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유품 (2)
“싫다. 또 배야?”
백서희가 질린 기색을 내비쳤다.
정주에서 성도까지 오는 것도 중간중간 육로를 이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배를 타고 왔다.
그런데 또 배라니....
“어쩔 수 없지. 사천에 강이 많은걸.”
그 옆에서 강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배가 지겨워도 말 타고 가거나 달리는 것보단 낫지 않나?”
“음, 그건 인정.”
따지고 보면 백서희도 잦은 이동 때문에 피로가 쌓여서 그런 거지,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는 것은 동의하고 있었다.
이젠 강엽이 햇볕 때문에 죽을 일도 없으니 배 타는 시간대도 자유롭게 고를 수 있고.
타강을 따라 노주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장 숙정방으로 향했다.
숙정방을 지키고 있는 방도들은 두 사람만 왔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곧 단목정과 다른 이들이 나중에 올 거라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단목 방주에게 말은 해놨지만, 노주의 포구들은 맹월림과 싸울 때 중요한 보급로로 쓰일 수 있다. 사천삼패가 이쪽으로 올 수도 있으니까 대비하도록.”
“헙, 사천삼패 말입니까?”
“그래.”
“아, 알겠습니다요.”
이미 당천경 등 사천삼패의 수뇌부들과도 얘기를 해놓았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원을 해주기로.
‘전쟁이 길어지면 무림맹도 이쪽을 이용하겠지.’
물론 전쟁이 장기화되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문득 강엽이 서찰을 꺼냈다.
“이건 낭인전 노주 분타에 갖다줘라. 중경 분타주인 장경에게 보내는 서찰이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거다.”
그동안의 근황과 야차마곤이 무림맹의 척마대에 합류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적힌 서찰이었다.
원래는 직접 갖다주려고 했지만, 시간이 없기에 인편으로 서찰을 부친 것이다.
“이쪽에 맹월림이 온 적은 없나?”
“예, 다행히 아직까진 없습니다. 상관세가가 잘 막아주는 것도 있고... 맹월림이 진멸신권에게 막혔습지요. 맹월림의 천인장이 진멸신권과 두 번 싸워 모두 패했다고 합니다.”
“천인장이라....”
몇 달 전에 숙정방을 쳐들어온 맹월림의 전사.
강엽은 스스로를 백인장이라 밝힌 사내를 떠올렸다.
‘그때 쳐들어온 자는 중단전을 개방했지. 그보다 한 끗발 높다면 교성급이라고 봐야 하나.’
그런 자를 두 번이나 패퇴시킨 진멸신권의 무공은 얼마나 강할까.
이전에 낭왕의 후계자로 강력하게 거론되었다고 하던 말이 마냥 헛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강엽이 관심을 보이자 방도가 더 자세히 보고했다.
“진멸신권은 사천 남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의 문파들과 협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나도 하오문에서 들었어. 듣기로는 개방이랑 아미파도 협력하고 있다던데?”
백서희가 끼어들며 덧붙였다.
“격공이랑 허공섭물을 자유롭게 쓴 모양이야. 천인장이 백 초도 못 버티고 튀었대.”
사실상 사천 남부는 진멸신권이 거대한 방파제가 되어 맹월림이라는 파도를 막고 있는 셈이었다.
“뭐, 일각에선 너랑 진멸신권을 두고 누가 더 강하냐고 비교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당연히 주군이 더 강하지요.”
방도가 가슴을 쭉 폈다.
“주군께선 혈교의 교성은 물론이고 광명마교의 사도까지 쓰러트리시지 않았습니까?”
“그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나?”
“아무렴요. 그 소문이 퍼지고 나서 사천 사람들이 주군을 사도십대고수로 뽑고 있습지요.”
방도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하는 말에 강엽과 백서희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사도십대고수?”
“사파도 아닌데 왜 사도십대고수야?”
물론 강엽이 정파는 아니다.
하지만 사파로 오해받을 짓을 한 적도 없었거늘 왜 사도십대고수로 뽑힌단 말인가?
방도가 눈을 껌뻑였다.
“...아닙니까?”
“....”
두 사람이 기분 나빠하는 티를 팍팍 내자 방도의 목덜미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강엽의 명성이 퍼지면서 그를 정파로 봐야 할지, 사파로 봐야 할지는 호사가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소문을 들은 숙정방도들이 자기들이 정파도 아닌데 왜 주군인 강엽이 정도십대고수냐면서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던 것이다.
숙정방이 강엽의 산하에 들어왔다는 건 사천 무림에서 널리 알려진 만큼 자연히 호사가들도 숙정방도들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어느샌가 주군께서 사도십대고수로 인정받게 된 것입지요.”
맨땅에 머리를 박고 이실직고하는 방도의 모습에 두 사람이 벙쪘다.
한마디로 강엽이 사도십대고수가 된 게 숙정방도들의 입방정 때문이란 것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주군! 지금이라도 호사가들을 찾아가서 바꾸라고 하겠습니다요...!”
“어떻게 바꿀 건데?”
“예? 아, 그야....”
차마 말을 못하는 걸 보니 듣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한숨을 내쉰 강엽이 손을 휘저었다.
“됐으니 애먼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싸우지도 않았는데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온다.
강엽이 축객령을 내리자 방도는 면목없는 얼굴로 허리를 꾸벅 숙이며 물러났다.
“어이가 없긴 하네. 얼마 전에 무림맹에서 맹주랑 총군사 만나서 밥까지 먹었는데.”
무림맹을 떠나기 전에 제갈의현이 불러서 맹주와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맹주가 지금까지 강엽이 한 일을 치하하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는데 사도십대고수라니....
강엽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낭인전 때문이다.”
“엥?”
“낭인전은 정사중간이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날 정파로 보지 않는 게 당연하지. 숙정방 이전에 낭인전의 색깔이 분명치 않은 게 문제야.”
“....”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백서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엽은 진지했다.
“정파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사파 낙인이 찍히는 것도 원하지 않았는데... 원래 세상에 회색지대는 없으니까. 내가 이해해야지.”
사도십대고수라 불리는 게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강엽의 위상이 올라갔다는 뜻이니까.
태화문주인 번천광야 조광해에 필적할 정도가 된 것이다.
“무림에 투신할 때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무림인이 된 것도 어느덧 일 년을 훌쩍 넘었다.
작년에 해를 넘길 무렵 낭인전에 입단했으니, 그전의 기간까지 합치면 일 년하고 여섯 달이 흐른 셈.
뭣도 모르는 무림 초출이 사도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걸린 것이다.
“어쨌든 악명도 명성은 명성이니까. 어디 가서 명성 낮다고 무시받을 일은 없겠군.”
낭인전 금패의 위상도 높긴 하지만 사도십대고수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금사강을 따라서 운남으로 들어간다.”
“...또 강이네.”
백서희가 투덜거렸지만 뱃길이야말로 운남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게 아니면 험준한 산맥을 넘어가야 하는데, 기력은 둘째치고 오가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맹월림이야 량산에 사는 부족들을 복속시켜야 하니 산맥을 넘었다고 해도, 우리는 아니니까.”
“알아. 그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당분간은 한 군데에서 푹 쉬고 싶네.”
물론 그렇게 될지는 의문이었다.
운남은 말할 것도 없고, 사천과 대륙 동부의 정세도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뭐, 한동안은 쉴 수 있겠지.”
강엽도 그러기를 바랐다.
* * *
두 사람은 숙정방에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알게 모르게 쌓인 여독도 풀어야 하지만,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평범한 향로인데?”
백서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유이강이 성도전장에 맡겼던 향로.
분명 뭔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불을 붙여봤는데, 평범하게 연기만 올라올 뿐이었다.
“다른 조건이 있나?”
강엽도 혀를 찼다.
혹시 연기에 뭔가 특별한 기운이 깃든 건가 싶어 깊이 들이마셔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특별한 향을 써야 한다거나, 향을 피우는 데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유이강에게 자세히 듣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향로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노사나 연가휘도 유언에 대해선 모른다고 했지?”
“그래, 유이강이 성도전장을 이용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 측근들 몰래 갔다는 거지.”
오히려 유이강의 유언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반응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 노사는 흑룡교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니 이 향로에 대해서도 뭔가 알지 모르지.”
하지만 무림맹에 있는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올 수도 없는 노릇.
검성을 치료한 대법의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 장기간 여행을 할 형편도 아니었다.
“...흑룡교와 관련이 없는 물건 아냐?”
“글쎄, 그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겠지만....”
하지만 강엽은 향로가 흑룡교의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흑룡교와 관련이 없다면 아무리 귀한 물건이어도 전장에 보관하지 않았을 테니까.
“같이 보관한 이백만 냥은 아마 비자금이겠지.”
“...비자금?”
“훗날 모든 기반을 잃고 도망치거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려고 마련한 게 아닐까 싶은데. 어쨌든 미래를 내다보고 맡겼을 거야.”
이백만 냥이라면 조직을 재건할 만한 거금이다.
그런 거금과 함께 보관한 물건이라면 유이강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물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 자신과 관련된 물건은 아닐 거야. 그럼 기록을 동봉했거나 죽기 전에 언급이라도 했겠지. 흑룡교와 관련된 물건일 가능성이 커.”
“흠, 그렇단 말이지. 이거 피 뿌리면 안 되나?”
“피?”
백서희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주억여 보였다.
“예전에 귀주에서도 교주놈이 숨긴 문이 내 피에 열렸잖아. 이게 흑룡교의 물건이라면 내 피에 반응하지 않겠어?”
“....”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강엽이 못내 허락의 뜻을 내비치자 엄지를 질끈 깨문 백서희가 향로 위로 피를 떨어트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뭐야. 아무것도 변한 게 없잖아.”
향로가 그대로 허연 향만 피우자 백서희가 실의에 빠져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강엽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향을 피워도 반응하지 않고, 교주의 혈손에게도 반응하지 않는다....’
유이강의 성정상 아예 쓰지도 못할 물건을 넘겨주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향로를 쓰는 법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 넘겨준 것이겠지.
‘나한테 도움이 되는 물건이라고 했으니 무공이나 술법과 관련이 있을 텐데.’
당시 유이강과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기며 단서로 삼을 만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순간 어쩌면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시도할 만한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해.”
“어? 있다고?”
시무룩해했던 백서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강엽이 허연 연기를 피워내는 향로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을 무릎 위로 올렸다.
“흑룡교주의 독문심법을 운용한다.”
“...!”
전륜구룡공. 유이강은 강엽이 중단전을 개방할 때 전륜구룡공의 일부가 깃들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성도전장을 찾아가라는 유언을 남겼다.
중단전의 구룡환이 전륜구룡공과 완전히 일치하진 않지만, 특성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
후웁-.
깊게 연기를 들이마시며 중단전의 용환을 공명, 붉은 혈룡들을 고속으로 회전시킨다.
심장 한가운데에서 맞물린 혈룡들이 벌겋게 명멸하며 농밀한 심상의 파동을 뿌린다.
구우우우우우웅......!
전륜구룡공의 구결대로 토납한 기운을 연기와 함께 폐부 깊숙이 받아들이는 순간.
강엽은 시커먼 어둠이 의식을 덮치는 것을 느끼며 그 너머로 스스로를 내던졌다.
* * *
그곳은 거대한 대전이었다.
마치 황제가 문무백관을 거느리며 국사를 논하는 대전처럼 길게 이어진 공간.
“...그렇군.”
용이 새겨진 거대한 권좌 위로 시선을 옮긴 강엽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최근에 타인의 심상을 많이 겪은 탓인지 이런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았다.
흑룡교의 비밀 분타에서 죽은 교주가 자신의 혼백 일부를 떼어내 심상세계를 만든 것처럼.
“초대 흑룡교주인 당신이라면 비슷한 짓을 할 수 있겠지. 안 그런가?”
입꼬리를 비틀며 옥좌에 앉아있는 자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백무량.”
“....”
금룡이 수놓인 흑포를 입은 사내.
진조의 기억 속에서 엿본 백무량이 권좌에 앉아 강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알아봤으니 뭐라고 대답할 만도 한데, 강엽을 향한 눈길엔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기자 열 명의 인영이 강엽을 팔방에서 둘러쌌다.
“이건 뭐 하자는 거냐?”
“이겨라.”
“음?”
“자격을 증명해야만 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
“....”
강엽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모로 꺾는 순간.
그를 포위한 열 명이 합격진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