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용서 (1)
“후우...!”
무림맹 깊숙한 곳에 있는 전각.
당천경을 통해 흑룡교도들이 구류된 장소에 온 강엽은 심장을 옥죄이는 격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막 깨어났을 때는 상황이 급박한지라 아픈 걸 잊었지만, 한번 자각을 하자 시간이 갈수록 극심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프면 잠깐 쉬었다 갈까?”
옆에서 부축하고 있는 백서희의 살내음이 코끝을 간질일 때마다 폭력적인 충동이 불쑥불쑥 치솟곤 한다.
목구멍이 따갑다. 타는 듯한 갈증이 마음을 갉아먹는다. 누구라도 좋으니 목덜미를 물어뜯고 피를 빨 수 있다면....
퍼억!
“뭐, 뭐야? 미쳤어!?”
갑자기 벽에 머리를 처박는 모습에 백서희가 기겁했지만, 강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통 덕분에 흡혈욕이 약간은 가라앉았으니까.
“...별 거 아니야.”
“피 마시고 싶어서 그래?”
“....”
“뭘 새삼스럽게. 아까부터 침만 꿀떡꿀떡 넘기더만.”
“...미안하다.”
역시 숨기는 게 무리였던 걸까?
강엽이 쓴웃음을 삼키면서 사과하자 백서희가 단검으로 손바닥을 그어 피를 냈다.
“너...!”
“내가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
입가를 따라 씁쓸한 감정이 번졌다.
“나야말로 미안해. 별 도움이 못 돼서.”
그녀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이 미처 맡지 못한 조그마한 구멍을 막는 것에 불과했다.
한데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해서 당천경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한 사람 몫을 하지 않았던가.
하마터면 강엽을 잃을 뻔했다는 자괴감이 심장을 아프게 죄여왔다.
“나도,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참으려고 했는데 눈앞이 뿌얘진다.
강엽은 먼지 묻은 소매로 눈가를 슥슥 닦는 백서희를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운 걸 들키기 싫은지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반짝이는 눈물 방울까지 숨길 순 없었다.
“그러니까 먹어. 이게 지금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유일한... 끄악!”
따끔한 알밤을 맞고 요상한 비명을 지른 백서희가 시뻘게진 얼굴로 쌍심지를 돋웠다.
“뭐야!? 사람이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답지 않게 궁상이나 떠니까 그렇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나라고 얼마나 다르겠냐.”
“그야 넌 나랑 달리...!”
“교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
“교주는커녕 천하팔존에 미치지도 못해. 무림에 투신한 이후에 이렇게 무력감을 느껴본본 적은 없어.”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어이없어했을 것이다.
이제 이립도 안 된 젊은 청년이 자기 수준이 천하팔존에 미치지 못한다며 한탄하다니?
백서희도 반쯤 입을 벌린 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너만 절망한 게 아니라고. 나도 그래. 어쩌면 무림맹에 있는 모두가 그럴지도 몰라.”
“....”
무력감에 시달린 것은 백서희만이 아니다.
강엽은 아직 자신이 최정상의 강자들과 견주기엔 부족하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했다.
“지금은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자.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기회는 반드시 올 거다.”
“...응.”
“그럼 부축 좀 부탁한다.”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말하다 보니 머리가 팽 돌았다.
강엽이 휘청거리자 백서희가 깜짝 놀라 외쳤다.
“야, 야! 강엽!”
“...조금만 더 쉬었다 가자.”
흡혈욕이 가라앉은 건 좋은데, 이젠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이 시야를 덮쳐온다.
‘잠들면 안 되는데....’
의식은 이내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이상하지 않아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강엽은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 봤던 얼굴이 있었다.
‘예사란?’
진조의 기억 속에서 봤던 광명마교의 시조.
초대 가루라의 화신인 그녀가 이전보다는 약간 나이든 얼굴로 말을 걸고 있었다.
강엽은 대답하려고 했지만, 입술은 아교를 칠한 것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전에 그랬듯 운신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거울이 없어서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강엽은 이번에도 진조의 몸일 거라 생각했다.
입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니까.
“뭐가 말이냐?”
“사람의 마음이 타인을 죽이는 방향으로만 귀결될 수 있을까요?”
다소 뜬금없는 말.
하지만 예사란은 꽤나 진지했다.
“똑같은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도 내면에 품은 심상이 다르면 심상절예도 달라져요. 하지만 어떤 심상을 품든, 그게 어떤 형태로 구현되든 적을 죽이는 데에만 쓸모가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심상절예라고 해도 결국 무공의 한 갈래다. 무공으로 적을 죽이는 게 이상한가?”
“사람의 마음 속엔 살의만 있지 않잖아요.”
예사란이 은어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강엽의 가슴팍을 간지럽혔다.
“가령 부처께서 심상절예를 얻으셨다고 가정해보자고요. 부처의 심상이 살생을 지향할까요?”
“...그렇진 않겠지. 심상절예가 필살의 절기로 귀결되는 건 우리가 무인이기 때문이다.”
무인은 죽음을 벗 삼아 칼날 위에서 춤추는 존재.
불살계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은 무인이라 한들, 심상절예는 적을 치기 위한 형태로 완성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심상절예는 상리를 초월한 이적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우리 자신이 만든 기예일 뿐이야.”
아무리 위대한 경지라고 해도 무공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는 뜻.
“네 말대로 사람의 마음은 한 가지로만 귀결되지 않는다. 오만 가지 생각과 감정이 미쳐 날뛰는 혼돈의 바다나 다름없어. 광기나 다름없는 그 망망대해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등대가 필요하겠지.”
심상절예가 바로 그 등대였다.
“심상은 자신이 평생 쌓아올린 무공관(武功觀). 곧 자신의 근원이자 이상향이다.”
“그러니까....”
“하나 근원과 이상향이 언제나 똑같진 않지.”
예사란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숭고한 이상향을 그린다 한들 근원을 벗어날 순 없다. 심상절예는 한계를 초월해야 완성할 수 있지만, 그게 자신의 근원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렇기에 심상절예는 형태는 다를지언정 싸우기 위한 용도로밖에 못 써먹는다는 말로 설명은 끝났다.
예사란은 차마 부정하진 못했지만, 납득한 것도 아닌지 깊은 사색에 빠진 기색이었다.
강엽도 마찬가지였다.
‘무공관이라....’
자신의 근원이자 이상향.
진조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순 없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위화감이 느껴진다.
‘혈공진기를 내 근원이자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나?’
혈공진기가 기반이 되긴 했지만, 흑룡교주의 전륜구룡공 등 온갖 무공의 심상을 끌어오지 않았던가?
여태껏 그 사실에 의문을 품진 않았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쌓은 무공을 바닥부터 돌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라.
* * *
“...아.”
어두컴컴한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서야 자신이 심상세계에 들어왔다는 걸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진조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요즘 자주 정신을 잃는구나.]
“...당신 기억을 엿봤다.”
[호오, 뭘 봤지?]
“당신과 예사란이 심상절예에 논하는 기억이었지.”
강엽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해주자 진조가 턱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군. 네 녀석이 뭘 말하는 건지 알겠다. 확실히 그녀는 심상절예에 대해 많이 고민했었지.]
“심상절예를 완성했는데도?”
[이 세상 모든 무공이 다 그렇지만, 심상절예 역시 완벽히 규명되지 않았다. 어쩌면 알려진 부분보다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
심상절예를 완성한 절대고수라 해도 자신이 이룩한 경지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
지고한 경지에 오르긴 했으나 그들에게도 심상절예는 깊은 바닷속에 파묻힌 심연의 미지였다.
[예사란은 심상절예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적을 치기 위한 구명절초가 아니라, 우화등선을 해서 신선이 되거나 열반에 들어 부처가 되는 것처럼 지고한 존재가 되는 과정으로 여긴 게야.]
“그래서 성공했나?”
[글쎄.]
애매모호한 답이었다.
[그녀는 성과를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후예들은 뭔가 실마리를 찾은 것 같군.]
“...몽상정토.”
[네놈의 혼백이 사멸하기 직전이었기에 짐은 개입하지 못했다. 혼백을 수복하느라 손을 쓸 수가 없었지.]
그럼 몽상정토에서 몸을 회복시킨 건 재생력이 아니라 진조의 개입 덕분이었던 걸까.
하기야 현실에서도 재생력이 통하지 않았는데 심상세계에서 통한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심상세계를 구축하고 나와 만나는 것도 심상절예를 응용한 건가?”
[술법을 조금 곁들이기는 했지. 아마 몽상정토라는 것도 큰 틀에서 보면 이 심상세계와 비슷할 게다.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 같지만.]
“한 발짝 더 나아가?”
[단서는 충분히 준 것 같은데?]
“...지고한 존재 말이군.”
[몽상정토를 설계한 것이 단순히 신도들에게 피안을 약속하거나 복락을 안겨주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왠지 그런 예감이 든다.]
진조 역시 일신의 능력으로 천리를 농락하는 존재.
그런 진조가 높게 평가하는 교주는 얼마나 큰 그림을 그렸단 말인가.
[서두르거라, 후계자야. 그 교주놈이 계획을 완성하면 이 땅의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야. 설령 혈마가 돌아온다고 해도....]
* * *
강엽은 눈을 껌뻑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압박감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니 가슴을 둘둘 만 붕대가 보인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늙수그레한 목소리였다.
말을 건 사람을 돌아본 강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은....”
“이청학입니다. 기억하시는지요?”
“물론입니다. 함께 술잔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흑룡교도들을 무림맹에 데려오는 길에 들른 객잔에서 강엽에게 술을 따라주었던 이 노사.
그가 새하얀 수염을 쓸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다행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심흔이 깊지 않아서 제때 손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이 늙은이가 교의 비술을 이은 술사입니다.”
의외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심상절예로 인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비술을 익혔다니.
“알고 보니 대단한 분이셨군요. 목숨을 빚졌습니다.”
강엽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자 이 노사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은공께서 베풀어주신 것에 비하면 소인의 재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천하제일의 신의라도 심상절예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진 못할 겁니다.”
진심이었다. 염왕에게 흑룡교에 그러한 비술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명불허전이었다.
진조도 강엽이 입은 심흔을 완벽히 치유하지 못해서 임시방편만 해주었던 것 아닌가?
“일행분들의 희생이 컸습니다.”
“예?”
“소인의 비술은 의술이 아닙니다. 술법이지요. 심흔을 치유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심흔을 여러 사람에게 분산시키는 것밖에 없습니다.”
“...!”
강엽은 그게 가능하냐고 묻지 않았다. 가능하기에 지금 이렇게 눈을 뜰 수 있었을 테니까.
“하면 우리 일행이...!”
“다들 은공의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오셨습니다. 사정을 들으시곤 흔쾌히 나서주셨지요.”
“그럼 그들이 위험한 것 아닙니까?”
“여러 명이 분산해서 감당했기에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겝니다. 당분간 몸져눕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일행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연가휘처럼 강한 흑룡교도들까지 지원한 뒤에야 강엽을 저승 문턱에서 돌려세울 수 있었다.
문득 이 노사가 장탄식을 내뱉었다.
“천 년 전 본교를 개파하신 초대 조사께선 평생 동안 심상절예의 대책을 강구하셨지요. 그게 수십 대를 이어온 끝에 소인이 익힌 비술이 탄생했지만, 심흔의 부담을 다수가 짊어지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흑룡교의 초대 조사라면 진조와 예사란의 동료였던 백무량을 말함이리라.
심상절예를 몇 번이나 봤던 만큼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을 터.
‘천 년 전의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군.’
예사란의 후예가 무림맹을 뒤집고, 백무량의 후예가 자신을 살린 셈.
강엽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일행은 어디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