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고립 (3)
마의와 이사도의 대화.
그리고 이어지는 마의의 포부를 들은 순간, 강엽은 그를 주시하는 시선을 감지했다.
시야의 바깥에서 누군가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감각.
‘들켰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새겨진 술법진과 사슬에 속박된 노인을 확인하고, 급히 퇴거하려고 할 때.
문득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이 뒤통수로 쇄도했다.
쉬아악!
‘비도?’
간발의 차로 기습을 피한 강엽이 눈을 빛냈다.
작디 작은 은장도. 날의 길이는 손가락만큼 짧아서 투척하는 게 아니면 병장기로 써먹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장인은 연장을 가리지 않는다는 격언처럼 습격자는 매우 빠르게 연계초를 가져갔다.
강엽이 적의 공격을 알아차린 것과 동시에, 아니 그보다도 더 빨리.
쐐애애애애액!
섬전처럼 공간을 가른 일수.
백서희를 통해 점창의 쾌검에 익숙해진 강엽의 기준에서도 찰나처럼 느껴지는 출수였다.
하지만....
꽈앙!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투명한 벽이 비수의 전진을 막았다.
현운 도장의 몸을 잠식한 술법을 정마안으로 들여다보기 전, 혈라지망으로 친 심신을 보호하는 술법이 발동된 것.
[.......]
회심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에도 습격자는 분통을 토하기는커녕 지극히 침착했다.
가면을 쓴 얼굴을 살짝 기울이면서 강엽을 물끄러미 응시할 따름.
[그렇군. 어디서 봤다 싶다더니.]
“뭐?”
[교주의 술법을 통해 널 본 적이 있다. 일사도가 무림맹을 방문했을 때였지. 귀영이라고 했던가.]
“.......”
광명마교주가 일사도의 몸에 강림했던 사건.
아마 광명마교주가 모종의 술법으로 마의에게 그때의 일을 보여준 듯싶었다.
일사도와 직접적으로 충돌한 건 아니지만, 마의가 간접적으로나마 강엽의 얼굴을 봤다면 익숙하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성수장과는 무슨 관계냐?”
[음?]
“생사단을 씹었지. 생사단을 만든 게 당신이라면 약선이 왜 그토록 숨겼는지도 이해가 가.”
인신공양으로 만든 비약. 아무리 효과가 좋아도 사람을 재료로 썼다면 공개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외려 발견 즉시 폐기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생사단을 아나?]
“...실물을 본 적은 없다.”
[세상 최고의 비약이지. 그 어떤 부상이나 병마도 치료할 수 있는 만병통치의 비약.]
그렇게 말하니 돌팔이 같은데.
문득 치미는 생각에 강엽이 실소를 흘리자 마의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리석은 놈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법도니 인륜이니 하는 것에 얽매이면서 의술의 발전을 막았어.]
“당연한 것 아닌가?”
개탄을 금치 못하는 마의의 태도에 강엽은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사람 살리는 약의 재료가 사람이라니.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성수장의 의원들도 그리 말했었지. 하나 놈들은 나를 규탄하면서도 정작 생사단을 폐기하지는 못했다.]
가면의 눈구멍 속에 있는 노란 안광이 타오르듯 사위를 밝혔다.
[약의 효능이 지나치게 좋기 때문이었지. 그들은 내가 이룬 결실을 부정하면서도, 정작 그 결실을 어둠 속에 완전히 파묻진 못한 거다.]
하오문주는 생사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 연원이나 효과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외인이 존재를 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것을 저주받은 물건이라 여기면서도 누군가가 생사단을 썼고, 그 때문에 외부에 알음알음 알려진 것이다.
[물론 네가 말한 것도 사실이다. 사람을 살리는 약을 사람을 갈아야만 만들 수 있다니. 비효율의 극치지. 그야말로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격이다.]
사람을 살리는 약을 만드는 데 집착하면서도, 정작 인명을 등한시하는 자가당착의 모순.
잠깐의 대화만으로도 마의의 심성이 얼마나 비틀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생사단을 계속 만들겠다?”
[아니, 실패에 게속 집착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때론 실패를 겸허히 인정하는 자세도 필요한 법.]
그 지론엔 강엽도 십분 동감했지만, 그렇다고 마의가 이제 와서 상식적으로 행동할 리는 만무하다.
필시 생사단을 만들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크고 장대한 미친 짓을 저지르려 할 터.
“망자를 일으키고, 검선을 생포하고, 현운 도장까지 노리는 건 인신공양 때문이겠지.”
침묵하는 마의를 향해 강엽이 날선 눈매를 세웠다.
찰나였지만 검선을 사로잡은 현장을 엿봤다.
술법진의 극히 일부만 훔쳐봤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강엽은 마의가 무엇을 염원하고 이 같은 짓을 벌였는지 직감했다.
“넌 심상을....”
[시간이 됐군.]
불현듯 말을 자른 마의가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있던 사념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카만 어둠만이 두 사람을 차갑게 감쌌다.
[못다한 이야기는 조만간 다시 하지.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대등한 눈높이에서 얘기하진 못할 거다.]
제 할 말만 남기고 어둠 속에 잠기는 마의였다.
한동안 마의가 뒤덮은 어둠 저편을 꿰뚫어볼 듯이 노려봤던 강엽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만만한 놈이 한 놈도 없군.”
* * *
현실로 돌아온 강엽은 초막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현운 도장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가운데 백서희와 청수가 한껏 긴장한 얼굴로 곁을 지키고 있었다.
“후우....”
강엽이 눈을 뜨자 두 사람이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일단 불러서 왔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사부님은 괜찮은 겁니까!?”
호들갑을 떠는 두 사람의 물음에 강엽은 일단 진정하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완안극은 바깥에 있나?”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막고 계셔.”
청수야 현운 도장의 제자이니 하는 수 없이 들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 명도 못 들어오는 실정.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강엽이 청수에게 말했다.
“현운 도장은 괜찮다. 술법을 풀진 못했지만, 당장 목숨을 빼앗기진 않을 거야.”
“술법이라니요?”
강엽이 자신이 알아낸 바를 설명해주자 청수의 신색이 납덩이처럼 경직되었다.
“하면 사부님은....”
“여길 나가도 마의를 따돌리리란 보장이 없어. 성의 경계를 넘어도 놈은 쫓아올 거다. 무당파로 가면 말할 것도 없고.”
“그럼 큰일이 아닙니까?”
농성이 능사는 아니다. 마의가 망자들을 끌고 온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러니 철저히 대비해야지. 놈이 숫적인 우세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닫도록.”
이후 강엽은 척마대를 불러 지시를 내렸고, 제갈세옥과 함께 산길에 다양한 술법진을 깔았다.
그 과정에서 제갈세가의 술법을 곁눈질로 엿보면서 짜임새를 살피고 파훼법을 구상한 것은 덤.
모산파나 흑룡교의 술법과는 궤가 다르기에 비록 수준이 낮더라도 눈여겨볼 구석이 있었다.
‘잘됐군. 안 그래도 제갈의현의 술법만으로는 표본이 부족했었는데....’
이제 와서 제갈세가의 술법을 흉내낼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술법 요결을 기존의 술법과 접목시켜 새로운 방향으로 비틀어볼 심산이었다.
그렇게 제갈세가의 술법을 눈대중으로 엿보며 이것저것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께서 강 무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무림맹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고요.”
“총군사께서 금칠을 해주시는군.”
“하하, 아버지는 웬만한 사람들은 높이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사적인 자리에선 더더욱 그렇지요.”
그리 말하는 제갈세옥의 목소리엔 씁쓸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용봉지회의 일원으로서 강호에 이름을 떨쳤음에도 아비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일까.
사적인 일이기에 강엽은 더 파고들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기왕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교류나 하는 게 어떻소?”
“교류요?”
“다른 술사들은 적으로밖에 못 만나봐서. 총군사님과는 이런 교류를 할 기회가 없었고.”
생각해보면 다른 술사와 진득하게 얘기하는 것은 강엽도 처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호기심이 들었던 것.
“어렵게 생각할 것 없소. 무인들도 논검을 하지 않소. 학자들도 토론을 하고 말이오.”
“...강 무사님은 독특하시군요.”
“내가?”
“아, 이상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이제껏 봤던 술사들은 동문이 아니면 서로 비기를 내보이는 것조차 꺼려했거든요.”
함부로 비기를 내보였다가 밑천이 털리거나 파훼법이 알려질 수 있는 만큼 술사들은 무인들 이상으로 폐쇄적인 성향이 짙었던 것이다.
“술법을 가르치는 것도 그렇습니다. 본가야 혈연으로 이루어졌으니 혈족들에 한해선 교류에 인색하지 않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않거든요.”
제자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수발을 드는 건 물론이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서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뼈가 가루가 되도록 고생을 해야 스승으로부터 진언 한 자락 적선받듯 전수받으니 지식을 나누는 데 인색할 수밖에.
술가의 태생에 익숙한 제갈세옥으로서는 먼저 교류를 제안한 강엽이 특이하게 느껴질 만했다.
“...그런 차이가 있었군.”
“예?”
“아니, 혼잣말이오.”
제갈세옥의 말을 듣고서야 강엽은 자신과 다른 술사들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법을 대하는 관점이 달라.’
처음엔 모산파의 비급을 훔쳤고, 이후엔 연이어 기연을 얻어서 흑룡교의 술법까지 배운 강엽이다.
대부분의 술법을 독학으로 체득했기에 강엽은 술법을 학문의 일종으로 간주했다.
그렇기에 핵심적인 술법이나 위험한 술법만 아니면, 교류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여겼는데....
‘다른 술사들은 그조차 아까워하는군. 하긴 평생을 연마한 기술이니 어쩔 수 없나?’
애초에 강엽은 술법에 입문한 과정이 비상식적인 데다 술법 한두 가지 털린다고 해도 별 타격도 없었다.
그에 비해 다른 술사들은 가진 게 너무 적었다.
그들로서는 평생을 연마한 기술이니 아까워서라도 대놓고 교류할 생각을 못했으리라.
“생각이 짧았군. 아까 한 말은 잊어주시오.”
“아, 아닙니다. 사실 술법 자체는 교류하지 못해도 술법의 이치나 이론을 논하는 건 괜찮습니다. 본가에서도 그 정도는 하거든요.”
사실 강엽이 원하는 것도 딱 그 정도였다.
술법의 토대가 되는 이론을 들으면 제갈세가의 술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나도 적당히 던져줘야겠군.’
술법 그 자체보다는, 술법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견해를 말해주면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 * *
“부상자들은 어떻소?”
“완 노사님의 의술은 정말 놀라워요. 솔직히 약선 어르신이나 저희 숙부님 말고 그만한 의원이 또 계실 줄은 몰랐어요.”
당묘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현상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던 부상자들이 점차 호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상을 당한 사람들은 운기조차 못할 정도로 심신이 망가졌거든요. 그걸 며칠 만에 뒤집다니....”
침술로 경혈을 자극하여 막혀있던 혈도를 뚫어주고, 사기를 조금씩 밖으로 빼냈다.
사혈(瀉血)을 하는 바람에 피를 좀 많이 흘리긴 했지만, 부상자들이 망자로 전락할 염려는 사라졌다.
“다만 현운 도장께선 술법에 당하신 것이기에 크게 효과가 없었어요. 역시....”
“마의를 죽여야겠지.”
“그자가 올까요?”
“올 거요.”
인신공양은 질 좋은 제물이 많을수록 효과도 뛰어나다.
그러니 마의도 검선을 사로잡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현운 도장까지 노린 것이리라.
“한시름 덜었으니 좀 쉬시오. 부상자들 돌보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병동을 나가려고 할 때였다.
“강 무사님.”
뒤에서 부르는 말에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돌리자 당묘정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내 그녀가 멋쩍은 듯이 귀밑머리를 꼬며 웃었다.
“...고마워요. 강 무사님이 오시기 전엔 어떡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었거든요.”
만약 강엽이 오지 않았다면 부상자들을 치료하지 못했을 테고, 연운산맥을 넘었어도 뒤쫓아오는 마의에게 덜미를 잡혔을지 모른다.
강엽이 무어라 대답하려 할 때.
“...왔군.”
“네?”
강엽은 대답하는 대신 문을 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밤하늘에서 검은 점이 날아왔다.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허공을 유영하는 짐승을 본 당묘정의 눈이 쥐방울처럼 커졌다.
“저건...!”
그녀도 강엽이 박쥐를 정찰용으로 써먹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 자체로 놀라진 않았다.
다만 뒤이은 말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람들에게 알리시오. 적들이 왔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