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소요 (5)
‘아직까진 잘 버티고 있는데....’
기감을 확장해서 전황을 조망한 강엽은 미간을 좁혔다.
대부분이 혈교도였지만, 군데군데 다른 놈들이 끼어 있었다.
소속된 문파의 이름을 무복에 수실로 새긴 자들.
‘태화문.’
운남에서 맹월림이 그랬듯 혈교는 태화문을 협력자로 삼고 사천 전역에 전란을 일으켰다.
혈교의 교도들뿐 아니라 혈라분에 중독된 자들이 곳곳에서 난리를 치고 있다고 했던가.
한중의 암시장이 망해서 엄청난 타격을 받았음에도 그전에 비축해둔 양이 워낙 많았던 만큼 완전히 근절할 순 없었다.
“죽여라! 죄다 부수고 죽여!”
“우워어어어어!”
백 명 남짓한 작은 방파를 공략하기 위해 그보다 몇 배나 많은 숫자가 돌격하고 있었다.
약에 취한 자들은 상전의 명령도 듣지 않고 딴길로 새며 주변의 민가를 덮치고 있었는데, 집안 곳곳에서 비명과 절규가 들려왔다.
거기까지 파악한 강엽은 즉시 움직였다.
촤악!
의지를 받든 혈목이 민가 아래의 지반을 파고든다.
그 집안에 살고 있던 가족은 갑자기 쳐들어온 칩입자들의 횡포에 벌벌 떨고 있었다.
“으흐흐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됐고 입에선 침을 질질 흘리는 침입자들.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사내들이 세간살림을 부수며 들어왔다.
“이,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썩 나가시오!”
집안의 가장이 아내와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몽둥이를 들었지만,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팔은 누가 봐도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침입자들이 가장의 뒤에 있는 여인을 보고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 여자다! 여자!”
“죽여어엇!”
침입자들이 달려들자 가장은 사색이 되면서도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바로 그 찰나.
푸확!
문 바깥에서 튀어나온 붉은 줄기가 침입자들을 꼬챙이처럼 꿰뚫어버리면서 천장에 처박았다.
“끄아아악!”
곧이어 붉은 줄기에 목이 칭칭 감긴 채 집 밖으로 끌려나가는 침입자들의 모습.
끔찍한 참상에 가족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겁에 질려서 서로를 끌어안았는데, 별안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우레같은 전성에 깜짝 놀라는 가족.
가장이 입 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가자 식구들이 기겁했다.
“아, 아빠!”
“여보!”
“괘, 괜찮아. 그냥 보기만 할 거야.”
불안해하는 가족들을 달랜 가장은 창틀로 고개를 내밀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았다.
“맙소사...!”
수없이 많은 붉은 줄기들이 민가를 쳐들어간 침입자들을 끌고 나와서 처형하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악!
곳곳에서 고통스러운 절규가 울려 퍼지고,
우드드득!
침입자들을 허공으로 들어올린 붉은 줄기들이 그들의 목뼈를 인정사정없이 꺾어버린다.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난데없는 교수형이 펼쳐지자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동요했다.
집안의 가장도 쩍 벌린 턱을 다물지 못했다.
“...여, 염라대왕께서 오셨나 보다.”
* * *
“대강 정리했나.”
민가로 침입한 적들을 혈목에게 맡긴 강엽은 농밀한 기파를 풍기는 적들을 맞이했다.
십수 명의 적들이 그를 포위해가고 있었는데, 전원이 중단전을 개방한 교령급의 고수였다.
다들 강엽이 누군지 알아본 듯 경계심을 잔뜩 돋운 낯빛이었다.
“귀영!”
“운남에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강엽 일행에 대해선 혈교도 알고 있었다.
맹월림과의 전쟁이 끝나고 시일이 흘렀으니 모르는 게 이상한 일.
불현듯 교령이 외쳤다.
“쳐라! 귀영은 낮에 잘 싸우지 못한다!”
그동안 강엽의 행보를 조사하면서 낮에는 싸움을 기피했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강엽이 입매를 비틀었다.
“소식이 느린걸. 그게 언젯적 일인데?”
불괴의 능력을 각성하면서 태양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진 몸. 이젠 흑무암쇄진이 없어도 칠 할에 가까운 내공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입도공월 때문에 내공을 소진했다는 건데.’
모산혈조는 자신과 제자들을 이동시키기 위해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신공양으로 바쳤다.
하지만 강엽은 온전히 내공만으로 술법을 발동했기 때문에 적잖은 내공을 소모한 상황.
‘입도공월 때문에 팔 할을 소모했어. 흑무암쇄진을 쓰면 어느 정도 괜찮아지겠지만....’
주변의 적들을 살펴본 강엽이 목뼈를 좌우로 꺾으며 중얼거렸다.
“뭐, 해볼 만은 하겠군.”
“이런 건방진...!”
부지불식간에 위에서 뛰어내린 교령이 도기를 내려치자 또다른 적이 틈새를 파고들어왔다.
그러나 강엽은 도기를 두른 칼날을 맨손으로 쳐내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유도했다.
궤적이 비틀린 도격이 사각을 노린 적의 가슴을 단숨에 관통했다.
“커헉!”
“엇!?”
찔린 놈과 찌른 놈 모두 경악한다.
“아무렴 내가 낮에 약해도 졸자들에게 당할까?”
고작 중단전이나 개방한 놈들에게 당하기엔 강엽이 너무 고강해졌다.
부지불식간에 뽑혀나온 자성검이 공작의 꼬리깃마냥 부챗살을 그리고,
퍽퍽퍽퍽퍽-!
검격의 소나기가 적들의 호신기를 뚫고 심맥을 끊어낸다.
그렇게 일곱 명이 쓰러지자 남은 적들은 새파랗게 질려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젠장, 누가 낮에는 못 싸운다고 한 거냐!”
“잘만 싸우잖아!”
그들은 선동을 한 교령을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이미 강엽의 검에 심장이 꿰뚫린 채 즉사해서 원망을 들어줄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강엽이 손을 까딱이며 그들을 도발했다.
“뭐 하나? 안 들어오고.”
“....”
다들 눈치만 보자 강엽이 코웃음을 치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섬전처럼 몸을 돌려 검을 휘둘렀다.
차아앙!
눈에 핏발을 세운 노인. 대도를 세워 검극을 막아낸 그가 긴 수염을 파르르 떨며 증오스럽게 외쳤다.
“귀영..!”
“날 아나?”
“감히! 네가 노부를 모른다고 한 것이냐! 이 태화문의 혼섬잔도를!”
“모르겠는데?”
강엽이 시큰둥하게 대꾸하면서 대도를 되받아쳤다.
물론 그는 혼섬잔도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과거 노주의 흑도 방파를 이용해 숙정방을 짓밟으려고 했던 태화문의 노고수.
당시 조영옥이 와서 대공자 일파였던 그를 데려가지 않았던가.
“그날의 굴욕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네놈에게 복수할 순간만을 기다렸느니라!”
치를 떨며 외친 혼섬잔도의 이목구비에 진한 혈색이 돌더니, 이내 완전히 적갈색으로 변해버렸다.
안구 역시 시커멓게 물들고, 홍채는 붉어진 외양.
“혈라분이군?”
“그렇다!”
일전에 참패를 당한 노고수는 본래의 무공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혈라분을 복용한 것이다.
그래도 승산은 없었지만, 혼섬잔도는 혼자 싸우는 게 아니었다.
“뭘 하고 있나? 당장 비약을 복용해라!”
“부작용이 심한데....”
고수들이 군말을 내뱉었지만, 강엽이 얼마나 강한지 겪어봤기에 시키는 대로 따랐다.
강엽이 그 꼴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만무.
그러나 혼섬잔도가 시퍼런 도격을 날리면서 끈질기게 훼방을 놓았다.
한없이 흡혈귀에 가까운 육신이 끝없이 가속하면서 강엽을 막다른 구석까지 몰아넣는다.
“죽어라, 귀여...!”
처절하게 외치는 혼섬잔도.
순간 강엽의 신형이 흐릿해지면서 그를 전광석화처럼 통과했다.
“너? 너...?”
눈을 부릅뜬 혼섬잔도의 목에 시뻘건 혈선이 그어지고,
“나참! 기껏 변했는데 죽어버리다니!”
“무능한 영감탱이! 하지만 시간을 벌어줘서 고맙다! 우린 이만 튀지!”
목이 달아난 혼섬잔도를 비웃은 고수들은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강엽은 그들을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올 땐 마음대로여도 갈 땐 아닌데.”
“이런 씨....”
콰직!
격공권을 맞은 고수의 안면이 함몰되고, 높이 뛰어오른 고수가 격공검에 다리가 잘려나간다.
‘격공도 은근히 부담이군. 그냥 놔줘야 하나?’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내공이 팍팍 깎여나가는 게 느껴진다.
만전 상태에 비하면 내공이 일 할도 남지 않았기에 흑무암쇄진을 쓰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
한 놈을 추가로 격살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화아아아아악...!
전방에서 엄청난 열기가 전해졌다.
곧이어 어마어마한 불길의 파도가 고수들을 덮치며 그들을 통째로 구워버리는 게 아닌가?
“......!”
한순간에 폐부 깊숙이 타버린 고수들은 이렇다 할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여어, 이게 누구야?”
껄렁한 목소리와 함께 풀잎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나타나는 사자머리의 청년.
강엽의 눈이 기광을 발했다.
“하후진?”
두 달, 아니 거의 세 달 만에 만나는 하후진이었다.
그러나 예고되지 않은 만남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의 변화였다.
“삼화취정을 이뤘군.”
“기연을 정통으로 맞았거든.”
이빨을 드러낸 하후진이 칼등을 어깨 위로 올리며 숙정방을 가리켰다.
“설명은 싸움이 다 끝난 뒤에 해줄게. 교성을 죽이긴 했는데 잡졸이 너무 많아.”
“어쩐지 교령만 있고 교성이 없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용케 교성을 죽였군.”
“흐흐, 삼화취정 좋더라.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이젠 너랑 대등하지.”
“....”
강엽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진실을 알면 하후진이 얼마나 절망하겠는가?
‘그래도 입이 근질거리긴 하는구만.’
무림엔 삼 할의 힘을 숨기라는 격언도 있지만, 그럼에도 힘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무림인의 본성이다.
강엽은 자신의 안에도 그런 본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심 웃었다.
* * *
혈교는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도망쳤다.
교성이 하후진을 붙잡고,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워 몰아칠 때만 해도 승산은 충분했다.
하지만 삼화취정의 고수만 세 명이 있는 일행이 난입하자 전황이 순식간에 뒤집혀버렸다.
약에 취해서 고통과 두려움을 잊고 공격했지만 절세고수의 한 수에 추풍낙엽처럼 휩쓸렸던 것.
완안극과 백서희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적들을 쓸어버리니 혈라분이고 뭐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그래도 도와주지 않았다면 위험했겠지. 제때 와줘서 고맙다.”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이다. 나야말로 네가 여기 있는 게 놀라운데. 그리고....”
강엽이 단목정을 돌아보았다.
하후진과 나란히 앉은 단목정은 다소곳이 예를 갖추었는데, 그러면서도 한 손은 하후진과 잡고 있었다.
그러나 강엽이 보는 것은 하후진과 맞잡은 손이 아니라 살짝 부분 그녀의 배였다.
품이 넉넉한 궁장을 입고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았지만 강엽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하후진이 쑥스럽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나도 오고 나서 알았어.”
“그럼 무림맹에 가기 전에...?”
일행과 달리 무림맹에 도착하기 전 염왕과 함께 떠났던 하후진이었다.
당시에 단목정도 함께 있었던 만큼 떠나기 전에 작별인사를 나눴겠거니 했었는데....
‘어째 얼굴이 따갑구만.’
강엽이 고개를 돌리자 단목정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본 백서희가 그를 향해 가자미눈을 흘기고 있었다.
단목정이 수줍게 말했다.
“석달이 조금 안 됐습니다.”
“축하한다. 근데....”
강엽이 말끝을 흐리자 단목정은 긴장했다.
딱히 강엽이 두 사람의 사이를 반대한 건 아니지만, 그날의 일을 말하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강엽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예상과 다른 말이었다.
“염왕께선 알고 계신가?”
“...예?”
“어, 음....”
둘 다 말을 잇지 못한다.
강엽이 혀를 끌끌 차며 하후진을 힐난했다.
“단목 방주는 몰라도 넌 알려야 하는 거 아니냐?”
“으음, 그렇지. 근데 나도 사부가 어디 있는지 모르거든. 한 군데에만 있는 양반이 아니야.”
“무림맹에 계신 거 아닌가?”
“아니, 내가 알기론 남해로 가셨다.”
“남해?”
“거기에 뭔가 있다던데. 우리 사부가 선문답 같은 걸 하면서 떠난 게 한두 번이어야지.”
말은 그렇게 해도 염왕이 아무 이유도 없이 먼 곳으로 훌쩍 떠날 리가 없었다. 그의 신경을 건드릴 만큼 큰일이 남해에 생긴 것이리라.
“안 그래도 하오문에 사부 소식 좀 알아봐달라고 한 참이야. 어딨는지 알면 말씀드려야지.”
“하오문이라....”
“그래. 참, 홍 소저가 안부 전해달라....”
무심코 홍가려의 소식을 전한 하후진은 백서희의 눈치를 보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뭐, 아무튼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말해봐라. 일행도 두 명이나 늘었는데 누구냐?”
“그러지.”
강엽은 다과를 먹고 마시면서 운남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