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고립 (4)
쾅! 쿠왕! 터어어엉!
연달아 산세를 강타하는 굉음.
산 밑에서부터 올라온 소리가 지척에 이르자 일행은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개미떼가 몰려오는 것 같군요.”
제갈세옥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지만, 그건 일행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했다.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산길 전부가 보이지 않는데도, 군데군데 드러난 곳엔 검은 물결이 일렁거렸다.
마의가 그들을 잡기 위해 동원한 망자의 군세.
산길이 좁고 가파른 데다, 강엽과 제갈세옥이 깔아둔 술법진이 시도 때도 없이 터졌다.
갑자기 땅이 진창이 되거나, 바윗덩이가 절벽을 타고 쏟아지며 망자들을 덮치거나....
느닷없는 진법의 기운에 이끌려서 산길 아래로 추락하는 일도 잦았다.
“왜 갑자기 추락하는 거지?”
“망자들은 진동에 민감합니다.”
제갈세옥의 말이었다.
좌중의 시선이 모이자 그가 겸연쩍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라고 강 무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사람들이 강엽에게 시선을 돌렸다.
청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여기 오기 전에 몇 마리 잡아봤거든.”
눈알이 짓물린 주제에 사물을 분간하는 모습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험을 한 것이다.
“확인해보니 놈들은 오감이 퇴화했더군. 시각과 청각은 물론이고 후각도 상당히 뒤떨어졌어. 사람은 물론이고 늑대나 개처럼 코가 좋은 짐승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 가지 감각만은 매우 뚜렷했다. 오히려 생전보다 발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진동을 느끼는 감각은 뛰어났지. 작은 흔들림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방향도 정확했고.”
산길의 술법진은 그걸 응용한 것이다. 대상의 감각에 혼선을 빚어 방향을 유도하는 술법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망자들이 부서지고 꺾이자, 나무 사이를 가로지른 은혼사가 육신을 절단했다.
후두두둑!
“세상에....”
척마대원들과 호광의 무림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강엽은 얼굴을 펴지 않았다.
백서희가 쳐둔 은혼사는 날카롭고 질기지만, 버틸 수 있는 무게엔 한계가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망자들이 무더기로 떨어지자 결국 툭 끊기고 말았다.
물론 그 아래엔 또다른 은혼사가 있어 망자들을 받아냈지만 얼마 못 버티고 끊어지는 건 매한가지.
‘혈목으로 한차례 걸렀는데도 저 정도란 말이지.’
일행이 있는 곳에선 보이지 않지만, 산 아래에선 혈목 다발이 튀어나와 망자들을 쓸어내고 있었다.
백서희가 인상을 썼다.
“괜찮겠어? 저놈들이 밀고 들어오면 하루도 못 버틸 것 같은데?”
사람이라면 지치고 힘들어서 하루 종일 싸울 수 없지만, 망자들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였다.
열두 시진 내내 머릿수로 밀고 들어온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안색이 급변해서 강엽을 바라보는데, 의외로 제갈세옥의 입에서 답이 나왔다.
“당분간은 괜찮습니다.”
“무슨 뜻이죠?”
“저 술법들은 망자들을 막고자 함이 아닙니다. 너무 많은 숫자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거르는 것이지요.”
설령 이보다 더 많은 술법진을 깔아뒀다 해도 망자들을 영원히 막을 수는 없을 터.
강엽과 제갈세옥은 처음부터 그리 판단하고 비장의 수단을 준비했다.
“슬슬 발동될 겁니다.”
우우우우우웅...!
산기슭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
주력을 모르는 이들조차 느낄 수 있을 만큼 농밀한 술법의 파동이 온 산세를 뒤덮기 시작했다.
강엽이 짧게 내뱉었다.
“삼중막(三中膜)이다.”
산길 사이에 거대한 막을 만들어 망자들을 격리하는 진법. 그로써 망자들은 네 군데로 분리되어 오도 가도 못하고 진퇴양난에 처한다.
“이건 제갈 소가주의 공이다. 내가 익힌 술법엔 이런 종류가 없거든.”
-삼중격벽진(三中隔壁陣).
공간을 나누어 대군을 가두는 제갈세가의 절진.
강엽이 공을 돌리자 제갈세옥이 쑥스러워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저 혼자선 칠 수 없는 진법이었습니다. 강 무사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냈겠지요.”
제갈세옥은 이 진법을 터득했지만 진축이 될 만한 법구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엽이 빌려주었던 것이다.
‘금시환령을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모산혈조가 남긴 장문령부.
절반만 남아서 본래의 공능은 잃어버렸음에도 술법진을 펼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럼 준비하자고.”
강엽이 목을 두둑 꺾었다.
* * *
싸움은 싱거우리만치 빨리 끝났다.
망자들은 숫자가 많아서 부담스러울 뿐, 일행의 무공이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가끔 망자가 된 맹수나 고수가 나오긴 했지만 진법을 넘진 못했다.
“교대로 들어간다. 쉴 때는 확실하게 쉬어두도록. 이 싸움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진법으로 막고 있으면 안 됩니까?”
누군가 물었지만 강엽은 단호했다.
“무작정 막기만 하는 건 하책이다. 정 방법이 없으면 놈들이 다른 길로 돌아올 수도 있어.”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은 하나뿐이지만, 망자들이라면 짐승이 지나는 길로 올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일부러 길을 열어두고, 진법으로 격리한 다음 청소하기를 택한 것이다.
아군이 피로에 시달리지 않도록 교대로 투입하고, 싸우지 않는 인원은 쉬면서 운기를 하는 식이었다.
‘물론 이렇게 해도 언젠가는 한계에 달하겠지만....’
암만 일행이 강해도, 주기적으로 쉰다고 해도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운다면 종국엔 지치고 말 터.
그나마 마을 곳간 중 일부가 무사해서 식량은 넉넉하지만, 장기간 버티는 건 무리였다.
‘다만 시간이 없는 건 마의도 매한가지다. 지금쯤이면 무림맹도 패전 소식을 들었겠지. 호광성은 무림맹의 코앞이니 무턱대고 포기하진 않을 테고. 원군을 보낼 거다.’
게다가 마의는 검선을 은신처에 두고 온 상태였다.
검선이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누군가가 그를 구출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리라.
그렇게 사흘 가량이 지났을 무렵.
“.......”
강엽은 전장의 공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쩌저저적...! 쾅! 투아아아앙-!
산 아래에서부터 끊이지 않고 울리는 굉음.
이제껏 망자들만 앞세웠던 마의가 술법진을 부수며 올라오고 있었다.
혈목도, 술법진과 삼중격벽진도 한시도 버티지 못한다.
황보진악을 위시한 인원들이 신호탄을 보고 탈출해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했다.
“놈은 혼자 오고 있소. 오롯이 본신의 무위만으로 술법진을 파괴하고 있소이다.”
그리 말하는 황보진악의 안색이 허옇게 굳어 있었다.
악의로 가득한 살기를 접한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격하게 움직인 반동으로 몸이 뜨겁기는커녕 식은땀만 주륵주륵 흘렀다.
온몸의 피가 싸늘히 마르는 기분이 이러할까.
“그놈은 괴물이오.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이길 수 있겠소?”
“이기지 못하면 우리가 죽어.”
“그야 그렇소만.”
“다른 사람들 챙겨서 물러나라.”
이 싸움에서 척마대원들은 큰 도움이 못 되는 만큼 현운 도장을 지키기 위해 후방에 뺐다.
백서희와 완안극도 마찬가지. 두 사람은 함께 싸우겠다고 했지만 강엽이 거절했다.
‘상대가 심상지경의 고수라면 위험하다.’
백서희는 예언이 이 순간을 경고한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심상지경의 고수가 상대라면 이 선택이 최선이었다.
쩌저저저저저적... 짜아악!
마을을 지키는 진법이 찢어진다.
두 동강이 난 진법 너머에서 을씨년스러운 목소리가 전성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귀영.]
흰 가면을 쓴 사내. 거센 산바람에도 머리를 감싼 두건이나 시커먼 옷자락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텅 빈 마을을 쭉 둘러본 마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혼자 있는 거냐? 동료들은 어디 가고?]
“....”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됐는지 마의가 납득했다.
[그런가. 혼자서 나와 겨루겠다는 거군. 네가 강하다는 건 알지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돌연 잦아들었다.
돌풍처럼 회전하며 날아온 무언가가 머리 위를 넘어 강엽의 손에 빨려들어가는 걸 보면서였다.
과거 그가 몇 번 교류했던 어떤 광인이 신줏단지처럼 여긴 보물.
[...금시환령?]
팔뚝만한 금막대가 수중에 얌전히 안착하는 것을 본 그가 노란 안광을 빛냈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궁......!
돌연 일어난 격한 진동이 온 산을 흔들었다.
* * *
지하 깊숙한 곳에서부터 발원한 거력이 지면을 밀어올리면서 마을 건물들을 허물었다.
시뻘건 혈목이 건물을 부수고 오 장 너머로 뻗고, 그 사이로 혈선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간다.
그와 함께 자욱한 흑무가 산자락의 안개와 겹쳐지며 마을이 있는 구릉 일대를 통째로 감쌌다.
혈라지망과 흑무암쇄진. 절대고수를 상대함에 있어 승산을 높이기 위해 준비한 수였다.
[천시, 지리, 인화.]
칠흑의 안갯속에서 묵직한 저음이 들려온다. 사위를 살핀 마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초적인 병법이지. 하늘의 때를 얻고, 지리의 이점을 취하며, 사람의 화합을 도모할 것. 인화는 그렇다 치고 천시와 지리는 확실하게 얻었군.]
고개를 돌리자 산 곳곳에 흐르는 개울물이 강제로 끌려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수류의 능력에 의해 검은 안개와 합쳐진다. 그렇게 사람이 만든 묵운 사이로 천둥소리가 울리는 찰나.
거대한 벼락이 천지를 가로질렀다.
콰아아아아앙......!
소리가 빛살을 따라오지 못한다. 고막이 때렸을 땐 벼락이 지상을 까맣게 태워버린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의는 아무렇지 않게 버텨냈다.
상시로 두르는 호신강기 덕분.
[괜찮군. 뇌기를 다루는 수준은 일사도와 맞먹어.]
마의가 토시로 감싼 소매를 흔들자 작은 소검이 양손에 쥐어졌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사라졌다.
슈왁!
축지를 쓰듯 느닷없이 측면에서 튀어나온 검격. 날카로운 참선(斬線)이 어두운 안개를 갈라버렸다.
그러나 강엽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마당.
마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공격초를 이어갔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소검을 역수로 고쳐쥐고 힘껏 허리를 비틀었다.
쩌어어어어엉...!
자색 검날과 부딪치자 날카로운 파찰음이 일어나고, 막강한 충격파가 궤적을 따라 주변을 흔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
초막의 지붕 위에서 치솟은 검은 인영들이 일제히 입을 벌려 망혼소의 음공을 토해냈다.
사전에 깔아둔 혈라지망이 강엽의 생각을 읽고 술법을 발동한 것이다.
좁쌀만큼이라도 영향을 받았다면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있었을 터.
그러나 마의는 별다른 흐트러짐 없이 검초를 뿌렸다.
콰아아아아앙-!
묵직한 공력 경파가 일며 강엽의 몸이 무너진 모옥을 다시 한번 부수고 깊숙이 처박힌다.
[하나 알려주마. 내게 환술은 통하지 않는다.]
어깨를 비틀자 자색 검날이 어깻죽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경파와 호신강기가 스치고, 가면 속 노릿한 안광과 마안의 붉은 안광이 교차하는 그 순간.
마의의 등짝이 터지듯이 찢겨나가면서 여덟 개의 다리가 강엽을 노리고 짓쳐들어왔다.
지이이이이잉...!
거미의 그것처럼 마디가 꺾인 다리. 절세보검처럼 날카로운 끝자락엔 불길한 흑점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강엽이 막지 않아도 사방에 쳐둔 혈라지망이 술법을 발동,
-사상봉절 뇌벽.
강엽을 감싼 뇌광과 섞이면서 팔방으로 쇄도하는 흑점을 막아냈다.
투아아아앙!
어마어마한 반발력과 함께 두 사람이 뒤로 튕겨나가고, 사이의 공간이 팽창하면서 사방으로 자욱한 흙먼지와 농밀한 기파를 뿌려댔다.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자세를 잡은 강엽이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마의가 반격한 뒤였다.
‘이놈....’
한 가지 의혹이 번쩍이듯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코앞까지 쫓아온 검을 한 끗 차로 피해서 놈의 하박을 치고, 전신의 발경을 끌어올려 옆구리에 강렬한 발경 족격을 먹인다.
호신강기로 인해 별다른 충격을 주진 못했지만 잠시나마 마의를 제지시킨 호쾌한 궤적.
파아아앙!
곧바로 질풍처럼 반격한 마의가 뇌광에 휩싸인 팔뚝을 걷어찼다.
그리고 호흡에 구애받지 않는 몸놀림으로 두 손을 어지러이 휘둘렀다.
신들린 것처럼 광란하는 수백의 참선이 뇌광을 쪼개며 압박을 가한다.
그렇게 위기에 몰린다 싶었을 때.
화아아아악...!
돌연 뜨거운 기운과 차가운 기운이 충돌, 마의의 전권을 절묘하게 파고들며 그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교주가 말했었지. 네놈이 일월신마공을 익혔다고.]
비틀거리며 일어선 마의의 목소리는 잡스러웠다. 일월합벽의 기파에 깨져나간 가면 사이로 육성과 전성이 겹치듯 울렸던 것이다.
깨진 틈새로 드러난 마인의 낯짝.
머리털은 한 올도 없는 데다 코는 잘려서 썩은 단면이 훤히 드러났고, 피부는 퍼렇다 못해 칙칙하다.
그동안 감춰졌던 실물을 본 강엽이 인상을 썼다.
“일찌감치 인간을 포기했군. 스스로를 생강시로 만든 게 백 년간 활동할 수 있던 비결이냐?”
싸우던 중에도 숨쉬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호흡을 무시하는 움직임까지 더해진 만큼 의심이 갈 수밖에.
‘하필이면 약을 먹는 모습을 봐서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그렇군.’
지금까지 알아낸 단서들이 하나로 모이면서 새로운 가설을 짜맞춘다.
마의가 생사단을 복용한 것은, 단지 검선과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을 치유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강시긴 강시되, 완전한 강시는 아니었던 건가. 활동하기 위해선 선천지기가 필요했던 거야.”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선천지기를 빼앗아 생사단을 만들고 계속 복용해왔던 게 아닐까.
가면 사이로 드러난 피부를 매만진 마의가 무표정하게 뇌까렸다.
[그래야 염원을 이룰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