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평정 (3)
북해빙궁의 장로 빙오선.
강엽이 갓 흡혈귀가 됐을 무렵 만난 그녀는 감히 그 힘을 가늠할 수도 없는 초강자였다.
만약 당시에 빙오선이 살의를 품었거나 강엽을 붙잡아 문초할 작심을 했다면 도망치지 못했겠지.
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야율산산을 구해준 은혜를 감사해하며 귀중한 보은패를 주었다.
그로부터 이 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강엽은 빙오선이 이룬 정기신 합일의 경지를 엿보며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역시 삼화취정... 빙궁주 다음의 강자였군.’
내상을 입고 쇠락한 빙궁주를 제외하면, 빙궁에서 그녀만한 성취를 이룬 자는 없었다.
전황을 좌우할 수 있는 절세고수가 빙궁을 떠나 궁벽한 오지에 머무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엽은 빙오선의 뒤에 놓인 수정관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낭왕.”
“...가사 상태일세.”
야율산산으로부터 강엽이 여기에 온 이유를 들은 빙오선이 한 박자 늦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강엽은 일일이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수정관 안쪽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안쪽에서 허연 김이 올라와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드문드문 드러난 낭왕의 얼굴은 마치 잠든 것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깨울 수 있습니까?”
“귀식대법으로 가사 상태로 인도해서 바로 깨우는 건 무리일세. 오히려....”
수정관에서 풀려나온다면 간신히 잡아뒀던 시간이 급속도로 흐를 터.
눈을 반개한 채 수정관 위에 손을 올린 강엽은 기감을 활짝 열고 낭왕의 용태를 살폈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심상의 상처.
낭왕의 몸 곳곳에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심상의 흔적이, 그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간 자의 경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주고 있었다.
‘심상절예는 아니야. 심검을 쓴 것 같은데....’
만약 심상절예를 정통으로 맞았다면 그 자리에서 삼도천을 건넜으리라.
‘상처의 깊이와 각도를 보면 쌍검.’
낭왕의 육신에 새겨진 심흔.
강엽은 그 형태와 깊이로 두 사람의 싸움을 상상 속에 그리며 일월신교주의 무공을 헤아렸다.
미쳐버린 사람치곤 놀라우리만치 절제된 무공의 흔적이 돋보인다.
“일월신교주가 정말 광인입니까?”
“그렇네만... 그건 왜 묻는 겐가?”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대강 얼버무린 강엽은 잠시 후 수정관 위에서 손을 뗐다.
“열어주십시오.”
“진심인가?”
“영약을 가져왔으니 심흔을 치유할 수 있을 겁니다.”
빙오선은 바로 수정관을 열지 않았다.
강엽의 옆으로 걸어와서 관뚜껑을 매만질 뿐.
“...연생빙정관(聯生氷晶棺)이라고 하네. 본궁에도 하나밖에 없는 보물이야. 치명상을 입거나 불치병에 걸린 사람도 연명시킬 수 있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노인의 입가를 타고 쓴웃음이 번졌다.
“이 보물의 공능을 유지하려면 천지의 자연지기를 끌어와서 안에 주입해야 한다네. 궁주님을 제외하면 오직 노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
그렇기에 어려운 시국에도 빙오선은 낭왕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녀가 떠나면 낭왕은 차츰 수정관 안에서 말라죽을 테니까.
“다른 약점도 있네. 뚜껑을 열면 자연지기가 빠져나올 터. 이는 낭왕의 심신에 악영향을 미칠 게야.”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낭왕을 살리지 못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강엽은 단호했다.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수정관은 어디까지나 억지로 목숨을 이을 뿐,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단은 되지 못했다. 지금은 괜찮아도 언젠가는 한계가 올 것이다.
“제 목숨을 거는 한이 있어도 되살릴 겁니다.”
성공을 십할 확신하기에 내뱉는 자신감이 아니다.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럼에도 모든 것을 걸고 낭왕을 살리겠다는 결연한 각오.
진심을 읽은 빙오선이 굳은 표정을 짓고 수정관의 모서리 아래 붙은 기관장치를 눌렀다.
그러자 수정관의 뚜껑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면서 안에 있던 허연 기운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단 차갑지 않은걸.’
음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정순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강엽은 품에서 목함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마자 흘러나오는 청아한 향기에 빙오선과 야율산산의 얼굴에 나지막한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허어, 그건 설마...?”
“대환단입니다.”
불권이 주었던 천고의 영약.
손톱만한 영단을 낭왕의 목구멍에 흘려넣은 강엽은 수염이 듬성듬성 난 턱을 움켜쥐었다.
대환단은 혀에 닿자마자 녹아내렸지만, 온전히 삼키기 위해선 식도를 움직여야 했기 때문.
초음으로 낭왕의 혈도를 들여다본 강엽은 진기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바로 움직이는군.’
주인이 정신을 잃었음에도 정기신이 합일된 육신이 대환단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명문혈을 통해 진기를 인도하지 않아도 저 스스로 대주천을 하며 약효를 기혈에 녹여내는 것.
그로써 낭왕의 심신을 좀먹던 심흔이 독소처럼 빠져나오면서 바깥에 퍼지기 시작했다.
일전에 검성을 치료할 때 광명마교주의 심상을 겪었던 것과 같은 현상.
벼락처럼 시야를 덮친 환상에 야율산산과 빙오선이 당황할 때 강엽이 움직였다. 재빠르게 심검을 휘둘러 일월신교주의 심상을 벤 것이다.
“바, 방금 그건... 뭐죠?”
“일월신교주의 심상이다.”
야율산산은 해쓱하게 질린 채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빙오선은 차분했지만 안색이 안 좋기는 매한가지.
강엽이 빨리 나서지 않았다면 두 사람 모두 심상에 사로잡혀 심대한 타격을 입었겠지.
심상지경의 고수가 발하는 심상은 티끌처럼 작은 조각일지라도 지극히 위험하기 마련.
그 뒤에야 강엽은 심흔이 조금씩 아물고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흔이 심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하기사 대환단으로도 치유하지 못할 만큼 심했다면 애초에 수정관에 옮기지도 못했으리라.
빙오선 역시 낭왕이 눈에 띄게 호전되고 있는 것을 알고 놀라워했다.
“대단하군. 대환단에 이런 효능이 있었다니....”
“낭왕 어르신은 무사한가요?”
야율산산의 물음에 빙오선의 시선도 강엽을 향했다.
“그래, 지금 당장 눈을 뜨진 못하겠지만... 며칠 동안 푹 쉬고 나면 다시 눈을 뜨실 거다.”
원래는 그렇게 빨리 낫지 않지만, 대환단의 기운이 정기신을 보듬고 있었다. 손실된 부분을 느리게나마 메꾸면서 상처를 수복한다.
“음?”
문득 강엽이 미간을 좁혔다.
낭왕의 경맥을 대주천한 기운이 모공을 통해 빠져나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대로 퍼지는 게 아니라 강엽을 향해 모여들고 있다는 것.
불문의 공능이 담긴 대환단은 열양지기의 총화.
비록 일부라 하더라도 상극의 기운이 들어오는 것은 강엽에게 있어 하등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이게 왜 내 몸에... 아니,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들어오는 대환단의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혈공진기를 돌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시도는 실패했다.
대환단의 기운은 저들끼리 꽁꽁 뭉치면서 혈공진기를 피해 경맥으로 피신했다.
일월신교의 태양이 새겨진 오른쪽 손등, 그중 수삼양경(手三陽經)의 혈자리에 똬리를 틀었다.
음양의 균형이 무너져서 고생한 것을 떠올리면 절대로 허용해선 안 되는 일.
강엽의 손등이 불룩거리며 튀어오르자 야율산산과 빙오선의 얼굴에 걱정의 낯빛이 흘렀다.
“강 공자, 대체 이건...?”
“건드리지 말게!”
빙오선의 제지에 야율산산이 흠칫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내면에 집중한 강엽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잡았다.
대환단의 기운이 몰린 오른손이 붉게 달아오르며 허연 수증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경혈의 손상을 감수할 수밖에....’
재생력이 있으니 자해를 하더라도 폐인이 되는 꼴은 면할 수 있을 터.
손톱을 세워 손등의 혈자리를 그으려고 했을 때였다.
우우우우우우웅......!
경혈에 뭉친 대환단의 기운이 손등의 태양에 빨려들어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뭐야?”
상상도 못한 초유의 사태.
강엽이 넋이 나가서 침묵하자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으음, 안정된 것 같긴 한데... 자네 괜찮나?”
“...그런 것 같군요.”
떫은 얼굴로 손등을 바라본 강엽은 미간을 구기며 입맛을 다셨다.
“일단은 낭왕부터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 * *
추운 동굴에서 벗어나 아늑한 산장에 돌아온 일행은 낭왕을 보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낭왕이 정신을 차린 건 사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설마 네 녀석이 날 살릴 줄은 몰랐구나. 이 머나먼 북해까지 와서 말이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몸은 어떠십니까?”
낭왕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구나. 심흔을 입었을 땐 이대로 세상 하직하나 싶었는데 말이다. 조금만 정양하면 금세 예전으로 되돌아갈 것 같다.”
“대환단의 효능이 대단하긴 하군요.”
“...대환단이 왜 여기서 나와?”
낭왕이 뜨악하는 표정을 짓자 강엽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동안 겪은 일을 설명해주었다.
태화문의 내전을 끝내고 하오문주의 의뢰를 받은 일, 그리고 호광성에서 마의와 싸웠던 일 등등.
이야기가 끝났을 땐 어느덧 한나절이 흐른 뒤였다. 북해로 오게 된 방법을 말했을 땐 입도공월을 얻은 계기도 곁들였기 때문이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너처럼 짧은 시간에 수많은 사건에 휘말리는 놈은 처음 본다. 책을 쓰면 수십 권은 나오겠어.”
“웬만하면 제가 가기 전에 좀 해결해줬으면 싶습니다만.”
강엽이 투덜거렸다. 그도 요 몇 달간 자신이 너무 많은 사건에 개입했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다.
“뭐, 그것도 이제 곧 끝날 겁니다.”
“광명마교와의 싸움이 남았지.”
“불권이 본인의 목숨을 담보로 광명마교주의 심검을 봉인한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시일을 놓쳐 광명마교주가 심검을 되찾는다면 무소불위의 권능을 휘두르겠지요.”
그때는 불권도 죽고 없을 것이다.
검선 역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원기를 소모했으니 전쟁에선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천하팔존 중에 실질적인 전력은 맹주와 나, 그리고 신유뿐이구나. 패군은 황실에 매인 몸이니 움직이지 않을 테고....”
패군(覇軍)은 강호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천하팔존에 꼽힌 것은 황실이 주최한 비무대회에서 신위를 드러낸 덕이었다.
“아니, 염왕 선배와 너도 있으니 다섯인가? 백도 무림이 처음으로 우위를 점하는 순간이군.”
“해서 전주님만 회복하면 바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입도공월이 있으니 돌아가는 것은 금방이다. 가기 전에 빙궁과의 협약을 끝내야겠지만.
대화 주제가 그쪽으로 가자 낭왕이 쯧하고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의뢰서는 배신자들이 조작했다는 거군. 천하의 낭왕이 그런 수작에 놀아나다니.”
“인장이 찍혔으니까요. 저라도 속았을 겁니다.”
“아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빙궁주가 와병 중이라도 손님을 맞이하지도 않았으니....”
궁주전에 숨어들어 진실을 밝혀냈다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는 일 따위도 없었겠지.
“그땐 내가 아쉬운 입장이라서 그러려니 했지. 한데 그 짓거리를 꾸민 놈들이 투옥됐다고?”
“심문한 뒤에 처형한다고 하던데... 지금쯤이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지도 모르겠군요.”
사흘이나 지났으니 배신자들을 징치할 시간은 충분했다.
‘광명마교와 싸우느라 얼마 살아남지도 않았으니 시간이 별로 걸리지도 않을 테고.’
오히려 배신자들의 형 집행보다는 그들이 속한 조직과 가문을 터는 게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었다.
“너도 그놈들이 왜 빙궁을 등지고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구나.”
“돌아가면 알 수 있겠지요.”
어느 정도는 짐작되는 부분은 있었지만, 지금 와서 굳이 들추어보고 싶은 생각까진 없었다.
‘일월신교주와 관련되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전전대 궁주와 전대 궁주가 일월신교주와 싸우다 내상을 입어 유명을 달리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궁주들이 그럴진대 휘하의 가신들과 무인들은 얼마나 죽었겠나.
‘사실상 제물이나 다름없지. 그런 상황에서 광명마교가 해답을 제시하고 그들을 포섭했다면....’
야율산산의 말로는 광명마교가 오고 나서 일월신교주가 잠잠해졌다고 하니 가능성은 있었다.
물론 이유가 그것뿐은 아니겠지만, 설령 다른 이유가 있다 한들 강엽은 크게 궁금하진 않았다.
“그래도 간만에 일이 쉽게 끝나서 다행입니다.”
“....”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그런 말을 들으니까 예전에 강호철칙 운운하던 놈들이 생각나서 말이다.”
낭왕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수염난 턱을 긁적였다.
“꼭 그런 얘기를 하면 일이 터졌거든. 그래서 한동안 우스갯소리로 ‘해치웠나’와 ‘이 싸움이 끝나면 그녀에게 청혼할 거야’ 다음으로 해선 안 되는 말로 통했지.”
“...서희도 가끔씩 강호철칙 어쩌구 하던데, 그거 그냥 미신 아닙니까?”
“원래 무림인이란 족속들이 은근히 미신을 잘 믿는다. 뭐, 말이 씨가 된다고 하니 굳이 불길한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
할 말이 없어진 강엽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