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52화 (346/450)

69화. 평정 (2)

빙궁주 내외를 구출한 강엽은 두 사람을 호위하며 전장에 돌아왔다.

백 장 너머에서도 코를 찌를 정도로 농밀한 피비린내.

날붙이가 난상으로 부딪치고, 처절한 비명과 악다구니가 뒤섞인 채 알 수 없는 언어로 화한다.

누군가의 팔다리가 굴러다니고, 내장 조각을 게워내는 시체가 굴러다니는 시산혈해.

터어어엉!

“이 반역자 쓰레기들이!”

“개소리! 궁주님을 배신한 너희야말로 반역자다!”

빙궁과 광명마교뿐만 아니라, 광명마교에 가담한 소수의 배신자들도 뒤엉킨 채 싸우고 있었다.

“아아, 상공! 산아가...!”

“나도 보고 있소.”

빙궁주 내외의 시선이 향한 곳.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강엽은 광명마교의 고수와 어우러진 야율산산을 발견하고 이채를 띠었다.

‘저쪽도 대교인 것 같은데....’

대교가 사도를 보좌하는 부관임을 감안하면 그리 많은 숫자가 배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난히 일사도를 닮은 예간성을 포함하면, 빙궁에서 마주친 대교의 숫자만 얼추 네 명.

아마 죽은 사사도의 휘하에 있던 대교들이 빙궁에 남아 팔사도를 보필했던 게 아닐까.

“부탁드립니다, 무사님. 저희 딸을....”

빙궁주의 부인이 부탁했다.

처음 봤을 땐 이국의 언어로 말해서 한어를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빙궁주가 고개를 저었다.

“지켜봅시다, 부인.”

“하지만...!”

“부인도 알지 않소. 무인들의 대결에 제삼자가 끼어드는 것은 모욕이라는 것을....”

만약 야율산산이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협공받고 있었다면 얘기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대교라면 야율산산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적수였다.

“우리 딸을 믿읍시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저 아이에게 힘이 될 것이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빙궁주는 물론 강엽도 팔짱을 끼며 개입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빙궁주의 말마따나 야율산산이 꿀릴 게 없었던 것이다.

‘이긴다면 큰 자산이 될 테지.’

만인의 앞에서 대적을 쓰러트린다면 아랫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터.

훗날 그녀가 빙궁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오늘의 승리가 값진 경험이 될 것이다.

‘슬슬 이쪽을 눈치챈 것 같은데.’

이변을 깨달은 대교의 기파가 흐트러졌다.

강엽의 손에 붙잡힌 팔사도를 발견한 그가 경악한 순간, 야율산산의 일권이 호신기를 강타했다.

누적된 충격으로 인해 호신기에 균열이 일자 그가 짓씹듯 외쳤다.

“이 젖비린내 나는 계집이...!”

굴렁쇠에 칼날을 입힌 건곤권(乾坤圈)이 쇄도한다.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오싹하게 다가왔지만, 야율산산은 차분하게 보법을 밟았다.

풍압에 잘려나간 금발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시리게 빛났다.

퍽! 퍼억!

능숙하게 전권을 빠져나와 대교의 옆구리를 치고 빠지는 연계식. 그녀는 고양이처럼 경쾌한 몸놀림으로 우세를 점해갔다.

쩌저적...!

심지어 허공에 얼음꽃이 피어나며 대교의 피부를 얼리기까지.

“빙백신공이라 하오.”

강엽의 시선을 알아차린 빙궁주가 설핏 웃으며 덧붙였다.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궁주 독문무공이지. 본궁 무맥의 시작이자 끝이외다.”

강엽과 팔사도의 싸움을 봤기에, 그는 강엽 역시 한빙지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영특한 아이요. 균형과 박자를 타는 감각이 탁월해. 이러다간 십 년도 안 돼서 따라잡히는 게 아닐까 싶소. 너무 빨리 따라잡히면 아비로서 면이 안 서는데... 허허, 그것도 홍복이겠지. 이런 상황만 아니면 같이 비무나 하면서 무에 대한 담론을 나눌 텐데 참으로....”

“.......”

혹시 딸얘기가 나오면 팔불출이 되는 건가?

강엽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을 끊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부인이 궁주의 옷깃을 잡아챘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빙궁주가 객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체신머리 없이 입을 놀렸구려.”

그때쯤 야율산산은 대교의 관절을 걷어차서 자세를 무너뜨리고는 허리에 일장을 먹였다.

볼썽사납게 쓰러진 대교가 내상을 못 견디고 피를 왈칵 토할 때.

콰직!

귀신처럼 다가온 야율산산의 일권이 그의 관자놀이를 강타,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

혼란스러웠던 전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무거운 침묵.

광명마교의 무인들과 배신자들은 아군에 포위된 채 이도 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이놈들....”

“싸움은 끝났다, 더러운 마교도들!”

사태를 관망하던 자들이 궁주가 풀려난 것을 보고 야율산산의 편에 가담한 것.

광명마교의 무인들이 이를 갈며 빈정거렸다.

“흥! 눈치만 보던 놈들이... 우리가 유리했다면 너희가 소궁주의 편을 들었겠느냐?”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몇몇 이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배신자들의 지적대로 그들은 어느 쪽이 유리한지 쟀던 것이다.

만약 야율산산이 불리했다면 그녀의 뒤를 치진 않았어도 거들기 위해 나서지도 않았겠지.

그러나 대부분의 이들은 철면피를 쓴 것처럼 무신경하게 반응하며 야율산산에게 예를 갖추었다.

“역도들을 제압했습니다, 소궁주님.”

“조금만 더 빨리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송구합니다. 너무 급작스러워서 사태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기막힐 만큼 뻔뻔한 대답에 야율산산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그녀가 반박하려고 할 때였다.

“싸움은 끝났다.”

전장에 내려앉은 나지막한 목소리.

피로에 찌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빙궁주는 살아남은 무인들을 쭉 훑어보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적의 수괴를 사로잡았으니 본궁의 승리다. 마교의 무리와 배신자들은 즉시 항복하라!”

“목소리에 내공이...!”

그제서야 빙궁주가 회복했다는 것을 깨달은 적들이 강엽의 손에 붙잡힌 팔사도를 돌아봤다.

강엽이 누군지 모르는 그들의 눈엔 마치 빙궁주가 팔사도를 제압한 것처럼 보였을 터.

광명마교와 배신자들의 얼굴에 결연한 각오가 서렸다.

반역도로 몰리면 그들만 죽는 게 아니라 가족들과 가문까지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죽더라도 싸워야 하오!”

“하지만 세력에서 밀리지 않소!?”

배신자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한 모양새.

강엽이 빙궁주를 돌아봤다.

“다 죽이실 겁니까?”

“솔직히 내키진 않소.”

빙궁주가 굳은 얼굴로 수염을 쓸었다. 딱히 그가 자비롭거나 무른 성격이라서 그렇게 말한 건 아니었다.

“저들이 열세여도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이쪽의 피해도 커질 테니까. 하지만 끝까지 항전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빙궁주의 손이 반쯤 올라가자 적들에게 병장기를 겨눈 무인들이 살기를 뿜으며 압박했다.

모두가 빙궁주의 입만 주시하는 그 순간.

“역도들을 참하....”

“항복하겠습니다!”

“...!?”

여기저기 찢기고 베여 피투성이가 된 중년인이 무릎 꿇고 넙죽 숙이자 사방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빙궁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송 단주, 자네도 가담했나?”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속하가 불민하여 간악한 마교놈들의 꾐에 빠졌습니다!”

“가족이 있는 친구가 왜 그랬나? 자네 혼자만 피 보는 게 아니라 가족까지 피해가 미칠 텐데?”

“제발 가족만은...!”

“자네는 반역죄로 다스릴 걸세. 자네 가족과 가문 역시 조사할 테고. 죄가 밝혀지면 엄중히 처벌하겠지.”

설령 살아도 비참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빙궁에서 쫓겨나 설원을 헤맬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송 단주는 자비에 감읍하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그를 시작으로 병장기 떨어지는 소리가 속출하며 배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빌었다.

“살려만 주십시오! 백의종군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궁주님! 제발 한 번만 용서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자들이 순식간에 사기를 잃고 목숨을 구걸하는 꼬락서니.

광명마교의 무인들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젓거나 경멸 어린 눈길을 보냈다.

“이런 병신 같은 놈들.... 이제 와서 항복한들 용서받을 것 같나?”

차라리 한 놈이라도 더 길동무로 삼겠다는 정신으로 싸운다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르거늘.

그때 강엽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꽂혔다.

“너희야말로 현실을 모르는군. 이쪽에 팔사도가 있다는 걸 잊었나?”

“...그분도 이해해주실 거다.”

죽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편안하게 대답한 이를 시작으로, 광명마교의 무인들이 병장기를 꼬나쥐었다.

하나같이 순교를 각오하고 돌진하겠다는 태도.

결연한 의지에 그들을 포위한 빙궁의 무인들이 반사적으로 싸울 태세를 갖추며 매서운 살기를 발한다.

찰나, 뜻밖의 제안이 떨어졌다.

“배신자들에게 고한다. 그대들의 가족과 가문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칼끝을 돌려라.”

“...!”

방금까지 협력하던 이들이 서로 상잔하게끔 내모는 잔인한 명령.

그러나 항복한 이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처자식의 목숨이라도 살릴 수밖에!”

“이교의 죄인놈들이 감히!”

졸지에 같은 편이었던 자들이 죽고 죽이는 참상에 바깥에 있던 자들은 말없이 입만 벌렸다.

‘세 치 혀로 배신자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군.’

그 와중에도 복권시켜주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배신자들을 철저히 소모품으로 쓰고 버리겠다는 차가운 발상.

딸자랑에 여념이 없던 팔불출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냉혹한 지배자만 남아 있었다.

“크아악!”

“죽어! 죽으라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마교도들과 배신자들의 비참한 모습에 빙궁의 무인들은 굳은 얼굴로 침묵을 견지했다.

한쪽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볼 뿐이었다.

* * *

내전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순식간에 끝났지만, 전후처리를 하는 건 만만치 않았다.

단지 당사자들이 죽었다고 끝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조직과 가문까지 연행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엽은 뒷일을 뒤로한 채 야율산산을 앞세워 빙궁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향했다.

험산의 중턱 으슥한 곳에 숨겨진 작은 산장.

특이하게도 기와 대신 청석판으로 천장을 덮은 산장의 굴뚝엔 연기가 뭉게뭉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을의 사냥꾼들이 종종 쓰는 곳이에요. 폭설이 내리면 오도 가도 못하니까요.”

지금은 여름이라 눈이 없었지만, 여름만 지나면 모든 게 얼어붙는 설원이 되기에 피난처는 필수였다.

“안가가 아니군?”

“배신자들 중 일부는 안가가 어딨는지 알고 있었어요. 물론 그들이라고 모든 안가를 아는 건 아니지만, 신중을 기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이곳을 추천한 사람은 아설하의 남편이었다.

어린 시절 사냥꾼 아비를 따라 나섰다가 눈보라에 갇혀 산장에 며칠씩 묵은 경험이 있다고 하던가.

“사냥꾼들 때문에 오래 묵진 못하겠지만... 다행히 지금까진 탄로나지 않았네요.”

물론 대비는 해놨다.

아설하의 남편이 촌장을 찾아가서 빙궁의 높으신 분이 수련 때문에 산장을 빌리길 원한다고 말한 것.

돈도 두둑이 주었겠다, 촌장은 산장에 식량을 가득 채워둔 뒤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낭왕을 호위하는 분들이 오셨구요.”

두 사람이 인기척을 드러낸 만큼 산장에 있던 이들도 재빨리 알아차리고 예를 갖추었다.

“삼가 소궁주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강엽이 신경 쓰이는 듯 연신 힐끔거렸다.

야율산산이 살포시 웃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전에 빙오선 장로님과 함께 저를 구하러 왔던 설혼대의 무사들이에요.”

“옷은 대충 기억나는군.”

그 말에 설혼대 무사들이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야율산산은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나직이 물었다.

“장로님은 안에 계셔?”

“으음, 그게....”

“같은 편이니 안심해도 돼. 중원에서 낭왕을 찾아오신 분이야.”

“소, 송구합니다. 장로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야율산산은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괜찮아. 길은 나도 알고 있거든.”

산장 너머 숨겨진 험난한 골짜기.

야율산산을 따라 절벽 중턱의 동굴로 발을 내디딘 강엽은 살갗을 얼릴 듯 쏟아지는 냉기를 느꼈다.

등이 굽은 늙수그레한 노파가 지팡이를 짚은 채 등받이 없는 걸상에 앉아있는 모습.

야율산산이 반갑게 인사했다.

“빙 장로님!”

“허어, 소궁주인가? 설마 이런 시기에 찾아올 줄은 몰랐구먼. 한데 뒤를 따라온 젊은이는 뉘신가?”

허옇게 샌 머리를 뒤로 넘겨 묶은 노년의 여인이 강엽을 보고 주름진 눈을 껌뻑였다.

“...혹시 우리 구면인가? 어째 어디선가 만난 것 같구먼.”

“실제로 구면입니다.”

슬쩍 웃음을 흘린 강엽이 포권을 쥐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빙오선 장로님. 전에 만났을 땐 이걸 주셨지요.”

야율산산을 구해준 보답으로 받은 보은패.

비로소 강엽을 알아본 빙오선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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