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태화 (1)
청송객잔.
강엽이 무림에 투신했을 당시 이곳에서 낭인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었던 추억을 갖고 있었다.
한데 그 추억이 송두리째 뜯어나간 것을 본다면 기분이 어떻겠나.
백서희와 하후진 역시 청송객잔과는 인연이 각별했던 만큼 아연해졌다.
“객잔이 사라지다니....”
“뭐지? 불이라도 났나?”
세 사람을 맞이한 것은 잿더미만 남은 폐허였다.
새카맣게 타서 앙상한 뼈대만 남은 식탁과 깨진 식기만이 한때 이곳이 객잔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후진이 악다문 이 사이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떤 씹어먹을 새끼가 감히!”
“우발적인 화재는 아니야.”
주변의 흔적을 살펴본 강엽이 꺼내놓은 진단에 백서희가 아미를 찡그렸다.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거야?”
“객잔은 불을 쓰니 화재가 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야. 하지만 전강이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지.”
설령 전강이 자리를 비웠어도 마찬가지였다.
강엽이 아는 한 청송객잔의 주인인 장경은 그런 어수룩한 실수로 객잔을 홀라당 태워먹을 위인이 아니다.
“게다가 주변의 건물들은 피해가 경미해.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주변에 더 번졌어야 하는데....”
주변의 건물들도 좀 타긴 했지만 대부분 그을린 흔적에 그쳤다. 당장 장사를 하는 데 지장이 없는 수준.
“화마의 규모를 통제하면서 청송객잔만 태운 거다. 다른 곳에 번지려고 하면 일부러 막았어.”
“그게 가능... 아, 가능할 것 같네.”
“으음, 좀 어렵지만 해볼 만할지도?”
백서희와 하후진 모두 납득했다.
급격히 타오른 화마를 한 번에 끄는 건 어렵지만, 공력으로 막을 만든다면 가능할 성싶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면 삼화취정은 이루어야 할 텐데... 그럼 전강이 객잔을 태운 건가?”
“꼭 그렇지는....”
고개를 젓던 강엽이 돌연 말끝을 흐렸다.
골목 너머 대로에서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자들이 죄인처럼 끌려가고 있는 광경이 눈에 띄었던 것.
하나같이 옷이 찢겨지거나 산발이 된 머리 사이로 피딱지가 앉아서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관아가 죄인들을 압송하는 거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끌고 가는 자들의 정체가 문제였다.
“뭔 혈귀 새끼들이 백주에 저리 당당히 걸어가?”
백서희의 중얼거림에 납처럼 안색이 무거워진 하후진이 대답했다.
“...혈귀놈들이 중경을 먹은 것 같은데.”
저잣거리의 군중들이 수군거렸다. 혈교의 고수들이 중경의 문파들을 짓밟았다고 했다.
죽은 고수들의 이름과 멸문한 문파들의 이름이 군중들의 입을 타고 오르내렸다.
“.......”
강엽의 안색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군중들이 언급한 이름 중에 그도 아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석파검 유성홍....’
낭인전에 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에게 가르침을 베풀어주었던 중경 무림의 명숙.
혈교가 쳐들어왔을 때 용감히 싸운 그는 본보기로 목이 잘려 장대 끝에 효수되었다고 한다.
“물럿거라! 앞을 막는 자는 즉참할 것이야!”
선두에서 길을 여는 자가 외치고, 뒤따르는 고수들이 스산한 눈길을 보내자 군중들이 찔끔했다.
혈교의 고수들이 득의양양해하며 가두행진을 해도 누구 하나 막는 사람이 없다.
군중들의 술러임 속에서 처형이라는 말이 들리는 걸 보면, 끌려간 자들은 형장의 이슬이 될 듯싶었다.
“...강엽, 어쩔 거야?”
“석파검에게는 빚을 졌지.”
“빚?”
“그의 제자들이 위험해지면 한 번 도와주기로 했거든. 늦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끌려가는 사람들 중엔 석파검의 제자들도 있었다.
기척을 죽이면서 건물들을 넘나든 세 사람은 곧이어 처형대를 발견하고 몸을 바짝 낮추었다.
“올라가라, 이교의 죄인들!”
“큭...!”
처형대에 끌려간 중경의 무림인들은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이 목에 닿자 해쓱해졌다.
조소를 머금은 혈령교위가 과시하듯 외쳤다.
“친애하는 중경의 주민들이여! 이들은 죄인이다! 감히 본교를 음해한 정파의 위선자들! 그간 본교를 혹세무민하는 사교로 몰았으나, 이들이야말로 진리를 거부하고 그대들을 착취한 죄인들일지니! 이에 본교는 이 죄인들을 일벌백계로 다스려 법도를 세우고자 한다-!”
군중들 곳곳에서 목울대를 꿀꺽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혈령교위가 입꼬리를 당겼다.
“하나 본교는 관대하다! 이제라도 과거를 뉘우치고 본교에 귀의하면 사면할 의향이 있다!”
“...!”
그 말에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고, 처형대에 끌려간 무인들 일부가 부리나케 애걸했다.
“귀, 귀의하겠소! 혈교에 들어갈 테니 살려주시오!”
“나도, 나도 혈교도가 될 테니 제발!”
처형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 중에도 혈교에 들어갈 테니 살려달라는 자들이 속출한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절개도 없는 놈들이! 사부와 사형제들을 죽인 원수놈들에게 목숨을 구걸해? 그러고도 정파냐!”
“닥쳐! 절개는 개뿔이! 우리가 무림맹이냐!? 구파일방이냐고, 이 새끼들아!”
양쪽이 서로 쌍욕을 갈기며 비난하자 처형대는 시끄러워졌다. 군중들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전에 몇 명은 회유한 것 같군.’
그들이 바람잡이가 되어 목숨을 구걸하자 다른 이들까지 덩달아 양심을 외면한 것이리라.
하후진이 뺨을 긁적였다.
“이러면 좀 애매해지는데... 살려달라고 비는 놈들까지 구해야 하나?”
“혈교만 죽이고 알아서 하라고 해야지.”
운남에서 포로들을 구할 때와는 경우가 다르다.
그땐 하오문의 도움을 받았기에 인도할 장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지 않나.
“서희 말대로 혈교만 죽... 음?”
강엽이 돌연 눈을 빛냈다.
군중 속에 섞인 거구의 사내. 거적때기로 얼굴을 가렸지만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전강?’
전강뿐만이 아니다. 청송객잔의 낭인들이 병장기를 숨긴 채 군중들 속에 있었다.
“크하하! 상황이 정리된 것 같군! 본교에 귀의할 자는 살려준다! 죽일 자들은 이쪽으로!”
혈령교위의 외침에 혈교도들이 무림인들을 두 무리로 나누었다. 투항한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절개를 지킨 자들은 안면을 일그러뜨린다.
전강과 낭인들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콰아아앙!
묵직한 경파를 맞고 튕겨나는 혈령교위의 모습.
좌장을 잃은 혈교도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군중들 속에 있던 낭인들이 날붙이를 들고 외쳤다.
“전부 죽여!”
“뒈져라, 이 혈귀 새끼들아아아!”
피 튀기는 살육전이 벌어지자 혼란에 빠진 것은 군중들이었다. 싸움을 피해서 도망친 군중들이 저들끼리 엉키며 밟은 탓에 사고가 속출했다.
“강엽!”
“가라.”
허락을 받은 백서희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하후진도 입맛을 다시며 뚝 떨어졌다.
군중들을 잡기 위해 몸을 내던진 혈교도가 대도를 맞고 멀리 날아가며 좌판을 깔아뭉갰다.
“커억!”
“이제부터 여긴 통행금지다. 알간?”
백서희가 사람들을 구하고, 하후진이 혈교의 추격을 막는 동안 강엽은 전강의 옆에 나타났다.
“...강 무사?”
“간만입니다, 전강.”
일행의 존재감이 워낙 조용했기 때문에 삼화취정의 고수인 전강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소처럼 큰 눈망울을 껌뻑인 전강이 씨익 웃었다.
“무탈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구려.”
“장경은 어디 있습니까?”
“안전한 곳에 있소.”
“자세한 얘기는 뒤에 합시다.”
강엽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함정이었던 것 같으니까.”
“이놈들-!”
사자후처럼 저잣거리를 삼키는 육성. 내공이 약한 이들이 귀에서 피를 흘리며 나뒹굴었다.
“큭큭큭! 잘도 나타났구나, 정파의 떨거지들! 처형식을 하면 기어나오리라 생각했다!”
화려한 비단 장포를 입은 근사한 장년인이었다.
누군가가 비명처럼 외쳤다.
“기련추마(祁連錘魔)!”
천천히 처형대 위에 착지한 기련추마가 군중의 공포를 즐기는 낯짝으로 으쓱거렸다.
“만나서 반갑다. 본좌는 혈교에 귀의하여 중경을 다스릴 권한을 하사받은 기련추... 켁!”
투아아앙!
“.......”
장내에 내려앉은 묵직한 침묵.
혈교도들은 물론, 포박된 무림인들과 그들을 구하러 온 낭인들도 벙찐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부지불식간에 기련추마를 기습해서 날려버린 강엽이 전강을 힐끔거리며 손목 관절을 풀었다.
“저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괜찮겠소? 기련추마는 기련산에서 악명을 떨친 초고수요. 왕년엔 공동파와 종남파의 제자들을 여럿 죽여서 무림공적이 된 전적도 있소.”
“일일이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자는 아니군요.”
강엽이 공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그 기세를 느낀 전강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강엽과 만난 것은 그가 한중의 암시장에 쳐들어가기 직전이 아니었던가.
당시에 삼화취정도 이루지 못한 강엽이 아득한 절대고수가 되어 나타났으니 경악스러울밖에.
하지만 강엽은 전강의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기련추마가 처박힌 건물을 지긋이 응시했다.
공교롭게도 기련추마가 부순 건물이 대장간이었던 탓에 화로가 터지고 시뻘건 쇳물이 흘러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악! 이 육시를 할 놈이!”
“뭐, 그걸로 죽을 리는 없나?”
값비싼 비단옷이 타는 등 낭패감을 드러냈지만, 호신강기로 방비한 몸은 티끝 하나 상하지 않았다.
별호에 추 자가 들어간 고수답게 기련추마는 유성추의 달인이었는데, 그가 휘두르는 유성추의 궤적에 따라 대기가 찢어지며 흙바람이 휘날렸다.
그리고 강엽은 그가 휘두르는 유성추를, 호신강기도 없이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
우드득!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독문병기의 모습에 기련추마가 망연자실하는 찰나.
강엽의 허리춤에서 뽑혀나온 자성검이 한 줄기 빛살이 되어 그의 호신강기를 꿰뚫어버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흉부를 관통한 검을 내려다본 기련추마가 뒤로 넘어갔다.
“심어검... 망할! 재수도 없...!”
욕지거리를 마치지도 못하고 숨이 멎는 최후.
수십 년간 흉명을 떨친 노마두가 허무하리만치 쉽게 당하는 광경에 혈교도들의 사기는 뚝 떨어졌다.
반대로 낭인들과 막 자유를 되찾은 무림인들도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기련추마... 사실 허접했던 건가?”
“아니, 그럴 리가! 그냥 저분이 강한 거지!”
다들 현실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몇 명은 강엽의 정체를 알아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 * *
전강이 헛웃음을 흘렸다.
“여차하면 사람들만 구하고 후퇴하려고 했는데...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구려.”
“귀의한 자들은 어쩔 겁니까?”
강엽과 전강이 난입하기 전에 혈교에 투항하겠다고 목숨을 구걸했던 배신자들.
정작 혈교가 지리렬멸하자 뻘쭘해진 그들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제발 한 번만 봐주시오!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고!”
“시끄럽다! 사문을 배신한 놈들... 퉤!”
순식간에 입장이 바뀌자 배신자들은 후회했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만둬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어찌 탓하겠느냐?”
“사, 사형!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아니. 우리 인연은 여기서 끝났다. 지난 인연을 봐서 살려주겠다만, 다시는 중경에 돌아오지 말거라.”
“...!”
그렇게 배신자들이 몰매를 맞거나 쫓겨나는 중에 대사형이라 불린 청년이 강엽에게 다가왔다.
복잡한 기색을 띤 그가 두 손을 모았다.
“홍성문의 대제자 유가형입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공.”
“석파검 유성홍 대협의 아드님이군.”
“아버님을 아십니까?”
“나 귀영이오.”
“아!”
청년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강엽이 정체를 밝히고 나서야 기억이 났는지 힘없이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작년 입춘 무렵에 뵌 것 같았는데....”
“춘부장의 일은 유감이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겠소.”
“...감사합니다.”
청년이 눈시울을 붉히자 강엽은 쓴웃음을 지었다.
“갈 데는 있소?”
“사문을 재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혈교가 쳐들어오면 무너질 텐데.”
“그건....”
청년은 반박하지 못했다. 강엽의 말마따나 혈교가 돌아온다면 몰살을 면치 못하리라.
그때 전강이 나직이 제안했다.
“우리랑 함께 갑시다.”
“예?”
“우린 하오문의 도움을 받고 있소. 살아남은 백도 정파의 무림인들을 몰래 빼돌리고 있지. 당문의 문주님께서 그렇게 살아남은 무림인들을 한데 모으고 계시오.”
“...그렇군요. 당문주님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복수할 수만 있다면...!”
청년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전의를 다지자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복수를 부르짖었다.
전강이 강엽을 돌아보았다.
“강 무사도 함께 갑시다. 분타주도 그쪽에 있소.”
“알겠....”
대답하던 강엽이 불현듯 말을 줄이자 전강이 의아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나와.”
강엽이 어딘가를 노려보며 말하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힘으로 끌어내야 하나?”
“...조용히 접근하려고 했는데.”
군중 속에 숨어있던 사내.
오랫동안 씻지 못했는지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포권을 쥐었다.
“오랜만입니다, 귀영. 절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조영옥의 호위대주.”
그저 조영옥의 신변을 지키는 아랫사람이 아니라 그녀의 혈육으로서 손발처럼 움직였던 측근.
깊게 침음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영빈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