하리라.
강엽이 팔사도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빙궁주가 난색을 표했다.
“자네가 말인가?”
“잘하면 쓸 만한 정보를 건질지도 모릅니다.”
“...알겠네. 내 조치하지.”
빙궁주로선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 * *
“꼴이 말이 아니군.”
뇌옥에서 만난 팔사도의 몰골.
딸에게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은 빙궁주의 태도가 이해가 갈 만큼 처참함 그 자체였다.
“...날 비웃으러 왔나요?”
갈라진 입술 사이로 메마른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난 며칠 사이에 부쩍 수척해진 얼굴은 퉁퉁 부었고, 터진 입술엔 피딱지가 졌다.
탁자 위로 올라온 손은 붕대를 칭칭 감았는데, 붕대도 안쪽에서 흘러나온 피로 얼룩이 묻어났다.
“.......”
강엽이 입을 다물자 팔사도는 입꼬리를 길게 늘렸다.
“오라버니는 참 인정사정없더군요. 절 불쌍하게 보는 주제에 자비 한 자락 베풀지 않았지요.”
“순순히 말했으면 유혈사태는 없었을 텐데.”
“그냥 죽이지 그래요?”
어깨를 들추면서 빈정거리는 모습. 강엽을 노려보는 눈엔 원독의 빛이 번들거렸다.
“오사도가 죽었다.”
“네, 알아요. 당신이 죽였죠. 몇 달 전에....”
“옥천인지 뭔지로 되살아난 그 여자를 다시 죽였다고.”
“...!”
“마의, 너희들은 삼사도라고 했던가? 그자부터 육사도까지 모두 내 손에 귀천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왜 헛소리라고 생각하지?”
강엽이 무신경하게 되물었다.
“내 말이 의심스럽다면 그 잘난 교주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나? 교주가 답신을 줄 텐데?”
“....”
팔사도는 입을 닫았지만, 역으로 그 침묵이야말로 강엽의 의문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너희는 교주와 심상으로 연결됐지. 하지만 교주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서 교감하지 못하는 것 같군.”
지난날 옥룡설산에서 구사도를 마주쳤을 때, 마안을 통해 놈의 기억을 읽어내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갑자기 벽에 막히는 기분이 들면서 교주가 원영신으로 강림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마안으로 들여다보면 교주도 무조건 안다.’
사도 본인의 정신력도 단단하기에 잘 먹히지 않는다.
하나 팔사도가 무력화되고, 광명마교주가 강림할 수 없는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엿볼 기회는 지금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터.
후우우우웅...!
강엽의 왼쪽 눈동자가 핏빛 광채를 토해내면서 회전하자 팔사도가 벌떡 일어나서 으르렁거렸다.
“감히 내 정신을 엿보겠다고!”
“앉아.”
강엽의 말이 실체를 가진 것처럼 어깨를 잡고 짓누르자 팔사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다, 당신...!”
“내가 알고 싶은 건 딱 하나다.”
검지를 펴든 강엽이 나지막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석탑을 부술 수 있지?”
“마, 말 못해. 아니, 알지도 못해!”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해도 목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동안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기밀은 강엽의 뇌리에 차곡차곡 새겨졌다.
석탑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던 순간부터, 팔사도의 뇌리에 관련된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무조건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는 법이니까.’
석탑을 부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떠오른 건 아니지만, 꽤 쓸 만한 정보들이 많았다.
가령 석탑을 어찌 그렇게 빨리 만들 수 있었는지 등.
“진축을 세우고 나머지는 술법으로 때운다.... 확실히 술법을 쓰면 편하겠지.”
필시 모용세가의 석탑도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것이리라.
“석탑의 기능은 세 가지.”
“끄윽...!”
뇌에 부하가 걸린 나머지 팔사도의 코와 눈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강엽은 아랑곳 않고 작업을 이어갔다.
“석탑을 통한 축지술. 이건 사도들에 한해서만 쓸 수 있군. 대규모 이동은 무리야.”
입도공월과 비슷한 효능을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한계 또한 비슷한 것 같았다.
“두 번째는 몽상정토의 확장.”
석탑의 주변에서 죽은 사람들의 혼백은 귀천하지 않고 몽상정토에 가서 광명마교주의 힘이 된다.
이는 모용세가에 강림한 광명마교주가 떠든 말과도 대략 일치했다.
“세 번째는... 천지의 자연지기를 모아서 광명마교주가 그 힘을 무한히 휘두르는 건가.”
그로써 사람에게 허락된 내공을 초월하여, 가히 신과도 같은 권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첫 번째 공능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광명마교주 개인을 위한 권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바.
“부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군. 광명마교주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은 말이야.”
사도라 할지라도 불가능하다. 안쪽에서 힘을 행사한다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 이상은 팔사도를 몰아붙여봤자 얻을 수 없다.
그렇게 마안의 효능을 끝내려고 할 때, 강엽은 불현듯 뇌리를 파고드는 기억을 느끼고 흠칫 굳어졌다.
“이건....”
팔사도의 의식 기저에 자리한 기억.
그녀가 어린 시절 겪었던 괴로운 감정들이 마안을 통해 흘러들어온다.
전대 궁주인 아비가 욕정에 사로잡혀 시비를 건드리는 바람에 태어난 사생아.
하필이면 북해에선 저주받은 존재로 여겨지는 태양지체를 타고나는 까닭에 겪었던 모진 핍박.
강력한 열양지기를 타고난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빙백신공의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가신들이 그녀의 목숨을 거둬야 한다고 연신 읍소하자, 결국 전대 빙궁주는 그녀를 상인들을 통해 멀리 대륙으로 보내버렸다.
-쫓겨나는 게 죽는 것보단 나을 게다.
하지만 상인들은 도적들의 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 그녀는 도적들에게 노예로 끌려간다.
도적 소굴에서 그녀는 끔찍한 학대를 당했다.
이후 변고를 깨달은 상단에서 추격대를 보내 도적들을 소탕하면서 구출되긴 했지만, 이미 그녀의 심신엔 끔찍한 상처가 남았다.
그러나 상단에 돌아가서도 편히 살지는 못했다.
가학적인 욕망의 소유자였던 상단의 공자에게 그녀는 너무나 괴롭히기 쉬운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공자님, 제발...!
결국 핍박과 학대를 견디지 못한 그녀는 야밤에 공자를 죽이고, 급히 말을 훔쳐 상단에서 달아났다.
뒤늦게 변고를 깨달은 상단에서 추격자들을 보내서 그녀를 붙잡으려고 할 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우연히 지나가던 과객이다.
하얀 장포를 입은 선량한 인상의 사내.
손짓 한번으로 추격자들을 쓸어버린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안에 위대한 힘이 있구나. 본좌와 함께 가겠느냐?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교주와 함께 광명마교의 성지로 간 그녀는 혹독한 수련 끝에 태양지체의 힘을 통제할 방법을 익혔고, 그렇게 공을 쌓으며 사도가 되었다....
“끄르윽....”
탁자에 머리를 박은 채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팔사도.
그녀를 내려다본 강엽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팔사도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와 별개로, 한꺼번에 많은 것들이 쏟아지니 두통이 일었던 것이다.
물론 이제 와서 그녀를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안으로 들여다본 기억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혀야 하는 마당.
마안은 어지간한 섭혼술보다도 뛰어나지만, 그 성질상 타인의 감정에 휩쓸릴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잠깐 정신을 제압하는 것 정도는 괜찮으나, 의식의 심층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그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이보시오, 간수.”
“아, 네. 무사님!”
바깥에 있던 간수가 안으로 들어왔다가 엎어진 팔사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눈을 뒤집어깐 채 칠공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던 것이다.
“생명에 지장은 없소. 가서 의원이나 불러주시오. 그리고 물도 좀 주시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간수가 급히 가져온 주전자물을 주둥이째 들이킨 강엽이 입가를 닦으며 팔사도를 내려다보았다.
“...이젠 만날 일도 없겠지.”
어차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여인. 굳이 처형식까지 볼 생각은 없으니 이게 마지막 만남이리라.
의원이 오자마자 교대하듯 일어난 강엽은 거처에 가서 푹 쉬었고.
그 다음날 팔사도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빙궁주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