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평정 (1)
투아아아아앙!
나무와 벽돌로 만든 벽이 절세고수의 경파를 이기지 못하고 처참하게 터져나간다.
팔사도를 전각과 함께 날려버린 강엽은 그녀를 뒤쫓기 위해 걸음을 내딛을 때였다.
“흐아아아압!”
문득 뒤에서 치닫는 기파.
강엽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방문 밖을 지키고 있던 빙궁의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순서가 잘못됐어.”
푸하학!
강엽의 몸에 날붙이를 박아넣기도 전에 대량의 피를 쏟아내며 허물어지는 무인들의 모습.
이들이 정상적인 호위였다면 격전의 현장에서 빙궁주를 호위하며 탈출하고 봤을 터.
구태여 팔사도와 싸우는 강엽의 뒤를 치는 것은 이들이 빙궁 소속이 아니거나 배신자이기 때문이리라.
“빙궁주 맞습니까?”
뒤를 돌아보자 빛바랜 금발을 늘어뜨린 중년의 색목인이 퍽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귀하는 뉘시오?”
“야율산산이 날 고용했습니다.”
짧은 답변에 빙궁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우물거렸지만, 강엽은 듣지 않았다.
팔사도가 튕겨나간 벽 너머에서 심후한 공력이 휘몰아쳤던 것이다.
“자세한 얘기는 이따 하시죠.”
부서진 벽을 넘어갔을 땐 팔사도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는 걸 보면 그 짧은 사이에 호신강기를 복구한 듯싶었다.
“귀영...!”
흐트러진 금발 사이로 시퍼런 안광이 열기를 품고 번들거린다.
주변의 습기가 급속도로 말라가는 것을 느낀 강엽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북해 출신이면 빙공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닥쳐!”
화아아아아악!
장심에서 쏘아진 황금빛 서광.
‘이건 좀 위험한데.’
피한다면 빙궁주가 있는 전각이 통째로 무너질 것이다.
후우우우우웅...!
손목을 따라 회전하는 투명하게 너울지는 흐름.
황금의 빛줄기는 태극반의 경파에 막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으나, 팔사도는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쐐애애애액!
빛줄기를 뿌리자마자 빠르게 따라붙으며 십자창을 찌른다.
태극반에 걸려 타점이 빗나가는 찰나 창대를 잡아당기고, 타탁 연달아 몸을 놀리며 강엽의 하체를 후렸다.
‘무시하고 그냥 막아볼까.’
호신강기가 없어도 이쯤은 불괴의 공능으로 막을 수 있을 않을까.
하지만 바로 생각을 고쳤다.
후와아아악!
팔사도의 창날을 타고 황금빛 강기가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것.
이걸 맞고 죽진 않아도 손실은 있다는, 그런 판단이 섰다.
왜냐하면 이 힘의 본질이....
‘태양.’
그래, 태양에 한없이 가까운 힘이었다.
‘태양지체라고 하더니.’
야율산산이 건넨 정보.
그녀는 아는 게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팔사도가 어떤 곡절로 빙궁을 나갔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빙궁에서 불길하게 여겨지는 태양지체라서 어릴 적부터 미움을 샀다고 하던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질로 인해 저주의 존재라 불렸으니 빙궁을 증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지.
내심 생각을 정리한 강엽이 왼눈에 마안의 힘을 불러내며 시뻘건 안광을 토해냈다.
홍채를 따라 회전하는 붉은 광채가 동공에 투사되는 바로 그 순간.
“...!”
일순 정신이 아찔해진 팔사도의 투로가 흔들리며 결정적인 빈틈이 드러났다.
터어어어어엉!
“흐읍!”
뒤로 날아간 팔사도가 답답한 신음을 삼켰다.
하체를 노리느라 훤히 드러난 옆구리에 강엽이 엇박자로 일격을 찔러왔던 것이다.
손바닥의 흔적을 따라 균열이 일어난 호신강기.
그 틈으로 스며들어온 싸늘한 한기가 태양지체의 진기와 얽히며 허연 수증기를 피어올린다.
“...그러고 보니 한빙지공을 썼었지.”
과거 황산에서 조우했을 당시 강엽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음한지기를 쓴 적 있었다.
새삼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흐트러진 금발 사이로 드러난 새파란 눈동자가 한층 날카롭게 빛난다.
“.......”
원독 어린 눈빛을 받았지만 강엽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강림하지 않는군.’
만약 초장부터 심상절예를 날렸다면 팔사도와 공방을 나누는 일 자체가 없었겠지.
그럼에도 팔다리를 놀려가며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확인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심검을 봉인당한 후유증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겪은 광명마교주의 행태를 보면 인명을 경시하는 사상과는 별개로 사도들은 상당히 아꼈다.
오사도가 갓 목숨을 잃었을 때도 바로 원영신으로 강림했고, 구사도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러했다.
일전에 마의와 싸웠을 때도, 사도들만으로도 충분한데도 굳이 이사도의 몸에 강림하는 강수를 두었고.
한데 팔사도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강림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일까.
과연 팔사도는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교주를 불러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십초식. 그 안에 교주가 나오지 않으면 넌 죽는다.”
“...!”
그 의미를 깨달은 팔사도가 헛바람을 삼키는 찰나 강엽의 신형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쉬악! 부아악!
직후 수십 줄기의 빛살이 호신강기를 난도질했다.
앞서 당했을 것을 교훈 삼아 이중으로 촘촘하게 짰음에도 어이없을만치 쉽게 파훼되는 참상.
강엽의 손톱을 따라 사시나무처럼 진동하는 강기가, 진기 구조의 결을 절묘하게 해체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조각조각 찢겨나갈 터.
“당신...!”
화아아아아악!
결국 모종의 결심을 한 팔사도가 공력을 끌어올리자 황금빛 찬란한 기운이 강엽을 덮쳤다.
불괴의 공능으로도 견디기 버거운 뜨거운 열기.
미간을 좁힌 강엽이 흑무암쇄진까지 끌어올려 앞을 가렸으나, 팔사도의 진기는 흑무암쇄진을 흩어버리고 그 뒤에 숨은 강엽에게 닿았다.
“십초식도 필요 없어.”
-심극.
비대한 의념이 공력 파동을 따라 흘러나오고, 압도적인 섬광이 사위를 새하얗게 불태웠다.
“그전에 내가 당신을 죽일 테니까!”
피를 토하듯 처절한 외침을 필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추운 땅에 작은 태양이 떠올랐다.
-극양조융(極陽照融).
선천적으로 타고난 열기를 기공으로 승화시킨 절기.
무게중심을 낮춘 채 두 팔로 전면을 가린 강엽의 옷깃이 뜨거운 열풍에 휘말려 마구 나부꼈다.
옷 바깥으로 드러난 살갗이 붉게 타오르고, 머리카락과 눈썹이 타버리는 고통과 함께 눈이 말라간다.
그런 와중에도 강엽은 심검을 쥐지 않고, 태극반으로만 열기를 해소하면서 거리를 좁혔다.
[귀여엉-!]
새하얗게 타오르는 빛속에서 팔사도의 전성이 거칠게 범람했다.
[교주님께 들었다! 당신은 태양에 약하다고! 당신에게는 나야말로 천적이야!]
강엽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일사도만큼 까다로운 적수였다.
기공을 발한 상태로 그녀는 십자창을 당기고 휘돌리면서 쉴 새 없이 살초를 쏟아부었다.
그런 팔사도에 맞서 강엽 역시 창날을 흘려내는가 하면, 창날이 짓쳐들어오기 전에 하박으로 창대를 누르면서 한빙지기를 쏟아부었다.
두 절세고수가 서로의 간합을 파고들며 공방을 나누자 궁주전 앞은 폐허로 변모했다.
서로 양보 없이 병장기와 팔다리를 부딪치면서 경파의 파편이 튀고 열기가 휘몰아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팔사도의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역력해지고 있었다.
‘이런 기공을 오래 쓸 수 있을 리가 없지.’
초음으로 관찰한 그녀의 축기량은 광명마교의 사도들은 물론이고 혈교의 교왕들과 비교해도 으뜸이었다. 금호요안을 개방했던 혈안사군이 그나마 비슷할까.
하나 사위를 압도했던 열기도 내공이 떨어지자 점점 잦아든다.
그녀의 단전이 빠르게 바닥을 드러내는 것을 관찰한 강엽은 빈틈을 포착하자마자 지체없이 일장을 때려박았다.
“웨엑...!”
“구초식 다 됐다.”
내공을 극한까지 쥐어짜는 오의.
쓰고 나선 뒤가 없는 만큼 최후의 한 수가 실패로 돌아가면 목숨을 내줄 수밖에 없다.
“안 끝났어! 난 아직...!”
단전이 텅텅 비었는데도 집념을 불태운다.
다 타버린 불씨를 어떻게든 되살리려고 발악하는 애처로운 모습에 강엽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하나 그녀를 향한 손가락을 거두진 않았다.
쇄골 아래 움푹 들어간 중부혈(中府穴)에 한빙지기를 주입한다.
-일월신마공 쇄빙옥(鎖氷獄).
쩌저저적...!
모든 열기를 쏟아낸 경혈이 급격히 차가워지면서 피부 위로 하얀 성에가 내려앉는다.
한기가 심장 어림까지 침투하자 고운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교주를 불러.”
“...하, 웃기지 마.”
그녀의 입가에 광기 어린 조소가 떠올랐다.
얼어붙어 덜덜 떨면서도 억지로 팔을 움직여 강엽의 옷을 붙잡기까지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같이...!”
진원을 소모해서라도 동귀어진을 할 심산인가.
하지만 경혈에 침투한 한기는 단전까지 이르는 길을 틈새 없이 꽉 얼리고 있는 마당.
할 말을 잃고 아연해하는 그녀를 내려다본 강엽이 손을 뻗어 가녀린 목을 붙잡았다.
“끄윽!”
“그럼 죽....”
목뼈를 꺾으려는 그 순간.
“멈춰!”
강엽이 뒤를 돌렸다.
멀리서 갈색 머리의 색목인 여인을 잡아끈 광명마교의 마인이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게 아닌가?
“누구지?”
“이 몸은 광명교의 대교다!”
“아니, 넌 관심 없고. 그 여자가 누구냐고.”
“빙궁주의 부인이다! 팔사도님을 놔주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어!”
단지 협박만 하는 게 아님을 증명하듯 하얀 목이 살짝 베이면서 피가 흘러나왔다.
여인이 창백하게 질린 채 뭔가를 중얼거렸지만, 한어가 아니라서 알아듣지 못하겠다.
“빙궁주의 부인이라....”
대교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야율산산의 어머니였다.
그녀 또한 빙궁주처럼 유폐되어 있었는데, 상황이 터지자마자 그녀를 인질로 잡은 모양이다.
‘그쪽엔 아설하의 부하들이 갔을 텐데.’
하필이면 대교를 맞닥뜨린 게 그들의 불운이었다.
“그쪽에 간 무인들은 죽었나?”
“그래, 다 죽였다. 운이 좋았지. 우연히 근처에 있지 않았다면 눈 뜨고 코 베일 뻔했어.”
“정말로 운이 좋을까?”
“뭐?”
강엽이 팔사도의 어깨를 잡고 힘을 주자 그녀가 눈을 홉뜨며 억눌린 비명을 토해냈다.
“끄으으윽!”
“너, 이교의 죄인...!”
“인질을 놔주고 무장을 해제해. 안 그럼 이 여자의 팔을 뽑아버리겠다.”
농담이 아니다. 팔사도가 무력화된 지금이라면 사지를 뽑는 것은 어린애 장난처럼 쉬웠으니까.
대교의 잇새 사이로 이 가는 소리가 까득 울렸다.
“놈! 진정 이년이 죽는 걸 봐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강엽이 입꼬리를 당겼다.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이야말로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는 의미.
“지체높은 신분이지만 결국 평범한 사람이지. 그런 사람과 광명마교의 사도를 저울에 올려두면 어느 쪽의 목숨이 더 무거울까?”
“주, 죽여...!”
목을 조르는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팔사도가 힘겹게 외치자 대교의 얼굴에 갈등이 서렸다.
“치잇!”
칼을 높게 치켜드는 대교의 모습.
정말로 궁주 부인을 죽이려는 것보다는 팔부터 베어서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행동이었다.
하나 그것이야말로 강엽이 원했던 찰나의 빈틈이었다.
“이, 이 자식!”
허공섭물에 팔다리가 붙들린 대교가 인상을 쓰면서 휘적거렸지만 자력으로 빠져나오기는 요원했다.
그저 조금씩 저항하며 억지로나마 손에 쥔 칼을 휘두르려고 발악하는 게 전부.
핏발이 선 채 부들부들 떠는 대교의 모습에 강엽이 아쉬움을 삼켰다.
‘거리만 가까웠다면 마안을 썼을 텐데.’
대상의 심령을 파고드는 마안. 다만 거리가 멀수록 효능이 떨어지기에 지금은 별 도움이 안 된다.
하다못해 거리를 일 장 안으로 줄여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속으로 온갖 경우의 수를 강구하는 그때였다.
뻐어엉!
“커억!”
느닷없이 경파를 처맞은 대교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지는 게 아닌가?
멀리서도 한기가 느껴질 만큼 싸늘한 기운이 치미면서 중후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시간 끌어줘서 고맙소.”
줄곧 침상에만 있었던 빙궁주가 벽을 짚고 나왔던 것이다.
대교를 향해 일장을 뻗은 그가 긴 날숨을 흘리며 기혈을 다스렸다.
“한 수를 숨겨두고 계셨군요.”
“저들이 내가 무력화됐다고 믿게끔 해야 했소. 물론 나 혼자였다면 금세 제압됐겠지만....”
쓰게 웃은 빙궁주는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부인에게 다가갔다. 반쯤 까무러친 부인을 다독이며 강엽에게 눈인사를 건넨 그가 팔사도를 돌아보았다.
“그 아이를 어찌할 생각이오?”
“당연히 죽일 생각입니다만.”
그녀가 범한 죗값을 떠나서 굳이 위험요소를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빙궁주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나왔다.
“음....”
“살리고 싶은 겁니까?”
“...아니,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지. 다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벌해야 법도가 설 거라 생각하오. 그러니 이렇게 부탁하겠소.”
머리까지 숙인 빙궁주를 내려다본 강엽이 한숨처럼 대답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동맹에 대한 확답. 강엽이 그 점을 짚자 빙궁주가 무겁게 대답했다.
“광명마교를 적으로 돌렸으니 방법이 없구려.”
광명마교가 빙궁을 건드렸으니 살기 위해서라도 강엽이 내민 손을 맞잡을 수밖에.
“그럼 싸움을 끝내러 갑시다.”
강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사도의 수혈을 짚어 그녀를 잠재우고, 빙궁주 몰래 그녀의 피를 빼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나, 만에 하나 빙궁주가 그녀를 살려주려고 할 때를 대비한 조치였다.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