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용서 (4)
강엽은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이건 초대 광명마교주의 기억이다.’
예사란을 광명마교의 시조라고 생각했던 전제.
천 년 전을 살았던 진조조차 까맣게 몰랐던 진실이 발가벗겨지는 순간 모든 전제가 뒤집어졌다.
기억은 드문드문 이어졌고, 그나마도 간헐적으로 끊겼지만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있었다.
-주군께서 돌아가셨다니... 어떻게....
세월이 흘러 장성한 청년이 믿기 힘들다는 듯이 천장을 보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에게 진실을 알려준 자가 침통하게 물었다.
-네 누이를 기억하나?
청년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혈마의 부하가 빈정거리듯 입매를 비틀었다.
-당연히 기억하겠지. 오래전에 헤어졌어도 쌍둥이 피붙이니까. 그년이 진조와 함께 주군을 시해했다.
-그 아이가 말입니까?
-그래, 심상절예를 완성했더군.
-...!
-주군은 이 땅에서 가장 강하신 분이지만, 결국 간악한 연놈들의 함정에 빠지시고 마신 게야.
-아, 아니... 그보다 어찌 그 아이가 살아있는 겁니까?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옛날에 탈출했다. 이름까지 바꿨더군. 우리도 그 사실을 알아내는 데 한참 걸렸다.
-그럴 수가....
망연자실했던 청년은 벽에 등을 기대다 주르륵 미끄러내렸고, 혈마의 부하는 그런 청년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주군께선 돌아오실 거다.
-예? 하, 하지만 돌아가셨다고....
-그분께 있어 죽음은 영원한 잠이 아니다. 부활할 방도를 예비해 두셨느니라.
-아아....
역시 혈마께선 위대하시다.
청년이 얼굴이 안도와 환희, 기대감으로 얼룩지는 것을 보면서 강엽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혈마가 죽었으니 금제가 풀렸을 텐데.”
혈마의 부하를 속이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의 심상이 전해져 오기에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저놈은 세뇌당한 게 아니다. 사육당한 게야. 피붙이와 찢어지고, 학대받았는데도 혈마에게 충성하는 걸 당연시하는 게다.]
“학대에 익숙해졌다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다. 하지만 영원히 그럴지는 모르겠군.]
“음?”
[네놈 말대로 금제가 풀렸으니까. 아무리 강력한 족쇄라도 세월이 흐르면 녹스는 법이다.]
곧바로 장면이 바뀌었다.
이제 청년은 핏빛 도복을 입은 교도들 사이를 거닐며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교도들을 지도하고, 혈마가 남긴 비술을 익히며, 언젠가 올 운명의 날을 위해 박차를 가한다.
-주군의 육신은 잿가루조차 남지 않았다. 그분이 돌아오려면 육신이 준비되어야 해. 하지만 평범한 인간의 육신은 그분의 혼백을 감당하지 못한다.
대나무를 이어붙인 죽간을 접은 그가 미간을 좁혔다.
-이 세상에 남은 흡혈귀는 진조와 나뿐이다. 하지만 난 완전한 흡혈귀는커녕 반인반마도 못 된다.
그는 방 한켠에 마련된 경대를 돌아보았다.
젊긴 하지만 눈가에 어린 잔주름 등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완전한 흡혈귀가 아니면 주군의 혼백을 감당하지 못한다. 하다못해 반인반마라도 되지 않는다면....
그저 상념의 흐름에 따라서 혼잣말을 지껄이던 그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군. 진조와 그 아이가 맺어졌다면...!
진조를 잡는 것은 무리겠지만, 진조와 누이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면?
완전한 흡혈귀와 가루라의 화신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마라면 혈마의 혼백을 담을 수 있지 않겠는가!
-화신님, 어디로 가십....
-잠깐 볼일이 있어서 출타하겠네.
오랜 세월 혈교의 비선을 총동원해서 자신과 똑닮은 여인을 찾아낸 그는 즉시 교를 떠났다.
말을 타는 시간도 아까워서 어검비행을 반복하며 대륙을 가로지른 그는 작은 산간마을에 도착했다.
진조가 침음했다.
[저 마을은....]
“당신과 예사란이 은거했던 마을이군.”
강엽에게도 낯익은 장소였다.
진조의 기억 속에 있었던 한갓진 마을이었다.
청년은 바로 마을에 들어가는 대신 어린 아이를 불러 자신의 누이가 있는지 살폈다.
-사부님을 찾아오셨다고요?
-사부님?
-예 씨 성을 쓰는 분이면 저희 사부님이신데요. 아, 진 사부님도 계시긴 하지만 그분은 남자시니까요.
아이의 말에 강엽이 퍽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진 사부?”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라.]
진조를 돌아보자 그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먼 산을 돌아보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성이 진 씨는 아니겠지?”
[...닥쳐라.]
드물게 날선 반응에 강엽이 실소했다.
“왜 까탈스럽게 구는지 원.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
대꾸하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다무는 진조를 더 놀리고 싶었지만, 강엽은 다시 눈앞의 심상에 집중했다.
아이에게 멀리서 찾아온 손님이 있으니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한 청년이 움직였기 때문.
울창한 숲 속에 들어간 그가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질겅질겅 씹고 있을 때였다.
-나와.
귓가를 찌르는 목소리.
심호흡을 한 청년은 환한 미소를 가장한 얼굴로 수십 년 만에 만난 누이와 대면했다.
-오랜만이구나. 날 알아보겠느냐?
-....
예사란은 즉답하지 않았다.
복잡한 기색으로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감동의 상봉을 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아.
-...그래, 그렇지.
따끔한 지적에 멋쩍은 표정이 된 얼굴.
오라비를 유심히 들여다본 예사란은 어쩐지 서글프게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행색을 보니 굶고 다니는 것 같진 않네. 근데... 온몸 가득 피냄새가 배어나오는걸.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검파를 쥐었다.
-혈교의 잔당들이 쥐새끼처럼 돌아다닌다는 말은 들었어. 아직 거길 못 떠났나 봐.
-잠깐, 기다려라! 싸우러 온 게 아니야! 할 말이 있어서 왔다! 잠시라도 좋으니...!
-우리 아이를 원해서 온 거야?
-...!
-정곡을 찔렀나 봐. 누이의 아이를 주군의 새로운 몸으로 쓰려고 하다니... 참 갸륵한 충성심이야. 간만에 만나는 누이의 가슴에 대못을 박네.
-...어, 어떻게?
여태껏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계획이었다. 한데 이역만리에 있는 누이가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혹시나 하고 찔러봤어. 혈마를 죽인 뒤에 혈교의 폐허를 뒤졌으니까. 그자가 죽은 뒤에 부활을 획책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이런....
설마 누이가 혈마의 계획을 알고 있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혈마를 시해한 자들이 교의 계획을 어디까지 파헤쳤는지 알아봤어야 했거늘, 급한 마음에 서두른 게 실책이었다.
낭패감에 휩싸인 오라비의 모습을 보는 예사란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번졌다.
-나와 그이 사이의 아이라면 혈마의 그릇으로 알맞다고 생각한 거지?
-.......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까 사실인가 보네. 그런데 조금만 더 조사했으면 좋았을걸.
청년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러나 강엽은 진조가 씁쓸한 웃음을 흘리는 걸 보고 그녀가 말하지 않은 속뜻을 짐작했다.
굳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필시....
-우리 사이엔 자식이 없어.
-...뭐라고?
-흡혈귀와 사람 사이에 반인반마가 태어나긴 하지만, 그 가능성은 굉장히 낮아. 게다가 나는 가루라의 화신이야.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양기를 지녔다고.
가루라의 화신이 지닌 양강지력은 흡혈귀의 상극이다.
수십 년간 부부로 살았던 두 사람이지만 예사란의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의미에선 다행이라고 생각해. 덕분에 후손들이 먼 훗날에라도 혈마에게 이용될 일이 없으니까. 오라버니는 가루라의 화신으로서 흡혈귀의 능력을 지녔지만, 그건 오라버니가 특별하기 때문이야.
같은 가루라의 화신이지만 예사란은 흡혈귀의 능력을 갖지 못했다.
-그런, 그런....
머리카락을 잡고 좌절하는 오라비의 모습에 예사란의 얼굴에 어린 쓴웃음은 천천히 사라졌다.
대신 연민이 그 자리에 떠올랐다.
-솔직히 날 닮은 사람이 왔다는 말엔 기뻤어. 아이가 없는 내게는 오라버니가 유일한 피붙이니까. 근데... 오라버니는 여전히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네.
-아니야! 나는......!
-미안해. 오라버니를 더 빨리 구했어야 했는데.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인 것 같아.
예사란이 검파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청년은 날카로운 검극이 미간을 겨누는 걸 알고 이를 악물었다.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과 혈마를 향한 충성심, 그 모든 것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한데 엉켜붙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눈부신 빛이 사위를 물들였다.
‘심상절예.’
예전에 봤던 것과는 달랐다.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터진 것은 같지만, 그때처럼 육신이 녹아내릴 것 같은 열기는 없었던 것.
청년 자신은 물론, 심상절예에 휩쓸린 산천초목들도 멀쩡하기만 했다.
-...뭐냐?
청년 역시 얼떨떨한 신색이었다.
-방금 건 분명히 심상절예였는데... 어떻게?
-아직도 같은 마음이야?
-뭣이?
-내가 벤 건 사물이 아니야. 오라버니도 아니고. 오라버니의 마음에 있는 누군가의 망령이지.
-......!
-금제는 오래전에 풀렸는데도 혈마의 그림자가 오라버니를 옥죄고 있었어.
평생 족쇄에 묶여 살았던 맹수는 족쇄를 끊을 만큼 강해지고 나서도 탈출하지 못한다고 하던가.
-내 마음을... 베었다고?
-진정한 심검이란 그런 게 아닐까. 뭐, 나도 처음부터 심검을 이렇게 쓴 건 아니지만....
왠지 쑥스러운 얼굴로 코를 슥 훔치는 예사란을 복잡하게 쳐다본 청년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난, 잘 모르겠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야. 혈교에 돌아가진 말고 당분간 한적한 곳에서 잘 생각해 봐.
청년은 힘없이 몸을 돌렸다.
예사란의 심검이 그를 베고 지나간 순간, 모든 것이 허무해지고 공허해졌던 것이다.
그녀가 말한 대로 자신을 옭아매던 사슬이 사라졌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겠지.
예사란은 지친 나그네처럼 돌아가는 혈육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볼 뿐이었다.
* * *
그 뒤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예사란의 당부대로 혈교에 돌아가지 않은 청년은 정처없이 방황했다.
누이의 심검이 마음속의 미몽을 베어버린 순간, 기이하리만치 어릴 적의 기억이 또렷이 떠오르면서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할 수 있었다.
-나는 대체....
한편에서는 잔해처럼 남아있는 미몽이 혈교에 돌아가야 한다고, 그래서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고 종용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혈마가 죽은 지금이야말로 온전히 네 삶을 누릴 기회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대체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그는 그렇게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창칼이 부딪치는 전쟁터를, 역병이 창궐한 마을을, 재난이 닥친 도시를....
중원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을 헤매면서 답을 구했다.
때론 법력 높은 고승이나 선인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원하는 답을 주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지옥에 빠트리는 심마는 내면에 있으니 마음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투적인 조언뿐.
간간이 혈교의 추격자들이 찾아오기도 했으나 힘으로 쫓아냈다.
그렇게 일 갑자의 세월이 지난 끝에.
불현듯 반로환동의 깨달음을 얻어 젊음을 되찾은 그는 자신의 내면에 한 자루 검이 들어섰음을 알았다.
과거 그의 누이가 그랬듯, 그리고 주군으로 모셨던 혈마가 그랬듯 심검을 얻은 것이다.
-이제야 내가 바라는 게 뭔지 알겠구나.
화사하게 웃은 그는 그 길로 은거했던 장소를 떠나서 누이가 살고 있는 마을로 되돌아갔다.
-회춘했구나, 오라버니.
-너 역시.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쌍둥이 남매는 시간의 흔적을 비껴난 듯 젊고 아름다웠다.
자신과 똑닮은 누이를 바라본 청년이 말했다.
-네 덕분에 나는 미몽에서 벗어났다. 이제 나는 내 길을 갈 것이다.
-축하해. 근데 그게 뭐지?
-혈마를 죽일 거다.
그 말에 예사란이 놀란 듯 봉목을 크게 떴다.
-...혈마를?
-놈이 이 땅에 부활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혈마의 혼백은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니까.
-나와 그이의 도움도 필요 없다는 건가?
-그렇다. 만약 내가 하지 못한다면 내 후손이, 그 다음 후손이 혈마를 죽일 대책을 강구하겠지. 나의 후손들은 내 기억과 영성을 물려받을 거다.
-...가혹한 길이 될 텐데.
-어쩌면.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는다. 설령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른다 할지라도.
-이젠 오라버니의 망령이 후손들을 붙잡을 거야.
-아니.
청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내가 곧 그들이고, 그들이 곧 나다. 나는 후손의 몸을 통해 이 예토(穢土)를 영원히 윤회할 것이다.
-...내게 바라는 게 있어?
-가루라의 영성을 내게 다오.
-....
-본디 우리는 하나였다. 어미의 뱃속에서 둘이 되었지만, 둘 중 하나가 죽는다면 남은 하나가 완전해지겠지. 애초에 우린 그런 운명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누이의 얼굴을 들여다본 청년이 입가를 들어올렸다.
-네가 자식을 낳는다면 그 아이가 네 영성을 물려받을 터. 다음대 화신이 되겠지.
-말했을 텐데. 나와 그이는 자식을 보기 힘들다고.
-자신하지 마라. 운명은 얄궂은 법이다. 때론 실낱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법. 네 앞에 있는 오바리의 존재가 그 증거지. 그러나 네 영성을 준다면 나는 고이 물러나겠다.
-날 힘으로 협박하겠다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니, 거래를 제안하는 거다.
-거래?
-네가 영성을 준다면, 막대한 양강지력도 천천히 사그라질 거다. 진조와 자식을 가질 수 있을 터.
-...!
-그리고 네 후손과 제자들은 내가 책임지고 보살펴주마. 몇 대... 아니, 몇십 대가 흘러도 말이다.
-...하나만 물어도 돼?
-얼마든지.
-혈마를 어떻게 죽일 거지? 나도 예전에 진조에게 영면을 약속하고 방법을 찾았지만 실패했어.
-그건 네가 그 남자를 마음에 뒀기 때문에 적당히 찾는 시늉만 한 거지. 나는 다르다. 혈마가 어떤 수작을 부리든 완벽하게 격멸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몽상정토.
청년의 입가에 눈부신 미소가 그려졌다.
-나를 따르는 자들을 한데 모아 그릇된 신을 멸하기 위한 검을 벼려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