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용서 (3)
‘이게 심흔의 치료법.’
강엽은 심유한 눈으로 대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역시 심흔을 치유하기 위해 대법을 받긴 했지만, 정신을 잃고 있었기에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주변에 있는 기물을 모두 치우고 확보한 넓은 공간.
태극과 팔괘의 이치에 따라 배치된 흑룡교도들은 진언을 낮게 읊조리며, 이 노사는 태극의 위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향을 피우고 있었다.
괴황지에 붉은 법문을 새긴 부적이 연기와 함께 타오른다.
연기 아래 태극의 중심부엔 한 팔을 잃은 검성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만약 그가 제정신을 유지했다면 흑룡교의 도움을 받는 것을 거절했겠지.
하나 심상절예로 인한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지금, 검성의 치료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옥청선자의 몫이었다.
강엽은 한쪽에 우두커니 선 채 멍하니 대법을 바라보고 있는 옥청선자를 향해 다가갔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무슨 말인가?”
“사실이 알려지면 파장이 작지 않을 겁니다.”
“각오는 됐네.”
만면 가득 번지는 쓴웃음.
설사 검성이 목숨을 건진다 해도, 흑룡교에게 구원받은 사실이 알려진다면 명예는 땅에 떨어지리라.
백도 정파의 기치를 지키기 위해서 흑룡교를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는 명분이 퇴색되기 때문.
옥청선자가 검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을 진행시켰다고 해도 사실이 알려지면 뒷말이 무성할 것이다.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문제가 될 것이고,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문제가 되겠지. 어느 쪽이든 문제가 된다면 사부님을 지키고 싶네.”
“약속은 꼭 지키길 바랍니다.”
기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검성만이 아니다.
흑룡교도들 역시 각오를 품고 대법에 임한 것이다.
‘실패하면 목숨을 잃는다.’
심흔을 분산하는 과정에서 교주가 남긴 심상의 의념이 역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다고 했던가.
강엽은 심상절예의 충돌에 휘말렸을 뿐이기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지언정 막상 심흔에 남은 교주의 의념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성은 교주의 심상절예를 정통으로 맞은 만큼 강하게 남았을 터.
만약 치료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검성은 물론 대법에 참여한 자들도 위험해질 공산이 크다.
‘만약 팔존을 잃는다면 그 충격은 걷잡을 수 없어.’
검성의 치료에 필요한 절대고수.
흑룡교의 교도들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기에 맹주가 참여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본래는 염왕와 낭왕도 호기심에 참여할 뜻을 밝혔지만, 이 노사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만약 심상지경의 고수가 참여한다면 교주의 심상이 거세게 반발할 우려가 있습니다.
낭왕의 경우는 맹주가 반대했다.
자신은 쓰러져도 대체할 사람이 있지만, 낭인전주인 낭왕이 쓰러지면 대체할 사람이 없기 때문.
마찬가지로 옥청선자 역시 화산의 무맥을 계승한 몸이라는 이유로 대법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옥청선자는 맹주에게만 위험한 일을 맡길 수 없다면서 대법에 참여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무어라 말하려는 그때였다.
“다들 준비됐나?”
제갈의현을 대동한 맹주가 들어왔다.
맹주의 결정이 내키지 않는 듯 떫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제갈의현에게 미안한 눈짓을 보낸 옥청선자가 깊이 읍했다.
“맹주님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화산파는 오늘 일을 잊지 않을 겁니다.”
“허허, 검성은 내 친우일세. 젊은 날엔 함께 싸운 동료이기도 하고. 의견이 안 맞아서 부딪칠 때도 많았지만... 원래 인생이 그런 것 아니겠나?”
맹주가 털털하게 웃자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는 옥청선자였다.
“총군사, 부탁하겠네.”
“휴우, 알겠습니다.”
“자네가 무얼 염려하는지 알고 있네. 하나 무림맹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내 책임일세. 검성 저 친구가 밉상이긴 해도 어쩌겠나. 그렇다고 손님인 염왕 선배나 낭왕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제가 맹주님 고집을 어찌 말리겠습니까.”
체념 섞인 얼굴로 팔방의 벽에 부적을 붙인 제갈의현이 수인을 맺으면서 진언을 외웠다.
-팔방풍류기환진(八方風流氣幻陣).
제갈세가 비전의 술법.
강엽은 제갈의현이 쓴 술법의 이치를 즉각적으로 파악했다.
‘바람을 이용해서 내부의 기운을 순환시키는 건가. 들키지 않으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긴 하지.’
맹주전을 호위하는 무인들이 바깥을 철통같이 지키는 것과 별개로, 대법의 기운이 바깥으로 흘러나간다면 기감에 민감한 고수들은 눈치챌 염려가 있다.
자칫 대법이 방해받을 수도 있는 만큼 제갈의현은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술법으로 대법의 기운을 일정한 법칙에 따라 순환하도록 짠 것이다.
‘확실히 흑룡교의 술식과는 다르군. 역천보다는 순천의 이치를 따르고 있다. 의도한 결과를 만들기 위해 천지의 기운에 손을 대지만... 조화를 깨트리지 않는 선에서 음양오행의 이치를 따르고 있어.’
흑룡교의 술법과 다른 건 물론이고, 모산파의 술법과도 다르다.
모산파가 남종인 천사도(天師道)의 영향을 받은 데 반해, 제갈세가인 북종인 전진교(全眞敎)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제갈의현 몰래 정안으로 술법을 살핀 강엽은 그런 차이점을 비교하며 시선을 멀리 던졌다.
우우우우우우웅......!
흑룡교도들이 모여있는 술법진.
음산했던 진언이 뚝 끊기는 것과 침묵이 찾아들자, 검성의 머리맡에 앉아있던 이 노사가 눈을 부릅떴다.
“맹주님.”
“드디어 우리 차례구만. 가세나.”
“예, 맹주님.”
맹주와 옥청선자가 이 노사와 삼각의 꼭지점을 이루고 앉는 것을 본 제갈의현이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태극과 삼재, 나아가 팔괘인가.... 그 모든 것이 구궁으로 모이는군. 어마어마한 술법일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강엽도 내심 그 말에 동의했다.
규모만 보면 이보다 더 큰 술법도 여럿 겪었지만, 술법을 구성하는 이치가 그야말로 격이 달랐다.
정안으로 술법을 살피자 검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미증유의 기운이 세 사람을 거쳐 팔방의 흑룡교도들에게 뻗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갈의현도 무언가 알아차렸는지 주먹을 꽉 쥐었다.
“...느껴지나?”
“예, 생생히 느껴지는군요.”
심흔에 깃든 교주의 의념.
잘려나간 검성의 어깻죽지에서 뿜어져나온 심상의 파동이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컥!”
“우웨엑!”
울컥 피를 토하는 흑룡교도들.
처음엔 십수 명의 인원이 피를 토하더니, 이내 그 숫자가 한번에 세기 힘들 만큼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중심부에 앉은 이 노사도 해쓱해지다 못해 파리해지고, 맹주와 옥청선자도 미간을 꿈틀거리는 모습.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제갈의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실패했단 말인가?”
쿠구구구구궁...!
발 딛고 선 지면이 흔들린다.
본래 현실에선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치는 의념의 힘이 선명한 실체를 갖고 맹주전 전체를 흔들었던 것.
이것만 봐도 교주가 검성을 죽이기 위해 남긴 심상의 흔적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 수 있었다.
“아직입니다.”
“...자네?”
무심코 강엽을 돌아본 제갈의현이 흠칫했다.
강엽이 오른쪽의 정안뿐만 아니라 왼쪽의 마안도 개안, 동공을 중심으로 붉고 푸른 안광을 회전시킨 것.
완전히 개안한 정마안이 서로 다른 광채를 내뿜으며 교주의 심상을 빨아들이기 시작하고,
제갈의현의 허락도 받도 않고 한 발짝 내딛은 강엽은 온몸으로 심상의 파동을 받아들였다.
이성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순전히 본능적으로 저지른 행위.
화아아아아아악!
강엽을 둘러싼 세상이 변했다.
* * *
어두운 밤하늘을 두 동강 내버리는 찬란한 빛줄기.
강엽은 자신이 어두컴컴한 황무지에 덩그러니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란히 서 있던 제갈의현도, 대법의 중심에 있던 맹주와 옥청선자, 이 노사도 홀연히 사라진 상황.
평범한 사람이라면 두려움에 질릴 만하지만, 강엽은 별다른 동요 없이 눈동자를 들어 시커멓게 덧칠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쩌저저저저적......!
먼 곳에서부터 뻗어나온 빛줄기가 하늘을 가로질러 온 사방을 부수고 으깨버린다.
-내 운명은 뒤틀렸다.
귓가에 꽂히는 익숙한 목소리.
그 정체가 교주의 의념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강엽은 밤하늘을 부수는 빛줄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상제와 부처도 이 몸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이 몸이 신인이 되어 운명을 부수겠노라.
단지 힘이 있으니 천하를 차지하겠다는 야망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바꾸겠다는 광기 어린 집념.
하늘이 자신을 가로막는다면, 천하를 모조리 부숴서라도 뜻을 이루겠다는 광오함이 엿보인다.
“뭐가 당신을 그리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걸.”
당장이라도 몸을 찌부러트릴 것 같은 압도적인 중압감.
눈살을 찌푸린 강엽이 안력을 집중시켰다.
우우우우우웅...!
완전히 개안한 정마안의 힘이 교주의 심상을 역으로 거슬러올라가며 근원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역으로 교주의 심상을 잡아먹는 것.
만약 눈앞의 심상이 심상절예 그 자체라면 아무 의미도 없는 발버둥에 불과했겠지.
그러나 심흔에 남은 잔류 사념이라면, 정마안의 힘으로 그 근원을 파고드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터.
콰지지지직...... 콰앙!
교주의 심상이 깨져나가며 그 너머에 있던 진풍경이 드러난다.
‘...몽상정토는 아니군.’
한없이 어두운 공간이었다.
투기장처럼 철망으로 둘러싸인 공간 속에서 열 살 남짓한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노려본다.
머리카락의 길이나 체형만 빼면 모든 면에서 비슷하게 생긴 쌍둥이가 병장기를 겨눈다.
-...시작하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흡혈귀의 감각으로도 꿰뚫어볼 수 없는 짙은 어둠 속에 잠긴 남자는 가죽신만 겨우 보일 따름이었다.
[...혈마?]
강엽은 진조가 나타났다는 사실엔 놀라지 않았으나, 말에 담긴 내용엔 깜짝 놀랐다.
“혈마라고?”
[오랜만에 듣긴 하지만 확실하다. 천 년이 아니라 만 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목소리지.]
어느새 강엽의 옆에 선 진조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철창 안에 갇힌 쌍둥이를 돌아봤다.
[저 사내 녀석은 누군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자 아이는 누군지 알겠구나. 예사란이다.]
“.......”
강엽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어리긴 해도 기억 속의 예사란과 무척이나 흡사한 얼굴이었으니까.
그녀와 대치하는 소년의 얼굴에서도 익숙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닮았군.”
[음?]
“저 소년. 일사도와 닮았어.”
[...그렇군.]
진조도 부정하지 않았다.
“일사도의 얼굴을 봤을 때 기시감을 느꼈지. 이제 보니 예사란을 많이 닮았어.”
광명마교의 일사도가 예사란의 오라비로 추정되는 소년을 닮았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
“뭐 아는 것 없나?”
[...짐도 모르겠구나. 예사란에게 피붙이가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거늘.]
진조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살짝 기울일 때 쌍둥이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붙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살벌하게 서로의 목숨을 노린다.
단지 대련이나 비무가 아니라 목숨이 걸린 혈전.
이윽고 어린 예사란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자 소년이 목을 벨 듯이 철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만.
소년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때 어린 예사란이 기습적으로 소년의 발목을 베었고, 소년은 피를 뿌리며 고꾸라졌다.
어린 예사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년의 몸에 올라타서 철검을 목에 깊숙이 박아넣었다.
소년이 간헐적으로 경련하자 혈마가 물었다.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왜 죽인 거냐?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하잖아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지도 않고 당돌하게 혈마를 올려다보는 어린 예사란의 모습.
어른이 된 시절과는 다른 분위기에 강엽이 지독한 이질감을 느낄 때, 혈마의 말이 이어졌다.
-옳은 말이군. 하나 명령을 어겼으니 벌을 받아야겠지.
-예...? 꺄악!
강한 충격에 쓰러진 예사란.
소녀의 뒤에서 피칠갑이 된 소년이 일어났다.
강엽은 심장이 찔리고 목이 반쯤 베였던 소년의 상처가 절로 아무는 것을 보고 눈을 좁혔다.
“흡혈귀?”
[혈마 저놈...!]
진조가 격정을 드러내며 외쳤다.
[기어이 흡혈귀를 만들었단 말이냐!]
소년이 재생력을 발휘한 반면 예사란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끅끅거릴 뿐.
혈마가 말했다.
-데려가라.
-폐기처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뒤편에 있던 부하가 물었다.
-아니. 남겨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다. 흡혈귀가 되진 못했지만 화신의 재능은 있는 녀석이니까.
태연히 중얼거리면서 소년을 향해 손짓한다.
해맑게 웃으며 달려온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은 혈마가 낮게 웃었다.
-이 녀석이야말로 진조를 사냥할 비장의 패지.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진조를 죽일 수 있을 거다.
-하오나 주군, 진조는 불로불사라고 들었습니다. 저 아이가 살아생전 그를 죽일 만큼 강해질 수 있을지....
-상관없다. 이번 대에서 안 되면 다음대, 그래도 안 되면 다음대를 노리면 된다.
-예?
-가루라는 죽어도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나지. 가루라의 피를 이은 이 녀석들은 나나 진조처럼 늙지 않는 건 아니지만, 대를 이어서 부활한다. 이 녀석의 후손들은 선대의 기억과 영성을 물려받을 거다.
-아아...!
-대신 세월이 지나도 내게 반항할 수 없도록 세뇌시켜야겠지.
빠드드득!
-끄아아악!
혈마의 손가락이 두개골을 파고들어 뇌를 주물럭거리자 소년이 눈을 까뒤집었다.
소년이 게거품을 물든 말든 혈마는 제 할 일을 마치고 나서야 손을 거두었다.
-만약을 위해 이 녀석의 존재는 극비로 해두도록.
-혹시라도 세뇌가 풀릴 일은 없겠습니까?
-그럴 일은 없다. 만약 풀린다면 그건 내가 죽고 난 뒤의 일이겠지.
어둠 속에서 혈마가 하얗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