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수습 (1)
섬서에서 사천으로 통하는 험로.
과거 촉도라 불린 검각의 산길은 요 며칠 동안 통행불가의 금지로 여겨지고 있었다.
두 성을 오가는 보부상들은 물론 단단히 무장한 표사들도 감히 넘어갈 엄두를 못 낼 지경.
사태의 중심지에선 양 무리가 대치하고 있었다.
“본 왕은 너희에게 실망했다.”
산을 방불케 하는 근육질의 거인.
머리부터 발끝까지 팔 척을 족히 넘는 거구는 옹골찬 근육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흉터 가득한 근육을 불끈거리면서 위압감을 과시한 그는 뚱한 기색을 드러냈다.
“명색이 구파의 장문인이란 것들이 합공의 치(恥)를 무릅쓰고도 나 하나를 뚫지 못하다니....”
“....”
거인의 앞에 선 두 사람은 침묵을 견지했다.
검은 도포자락을 걸친 백발의 노인과 매화 문양이 수놓인 분홍 장삼을 휘날리는 아리따운 여인.
섬서 무림의 거두인 공동과 화산의 장문인들이 단 한 명을 쓰러트리기 위해 힘을 합친 것이다.
본인은 물론 사문의 명예까지 진창에 박는 짓을 했는데도, 스스로를 혈진대군(血鎭大君)이라 밝힌 거인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선자, 명경지수의 마음으로 임해야 하오.”
화산파의 신임 장문인.
뒷방으로 물러난 검성의 뒤를 이어 장문직에 취임한 옥청선자가 그 말을 듣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
“상대는 토(土)의 기운으로 호흡하고 있소이다. 어지간한 타격은 대지로 흘려버릴 수 있소.”
“하지만 영원하진 않겠지요.”
사람인 이상 먹고 자고 쉬어야 한다.
온몸의 근육과 경맥을 통제하는 절세고수라면 신진대사조차 조절할 수 있으나, 그렇다 해도 먹고 자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순 없는 법.
공동파의 광악 진인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혈진대군과 대치한 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그가 뭔가를 먹거나 숙면을 취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반면에 그와 옥청선자는 번갈아가면서 쉬고 도전했는데도 혈진대군을 패퇴시키지 못했다.
고작 열 보를 후퇴시킨 게 전부.
옥청선자도 침통함을 금치 못했다.
‘수치를 무릅쓰고 합공했는데도 이기지 못하다니....’
사문의 명예를 땅에 처박았다. 함께 온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
혈진대군이 껄껄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옥청선자 넌 예전에 섬서제일미로 불렸다지? 장문직에 오른 지금도 자태가 제법 곱구나. 그래, 이렇게 하는 게 어떠냐? 이 몸에게 하룻밤 안기면 길을 열어주마.”
옥청선자를 훑어보는 눈빛엔 음욕이 가득했다. 화산파 장문인을 창기로 격하시키는 천박한 품행.
당사자보다도 뒤에 있던 제자들이 분노했다.
“저 망종이 감히...!”
“장문인!”
그들이 애타게 불렀지만 옥청선자는 무시했다. 굳이 싸구려 도발에 어울려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오히려 광악 진인의 표정이 납처럼 굳어졌다.
“천박하군. 교왕이라는 자가 파락호 같은 언행으로 일파의 장문인을 희롱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크하하하하! 알 게 뭐냐-!”
사자후처럼 메아리치는 웃음소리. 혈진대군의 광소에 숲이 흔들리고 산짐승들이 픽픽 쓰러졌다.
“크헉!”
“아악! 고, 고막이...!”
구파의 본산제자들조차 고통을 호소하는 음공.
귀와 코에서 피를 흘리는 제자들의 아우성에 두 문파의 장문인이 안색이 변해 즉시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삐이이이이이익-!
“...응?”
혈진대군의 미친 웃음조차 파묻은 날카로운 이명에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장정만큼 커다란 핏빛의 매가 허공에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혈진대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엉? 혈응(血鷹)이 왜?”
허공에서 유선형의 움직임을 가져간 혈응이 빠르게 착지했다.
뒤쪽에서 대기하다 요령 좋게 혈응을 받아낸 교성이 다리에 매여있는 전통을 열고 내용을 살폈다.
“이, 이런...! 교왕이시여!”
“뭐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구파 장문인들을 힐끔거린 교성이 조심스럽게 전서를 가져갔다.
“흠, 설마 편지 볼 때 공격하진 않겠지? 그런 짓을 하면 내 몸소 제자들의 사지를 찢어 죽여줄 것이야.”
두 장문인에게 단단히 엄포를 놓고 전서를 살핀 혈진대군의 안색이 삽시간에 경직되었다.
‘뭐지?’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절세고수의 안법이라면 백지 뒤에 비치는 글씨를 통해 내용을 추론할 수 있으나, 혈진대군이 두꺼운 손으로 가렸기에 볼 수가 없었다.
“허, 이건 피해를 입었다 정도가 아닌데... 혈옥귀군(血玉貴君)이 경을 치겠군.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어.”
“교, 교왕이시여.”
구파 장문인들도 있는 자리. 함부로 말했다가 정보가 새어나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나 혈진대군은 개의치 않았다.
“상관없다. 어차피 저놈들도 다 알게 될 텐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전서를 박박 구겼다. 삼매진화로 태워버린 잿가루가 바람결에 날아갔다.
“운이 좋구나, 구파 장문인들.”
“...무슨 말인가?”
“이 몸이 여길 지킬 이유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에잉, 며칠째 밥도 못 먹었는데 개고생만 했구먼.”
입맛 달아났다는 듯이 혀를 찬 그가 쩔쩔매는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철수한다!”
난공불락의 철옹성처럼 길목을 막았던 혈진대군이 물러날 뜻을 밝히자 구파 장문인들은 뜨악했다.
“순순히 보내줄 것 같은가?”
“늙다리, 건방 떨지 마라.”
화아아아악!
일대를 휘감은 패도적인 기세.
이제껏 방어 일변도로 싸웠던 그가 처음으로 살의를 드러내자 광악 진인의 백미가 파르르 떨렸다.
“네놈의 복마검법(伏魔劍法)은 이 몸에게 타격을 주지 못한다. 옥청 저 계집년의 매화검도 마찬가지.”
“....”
광악 진인의 노구가 뻣뻣해졌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혈진대군이 드러낸 기세는 구파 장문인인 그를 압도했던 것이다.
옥청선자의 갸름한 턱선에도 굵직한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번엔 그냥 물러나지만, 다음엔 너희들의 산에 올라갈 것이다. 네놈들의 목은 그때 거두마.”
혈진대군이 부하들을 데리고 철수하는데도 두 사람은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의 기척이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광악 진인이 십 년은 늙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체면이 땅에 떨어졌구려.”
“그보다 저들이 물러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사천 무림을 돕기 위해 출발한 두 장문인이었다. 혈진대군은 그런 두 사람을 며칠 동안 막으면서 섬서 무림의 원군을 검각에 잡아두었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철수를 결정했다면....
“상황이 변한 것이오. 혈교에게 불리한 쪽으로.”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두 장문인은 그대로 사천에 진입했고, 개방을 통해 소문을 접했다.
태화문이 전복되고, 전선이 무너졌으며, 혈안사군과 혈룡검군이 죽었다는 믿기 힘든 소문이었다.
* * *
전쟁에선 이기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이겼다고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조영옥은 승리를 만끽할 새도 없이 산적한 사안부터 맞닥뜨려야 했다.
전사자와 부상자를 수습하고, 항복한 자들을 구금한 뒤에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간부들을 불렀다.
“여러분의 충정은 잊지 않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합당한 보답을 받으실 겁니다.”
“아, 아닙니다, 공녀님.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조영옥의 부름을 받고 찾아온 간부들은 어정쩡한 자세로 예를 표했다.
안 그래도 지하감옥에서 혹사당했는데, 싸우기까지 했으니 몸이 축날 수밖에.
하지만 그 사실이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이 싸움에서 그들은 들러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공녀님, 감히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하세요.”
“본문은 앞으로 어찌 되는 겁니까?”
대공자 일파를 제거하고 혈교를 몰아내긴 했지만 피해가 극심했다.
수습한다고 해도 예전같은 위상을 되찾을 수 있겠는가.
“여러분도 알다시피 당금 강호는 난세입니다.”
조영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쭉 둘러보았다.
말로는 충성을 바친다고 했으나, 이들은 과연 태화문이 왕년의 성세를 되찾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겠지.’
태화문을 되찾는 과정에서 강엽 일행의 도움을 받았다. 사실 그가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은 대공자가 그랬듯 조영옥도 강엽에게 휘둘리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내전에서 이겼다고 끝이 아닙니다. 혈교가 건재한 이상 언제든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그, 그렇지요. 하지만 큰 피해를 봤으니 그들 역시 한동안은 경거망동하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아뇨. 그들은 다시 공격할 겁니다.”
이젠 조영옥도 알고 있었다.
‘혈마가 부활한다.’
예전이었다면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어찌 믿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강엽에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사를 들었다.
사대마교의 관계, 혈마를 부활시키기 위한 혈교의 대계, 그리고 진조의 정체까지.
혈마와 그 추종자들이 부활하는 날엔 지금까지의 전쟁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겁난이 일어날 터.
온 천하가 피와 비명에 잠기리라.
“기실 여러분을 모은 이유는 뜻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자고로 오월동주라고 했지요.”
적과의 동침을 입에 담는다.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사이가 좋지 않은 세력과도 손을 맞잡아야 하리라.
“사천삼패에 동맹 의사를 타진할 생각입니다.”
“...!”
백도 정파와 흑도 사파의 사이가 좋을 리 만무.
불구대천처럼 증오하진 않아도, 소 닭 보듯 백안시하는 관계였다.
“고, 공녀님! 하지만 그건...!”
“제 말 끝나지 않았습니다.”
싸늘한 눈빛으로 항변을 묵살한 조영옥이 간부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췄다. 시선이 얽힌 이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경청하는 태도를 취했다.
“또한 하오문, 나아가 낭인전과도 협력할 겁니다. 필요하면 무림맹과도 손을 잡을 거고요.”
“....”
평생 흑도에 몸담으며 살았던 이들이다. 무림맹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 그러나 급변하는 정세가 백도와 흑도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혹시 질문 있습니까?”
“...귀영은 저희 편입니까?”
자칫 조영옥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다. 문파의 안위를 외인에게 의존하는 듯한 질문이 아닌가?
그러나 조영옥은 차분히 대답했다.
“그는 낭인입니다. 의뢰를 받으면 그 일에 매달리니 언제나 저희 편이 될 순 없지요.”
“그럼 혈교가 그를 고용하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자세한 사정을 밝힐 순 없지만 그는 혈교의 대적이니까요.”
“으음....”
당연히 그 말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하나 그 이상의 질문을 하면 심기를 건드리는 걸 넘어 역정을 살 수도 있는 일.
태화문의 간부들은 눈치껏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공녀님을 전적으로 지지하겠습니다.”
* * *
“후우....”
자리에 앉은 조영옥이 어깨를 주물렀다.
“끄응, 어째 일을 해도 줄어들지가 않네.”
하루에 몇 건씩 일을 처리하는데도 일이 줄기는커녕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지금도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처럼 쌓인 마당.
그때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님, 접니다.”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을 연 조영빈이 허리를 숙였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피곤하시면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공적인 일이라면 지금 말하렴.”
“...소한방주가 전언을 부탁했습니다.”
대공자에게 충성했던 흑도 방파의 방주. 태화문에 온 그녀의 앞길을 막은 장본인이었다.
대공자가 죽고 혈교가 축출당한 뒤, 그는 조영옥의 일파가 그랬듯 지하감옥에 갇혀 있었다.
“전언이라... 뭐지? 주제 넘은 말만 아니면 좋겠는데.”
“충성을 하겠다고 합니다. 다만 조건이 붙었는데, 그게....”
“뜸들이지 말고 말해.”
“대공자의 장례를 치러달라고 합니다.”
흑도와 정사를 막론하고 사문의 배신자는 그 이전에 어떤 지위에 있었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
기사멸조의 죄를 지었다면 목을 치거나, 단전을 폐하고 사지근맥을 잘라서 내쫓는 게 당연지사.
비록 대공자가 죽었다 해도 배신자라고 낙인 찍은 이상 죄를 사할 수는 없었다.
“소한방주 개인의 요청인가? 아니면 전부?”
“몇몇 방주들이 뜻을 모았습니다.”
“흠....”
“어떻게 합니까?”
“명예로운 퇴진을 보장해줄 테니 은퇴하라고 해. 또 당분간 그들의 방파는 우리측 인사가 관리한다.”
그조차 못한다면 죽음으로 다스릴 뿐이다.
“예, 그리고....”
“또 할 말이 있니?”
한동안 입을 달싹였던 조영빈은 누이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어렵사리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누님, 강 무사를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오누이 간이라 해도 아랫사람인 이상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그러나 조영빈은 결심했다.
“제가 누님을 모신 세월이 십 년입니다. 누님의 생각을 전부 알진 못해도, 강 무사를 보는 눈빛이 전과 달라졌다는 건 압니다.”
“빈아야.”
조영옥은 동생을 나무라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타이를 뿐.
“그 사람은 정인이 있어. 나보고 두 사람을 갈라놓는 쌍년이 되라고?”
“저도 강 무사와 백 소저의 사이를 압니다. 하지만 누님이라면....”
“그만. 못 들은 걸로 하겠다.”
그 이상 말하면 진노를 사리라.
조영빈이 머리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괜한 말로 누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소제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조영빈의 기척이 멀어지자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다 문득 입술을 매만지며 작게 투덜거렸다.
“처음이었는데....”
강엽에게 말하진 않았으나, 그녀는 요선에게 빙의당했을 적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사는 아니었다지만 사내와 입을 맞췄던 감각은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에휴, 기분도 싱숭생숭한데 술이나 마실까....”
미녀의 눈썹처럼 가느다란 신월이 휘영청 뜬 야심한 밤.
창문 사이로 내리쬐는 은은한 빛 아래에서, 가인은 쓰디쓴 술과 함께 연심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