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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60화 (257/450)
  • 48화. 유품 (3)

    콰아아아아앙!

    장내를 강타하는 거센 충격음.

    동심원처럼 너울진 묵직한 경파가 몸을 날린, 혹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던 열 명을 분쇄해버린다.

    문자 그대로 상반신이 증발했다.

    핏덩이가 울컥울컥 흘러내리는 참혹한 광경을 무심하게 둘러본 강엽이 권좌에 앉은 백무량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자, 이겼는데 어쩔 거냐?”

    “....”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다음 제물을 불러냈다.

    상반신을 잃은 시신들이 녹아내리듯 사라지며, 새로운 적들이 강엽을 삼면에서 에워쌌다. 각기 검과 도, 권갑으로 무장한 자들이 날선 기도를 뿜어내며 짓쳐들었다.

    그러나,

    쾅! 투학! 으지직!

    반 각이 지나기도 전에 앞선 자들처럼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을 피로 뒤덮었다.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낸 강엽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다음.”

    대충 규칙을 알 것 같았다.

    상대를 쓰러트리면 더 강한 상대가 나오는 양상.

    ‘얼마나 이겨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완전히 불리한 조건에서 싸우지는 않는군.’

    첫 싸움에서 맞닥뜨린 적들은 은인패급밖에 되지 않았다.

    다음에 나온 적들은 은지패 수준.

    솔직히 강엽 입장에선 내공을 거의 쓸 필요도 없었다. 호수에서 물 한 바가지 퍼올린 정도라고 할까.

    그래도 내공을 쓴 건 쓴 건데, 새로운 적들이 나오면 단전의 내공도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신적인 피로까지 회복되는지는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이만하면 계속 싸우는 데 지장은 없겠어.’

    그다음에 나온 적들은 수준이 높아지진 않았다.

    다만 숫자는 몇 배로 불어났다. 대전 곳곳에서 검을 패용한 자들이 검진을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물론 강엽이 그들을 제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워낙 숫자가 많은 데다 손발이 잘 맞아서 앞선 싸움보다 조금 더 걸렸을 뿐.

    -그르르르르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

    붕대로 감싼 면상 아래로 날카로운 치열이 드러났으며, 눈은 독사처럼 노릿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전신에서 풍기는 악취로 정체를 알아챈 강엽이 콧잔등을 구겼다.

    “강시?”

    -크허엉!

    비호처럼 몸을 날리는 강시.

    이미 죽었기 때문에 호흡을 하지 않으며, 관절의 구동 범위도 비정상적으로 넓었다.

    보통 사람에겐 불가능한 바깥쪽의 각도로 팔다리를 휘둘러대는데, 손끝에 달린 날카로운 손톱이 대전 곳곳을 찢고 부수어댔다.

    “제법 하긴 하지만....”

    약간 종류가 다르긴 하지만 숙정방에서 교관 노릇을 하고 있는 홍예칠위 수준이었다.

    투아앙!

    강시의 조풍을 분쇄하는 일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강시의 몸통에 바람구멍을 내고 백무량이 앉아있는 권좌까지 치달았다.

    아쉽게도 권격은 백무량을 치지 못하고 그 앞에서 신기루처럼 스러졌지만, 강엽은 실망하지 않았다.

    ‘하긴 우연이라도 자신을 노리지 못하도록 해놨겠지.’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심장이 뚫린 시점에서 쓰러졌겠지만, 강시는 자신의 상처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덮쳐들었다.

    -크아아아아!

    화살처럼 쏘아져서 양팔을 크게 휘두르는 일격.

    촤아악!

    열 개의 손톱이 섬뜩한 파공성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미 강엽은 강시의 배후를 점하고, 놈의 뒤통수를 잡아 벽에 처박고 있었다.

    두개골이 산산조각 박살나고 그 안에 든 내용물이 역겨운 악취를 풍기면서 흘러내린다.

    강시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강엽이 손을 털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하나 예상과 달리 새로운 적이 출현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수고했다.”

    대신 백무량이 짧게 칭찬하면서 강엽을 향해 손을 쭉 뻗을 뿐.

    장심에서 흘러나온 검푸른 기운을 본 강엽은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검푸른 기운은 순식간에 도달해서 그의 몸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 순간,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관조한 강엽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이건 또 무슨 귀신 놀음이지?”

    백무량이 내준 기운은 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기경팔맥에 흘러들어 단전을 키워주고 있었다.

    이미 정기신 합일을 이뤄 어마어마한 내공을 이룬 강엽이지만, 하단전의 수용량이 조금 더 커지는 것을 체감할 정도로 막대한 기운.

    어지간한 영약보다 훨씬 정순했다. 아마 현실에 있는 육신도 동일한 효과를 누리지 않았을까.

    “일정 단계에 오를 때마다 보상을 주는 식인가? 이러면 최종 단계까지 못 가도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겠어.”

    아마 최종 단계는 백무량을 상대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거기까지 가지 못해도 보상이 있다면 충분히 도전할 만했다.

    문제는 과연 몇 번이나 도전할 수 있냐는 거지만, 강엽은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도전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내리 싸웠을까.

    “후우....”

    강엽이 윗머리를 쓸어올렸다. 치덕치덕 묻은 피와 땀이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다.

    가면 갈수록 강적이 나타나더니, 종국엔 삼화취정을 이룬 절세고수가 나타났던 것이다.

    일전에 상대했던 명도상인보단 압도적으로 강했고, 오사도에는 약간 못 미치는 수준.

    “너는 구천호법을 이겼다. 구천호법을 이겼으니 마땅히 교주의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그때까지도 권좌에 앉아있던 백무량이 말했다.

    강엽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백무량이 묻는 말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제 할 말만 지껄이며 시험을 진행할 따름.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천하엔 괴물들이 많다. 심상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면 그런 자들로부터 교를 지켜낼 수 없음이니.”

    마침내 권좌에서 일어난 백무량이, 양 소매를 걷어붙이며 강엽의 삼 장 앞에서 멈춰섰다.

    “.......”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는 무거운 적막.

    강엽도 진지하게 기수식을 취했다.

    ‘심상절예는 완성했다고 봐야겠지.’

    진조나 예사란, 초대 광명마교주와 달리 백무량은 생전에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심상절예를 치료하는 술법을 제시하고, 이만한 안배를 해두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심상지경에 도달했다고 봐도 무방할 터.

    “오라, 본교의 전인이여.”

    백무량의 손짓을 따라 강엽이 몸을 날렸다.

    * * *

    “컥! 쿨럭...!”

    “강엽!”

    앉은 자세에서 새우등이 되어 마른 기침을 내뱉자 백서희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여기 물!”

    물주머니를 받아 정신없이 물을 들이킨 강엽은 그제야 살 것 같다는 얼굴로 한숨을 토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며 확인했다.

    “...이상은 없나?”

    “무슨 소리야?”

    “안에서 초대 흑룡교주를 만났어.”

    강엽은 일전에 진조의 기억에서 백무량을 만난 얘기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결국 마지막에 백무량한테 된통 당했지.”

    예상대로 백무량은 심상절예의 고수였다.

    그가 휘두르는 심권(心拳)을 맞은 강엽은 혼백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의식을 잃었다.

    “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그 순간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더군.”

    향로는 백무량이 후손들을 위해 만든 법구.

    하나 그 안에서 죽는다고 실제로도 죽는다면 안 쓰느니만 못했다.

    ‘중간에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번 시작하면 무조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는 계속 도전해야 한다.

    “참,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거의 안 지났는데?”

    “뭐?”

    “정말이야. 한 식경쯤 됐나? 갑자기 운기하다 말고 기침하길래 난 뭔가 잘못된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일일이 계산한 건 아니지만 안에서 체감한 시간은 며칠은 되었다.

    “근데 정말 내공이 늘어난 거야?”

    “...그래.”

    내공뿐만이 아니다.

    강엽은 자신의 육신이 이전보다 한층 강건해졌음을, 근골은 물론 경맥도 더욱 질겨졌음을 깨달았다.

    정기신의 합일이 더욱 공고해지며 이전보다 끌어낼 수 있는 공력도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것만 봐도 놀라운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

    강엽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린 백서희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뭐야?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아니.”

    강엽이 부정했다.

    “백무량이 준 선물이다.”

    전각 너머로 보이는 바깥의 정경.

    앞마당에 있는 자그마한 연못의 물이 춤추듯이 저 스스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입을 떡 벌린 백서희의 표정에 강엽이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도가에서 흑룡은 오순(敖順)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신으로 불리기도 해. 말 그대로 물을 관장하는 용왕이지.”

    “어, 대단하긴 한데... 이것도 술법이야?”

    “아니, 그보다는....”

    강엽도 명확히 규정하진 못했다.

    다만 짐작가는 게 있긴 했다.

    “진조의 능력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은데.”

    진조가 물려준 능력들도 혈공진기가 성장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무공이나 술법과 상관없이 쓸 수 있었다.

    ‘이건 진조에게 물어봐야겠군.’

    예사란이 가루라의 화신이듯 백무량도 특별한 혈통을 타고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하튼 이건 너도 쓸 수 있어.”

    전륜구룡공을 익히면 된다.

    본래 백서희는 흑접의 무영환살공을 익혔지만, 무영환살공 역시 흑룡교의 심법 구결이 녹아들었기에 전륜구룡공과 공존할 수 있었다.

    기존의 내공을 포기하지 않아도 새로운 심법을 익힐 수 있는 것이다.

    “네가 흑룡교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기회일지도 몰라.”

    백서희의 재능이라면 향로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벽을 넘어 삼화취정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강엽도 그녀가 무조건 향로를 써야 한다고 강권하진 않았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니야. 해볼게.”

    고개를 젓는 백서희의 얼굴은 어느덧 단단한 각오로 무장하고 있었다.

    “맨날 강해지고 싶다고 노래하면서, 강해질 수 있는 해답이 눈앞에 있는데... 그게 싫다는 이유로 등신같이 걷어차고 싶진 않아.”

    그녀는 흑룡교를 증오했다.

    흑룡교주의 혈손인 흑접주는 그녀에게 삶을 준 아비였지만, 동시에 그녀의 인생을 파탄낸 원수였다.

    그로 인해 어미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고, 그녀 자신은 살수가 되어 흑접의 장기말로 살지 않았던가.

    흑접이 멸문하고 나선 흑룡교의 부활을 꾀한 교주의 혼백에게 몸을 빼앗길 뻔하기까지 했다.

    “진정한 복수는 내가 그 새끼들 힘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거지. 흑룡교의 재건 따윈 내 알 바 아니고.”

    백서희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전륜구룡공을 가르쳐 줘.”

    * * *

    흑룡교주의 독문심법답게 전륜구룡공은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입문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백서희는 젊은 나이에 중단전을 완성한 천재.

    진조의 영성을 물려받은 강엽에 비할 순 없어도, 그녀 역시 보기 드문 자질을 타고났다.

    게다가 강엽이 전륜구룡공을 몇 번이나 들려주며 구결을 풀어주었다.

    ‘어떤 면에서 전륜구룡공은 혈공진기와 굉장히 비슷하다. 양기를 싫어하고 응달진 곳을 좋아해.’

    빛이 없는 깊은 바닷속에서 사는 오순의 성질을 닮은 건지 전륜구룡공은 어두운 물가에서 익혀야 한다.

    강엽은 존재 자체가 음기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만큼 굳이 그런 과정을 소화할 필요가 없었지만, 백서희는 그렇지 않았기에 기본에 충실했다.

    달빛조차 실처럼 가느다란 초승달밤 아래.

    거센 물살이 쏟아지는 폭포 아래에 선 그녀는 곧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되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숲속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알몸이 된 그녀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씩 웃었다.

    “어때? 내 몸 죽이게 예쁘지?”

    “까불어.”

    강엽이 어이가 없어서 인상을 쓰자 깔깔 웃은 그녀가 시원하게 입수했다. 폭포의 용소에 풍덩 들어가서는 밑바닥으로 헤엄친 것이다.

    수심이 깊은 데다 와류도 거셌지만, 그녀는 절정고수답게 사방에서 몰려오는 압력을 오기로 견뎌냈다.

    그렇게 고여있는 밑바닥에 자리를 잡고 지난 며칠간 배운 전륜구룡공의 구결을 되뇌는 동안.

    ‘조건은 맞춰졌다. 이젠 기다리는 것뿐.’

    흑무암쇄진을 둘러 주변을 차단한 강엽은 수면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물길을 움직였다.

    용소에 고여있는 물줄기가 전륜구룡공의 오의대로 백서희를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제 백서희가 전륜구룡공을 터득할 수 있는지는 온전히 그녀의 재능과 의지에 달려 있었다. 전륜구룡공의 구결대로 호흡한다면 물 속에서도 질식하지 않으리라.

    강엽은 그녀가 결실을 볼 때까지, 물길을 움직이며 곁을 지켰다.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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