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쾌남 (2)
노인은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강엽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강엽이 맹월림의 배를 침몰시켰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맹월림이 먼저 공격할 의사를 드러냈다는 건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드높은 경지에 오른 기인이었고, 따라서 자존심도 강했다.
“선공을 양보하마. 너희 두 연놈이 합공해도 상관없느니라.”
다 잡은 물고기 취급하는 오만한 언행에 백서희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쌍욕을 내뱉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빌어먹을 늙은이가.”
“....”
침묵을 견지하는 노인의 입가에 흉험한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본 강엽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지쳤다고 생각하나 보군.’
실제로 지치긴 했다.
새로운 능력을 무리하게 쓴 반동으로 삭신이 삐거덕거리고 있었으니까.
“어허, 수치심을 모르는 게냐? 언제까지 계집의 뒤에 숨을 생각이냐? 네놈도 대장부라면 마땅히...!”
갑작스레 뚝 멎는 일갈.
뱃전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시커먼 안개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탐욕스럽게 혀를 날름거리는 안개가, 머리 위를 비추는 햇볕을 틀어막기 시작한다.
불길한 낌새에 선원들마저 바짝 엎드려서 오들오들 떠는 가운데, 노인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웬 사술이...!”
원흉을 찾는 눈길이 강엽에게, 정확히는 손목에 찬 흑룡비환에 고정되었다.
직감적으로 강엽이 안개를 불러냈음을 깨닫고 눈을 희번뜩 빛내는 찰나, 백서희의 어깨를 끌어당긴 강엽이 벼락같은 일권을 뻗었다.
쩌어엉-!
하나로 모은 검지와 중지가 권격과 부딪친다.
순간 무채색의 파동이 뻗어나가면서 갑판 전체가 폭풍우에 휩쓸린 것마냥 크게 흔들렸다.
“끄어억!”
“가, 가라앉는다!”
공황에 빠진 선원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쳤지만 다행히 배가 난파되는 일 따위는 없다.
뒤로 물러난 노인이 아연해져서 중얼거렸다.
“기도가 한순간에 바뀌다니...!”
위우우우우웅!
강엽이 끌어올린 공력의 화후를 짐작한 노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름진 얼굴에 경악이 번지는 것을 본 강엽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시간 없으니 빨리 끝내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한 자쯤 되는 낫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기수식을 취하는 노인.
그러나 노인이 뭔가 하기도 전에 한 줄기 섬광이 몸통을 꿰뚫을 기세로 짓쳐들었다.
조금 늦게 그게 어검술이라는 것을 깨달은 노인이 기겁하며 쌍겸을 교차하는 순간.
투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튕겨진 노인의 육신이, 장강의 물줄기와 연신 부딪치며 거친 물제비를 일으켰다.
“.......”
“...저거 죽은 거 아냐?”
설마 삼화취정을 이룬 초고수가 이렇게 맥없이 나가떨어질 줄이야?
백서희가 황당해하며 중얼거리자 강엽이 인상을 찡그렸다.
“글쎄, 한 수로 죽었으면 좋겠지만....”
투아아앙!
강물 한복판에 포말이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쩌렁쩌렁한 경악성이 울려 퍼졌다.
“이제 보니 정체를 숨긴 고인이었구려!”
“음?”
“젊은 얼굴로 노부를 방심시키다니! 어검을 쓰는 실력이라면 필시 천하팔존이겠지!”
“....”
한참이나 헛다리를 짚은 노인의 말에 강엽은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서희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얼굴로 끅끅거리고 있었다.
“푸흣, 천하팔존.... 아, 이렇게 웃길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하기야 노인이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 막 이십대 중반을 바라보는 강엽이 천하팔존과 비슷한 경지에 오를 거라 누가 생각하겠는가?
“천하팔존이라면 이것보다 훨씬 강하겠지. 검성만 해도 어검술을 완전히 통달했는데.”
광명마교주에게 패하긴 했으나 검성은 어검술의 극에 올라선 초강자. 강엽이 그와 비견될 만큼 강해지려면 많은 고난을 넘어야 하리라.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겠어.”
“혼자 가서 쓰러트리려고?”
“저렇게 두고 갈 순 없으니까.”
순망치한이라고 하지 않나.
상관세가가 노주를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이상 강엽으로선 그들이 쓰러지는 걸 방관할 수 없었다.
강엽은 아직도 넋을 잃은 채 주저앉은 선장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먼저 가시오. 난 저자를 처리하고 따라갈 테니까. 금사강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돌아올 거요.”
“뭔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장강의 물줄기는 의빈을 기점으로 민강과 금사강으로 나뉜다. 배가 운남으로 빠지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선언에 백서희가 작게 실소를 흘렸다.
“혼자 싸워도 되겠어? 저 늙은이 부하들도 있을 텐데.”
“괜찮아. 넌 선원들을 지켜줘.”
혹시 맹월림의 배가 또 쫓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혼자 싸우는 것도 아니야.”
멀리까지 기감을 확장한 강엽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오는 건가.”
강 한복판에서도 느껴질 만큼 호전적인 기파.
피부를 저릿하게 찌르는 존재감을 느낀 강엽은 전신에 검은 안개를 두른 채 뱃전 아래로 몸을 던졌다.
“저, 저...!”
“아, 괜찮아요. 물에 빠진 건 아니니까.”
자빠질 듯이 놀란 선장과 선원들이 백서희의 말에 그제야 강엽이 그냥 뛰어든 게 아님을 알았다.
갑판 위에 있는 널빤지 하나를 던지고 그 위로 몸을 싣었던 것이다.
갈댓잎 하나로 강을 건넜다는 달마대사의 일위도강(一葦渡江)이 현현하는 순간이었다.
* * *
“실수를 했구나.”
노인이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율속족(傈僳族) 출신인 그는 오래전 우연한 기회에 스승을 만나서 무도를 걸었다.
이후 스승의 문하를 떠나서 운남과 새외 무림을 떠돌며 힘을 기른 끝에 점창파의 아성에 도전했다.
비록 점창파의 장문인과 이백여 합을 겨룬 끝에 패하긴 했으나, 운남 무림인들은 그를 당랑산군(螳螂山君)이라 부르며 경외했다.
스스로의 무공에 자부심이 넘쳤기에 강엽이 비조선을 격침시키는 걸 보고서도 그가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노부의 불찰이다. 강호는 넓고 기인이사는 많다더니.”
시커먼 안개가 몰려온다.
널빤지를 밟고 오는 것이었으나 당랑산군의 눈에는 안개가 날아오는 것처럼 보일 따름.
동자료혈에 공력을 집중해서 봐도 시커먼 안갯속에 있을 강엽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침중한 낯빛이 된 당랑산군은 다시 한번 쌍겸을 교차해서 반격할 준비를 끝마쳤다.
“당신의 정체가 뭐든 간에 쉽게 당해주진 않겠....”
그런 당랑산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쿠와아아아아앙!
포구 저편에서 무지막지한 굉음이 울리면서, 농밀한 기파가 그가 있던 강변까지 휩쓸어버렸다.
당랑산군이 기습을 깨닫고 얼어붙은 순간 맹월림을 상징하는 깃발의 파편들이 물방울과 함께 떨어졌다.
분노로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는 당랑산군의 뒤로 굵직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깜빡 속을 뻔했구만. 비슷하게 생긴 놈을 대역으로 세울 줄이야. 술사놈들을 시켜 기척까지 위장했던데... 멀리서 보기만 했다면 못 알아차렸을 거다.”
구릿빛 근육질 상반신 위로 갈색의 장삼만 걸친 사내.
도발하듯 건들건들 걸어오는 사내가 돌덩이처럼 다부진 주먹을 들어올렸다.
사내가 사납게 웃었다.
“잔수작은 끝이다, 늙다리!”
웅혼한 기파를 듬뿍 머금은 권격이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랑산군의 머리통을 노렸다.
“네놈, 돈만 좇는 들개놈이...!”
촤아아아아악!
절묘하게 그린 쌍겸의 궤적으로 강맹한 경파를 눌러버리는 솜씨.
강엽에게 불의의 일격을 먹긴 했지만, 당랑산군 역시 맹월림의 천인장답게 평범한 이들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사내가 뻗은 권격은 하나가 아니다.
일권을 뻗은 자세 그대로, 동작을 크게 가져가지 않고 다시 한번 연격을 퍼부은 것이다.
몸을 회전시키듯 자세를 낮춘 당랑산군이 사내의 발목을 끊겠다는 듯 낫을 휘둘렀지만, 사내는 이미 공중으로 도약한 뒤였다.
전신의 무게를 싣은 진각이 지면을 강타한다.
쿠구우우우웅......!
그야말로 강 어귀를 통째로 흔들어버리는 위력.
이형환위로 피한 당랑산군이 겸강(鎌罡)을 휘둘렀지만, 사내는 바위처럼 꽉 찬 팔근육을 들어 막아냈다.
강철처럼 쇳빛으로 물든 팔뚝이 겸강을 튕겨내는 모습에 당랑산군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투아아앙...!
뒤이어 격공이 부딪치고, 반탄력으로 당랑산군을 반 보 밀어낸 사내가 허리를 틀며 역동작을 취했다.
보도처럼 날카로운 족격이 전방 십여 장의 사물을 두부처럼 절단한다.
-참룡족도(斬龍足刀).
작은 발동작에도 경파가 실리며 반경 십여 장의 공간을 무주공산으로 만들고 있었다.
“큭!”
피하는 데 급급한 당랑산군이 과도하게 상체를 비튼 바로 그 순간.
기광을 발한 사내가 우격다짐으로 어깨를 집어넣으면서 막강한 고법 경파를 작렬시켰다.
찰나 지면을 뒤집는 막강한 파동.
당랑산군의 신형이 하늘 높이 밀려났다. 이화접목이나 사량발천근 따위의 수법은 일절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수많은 겸기를 날렸으나, 이미 사내는 공력을 집약시킨 일권을 당랑산군을 향해 뻗고 있었다.
-일권파산포(一拳破山砲).
권사들 사이에선 신검합일과 비견된다는 주심(主心).
주먹에 일념을 담아 적을 쳐부수는 최상승의 권법 기예가, 그와 당랑산군 사이의 거리를 관통한다.
안색이 거멓게 죽은 당랑산군이 급히 호신강기를 펼쳐 자신을 덮쳐오는 권격을 막으려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날아온 보검이 힘겹게 방어하는 그를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단숨에 갈라버렸다.
“...어엉?”
눈앞에서 적수를 잃은 사내가 눈을 껌뻑였다.
당랑산군을 반으로 갈라죽이고도 허공에서 멈춘 자색의 검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기어검? 아니, 어떤 놈이 내 먹잇감을...?”
의아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린 그는 강 저편에서 가까워지고 있는 검은 안개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흑무를 뚫고 비추는 안광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내는 도리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허어, 그냥 안개가 아니라 사람이 있었군. 한데 남의 먹잇감을 노리는 건 너무하지 않나?”
“진멸신권?”
“그렇게 불리긴 하지. 진멸신권 정무악이 내 이름이다. 한데 자네는 누군길래 백주대낮에 그렇게 안개를 두르고 다니는가?”
“강엽.”
안개를 풀지 않고 흘러나온 대답에 진멸신권 정무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자네가 그 귀영이었구만! 그렇게 하고 다니니 영락없이 귀신일세그려!”
“....”
나름 웃기려고 한 농담인데 강엽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정무악은 뻘쭘함에 큼큼 기침을 했다.
그리곤 몸통 내부의 단면을 훤히 드러낸 채 피와 내장을 강물 너머로 흘려보내는 당랑산군의 시체를 흘긋 돌아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아쉽구만. 저 노인장하곤 결판을 내고 싶었는데... 자네가 끼어들지 않았어도 이겼을 걸세.”
“반대다.”
“응? 반대라니?”
“싸움엔 당신이 먼저 끼어들었다. 저 노인은 나와 싸우던 중에 기습당한 거지.”
다만 강엽도 자신이 끼어들지 않았어도 진멸신권이 이겼을 거란 말은 부정하지 않았다.
주심의 경지에 접어들었다면 격공이나 갖고 노는 수준은 진작에 벗어났을 테니까.
“한데 자네는 왜 여기 있는 건가?”
“지나가던 길이다. 맹월림이 시비를 걸어서 정리하고 가려고.”
엄지를 들어 멀찍이 가버린 배를 가리키자 정무악이 의아해했다.
“저긴 운남으로 가는 쪽인데...?”
자신이 중얼거린 말에 답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운남은 복마전이네. 그런데도 가겠다는 말인가?”
“막기만 해선 승산이 없다. 맹월림을 격파하지 않는 한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아.”
“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위험한데.”
“나만 싸운다면 그렇겠지만, 사천삼패도 도울 거니까. 점창을 해방하고 맹월림을 무너뜨릴 거다.”
“호오, 그거 참... 가슴 두근거리는 이야기구만.”
정무악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다는 듯이 시원하게 웃은 그가 말했다.
“마침 천인장도 죽었으니 맹월림을 지휘할 수괴도 사라졌군. 이쪽 방면의 적들을 처리하면 우리도 량산을 넘어서 놈들의 본거지를....”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쿠웅...!
갑작스런 폭음이 귓전을 때린다. 악다구니와 비명, 괴성이 아련하게 뒤를 따랐다.
“포구, 아니, 선착장인가? 맹월림 놈들의 반격이 거센가 보군.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세. 부하들이 있는 곳이라서 빨리 가봐야 해.”
“나도 따라간다.”
“엥? 자네 일행을 쫓아가야 하지 않나?”
“확인해볼 게 생겼거든.”
멀지않은 곳에서 전해지는 흉폭한 기운.
처음엔 당랑산군이 상관세가를 도모하기 위해 의빈에 왔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진조의 영성이 경고했다. 암시장에서 싸웠던 신녀와 비슷한 기척이 여럿 있다고. 맹월림의 선박들은 불괴강시들을 운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가라. 난 공력을 조금 회복하고 갈 테니까.”
“음, 알겠네. 그럼 먼저 실례하지!”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지는 정무악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한 강엽이 시선을 돌렸다.
강물에 몸을 담은 노고수의 주검.
모래사장을 뚫고 올라온 혈목이, 잘려나간 단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