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06화 (301/450)

59화. 소요 (6)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한밤이었다.

완안극을 구한 일화부터 점창파에서 치른 결전까지, 말하고 보니 참 많은 일을 겪었단 생각이 들었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예컨대 혈음마군과 무당의 관계나 일월신마공에 대한 것은 적당히 넘겼는데도 할 말이 넘쳐나는 저녁.

저녁 식사까지 한 뒤, 강엽과 하후진은 술병만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힘든 싸움을 치른 방도들은 피로감에 쩌들었지만, 두 사람이 지나가자 절도 있게 예를 갖추었다.

“주군과 하후 소협을 뵙습니다!”

두 사람을 향한 눈빛에 신뢰감이 가득하다.

강엽이야 당연하지만, 하후진은 그들이 어려울 때 몇 번이나 도와준 은인이니 그럴 수밖에.

적당히 대꾸하면서 전각 지붕에 오른 두 사람은 별빛이 가득한 밤하늘을 안주 삼아 독한 대곡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크으! 짧은 시간 고생 많이 했더라. 나는 웬종일 수련만 해서 자랑하기도 뭐하더만.”

“삼화취정엔 언제 올랐지?”

“오른 건 보름 좀 더 됐지.”

하후진이 입가에 묻은 술을 닦으면서 이죽거렸다.

“운이 좋았어. 기연도 따랐고. 사부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보다 훨씬 강한 고수랑 매일같이 싸웠거든.”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하고 얻어터졌지만 말이지.

하후진이 그렇게 덧붙이면서 한 모금 마시자 강엽은 순간 멈칫했다.

“남한테 말해줘도 되는 거냐?”

“말하지 말라는 말은 못 들었으니까...?”

고개를 살짝 기울인 하후진이 피식 웃었다.

“뭐, 어디 가서 대놓고 떠들지는 못하겠지만 딱히 숨길 이야기는 아니야. 마침 너한테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것도 있고.”

“뭔데.”

강엽도 하후진의 이야기엔 흥미가 있었다.

하후진이 염왕의 제자라지만 이렇듯 갑작스레 정기신 합일을 이룰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백서희도 향로를 통해 기연을 얻고, 낙일신검을 만난 뒤에야 깨달음을 얻지 않았던가?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하후진이 그동안 겪은 일화를 말하기 시작하자 강엽도 차츰차츰 그의 얘기에 빠져들었다.

“불권을 만났다고? 내가 아는 그 불권?”

“강호에 기인이사가 많아도 불권이란 별호를 쓰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 그 불권이 맞아.”

천하팔존 불권 법공 대사.

과거 염왕과 함께 흑룡교주를 토벌했던 영웅이자, 수십 년간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지켰던 소림 방장.

숭산엔 소림이 있는 만큼 불권을 만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만, 불권이 가르침을 내렸다는 대목에선 강엽도 깜짝 놀랐다.

“처음엔 내기를 했거든? 옷자락이라도 스치면 소환단을 주겠다고 하는데, 암만 상대가 천하팔존이라도 그딴 도발을 들으면 열 받잖냐?”

“그래서 무지성으로 싸웠다?”

“신나게 얻어터졌지.”

상승의 절학을 쓴 것도 아니었다.

불권은 손가락 하나만으로 하후진의 도격을 무위로 돌렸으며, 한 대도 스치지 않고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근육이 뭉개지거나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어찌나 아프던지... 어후,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네.”

아픈 과거를 떠올린 하후진이 부르르 떨자 강엽은 웃음이 나왔다.

“호되게 당했구만.”

“말도 마라. 한동안 개고생했다.”

“그래서 스쳤나?”

옷자락을 스치면 소환단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후진이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하도 처맞더니 감이 오더라고.”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과 발달한 기감이 합쳐져서 천행으로 소맷자락을 스쳤다.

“찢은 것도 아니고 스친 거야. 자존심은 상하는데, 그땐 또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라.”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었다.

본래 외인에게는 영약을 잘 내주지 않지만, 불권은 방장의 권한으로 소환단을 내주었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지.”

-노납의 세 수를 받아보게.

피하든 막든 상관없다.

불권의 세 수를 막기 위해서 하후진은 평생 이런 적이 있나 싶을 만큼 극도로 집중했다.

처음엔 한 수도 당해내지 못했고, 얼마간 시일이 흘렀을 때도 세 수를 받아내기 전에 무릎 꿇었다.

“한 달이 지나서야 세 수를 받아냈지. 그것만으로도 녹초가 됐어.”

공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록 살의는 없었을지언정 고절한 수법을 막기 위해선 필사적으로 심력을 짜내야 했다.

“그때부턴 다섯 수, 일곱 수... 차례대로 늘더라. 종국엔 열 수를 가져가시더군.”

그리고 열 수를 넘겼을 때, 하후진은 대환단을 복용하고 기감이 극대화되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것만으로 삼화취정을 이룬 건 아니야.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어.”

“뭐지?”

“심상절예.”

불권은 심상지경의 고수였다.

하후진은 염왕의 심상절예를 알고 있었지만, 너무 위험한 탓에 정면으로 겪은 적은 없었다.

“사부의 것과는 달랐어. 내가 심상절예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그런 게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대체 어땠길래?”

“그전에 하나 묻겠는데, 넌 광명마교주의 심상절예를 겪어봤다면서? 어땠냐?”

“상상을 초월했지.”

진심이었다. 심상지경에 오른 지금도 광명마교주의 심상절예를 정면에서 받아낼 자신은 없었으니까.

하후진이 입을 쩝 다셨다.

“나한테는 불권의 심상절예가 그랬어. 뭐라고 설명하진 못하겠는데... 대적할 엄두가 안 나더라.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이 된 기분이더군.”

“부처님 손바닥이라.”

하후진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것만 듣고도 강엽은 대충 불권의 심상절예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하나만 묻지. 불권의 심상절예를 접한 순간 온몸이 찢겨나갈 것 같던가?”

“그보다는 절로 숙이게 되더라.”

“숙여?”

“뭐랄까, 두렵다기보다는 위대한 존재를 본 것 같았어. 한없이 웅장하면서도 거대한... 엎드려 절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

“과연.”

강엽이 눈을 빛냈다.

‘불권의 심상절예는 살상용이 아니다.’

내면의 심상을 반영하는 심상절예가 필살의 절초로 구현되는 것은, 본인의 무공관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설사 자기 수양을 위해 무공을 익힌들 내면에 무공으로 적을 죽인다는 인식이 있다면, 심상절예는 반드시 적을 죽이는 형태로 구현된다.

불권의 심상절예가 그렇지 않은 것은 무공으로 타인을 살생할 마음이 정말 한 자락도 없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좀 이상하긴 한데....’

강엽이 알기로 불권은 정마대전에서 수많은 마인들의 골통을 깨부순 무승이었다. 한창 때는 마인들도 광승(狂僧)이라고 저주하면서 치를 떨었다고 했던가.

한데 그런 사람의 심상에 살심이 터럭만큼도 없다니.

‘설마 열반의 깨달음을 얻었나?’

머릿속에 의문이 싹텄지만, 이건 불권을 만나보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후진이 쓴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쯤 되니 궁금해지더라고. 아무리 우리 사부와 친분이 있어도 그렇게까지 해줄 의리는 없잖냐?”

소환단은 그렇다 쳐도 대환단은 방장의 제자인 사대금강(四大金剛)도 복용하기 힘든 영약.

그걸 내기에서 이겼다는 이유만으로 덜컥 주는 게 사리에 맞나 싶었지만, 불권은 이렇게 말했다.

-본사에 암운이 드리울 걸세. 자격이 없는 자에게 보물을 주느니, 자네 같은 젊은이에게 넘기는 게 나아.

하후진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헤아리지 못했지만, 불권의 말은 기억에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넌 뭐 짐작되는 거 없냐? 너라면 뭐 알까 싶어서 얘기해준 건데.”

“내가 소림 출신도 아니고 알 리가 있나.”

“음, 어쨌든 그 암운이란 게 나타나면 소림을 도와줄 생각이야.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염왕께선 별 말씀 없으셨나?”

“자기 허물도 못 치우고 후대에게 떠넘기는 밥맛 떨어지는 땡중이라고 욕하던데. 그 양반 그 말만 하고 남해로 떠나서 뒷말은 못 들었다.”

염왕까지 그런 말을 했다면 소림에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은 확실했다.

‘소림의 허물, 그걸 본인이 처리하지 못하고 후대에 떠넘긴다....’

정보가 부족하긴 하지만 대강은 알 것 같다.

강엽이 술병을 내려놓고 말했다.

“단서가 없지는 않군. 마침 잘됐어. 겸사겸사 할 일이 있었는데. 급한 일만 마치면 중경으로 가지.”

“엉? 중경은 왜?”

“청송객잔에 간다.”

청송객잔의 점소이 전강.

외소림 출신의 아라한이라면 불권이 남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 * *

숙정방은 한동안 굉장히 바빴다.

죽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것만으로도 몇날 며칠이 걸렸다.

“방도들의 장례는 무사히 치렀습니다.”

보고를 하는 단목정의 얼굴엔 시름이 가득했다.

방주의 업무에 숙달되어도 죽은 이들의 가족들을 대면하는 일은 좀처럼 쉬워지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본방이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노부모는 죽을 때까지 봉양하고, 아이들은 장성할 때까지 뒷바라지할 겁니다. 만약 자식이나 부모가 없다면 보상금을 넉넉히 지급할 예정입니다.”

“돈은 감당이 되고?”

어제 싸움으로 망가진 장원을 보수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예산이 소요되리라.

하지만 단목정은 단언했다.

“본방의 재정은 튼튼하니까요.”

방탕했던 전대 방주와 달리 그녀는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방의 힘을 키우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 외는 최대한 허리띠를 졸랐다.

“이렇게 해야 방도들의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설령 자신이 죽어도 방파가 식구들을 책임진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방도들이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터.

“다 좋은데 너무 무리하진 말도록. 이젠 홑몸도 아니지 않나?”

“아... 네.”

단목정의 얼굴에 홍조가 들자 강엽이 실소했다.

“납채를 받을 어르신은 있고?”

강엽이 나이가 많았다면 대신 부모 노릇을 했겠지만, 그도 아직 성혼하지 않은 몸이었다.

단목정이 조금 망설이면서 입을 뗐다.

“외가쪽이 있긴 합니다.”

귀한 딸을 흑도 방파의 첩실로 바쳤던 한미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그런 집안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좋아. 그럼 이 문제는 넘어가고....”

이후 몇 가지 당부를 한 강엽은 하후진과 백서희를 대동하고 숙정방을 나섰다.

완안극은 숙정방을 지키기 위해 남겼다.

“으음, 그래도 제가 따라가야....”

“누군가는 남아야지. 시간 있으면 금사하를 가르쳐봐라.”

완안극이 독공을 익히긴 했지만 검술에 조예가 없는 건 아니다. 설산검문의 무공도 지겹도록 겪어본 만큼 금사하를 돌봐줄 수 있을 것이다.

“휴우, 알겠습니다. 주인님의 뜻이라면....”

그러면서 하후진을 슬쩍 째려보는데, 딱 봐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후진이 씨익 웃었다.

“영감님, 나 없는 동안 정매 부탁합니다.”

“...쯧.”

지난 며칠간 무공을 겨뤄본 두 사람이었다.

완안극이 더 강한 만큼 하후진은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완안극도 마냥 얕보지는 못했다.

마의 벽이라 일컫는 삼화취정을 이룬 뒤부터 하후진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성장하고 있었다.

“하아, 아기 두고 떠나려니 발이 안 떨어지네. 나 없는 동안 우리 동동이 태어나면 어쩌지?”

“미친놈아, 작작하고 꺼져라.”

완안극이 정색했다. 회임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아기가 벌써 태어난단 말인가?

정작 하후진은 핀잔이 안 들리는지 단목정의 손을 꼭 잡고 몇 번이나 당부하고 있었다.

“정매, 나 없어도 잘 먹고 잘 쉬어야 해. 알았지?”

“상공, 다른 분들이 보시잖아요.”

“보면 어때? 내 여자 걱정하는 거구만.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리워진다.”

“상공도 참....”

하후진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단목정을 살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로선 고역이었다.

차마 방주의 앞이라서 말은 못하지만 방도들은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강엽과 백서희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벌써 그리워지기는 지랄....’

‘닭살 돋아.’

아무튼 눈물 겨운 이별을 하며 세 사람은 노주를 떠나 중경에 가는 배에 올랐다. 숙정방이 세 사람만을 위해 따로 수배해둔 배편이었다.

“흐흐, 우리 동동이 태어나면 아들일까? 딸일까?”

“알려줘?”

“아들이든 딸이든 다... 엥?”

하후진이 강엽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백서희도 놀라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의원도 모르던데?”

“초음으로.”

“...그게 그런 것도 돼?”

“자, 잠깐! 알아듣게 말해봐! 초음은 뭐야? 그걸로 알 수 있다고!?”

“딸이더군.”

“아하, 딸... 아니, 진짜냐?”

졸지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성별을 전해들은 하후진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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