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수습 (2)
강엽은 체내를 관조했다.
두 교왕의 피를 빨아들인 이후 혈공진기는 더욱 덩치를 불렸다.
낙맥과 세맥 곳곳에 흩어진 선천지기까지 싹 긁어모으면 종래의 사할 가량 늘어날 터.
‘무광암이나 입도공월은 잘하면 한 번 더 쓸 수도 있겠는데....’
만전 상태에서 써도 단전이 텅 비는 비대한 비기들.
몹시 부담스럽지만, 그 공능을 생각하면 안 쓸 수가 없었다.
공력의 소모량을 줄일 수 없다면, 축기량을 더해서 감당할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한 강엽이 눈을 반개하며 수인을 맺었다.
십수 가지의 손동작을 창졸간에 맞춰 구품정인(九品定印)을 완성한다.
순정한 혈공진기에 의념을 불어넣는 바로 그 순간.
구어어어어엉......!
장심에서 떠오른 붉은 구체를 중심으로, 강렬한 심상이 태풍처럼 연무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흠....”
“뭐, 뭐야!?”
옆에 딸린 연무장에서 수련하고 있던 백서희가 놀라서 달려왔다.
다른 사람의 수련에 개입하는 건 가까운 사이라도 해선 안 될 일이지만, 마냥 무시하기엔 일대를 휩쓴 파동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잠시 후엔 하후진과 완안극, 전강까지 달려왔다.
“이게 뭔 일이야? 적이라도 쳐들어왔냐!?”
떨어진 데서 돌아가며 대련을 하던 그들이었다.
한데 살 떨릴 만큼 거대한 기운이 기감을 강타하는 게 아닌가?
“적은 무슨. 그냥 실험이다.”
“이게 어딜 봐서 그냥이냐....”
하후진이 질린 표정으로 타박할 때 전강이 강엽의 손에 들린 구체를 발견하고 깊은 이채를 띠었다.
“혹시 그게 원인이었소?”
“주인님, 그게 무엇입니까?”
완안극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뭔지는 몰라도 건드리면 폭발할 것처럼 위험한 예감이 들었던 것.
“심법진이다.”
“예에?”
경악하는 일행의 모습에 강엽이 재빨리 덧붙였다.
“정확히는 심법진이 되기 전의 씨앗 같은 거지.”
“씨앗? 땅에 심으면 심법진이라도 돼?”
백서희의 물음에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해. 다만....”
마뜩찮은 눈으로 구체를 내려다본 강엽이 천천히 손을 쥐자 붉은 구체가 푸쉭 연기를 내며 꺼졌다.
“엥? 왜 없애는 거야?”
“미완성이거든. 안에 뭘 담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아직 토대만 세운 백지 상태의 미완성작.
“...난 술법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심법진이라는 것도 심극과 비슷한 거 아니냐?”
심극은 심상절예를 손에 넣기 전에 거치는 등용문.
무인의 근원이자 이상향을 담은 매우 강력한 절기지만, 당사자가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후진의 의문에 일행도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원래라면 그렇긴 한데... 좀 다른 모양이다.”
강엽은 심상절예를 완성한 무인.
그 자신의 심상이 결정된 만큼 심법진 또한 비슷한 형태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같은 심상이라도 방향이 달라. 비유하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줄기라고 할까.”
생각해보면 진조도 마찬가지였다.
심상절예와 심상법을 통합하긴 했지만, 둘의 형태는 전혀 판이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한 건 아닌 것 같고....’
이건 진조에게 물어도 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필시 이 의문 자체가 심극과 심법진, 나아가 심상절예와 심상법을 구분하는 깨달음의 단초가 될 터.
스스로 고찰하여 깨달음을 얻어야만 하는 문제인 만큼 섣부른 조언은 안 듣는 것만 못했다.
“그냥 대충 넣으면 안 되나?”
“아니,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아! 심법진이 뭐 솜옷인 줄 아냐!? 아무거나 쑤셔넣게?”
“말 한마디 해본 걸 가지고 왜 성질이요?”
완안극과 하후진이 얼굴을 맞댈 기세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에도 일행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짧은 시간 두 사람이 옥신각신 다투는 것을 지겹게 본 것이다.
“당장 심법진을 완성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거기에만 매달릴 순 없지. 할 일이 많아.”
“응? 또 뭐가 있어?”
“일단 이건 조영옥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인데....”
호랑이도 자기 말하면 온다고 강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편에서 조영옥이 나타났다.
다른 일행들처럼 큰일이 났다고 여겼는지 호종하는 무인들도 다 떼어내고 쏜살같이 달려온 것.
“혹시 적이 쳐들어왔나요!?”
“그건 아니고....”
어째 친숙하게 느껴지는 질문인걸. 강엽은 쓴웃음을 지으며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제서야 조영옥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전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요.”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오.”
“음, 뭐 됐어요. 듣고 보니 강 무사가 강 무사한 거네요.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은데요.”
“....”
강엽은 묘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지만, 일행은 과연 그렇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심지어 백서희와 완안극마저 위아래로 턱짓을 하는 게 아닌가?
“크흠, 그보다 상담하고 싶은 게 있소. 조 공녀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오.”
“제 허락이요?”
“들어보고 판단해주시오.”
“궁금하긴 하네요. 근데 그전에 손님부터 만나보셔야겠는걸요.”
“누가 날 찾소?”
“예, 하오문에서 왔어요. 한데....”
조영옥의 아미가 은근히 찌푸려졌다.
“해어화 홍 소저가 하오문의 소문주가 됐던데요?”
“홍가려가 왔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알고 계셨나 보네요.”
“하오문과는 연이 좀 있어서.”
“그녀가 사라졌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하오문의 소문주가 됐을 줄은 몰랐어요. 워낙 은밀하게 사라져서 항간에 온갖 소문이 나돌았는데....”
그녀를 탐한 자들에 의해 납치당했다느니, 사내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다.
사원루를 떠난 이유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기에 근거 없는 소문이 사실인 양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강 무사는 홍 소저와 친분이 있지 않나요?”
“의뢰 한두 번 하면서 알게 된 사이에요.”
백서희가 얼른 끼어들었다.
혹시나 조영옥이 강엽과 홍가려의 관계를 멋대로 오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가 만난 것도 의뢰 때문이었지.”
홍가려의 의뢰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이 만나는 일도 없었겠지.
백서희도 멋쩍게 웃었다.
“흠, 생각해보니 그렇네?”
둘만 알고 있는 추억을 얘기하는 모습에 조영옥이 눈꼴시리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만날 거죠?”
“그래야지. 지금 어디 있소?”
“접객당에요.”
* * *
접객당엔 홍가려뿐만 아니라 하오문 사천 당주인 오광우까지 있었다.
오광우가 가장 먼저 포권을 하며 예를 갖췄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강 무사님.”
“고맙소.”
포권으로 화답하며 홍가려를 바라보자 그녀가 붉은 면사를 벗으며 활짝 웃었다.
“무탈해서 다행이에요. 잘 지냈어요?”
“하오문 덕에. 운남과 사천일엔 빚을 졌어.”
“혈교를 몰아내는 게 본문의 방침이기도 하니 마음 쓰지 마세요.”
“문주님은 건강하신가?”
“네.”
홍가려는 가볍게 대답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하오문주를 언급하는 순간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뭔가 있다는 낌새를 받았지만, 강엽은 굳이 꼬치꼬치 캐묻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돌아봤다.
홍가려의 뒤편에 가만히 시립한 검객이 씩 웃었다.
“오랜만이군. 못 보던 사이 더 거물이 되셨어.”
“능정각.”
낭인전 사천 분타의 금인패급 낭인인 금파검 능정각. 그가 홍가려를 호위하며 태화문까지 왔다.
“홍 소저가 날 고용했지. 사천에 있는 동안엔 내가 호위를 맡게 됐어.”
“넷이 더 있군.”
“응?”
강엽은 별달리 덧붙이지 않고 천장과 병풍, 구석진 그림자 등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강엽은 그들의 호흡이 미세하게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역시 알아차렸네요.”
홍가려가 혀를 내둘렀다. 강엽의 말마따나 그녀의 주변엔 은신한 호위대가 있었다.
“문주님께서 붙여주셨어요. 강 무사는 금방 찾았지만, 사실 굉장히 뛰어난 아이들이에요.”
능정각이 헌신적으로 그녀를 지켜도 처소나 욕실처럼 은밀한 곳까지 따라올 수는 없는 노릇.
소문주가 된 지금 그녀는 전속 호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절정의 문턱은 넘었군.’
절정고수 넷에 금패급 낭인인 능정각까지. 이만하면 교성급을 맞닥뜨리지 않는 한 안전할 것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혹시 사천의 정세를 들으셨는지 모르겠네요.”
“글쎄, 한동안 두문불출한지라.”
조영옥에게도 상황이 변하면 즉시 알려달라고 하긴 했지만, 그녀도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건은 하오문이 더 정확하리라.
홍가려가 오광우를 슬쩍 돌아보자 그가 읍하면서 말했다.
“사흘 전 당문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당문주께서 만천화우로 교성 두 명을 격살하고, 활수명의 당우경 대협과 당문의 원로들이 위지세가의 가주를 생포했지요.”
혈안사군이 전선에서 모습을 감추자 당문은 지금까지 당한 한풀이를 하겠다는 듯 총공세로 전환했다.
혈안사군이 남긴 세 명의 교성과 위지세가주가 맞서 싸웠으나, 당문의 분노는 적들을 덮어버렸다.
“타강 유역에 적들의 시신으로 산이 쌓였습니다. 어찌나 독을 뿌렸는지 인근 십 리가 절대독지가 됐습니다. 독공을 익힌 고수가 아니면 접근도 힘든 판국이지요.”
“적들은 전멸한 거요?”
“교성이 이끄는 일부 패잔병이 북쪽으로 도망쳤는데, 결과적으로는 자충수였습니다. 마침 그쪽엔 사천 무림을 돕기 위해 온 화산과 공동의 장문인들이 계셨거든요.”
“결국 전멸했다는 말이군.”
“그렇지요. 한데 화산과 공동도 사천에 넘어오기 위해 고생했습니다. 스스로 혈진대군이라 밝힌 교왕이 두 장문인을 며칠간 막았습니다.”
검각의 사태를 들은 강엽이 찻잔을 만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혈진대군이라....”
“소문이 아직 널리 퍼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서... 결국 시간문제죠.”
홍가려의 말에 강엽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이 세간에 퍼진다면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구파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 일이었다.
이어 오광우가 말했다.
“아미와 청성은 혈풍신군을 잡기 위해 천라지망을 펼쳤습니다. 당문주께서 말씀하시길 당문과 화산, 공동까지 힘을 합칠 거라고 합니다.”
태화문에서의 싸움이 끝나고 강엽 일행이 휴식을 하는 동안 바깥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홍가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태화문이 정리된 덕분이에요. 주요 고수들이 사라진 바람에 혈교도 맥을 못 추고 있거든요.”
“그래도 혈풍신군을 잡는 게 쉽진 않을 거야.”
혈진대군이 물러났다는 것은 혈교가 사천의 대계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정했다는 뜻.
혈풍신군에게도 철수 명령이 내려졌을 공산이 컸다.
“사천 정세는 이만하면 충분히 안 것 같은데.”
“음, 그래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홍가려가 차를 홀짝이며 뜸을 들였다.
며칠 전 일월신교의 무리와 맞닥뜨린 일이 뇌리를 스쳤지만, 일단 강엽을 찾아온 용무부터 밝혔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릴게요. 낭왕 어르신이 위태로워요.”
“뭐?”
“그분이 북해로 가신 건 아시죠?”
강엽이 미간을 찡그렸다.
“맹주의 부탁이었던가?”
“네, 맞아요. 무림맹은 북해빙궁의 무공이 광명마교와 상극이어서 그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어요. 낭왕 어르신보다 광명마교의 움직임이 더 빨랐지만요.”
“자세히.”
“사사도와 팔사도가 교군을 이끌고 북해로 갔어요.”
은밀히 출발한 것도 아니다. 항주의 대로 한복판에서 두 사도가 나란히 말을 몰고 교군들을 이끌었다.
“그럼 낭왕이 위기에 빠진 게...?”
“아뇨, 그건 아니고요. 좀 복잡한데... 빙궁을 설득하긴 했는데, 그들이 조건을 내걸었나 봐요. 자세한 사정은 적히지 않았지만, 낭왕 어르신께서 깊은 내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왔어요.”
“....”
“이건 문주님의 서찰이에요.”
홍가려가 건넨 서찰. 빠르게 내용을 살핀 강엽은 그녀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것까지 파악했다.
“북해로 가는 것만이 아니군. 호광의 성수장에 들러 약을 구해달라?”
“문제는... 호광도 상황이 안 좋다는 거죠. 죽은 자가 나돌아다닌다는 소문 들어보셨나요?”
“얼핏 듣긴 했지.”
운남에서 같이 싸웠던 현운 도장이 급하게 떠난 이유가 호광성의 소문 때문이 아니었던가.
홍가려가 입술 끝을 깨물었다.
“그 소문은 사실이에요. 지금은 호광 전체가 수라장인데, 성수장은 그 중심부에 있어요.”
“산 넘어 산이군. 아니, 산 가기 전에 다른 산을 넘어야 하는 건가?”
어째 사건이 끊이지 않는군.
강엽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