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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61화 (258/450)
  • 49화. 쾌남 (1)

    백서희는 향로를 이용하겠다는 계획을 뒤로 미뤘다.

    지금은 전륜구룡공에 익숙해지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강엽도 그 판단에 찬성했다.

    ‘근데 전륜구룡공을 마공이라고 볼 수 있나?’

    흑룡교주의 독문심법이니 당연히 마공일 것 같지만, 구결을 낱낱이 쪼개고 고찰해봐도 상리에 어긋나는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어지간한 신공절학보다 훨씬 신묘했다.

    ‘백무량은 진조와 동행하던 시절엔 마인들을 적대했다. 과연 그런 자가 마공을 익혔을까?’

    그가 세운 흑룡교가 후대에 마도에 물들었을지언정, 전륜구룡공을 마공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전륜구룡공의 구룡신기(九龍神氣)는 마기와는 궤가 달랐다.

    “기분이 어때?”

    “나쁘지 않은걸.”

    백서희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전륜구룡공에 입문한 이후 그녀는 틈만 나면 강엽과 함께 폭포로 와서 수련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상쾌해.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라고 할까? 그놈들 무공을 익혀서 이런 기분이 되는 게 뭔가 엿 같긴 한데....”

    마치 왕후장상이나 입을 법한 값비싼 비단옷을 걸친 느낌.

    무영환살공만 익혔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두 무공을 비교하고 보니 확실히 차이가 났다.

    “천하제일인은 있어도 천하제일무공은 없다고 하던데. 그래도 무공 수준은 확실히 차이 나네.”

    “그건 비슷한 무공끼리 논할 때지.”

    아무렴 천하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신공과 살수 문파의 심법을 어찌 비교할까.

    무영환살공도 상승의 심법이지만 전륜구룡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 녀석은 그런 무공을 익혀서 이 나이에 여기까지 올라온 거지.’

    강엽은 말할 것도 없고, 하후진과 청수도 각각 염왕도문과 무당파라는 걸출한 문파의 신공을 익혔다.

    한데도 백서희가 그들과 견줄 만큼 강한 것은, 그녀의 재능이 그만큼 출중하다는 뜻.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익혔을 걸 그랬네.”

    “별 차이는 없었을 거다.”

    “왜?”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르니까. 무공을 보는 안목부터 다르지. 흑접 시절의 네가 전륜구룡공을 익혔다면 이렇게 빨리 입문했을까?”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백서희가 그동안 견문을 넓혔기에 전륜구룡공을 빨리 터득했다고 봐야 했다.

    “나도 전륜구룡공을 이만큼 이해하진 못했지. 그때 전수해줬다면 한계가 있었을 거야.”

    정기신을 합일하여 기감이 더욱 발달하고, 강호 최정상의 강자들과 손속을 겨루면서 무공을 보는 안목은 전에 비할 수 없이 높아졌다.

    “모르긴 해도 몇 달은 걸렸겠지. 구결을 잘 해석했는지 꼼꼼이 따지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테고.”

    구결을 그릇되게 해석해서 잘못된 길로 진기를 인도하다가 기혈이 꼬이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다 주화입마에 빠지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다.

    강엽이야 재생력 덕분에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되지만 백서희는 아니지 않은가?

    백서희가 배시시 웃었다.

    “하기야 그때라면 우리 둘 다 헤맸겠네.”

    “중단전의 상태는 어떻지?”

    하단전보다는 심상이 깃든 중단전이 더 큰 문제였다.

    심법을 바꾸었으니 지금까지 쌓은 무공관이 통째로 변화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만약 중단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즉시 수련을 멈춰야 했다.

    “음, 지금까지는 괜찮은 것 같아. 근데 심상이 좀 변한 것 같긴 해. 내가 바꾸고 싶어서 바꾼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어떻게?”

    “아직은 확실치 않아.”

    강엽은 즉시 초음의 파동을 발해서 백서희의 중단전에 자리한 심상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그녀가 말한 대로 뭔가 변하기는 했다.

    ‘용.’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용의 심상.

    아직은 뱀인지 용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흐릿하지만, 전륜구룡공의 성취가 높아지면 그녀 안에 있는 용도 구체적으로 변모하리라.

    “확실히 호환이 되니까 심상이 충돌하지 않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았다면 끔찍했겠지.”

    어쩌면 심상끼리 충돌해서 주화입마에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아, 맞다! 나 이거 할 수 있게 됐다?”

    손뼉을 친 백서희가 물에 손을 담그자 얼마 전 강엽이 그랬듯이 물길이 이리저리 휘저어졌다.

    향로를 써서 백무량을 만난 것도 아닌데 백서희도 강엽과 비슷한 공능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육성의 성취에 올랐군.”

    “이렇게 빨리 오를 줄은 몰랐어.”

    “완전히 무에서 시작한 것도 아니고, 기존에 쌓아둔 게 있으니까. 그만큼 성취가 빠를 수밖에.”

    강엽이 봤을 때 백서희의 수준이라면 팔성까지 올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마 근시일 내에 자신의 수준에 걸맞는 성취를 이루지 않을까.

    ‘슬슬 숙정방을 떠날 때가 됐어.’

    갈 길이 급하긴 했지만 요 며칠은 그녀의 성취를 더 우선시했다. 강엽도 계속해서 향로 속 백무량에게 도전하며 심권을 경험하고 있었고.

    향로 안과 밖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다 보니 짧은 시간 엄청나게 많이 싸웠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공을 밑바닥부터 점검했고, 그냥 넘어갔던 부분도 새로이 고찰했다.

    백서희가 물장구를 칠 때마다 수면을 따라 수많은 동심원이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본 강엽이 옆에 있는 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서걱!

    격공으로 자른 나뭇가지가 저 스스로 날아온다.

    눈길만으로 나뭇가지를 조종하는 신위에 백서희가 입을 헤 벌렸다.

    “...완전히 성공한 거야?”

    “운이 좋았지.”

    백무량과 싸우는 동안은 몰아에 빠졌던 것이다.

    기감은 극도로 곤두섰으나 마음은 명경지수처럼 고요해지는 상반된 상태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깨달음을 낚아챘던 것.

    ‘삼단전의 합일이 더 튼튼해지지 않았다면 깨달음을 얻어도 그림의 떡이었겠지만.’

    어쩌면 삼화취정이 더욱 견고해졌기에 깨달음을 얻은 것일지도.

    뭐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다.

    “내일 아침엔 숙정방을 떠나자.”

    “응?”

    “현운 도장과 합류해야 하니까.”

    “아, 그러네.”

    비록 며칠뿐이었지만 편히 쉬었기에 백서희의 얼굴엔 아쉬운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다만 그녀도 언제까지나 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떠나면 한동안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

    “그렇겠지.”

    별 생각없이 대답했던 강엽은 문득 은근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백서희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눈을 마주친 그녀가 귀밑머리를 배배 꼬며 시선을 피했다.

    “흠흠, 바쁘면 한동안 못 하니까....”

    “나 원.”

    강엽은 실소를 흘리면서도 백서희를 번쩍 안고 용소로 들어갔다.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백서희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얼굴에 어린 의문을 눈치챈 강엽이 이죽거렸다.

    “마침 재밌는 게 생각 나서.”

    “그게 뭔데... 엇!”

    백서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용소의 물이 기파를 따라 회전하더니 거대한 기막 안에 갇힌 게 아닌가?

    어마어마한 물을 빨아들였는데도 기막은 터지지 않았다. 본디 형체가 없어야 할 진기가 물을 가둔 형태로 유지되고 있던 것이다.

    백서희가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봤다. 마치 푹신한 베개를 찌르듯 움푹 파인 기막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오, 신기해라. 어떻게 한 거야?”

    “‘수류(水流)’의 능력 덕분이지.”

    백무량에게서 받은 물을 조종하는 능력.

    기막에 가둔 물이 바깥으로 빠져가나는 길 없이, 온전히 그 안에서만 움직이도록 한 것이다.

    기막 위에 앉은 백서희가 눈웃음을 흘렸다.

    “완전 좋은데. 침상보다 훨씬 푹신해. 오래 할 수 있겠다.”

    “후, 원하는 대로.”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를 벗어버린 두 사람은 이내 한 몸이 되었고, 거친 숨소리와 뜨거운 신음을 쏟아내며 휴식의 끝자락을 내달렸다.

    * * *

    다음 날 두 사람은 아침 일찍 숙정방을 떠났다.

    “만약 감당하기 힘든 적들이 왔다 싶으면 숙정방을 버려라. 단목 방주가 와도 마찬가지다.”

    무인에게 있어 방파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치욕이었다.

    하지만 강엽은 장원보다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사를 우선시했다.

    대문 앞까지 배웅을 나온 방도들이 감격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부디 무탈하셔야 합니다, 주군.”

    “그래.”

    숙정방을 떠나서 포구로 간 두 사람은 숙정방이 그들을 위해 수배한 배에 올라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서 의빈이 거뭇거뭇 보일 무렵.

    선장이 굳은 얼굴로 급보를 알렸다.

    “공자님, 포구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맹월림이오?”

    “예, 상관세가와 맹월림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습니다.”

    선실을 나온 강엽은 선장이 건넨 십리경을 눈에 댔다.

    확대된 시야 속에서 칼든 무인들이 얽히고설킨 광경이 보였다.

    “어떻게 할 거야?”

    함께 나온 백서희가 물었다.

    낮이라서 십리경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강엽과 달리 그녀는 안력을 끌어올려서 상황을 파악했다.

    “글쎄, 구름이라도 꼈다면 모르겠는데....”

    강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앞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건만 하늘에선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선장, 이대로 지날 수 있겠소?”

    강엽이 못 싸우는 건 그렇다 쳐도 자칫하면 애꿎은 선원들까지 싸움에 휘말릴 수 있었다.

    “보급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강엽은 그가 말끝을 흐리는 이유를 이해했다. 포구에 정박하지 않은 맹월림의 비조선 한 척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선장이 급히 명령했다.

    “이런! 당장 뱃머리를 돌려라!”

    “괜찮소.”

    “예? 하, 하지만 이대로면 잡힙니다!”

    비조선은 이미 물살을 타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탄 배보다 훨씬 날렵했기에 속도도 더 빨랐다.

    “이제 와서 뱃머리를 돌린들 바로 따라잡히겠지. 여기서 정리하고 가겠소.”

    선장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강엽이 무모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두 사람은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엽은 햇볕이 미치지 않는 그늘로 들어가고, 백서희는 쌍검을 들고 선수로 향했다.

    ‘장강의 물살까지 바꾸는 건 무리야. 하지만....’

    제아무리 삼화취정을 넘어 그 이상을 바라본다고 해도 장대한 장강의 흐름을 바꾸는 건 불가능한 일.

    그러나 적들의 접근을 막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쿠와아앙!

    “우와악!”

    “포탄!? 대체 어디서...!”

    굉음과 함께 희게 치솟은 포말을 본 선원들이 기함했다. 화기는 관부에서 엄금하는 만큼 무림 문파라도 함부로 다룰 만한 게 아니었다.

    “포탄은 아니니 진정해요.”

    백서희가 선원들을 다독였다. 강엽이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느라 말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도 속으로는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단순히 물살의 흐름을 조종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안쪽에서부터 폭발을 일으키는 위용.

    퍼퍼퍼퍼퍼퍼펑!

    마치 수면 위에서 진각을 밟은 것처럼 커다란 포말이 연달아 치솟았다. 묘하게 용오름을 연상시키는 재난 속에서 맹월림의 비조선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살기등등하게 병장기를 치켜들고 함성을 질렀던 맹월림의 전사들이 난간을 잡고 비명을 질렀다.

    잡을 것이 없는 자들은 볼썽사납게 갑판을 구르거나, 난간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수신께서 분노하셨는가?”

    엉덩방아를 찧은 선장이 벌벌 떨었다.

    강물이 제 스스로 재난을 일으키는 기적을 목도하니 고된 뱃일로 다져진 다리조차 힘이 풀리고 만 것.

    결국 충격을 못 견딘 맹월림의 비조선은 급류에 휘말려 박살났고, 맹월림의 전사들은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수장되었다.

    “후우....”

    땀에 절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본 강엽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위력에 비해 효율적인 능력은 아니야. 차라리 흑무암쇄진을 쓰는 게 훨씬 낫지.’

    중단전의 구룡환이 삐걱거린다. 날카로운 칼날이 뇌리를 헤집는 것처럼 머릿속도 지끈거렸다.

    그때였다.

    “이따위 수작으로 본림의 전사들을 해하다니...!”

    태양을 등진 돛대 위. 얼굴을 그을린 고집스러운 인상의 노인이 약간 어눌한 말투로 일갈했다.

    “아뿔싸! 언제...!”

    그제야 노인의 존재를 깨달은 백서희가 강엽의 앞을 막아섰다.

    땀으로 흥건한 앞머리를 쓸어올린 강엽이 혀를 찼다.

    “벽을 넘은 자다.”

    “삼화취정이라고?”

    “맹월림의 천인장이 군세를 끌고 량산을 넘어왔다고 했지. 저 노인이 그자인가 본데.”

    초음의 파동으로 노인의 무위를 꿰뚫어본 강엽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통찰했다.

    “진멸신권과 싸우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서 의빈을 공략하려고 했나 보군. 진멸신권보다는 상관세가가 더 수월하다고 생각했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지껄이는구나.”

    노인이 숱이 적은 염소수염을 쓸며 위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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