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수습 (4)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인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파묻은 강엽이 이마를 짓눌렀다.
‘저질렀다....’
취임식에 연회가 빠질 순 없는 법.
워낙 많은 피가 흐른 만큼 성대하게 열 순 없었지만, 조영옥은 일행을 위해 술자리를 열었다.
일행은 기꺼이 참석했다. 연회가 끝나면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완안극과 신유 때문에 수라장이 됐었지.’
완안극은 술 마시면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는데, 신유가 차를 마시는 척 몰래 술병을 챙겼던 것이다.
그러다 걸려서 달밤의 추격전이 벌어졌고.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지만, 덕분에 바깥 세상의 혼란을 잠시나마 잊고 웃고 떠들 수 있었다.
거기까진 참 좋았는데....
“잘 잤어요?”
옆에 누운 조영옥이 말갛게 웃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한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
“으, 골이야. 어제 술을 너무 마셨나 봐.”
그리고 옆에선 백서희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면서 냉수부터 찾고 있었는데, 그녀의 행색도 조영옥과 다를 게 없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어요. 도중에 다른 사람이 추가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그래, 몰랐지. 강엽도 몰랐다.
“흥, 나 몰래 둘이 시시덕거리는 꼴을 볼 것 같아요?”
“어머, 동생도 참.”
어제는 백서희가 언니하기로 했으면서 어느 샌가 조영옥이 언니 행세를 하고 있었다.
백서희가 미간을 와락 찌푸리긴 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술김에 나이 많은 사람을 동생 취급하는 건 불편하다고 했는데, 그 바람에 관계가 살짝 꼬이고 말았다.
“크흠, 언니로 모시기로 했지만 그래도 내가 첫 번째예요.”
그러면서 강엽을 흘깃 바라보며 편을 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올라가자 강엽은 헛기침을 했다.
“서열상으로는 그렇지.”
“...뭐, 약속한 거니까요.”
조영옥도 어깨를 으쓱였다. 아쉬운 감정이 잠깐 스치긴 했지만 그건 금세 사라졌다.
“참, 저는 다른 여인들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너무 격 떨어지는 여자만 아니라면요.”
“푸훕-!”
마시던 냉수를 시원하게 뿜은 백서희가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 진심이에요?”
“둘을 들였는데 셋은 안 될 게 뭐야?”
“정도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부인만 세 명을 들였는데? 첩실까지 합치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어.”
“...강엽, 넌 저러지 않을 거지?”
“으음, 그야....”
“대답이 늦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 모습에 강엽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당연히 아니지.”
“...라고 몇 달 전에 자기 인생에 여자는 나밖에 없다고 속삭였던 남자가 있습니다.”
결국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올린 강엽이었다.
뾰로통한 얼굴로 이불 안에 쏙 들어온 백서희가 목을 끌어안자 조영옥도 강엽의 가슴에 몸을 밀착시켰다.
“아니, 언니는 또 왜요?”
“동생과 달리 나는 계속 옆에 못 있잖아. 이번 기회에 많이 비축해둬야지.”
“내가 무슨 식량이냐....”
강엽의 항변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 * *
세 사람이 나온 것은 오후가 지나서였다.
태화문 바깥의 한갓진 숲속에 도착하자 떠날 채비를 마친 일행과 홍가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뭘 하다 이렇게 늦게 와?”
하후진의 볼멘소리에 완안극이 호통을 쳤다.
“어허, 주인님은 너랑 달리 할 일이 많은 분이시다.”
“그러는 영감님도 저놈 자식 언제 오나 오매불망 기다렸잖수.”
“난 인내샘을 갖고 기다렸느니라.”
어쨌든 일행이 기다린 건 사실.
강엽은 사과했다.
“미안하다. 일이 좀 생겨서.”
“...반지를 하셨네요?”
홍가려가 날카로운 눈썰미를 발했다.
조영옥의 손가락에 걸린 은가락지.
여인이 장신구를 차는 거야 여상한 일이지만, 평상시의 조영옥은 반지 따위 하지 않았다.
조영옥이 반지를 만지면서 미소 지었다.
“상공이 준 선물이에요.”
“...네?”
그 말에 모두가 벙쪄서 강엽을 바라보는데, 정작 당사자는 뒷짐을 진 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럼 어제 술자리에서 사라진 게... 어라? 근데 어제는 백 소저도 사라졌...?”
“거기까지 하지?”
백서희가 웃는 얼굴로 말하는데, 어째 화사한 미소와는 달리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살기가 쏟아진다.
하후진이 얼른 헛기침을 했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저도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완안극까지 모르쇠로 나오자 일행의 만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홍가려만 왠지 샐쭉해진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강 무사, 사태가 급한 건 아시죠?”
“알지.”
조영옥에게 준 가락지는 평범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지난날 모산혈조의 거처에서 발견한 법구 중 하나.
그녀에게 법구를 쓰는 방법을 알려주느라 시간을 지체했던 것이다.
일행을 두루 살핀 조영옥이 두 손을 정중하게 모은 채, 그러나 일문의 문주로서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그간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태화문의 문주로서 여러분의 헌신과 노고는 잊지 않을 겁니다.”
“쩝, 우리가 한 건 별로 없는데....”
하후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강엽은 몰라도 그와 전강은 신유를 상대한 게 전부였다.
“천만에요.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본문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거예요.”
“뭐, 난 낭인이니 돈이면 충분하우.”
“물론이죠. 입 떡 벌어지게 챙겨드릴게요.”
조영옥이 늠름하게 웃으면서 약속할 때 전강이 먼저 나섰다.
“난 성도로 가볼 생각이오. 아쉽지만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구려.”
“고생했습니다, 전강.”
“더 이상 도와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오. 그럼....”
그렇게 전강이 바람을 나부끼며 작은 점이 되자 그 모습을 보던 신유도 이별을 고했다.
“나도 가봐야겠네. 사천삼패가 혈풍신군을 잡는다지? 늦지 않았다면 한손 보태야겠어.”
천하팔존인 신유가 가세한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
강엽을 위시로 한 일행의 인사를 받은 그는 앞서 전강이 간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멀어졌다.
강호 제일의 보신경을 지닌 절대고수답게 흙먼지도 일으키지 않고 표홀히 날아간다.
눈 깜빡할 새에 기척의 범위 너머로 사라진 경공에 강엽도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경공만 따지면 나보다 낫군.’
싸운다면 강엽이 완승한다.
그러나 신유가 작정하고 도망친다면 암신이나 술법을 병행해도 따라잡기는 요원하리라.
“저런 영감님이 혈교엔 어떻게 잡혔나 모르겠네. 그나저나 너 저번에 내가 한 말 기억나냐?”
“무슨 말?”
삐뚜름히 고개를 기울인 강엽은 하후진이 전강이 사라진 곳을 곁눈질하자마자 깨달았다.
몇 달 전 불권에게 들었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
생각해보면 전강을 찾았던 이유도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으슥한 곳에 오자 하후진이 목소리를 잔뜩 낮춰 말했다.
“전강은 모른다고 했는데, 짐작이 안 되는 건 또 아닌 모양이더라. 눈빛이 달라지더라고.”
“눈빛이라....”
전강은 소림의 암검인 외소림 출신.
만약 불권이 우려하는 소림의 미래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음지의 비사와 깊이 얽혀있다면....
‘...외소림과 연관된 건가?’
외소림이 한창 활동했던 삼십 년 전은 혈교가 각지에서 크고 작은 혈겁을 일으켰던 시기.
강엽이 조사한 바로는 그때도 불권은 건재했지만, 결코 산문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속세와 연을 끊은 것마냥 두문불출하면서 불법 수련에 공을 들였다고 했던가.
한때 흑룡교 토벌의 선봉장으로서 광승 소리를 들었던 불권이, 암검인 외소림에게만 맡겨두고 그 자신은 일절 참견하지 않은 것은 기이했다.
설사 본인은 사정이 있다고 해도, 사대금강이나 십팔나한 등 소림을 대표하는 아라한들을 내보내지 않은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 사이에 중대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전강과 야차마곤처럼 외소림의 생존자들이 살아남아서 강호를 활보하고 있다면.
그리고 불권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다면.
불권이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 일을 걱정하는 것이 마냥 헛된 기우만은 아닐 터.
“혹시 모르니 좀 더 캐내볼까?”
“아서라. 전강은 입이 무거우니 대답을 못 들을 거야. 그가 뭔가 알고 있다 해도 그게 정답이란 보장도 없고.”
“하긴....”
“그리고 이거 받아라.”
“엉? 이건 귀걸이 아녀?”
“조 문주에게 준 것과 같은 거다.”
원래는 단목정에게 주려고 했지만, 남의 여자에게 장신구를 선물하는 것도 뭔가 께름칙했다.
“특정한 방식으로 진기를 불어넣으면 나와 연통할 수 있어. 중간에 방해만 받지 않으면 돼.”
“뭐? 그런 물건이 있단 말야?”
“영구적인 건 아니야.”
정해진 횟수를 다 채우면 새로이 술법을 걸어줘야 하기에 함부로 남발할 수는 없다.
“조 문주에게도 줬지만,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연통하라고 주는 거다. 적어도 사람이나 전서구 쓰는 것보단 훨씬 빠르니까.”
“신기하구만. 이것도 술법이냐?”
쓰는 법을 전해들은 하후진이 품 안에 귀걸이를 갈무리했다.
“고맙다. 웬만하면 안 쓰는 게 가장 좋겠지만.”
“금사하 데려가고.”
일행과 함께하기엔 금사하의 무위가 낮다. 그녀는 숙정방에서 더욱 수련에 힘써야 했다.
그렇게 하후진과 금사하까지 사라지자 남은 것은 홍가려뿐이었다.
“그럼 저도 가볼게요. 낭왕 어르신을 잘 부탁....”
“잠깐.”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은 강엽이, 돌연 시퍼런 안광을 줄줄 내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절세고수의 기감으로도 잡기 힘든 은밀한 기척.
만약 군중들로 꽉 찬 저잣거리였다면 그 압도적인 기척으로 인해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민가에서 먼 숲이었고, 일행을 제외하면 유난을 떠는 기척은 없다.
적어도 방금까지는 그랬다.
“나와라.”
“강 무사?”
홍가려가 멈칫 굳어졌다.
잠시 그녀를 돌아본 강엽의 오른쪽 눈동자가 선명한 푸른빛 광채를 토해냈던 것.
자연히 심상치 않은 낌새를 감지한 일행 역시 강엽의 방위에 맞춰 자리를 잡고 경계심을 돋웠다.
짹-! 짹-! 째액-!
우거진 녹음 사이로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가락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오른쪽의 정안이 타오르듯이 거세지는 것과 별개로, 허공에선 물결치듯 투명한 동심원이 일었다.
그 안에서 낭패감에 빠진 탄식이 일었다.
“허어, 사하수미궁진(駛河須彌宮陣)을 이토록 쉽게 찾다니....”
“진법 자체는 대단하지만, 쓰는 방식이 잘못됐군. 진축을 감괘와 간괘의 사이에서 삼 푼 비스듬히 놨어야지. 그럼 더 완벽했을 거다.”
“.......”
진법 안의 인영은 입을 다물었지만, 강엽은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만한 진법을 펼칠 수 있는 자가 그것도 몰라서 실수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법구의 힘을 빌렸겠지?”
아직 얼굴을 보이지 않는 인영의 어깨가 움찔 흔들리는 것을 본 강엽이 입가를 굳혔다.
“공격을 염두에 둔 진법은 아닌 것 같군. 아마 내가 이쪽에 ‘입도공월’을 설치해둔 걸 알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떳떳이 모습을 드러낼 신분은 아니겠지. 그래서 일행이 흩어지기를 기다렸나?”
만약 이들이 설치한 진법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칠 의도가 있었다면 문답무용으로 살수를 썼을 터.
강엽은 이들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당신들이 왔다는 말은 들었다, 일월신교.”
* * *
강엽의 말에도 일행은 놀라지 않았다.
올 게 왔다는 듯이, 혹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인영들을 향해 병장기를 겨누었다.
“.......”
홍가려를 제하면 일행 전원이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른 절세고수들.
하지만 물결치는 동심원 사이로 흘러나온 여성의 목소리에 두려움 따윈 배어 있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강 무사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 신분이 드러나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어서요. 원래는 하오문의 아가씨까지 가면 나오려고 했답니다.”
진법을 뚫고 나온 중년의 면사 여인과 홍안의 노인.
그들 뒤로도 무장한 무인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장내에 삼엄한 기세를 흩뿌렸다.
그들을 알아본 홍가려가 침음했다.
“당신들은...!”
“우린 구면이지요?”
“역시 강 무사에게 볼일이 있었군요.”
“네. 다만 염왕의 제자와 외소림의 생존자, 천하팔존 앞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건 위험한 일. 해서 부득이하게 은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유는 그렇다 치고 하후진과 전강의 사문에 대해서도 줄줄이 꿰뚫는 듯한 언행.
바람 사이로 언뜻 드러난 이마의 별 문양을 본 강엽의 미간에 일순간 골이 파였다.
‘이건....’
두근!
두 손등에 새겨진 일월의 문신.
일월성신의 영성을 상징하는 문양이, 면사 여인의 이마에 새겨진 문양과 공명하듯 맥동한다.
여인 역시 알아챘는지 면사 위쪽으로 드러난 눈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역시... 예지가 맞았군요.”
“이봐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참다 못한 백서희가 따지듯 묻자 여인의 옆에 시립한 홍안의 노인이 경직된 얼굴로 고함쳤다.
“예를 갖추시게! 이분은....”
“수성좌.”
타이르듯 부르는 말에 일행의 안색이 변했다.
고강한 초고수라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일월신교를 대표하는 칠성좌였을 줄이야?
여인이 옅은 쓴웃음을 흘렸다.
“싸우고자 찾아온 건 아닙니다. 다만 강 무사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어 결례를 무릅썼습니다.”
면사 위로 언뜻 드러난 얼굴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못 미더우시겠지만 제발 들어주시길. 이대로 가시면 강 무사님은 대흉을 맞닥뜨리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