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08화 (303/450)
  • 60화. 태화 (2)

    조영옥의 호위대주인 조영빈.

    만난 적은 두어 번밖에 없지만, 강엽은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호위가 호위대상을 떠나서 단독 행동하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

    강엽은 그의 몸에서 나는 약향으로 저간의 사정을 추측할 수 있었다.

    [조영옥이 근처에 있나?]

    별안간 전음을 들은 조영빈은 멈칫했지만, 이내 그 말이 맞다는 듯이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누님께서는....]

    [감초, 계소엽, 백모근, 패모, 포황, 황기. 그 외에도 이것저것 들은 것 같고. 낙맥이 상했군.]

    [...!]

    냄새를 구분할 줄 알고 약간의 의술적 식견만 뒷받침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변변찮은 재주.

    그러나 조영빈은 단숨에 뒷사정을 통찰하는 강엽의 직관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고 보니 천금상단주가 조영옥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했지.]

    [.......]

    비록 처지가 곤궁하더라도 적진 한복판에 숨는 것보다는 외가에 의탁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 정도 거동도 못할 만큼 내상이 심한가 싶었지만, 강엽은 세세히 따지는 대신 다짜고짜 말했다.

    “안내해.”

    그 말에 놀란 건 전강이었다.

    “같이 가는 게 아니었소?”

    “미안합니다. 장소만 알려주면 찾아가죠.”

    “...음, 알겠소.”

    지금은 조영옥을 만나는 게 더 시급하다. 전강도 분위기를 읽고 나중을 기약했다.

    그때 하후진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정 뭣하면 내가 따라가겠수다.”

    “음?”

    “챙길 사람들도 많고, 부상자들도 꽤 되는 것 같은데 혼자서 다 지킬 수 있겠수?”

    중경의 무림인들은 딱 봐도 학대받은 흔적이 역력했고, 낭인들 역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아무리 절세고수라도 이 많은 사람들을 건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과부적이란 말이 괜히 있겠나. 추격이 붙는다면 전강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도 나올 것이다.

    “하후 무사 같은 고수가 따라와준다면 천군만마와 같을 거요. 하지만 강 무사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하후진은 전강에게 볼일이 있어 왔을 뿐, 조영옥을 구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었다.

    강엽은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낸 다음 양피지에 묻혀 건네주었다.

    “갖고 있어. 그럼 찾아갈 수 있으니까.”

    “그려. 나중에 보자구.”

    하후진과 주먹을 부딪친 강엽은 전강과도 눈인사를 한 뒤에야 조영빈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지?”

    “...이쪽입니다.”

    * * *

    조영빈이 안내한 곳은 강엽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수많은 배들이 하역을 하는 강변의 포구. 큼지막한 석재 건물들이 어지럽게 난립한 창고지대였다.

    복잡한 길을 몇 번이나 돌아가는 동안 강엽과 백서희는 살갗을 찌르는 시선을 감지했다.

    백서희가 조영빈에게 물었다.

    “저거 다 당신네 사람인가요?”

    “그렇습니다. 적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서 경계를....”

    “너무 노골적이네. 시선에 민감한 사람은 금방 알아차릴 걸요. 딱 봐도 전문 호위는 아니네요.”

    강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백서희의 말에 동의했다. 만약 이게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다면 박한 평가를 내려주었을 것이다.

    ‘그만큼 신경이 곤두선 것도 있겠지만... 기련추마가 마음 먹고 뒤졌다면 발각됐겠군.’

    다만 중경은 광활한 대도시였고, 이쪽의 창고지대는 중경에서도 외진 구역에 있었다. 처형식을 벌인 저잣거리에서 남동쪽으로 강 건너 삼십 리 가량 떨어진 곳.

    평범한 창고 앞에 멈춰선 조영빈이 철문을 세 번 두드리자 작은 사각칸이 끼익 열렸다.

    “귀영과 그 일행을 모셔왔다. 열어.”

    사각칸 너머에 있던 눈동자가 잠시 강엽과 백서희를 훑더니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로 귀영인가?”

    “그렇다니까. 설마 내가 엉뚱한 사람을 데려왔겠나?”

    한소리 들은 눈동자가 미간을 구겼다. 뭐라 꿍시렁거린 그가 사각칸을 쾅 닫고는 철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음을 알려주듯 벌겋게 녹이 슨 철문은 삐거덕삐거덕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조영빈을 필두로 일행이 들어가는데, 철문을 열어준 거한이 조영빈의 빈손을 힐끗거렸다.

    “밥은 안 사왔소?”

    “못 샀다. 난동이 벌어지는 바람에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외까?”

    “나중에 말해주지. 그보다 누님은?”

    “운기하고 계시오.”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시지 않소.”

    거한의 말에 조영빈은 입매를 구겼지만, 강엽과 백서희를 의식한 듯 곧바로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누님께서도 조금 있으면 오실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두 사람은 그러려니 했다. 조영옥의 몸이 안 좋다는 것은 창고 가득 풍기는 약향만 맡아도 확실했으니까.

    조영빈이 어디론가 간 사이 두 사람을 제법 큰 방으로 안내한 거한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내왔다. 싸구려 엽차였지만 쫓기는 처지에선 이조차 감지덕지였다.

    “더 좋은 차를 드려야 하는데 미안하군. 우리가 곤궁해서 가진 게 없소이다. 지금은 이걸로 참아주시오.”

    여상히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이 조금씩 엽차를 홀짝이자 거한의 눈이 기광을 발했다.

    하지만 그건 찰나에 불과했고, 이내 거한은 쇳주전자를 옆에 둔 채 몸을 돌렸다. 그가 나갈 때쯤 조영빈이 교대하듯 방으로 들어왔다.

    강엽은 한결 진해진 약향을 맡았다.

    “탕약을 달이고 왔나 보군.”

    “...그렇습니다.”

    “내상이 그렇게 심한가?”

    “그게....”

    조영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강엽이 저간의 사정을 꿰뚫고 있어도 호위 입장에서 상전의 약점을 선뜻 말하는 것은 저항감이 일었던 것.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나중에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되지.”

    설령 답을 듣지 못해도 초음을 쓰면 얼마나 중한 내상을 입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쓴웃음을 삼킨 조영빈은 목이 타는 듯 탁자에 놓인 쇳주전자로 손을 뻗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목 좀 축여도 되겠습니까? 아까부터 물 한 모금 못 마셨더니 갈증이 나서....”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예?”

    조영빈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물었지만,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서희가 대신 대답했던 것이다.

    “산공독이 들어있거든요.”

    “...!”

    그 말에 흠칫 놀란 조영빈은 곧 두 사람이 독이 든 엽차를 잘만 마시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독이 들었다면서 왜 드시는 겁니까?”

    “싸구려니까.”

    산공독이라고 무조건 약효가 통하는 것은 아니다.

    절세고수의 진기는 한낱 싸구려 산공독 따위에 흩어지기에는 지나치게 장중하고 단단하다.

    ‘품질이 좋았어도 소용없었겠지만.’

    재생력이 있는 강엽은 말할 것도 없고, 백서희도 용혈을 각성하면서 어지간한 독은 듣지 않았다.

    굳이 공력을 끌어올리지 않아도 자연히 독이 분해되는 천독불침(千毒不侵)의 체질이 된 덕분.

    “오는군.”

    멀리서 우르르 몰려오는 기척.

    강엽이 찻잔을 내려놓고 다리를 꼬고 앉자 나무로 만든 문이 쾅 부서지면서 서슬 퍼런 살기가 쏟아졌다.

    차를 대접했던 거한은 물론, 창고 밖에서 사주를 경계했던 무인들까지 들어와서 반원꼴로 일행을 둘러싸자 조영빈이 격노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긴.”

    구레나룻을 씰룩거린 거한이 대답했다.

    “더 늦기 전에 배를 갈아타려는 거지.”

    “...뭐?”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수장될 뿐. 우린 그 사실을 이해하고 먼저 행동하려는 거다.”

    “이놈들-!”

    비로소 거한이 말하는 바를 알아들은 조영빈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누님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걱정 마라. 죽이지는 않으니까.”

    피식 웃은 거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한때 모셨던 상전인데, 무턱대고 죽이면 찝찝하지. 그녀의 신병은 대공자, 아니 신임 문주에게 넘길 거다. 그럼 우리도 자리를 보장받을 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느닷없이 말이 잘린 거한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강엽을 노려봤다.

    “...뭐냐?”

    “조영옥은 왜 천금상단에 가지 않았지?”

    조영빈을 만났을 때부터 떠올린 의문. 원래는 조영옥에게 물으려고 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들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적에게 들킬지 몰라서 노심초사하는 것보단 눈칫밥 먹더라도 외가에 가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아니면 그조차 못할 정도로 내상이 심한가?”

    “뭐, 어차피 죽을 테니 그냥 말해주마.”

    잠시 조영빈을 힐끔거린 거한이 사납게 웃었다.

    “천금상단의 장원은 성도에 있다. 근데 혈교의 교왕인 혈풍신군(血風迅君)이 무차별로 공격하는 바람에 생지옥이 됐지. 천금상단은 이공녀를 보호해주지 못해.”

    “사실이냐?”

    조영빈에게 눈길을 돌리자 그가 벌레 씹은 듯한 표정으로 목구멍을 쥐어짜냈다.

    “...사실입니다.”

    “천금상단의 장원이 무너지고 상단주는 식솔들만 데리고 도망쳤다고 소문났지.”

    본래 조영옥은 몸만 추스른 뒤 천금상단으로 가려고 했지만, 성도에서 전해진 소식을 듣고 중경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

    “뭐, 천금상단도 허망하게 무너지진 않겠지만... 이공녀는 확실하게 끝났지. 더 이상 비빌 언덕이 없는데 우리가 뭘 믿고 그녀에게 걸겠나? 가뜩이나 제 오라비에게 당해서 오늘내일하는 판국인데.”

    조영옥의 측근들이라면 그녀를 배신하지 않겠지만, 이들은 그녀를 지지하던 간부의 부하들일 뿐.

    간부가 전사하고, 조영옥마저 백척간두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작금의 상황에서 편을 바꾸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산공독을 처먹었으니 내공도 없을 거다. 천하의 귀영을 우리 손으로 죽일 수 있다니 정말....”

    “아, 그만 좀 씨부려라. 언제까지 들어줘야 해? 빨리 저 새끼들 죽이고 여기 뜨자고.”

    거한의 수다가 불만스러운지 뺨에 십자 흉터가 난 사내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백서희를 향해선 얇은 입매를 음흉하게 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당혹스러워하길 바라는 그들의 기대와 달리 당사자들은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고 앉을 뿐이었다.

    백서희가 코웃음을 쳤다.

    “이제 보니 우리가 손댈 필요도 없었네.”

    “뭐...?”

    태화문의 배신자들이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저편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이 들려왔다.

    -사, 살려... 끄아아아악!

    콰직! 푸화악!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절규가 끊이지 않자 배신자들의 표정에 동요가 실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적나라하게 담긴 비명. 간혹 금속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것은 더 큰 비명 속에 묻혔다.

    그리고 비명은 점점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시발, 나도 알아!”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거한이 가래침을 퉤 뱉으며 동료들을 선동했다.

    “작전 변경이다! 놈들을 인질로 잡아!”

    “누가 당할 줄 알고!”

    검을 든 조영빈이 강엽과 백서희의 앞을 지켰다. 산공독이 먹히지 않는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아직 그 말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배신자들이 각자의 날붙이를 휘두르려고 하는 찰나.

    콰아아아아아앙!

    난데없이 등 뒤에서 닥친 충격에 배신자들은 뭘 어찌할 새도 없이 나뒹굴었다.

    단단한 석재로 만든 벽이 형편없이 깨져나가면서 전면으로 파편이 튀었고, 창졸간에 당한 배신자들은 뼈가 부서지는 고통에 가늘게 신음했다.

    강렬한 풍압에 휘말려 짙게 솟아오른 먼지 사이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지요. 누구도 믿지 말고,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말라고. 처음 들었을 땐 참 비인간적인 말이다 싶었는데....”

    피바다를 딛고 선 당혜. 군청색의 비단에 노란 수실로 무늬를 더한 꽃신이 누군가의 머리를 밟았다.

    “이공녀! 이런 우라질...!”

    콰드드득!

    목뼈가 부러진 십자 흉터의 사내가 켁 소리를 낸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여인의 말이 무심히 이어졌다.

    “가끔은 아버지 말씀이 맞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긴, 평생을 함께한 충신도 배신하는 마당에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네놈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 건 당연한가?”

    “누님!”

    흙먼지 사이로 등장한 흑색 장삼의 여인. 아름다운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으나, 정리되지 않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살벌했다.

    누이의 등장에 반색하면서 외친 조영빈은 곧이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피를 보고 얼어붙었다.

    그러나 정작 조영옥은 아무렇지 않게 피를 닦으며 강엽과 백서희를 향해 살짝 고개 숙일 뿐.

    “두 분께 못난 꼴을 보였네요. 아랫것들의 잘못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직후 대도를 역수로 쥔 그녀가 칼날을 박은 것과 동시에 억눌린 신음이 석실을 가득 메웠다.

    “끄으윽...!”

    “배신은 즉결처분으로 다스리는 법.”

    복부에서부터 머리까지 일직선으로 갈라버리는 끔찍한 참격. 단장(斷腸)의 고통을 온몸으로 맛본 거한은 그렇게 시체조차 온전치 못한 몰골로 절명했다.

    “누님, 몸도 성치 않으신데...!”

    “됐으니 보고나 있으렴.”

    조영빈의 도움을 거절하고 배신자들을 하나하나 저승으로 인도한다.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조영옥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강 무사를 고용하겠어요. 돈은 원하는 대로 드릴 테니 길을 열어주세요.”

    “무엇을 위한 길이오?”

    “태화문의 생존.”

    문주에 대한 욕심이나, 죽은 이들에 대한 복수를 일절 내비치지 않는 담담한 태도. 밤하늘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싸늘한 분노를 토해낸다.

    상중하 삼단전을 합일하여 벽을 뛰어넘은 절세고수의 분노는 그토록 깊고 고요했다.

    “선조들이 일군 방파를 시궁창에 처박은 머저리를 내 손으로 장사 지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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