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47화 (245/450)
  • 46화. 심검 (1)

    투하아아아아...!

    경파의 충돌이 대기를 찢어발긴다.

    “저게 뭔... 으헉!”

    “가까이 가지 마라! 도망쳐!”

    경파의 범위에 놓였던 이들은 식겁하면서 몸을 숙이거나 다른 이들의 경고를 듣고 도망쳤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절대고수의 경파가 공간을 통째로 장악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박살냈던 것이다.

    검성의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졌다.

    ‘이놈....’

    본래 그는 주변인들에게 피해를 끼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교주를 한갓진 곳으로 몰아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하하, 어떤 수작인지 뻔히 보이는데 낚여주겠나?”

    막강한 경력이 깃든 검격이 교주를 베었지만 손에 감기는 맛이 없다.

    ‘부동명왕보(不動明王步)?’

    소림칠십이종절예 중 하나로서 정중동의 극한을 추구한 절세의 보법.

    광명마교의 교주가 구사하는 보법은 부동명왕보를 연상시켰다. 찰나에 수많은 공방을 나누는 동안 모든 공세를 무위로 돌렸다.

    ‘아니, 그건 아닌가.’

    사마외도답게 사람의 인지를 현혹하는 사술.

    동자료혈에 진기를 집중한 검성의 눈에 노을을 닮은 자색 광채가 떠올랐다. 사특한 재주를 꿰뚫어보는 화산파 비전의 안법이다.

    “뭔가 했더니 하찮은 속임수였군.”

    “호오?”

    “빛을 굴절시켜 신기루를 그린 게 아니더냐. 내 감각마저 속이다니 대단한 사술이다. 하나....”

    차아아아앙!

    불현듯 몸을 뒤집은 검성이 배후의 기습을 막아내고 역습을 가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뒤를 점거한 교주가 손바닥을 펼쳐 검날을 받아치면서 장대한 폭음이 울렸다.

    터어어어어어엉......!

    지붕이 주저앉고, 막대한 충격파가 반경 십 장 너머로 퍼져나간다.

    회심의 반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에도 검성은 실망하지 않고 담담히 기세를 쏟아냈다.

    “똑같은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군. 능천광야(凌天廣野)를 간파했는가.”

    교주의 손바닥에서 퍼져나가는 금빛 파문이 검성의 검을 밀어냈다.

    동시에 주변에 수십 개의 밝은 구체가 떠올라 교주를 중심으로 미친 듯이 회전한다.

    이번엔 검성도 턱이 빠질 만큼 놀랐다.

    “모두 강구란 말인가?”

    교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그럼 이것도 파훼해보거라.”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강구의 세례는 하나하나가 의지를 지닌 것처럼 허공을 유영했다.

    허리를 눕히면서 하나를 피하고, 몸을 날리듯이 하체를 회전하면서 검면으로 강구를 받아넘긴다. 이화접목의 이치로 흘려보낸 강구가 다른 강구와 부딪쳤다.

    쿠와아아아아앙......!

    포말처럼 치솟아 사위를 밝히는 압도적인 섬광.

    숨막힐 듯한 열기를 뒤집어쓴 나무들과 목재 기둥들이 화마에 휩싸이는 참상에 검성이 이를 악물었다.

    재난에 휘말린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가 아프도록 귀를 찔렀다.

    “비겁한 놈이....”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니라.”

    교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수십 개의 강구들이 엇박자로 쏟아지며 사방팔방 휘젓는다.

    좁은 공간을 빠져나가는 검성의 처지는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그는 열기와 섬광을 관통하며 교주를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자색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매화인동(梅花忍冬).

    열기와 섬광을 종잇장처럼 갈라버리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절초. 절대고수의 의념을 담은 검격이 수십 개의 강구를 단숨에 쪼개버린다.

    찢어진 공간 너머에 있는 교주가 기껍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래야 천하팔존이라고 불릴 만하지.

    언뜻 그런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지나간 것 같다.

    더 보여달라고 도발하는 걸까.

    ‘오냐, 얼마든지 보여주마!’

    손에 쥔 보검에 화산의 기상이 움텄다.

    심상에 한 그루의 매화나무를 품은 화산의 장문인은, 매화가 만개한 화산 그 자체였다.

    올올이 풀어내는 검초에 매화검의 오의가 담겨 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가 천지자연의 조화에 따라 춤추고 너울진다.

    어지러이 흩날리는 검초에 은은한 매화향이 퍼져나갔다.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매화의 향이 구주천하에 퍼져나가고, 천지만물이 그 향에 흠뻑 취해 어지럽게 노니는구나.

    “흠, 이건....”

    교주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코끝을 스치는 매화향은 단순한 환취(幻臭)가 아니었다. 매화검의 경지가 극성에 달하면 가벼운 검로에도 매화향이 깃든다지만....

    “훌륭하다, 검성. 이 경지에 도달했는가?”

    교주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검성이 승부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주변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처음부터 전력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치이이이익......!

    찰나 교주를 둘러싼 세상이 명암을 잃고, 검성만이 기이하리만치 뚜렷하게 각인되기 시작한다.

    검성을 중심으로 전면에 쏟아진 심상의 파동.

    심상이 깃든 중단전을 중심으로, 상중하 삼단전이 연쇄적으로 공명하여 구명절초를 쏟아낸다.

    -천경매화랑(天勁梅花浪).

    상단전으로 천지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하단전의 공력으로 뒤를 받치며, 중단전의 심상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전심전력으로 쏟아붓는 일격.

    ‘검강이니 이기어검이니 하는 것들조차 잡기에 불과하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평생을 쌓아올린 심상을 포탄 삼아 적의 심장을 겨누는 것이다.

    수천, 수만 장의 꽃잎의 파도가 밀려들어온다.

    -......!

    호신강기를 펼쳐도 소용없었다.

    수만 장의 꽃잎들이 말 그대로 호신강기를 갉아먹고 있었으니까. 매화의 파도에 떠밀린 교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승리를 확신하며 마무리를 가하려고 할 때.

    [경탄스럽도다. 검성, 그대는 궁검보다 적어도 한 수는 더 앞서는구나.]

    수만 장의 꽃잎을 뚫고 울려 퍼지는 전성.

    그 태연함에 눈썹을 굽힌 검성이 재빨리 연환식을 이으려고 했지만,

    검로를 잇기도 전에 찬란한 섬광이 천경매화랑의 꽃잎들을 뚫고 하늘 높이 뻗어올랐다.

    [답례로 본좌 또한 보여주마.]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천지의 모든 것이 시커멓게 물들고, 지상에서 뻗어나간 빛줄기가 하늘을 갈라버리는 환상.

    자신이 무엇을 봤는지 깨달은 검성이 기겁하는 것과 동시에, 교주의 전성이 준엄하게 선고한다.

    -심상절예 구현....

    검성이 언뜻 엿보기만 한 경지.

    감만 잡고 있는 심검지경의 완성이 눈앞에 현현하자 검성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찌 본신도 아닌 몸으로 완성된 심상절예를...!’

    교주가 심상절예를 완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진작 갖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원영신의 몸으로 구현할 줄이야?

    -천단(天斷).

    바로 그 순간.

    ‘아....’

    검성은 자신이 평생을 쌓아온 심상이 교주의 심검에 깨져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 절망감이 찾아오기도 전에.

    서걱!

    평생을 단련한 오른팔과 보검, 그리고 그의 뒤편에 있는 무림맹의 전각군이 모조리 두 동강 났다.

    * * *

    “.......”

    막지도, 피하지도 못했다.

    검성이 심검을 인식하고 경악했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심지어 벤다는 과정도 없었다....’

    땅에 떨어진 오른팔은 수중의 보검과 함께 먼지가 되었다.

    자연히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그게... 그게 정녕?”

    “그렇다.”

    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영신의 몸으로 심검을 썼기 때문인지 약간은 해쓱한 안색.

    그러나 검성과 달리 사지가 멀쩡했고, 아직은 여력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엔 약간 빗나간 모양이다. 본신으로 썼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커억!”

    천운은 두 번 따르지 않는다.

    간신히 즉사는 면했지만 검성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예감했다.

    팔만 잘라낸 걸로 끝이 아니라 교주의 기운이 경맥 전체를 헤집고 다녔기 때문.

    “그래도 시작한 이상 끝은 봐야겠지. 그대는 본교의 위엄을 세우는 효시가 될 것이다.”

    교주가 손을 들어올리자 먼 곳에서 날아온 금빛의 광채가 안착했다.

    일사도가 무림맹에 맡긴 보검.

    검갑에서 빠져나온 은은한 백금색의 검날이 허옇게 질린 검성의 낯짝을 누렇게 비추었다.

    “이렇게 죽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심상절예를 완성할 수도 있었겠지. 그대의 만용을 탓하거라.”

    “......!”

    정수리를 향해 내려치는 검격.

    하지만 어디선가 날아온 대도가 백금색의 검날을 튕겨내고 교주를 멀리 밀어버렸다.

    신형을 뒤집어서 착지한 교주의 입매가 차갑게 비틀렸다.

    “결국 체면을 버리기로 했나?”

    “...맹주?”

    검성이 다 죽어가는 안색으로 눈을 돌린 곳엔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맹주가 있었다.

    조금 뒤쪽엔 양손에 검과 도를 쥔 낭왕이 서늘한 눈으로 교주를 견제하고 있었고.

    “쿨럭, 어찌... 무인의 싸움에....”

    “미안하오. 도리가 아닌 줄은 아나, 장문인께서 입적하시는 꼴은 차마 볼 수 없었소이다.”

    망연해하는 검성을 외면한 맹주가 손을 뻗자 대도가 절로 빨려들어왔다.

    “교주, 그대가 천하제일인임을 인정하겠네. 원영신뿐만 아니라 심상절예까지 완성하다니... 궁검을 죽인 것도 필시 심검이겠지?”

    “아니다.”

    “뭣이?”

    “궁검은 심검을 쓸 가치조차 없었지. 힘의 격차를 실감하자마자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더군.”

    “헛소리! 궁검은 그럴 사람이 아니네!”

    “하하, 사람의 성품은 극한의 상황에 몰릴 때 나타나는 법이지. 그대가 믿든 안 믿든 궁검이 소인배처럼 살려달라고 빌었던 건 사실이야.”

    “네놈...!”

    “맹주.”

    낭왕의 조용한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린 맹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중요한 건 궁검이 어찌 죽었는지가 아니오.”

    “...그렇지.”

    눈앞에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교주의 상태를 보면 심상절예를 몇 번이고 쓸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지만, 그가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싸운다면 어려운 싸움이 될 터.

    물론 교주도 몸을 바친 일사도를 잃겠지만, 천하팔존 세 명의 목숨을 취한다면 손해는 아니리라.

    “어차피 검성은 그대로 내버려둬도 죽을 몸. 맹주... 아니, 멸도. 그대와 낭왕까지 죽인다면 성공이다. 무림맹은 감히 본교에 대적할 엄두도 못 내겠지.”

    “그 말은 틀렸다.”

    “...음?”

    “강호에 사람은 많다. 우리보다 강한 선배님들도 계시지. 설령 우리 셋이 이 자리에서 쓰러져도, 우릴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염왕과 불권을 말하나?”

    “염왕께서 출도하신 걸 알고 있었군.”

    “그자가 칠사도를 죽였을 때부터 알아봤지. 확실히 염왕은 꺼림칙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오히려 이 기회에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불권도 계신다.”

    “불권은 산 송장이나 다름없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뭐?”

    “천기가 말해주더군. 불권의 수명은 일 년도 남지 않았다고 말이야. 염왕과 진조의 후예만 제거하면 본교의 대계를 방해할 자는 없다.”

    “진조...?”

    처음 듣는 호칭에 맹주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이자 교주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대는 알 것 없다. 먼 고대부터 이어진 인연이니까. 아, 생각해보니 혈마도 있긴 하군. 하지만 혈마가 이 시대에 부활할 일은 없을 거다.”

    “....”

    제갈의현으로부터 들었던 혈교의 대계.

    그 말이 광명마교주의 입에서 다시 나오자 맹주의 눈빛도 심각해졌다.

    “말이 길었군. 이제 그대들의 목숨을 거둬야겠....”

    그렇게 다시 검을 들어올린 교주가 심검을 구현하려는 찰나.

    우우우우우웅......!

    돌연 그의 몸이 뼛속까지 비칠 만큼 투명하게 일렁거렸다.

    완성 직전에 이르렀던 심검이 스러진 것을 감지한 교주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이런, 원영신이...?”

    그와 일사도를 잇는 가교가 흔들리고 있었다.

    교주의 변한 모습에 맹주와 낭왕이 뜨거운 기도를 뿜어냈다.

    “그 친구가 성공한 모양이구만. 원영신을 봉쇄할 수 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어.”

    “내 말하지 않았소. 헛소리를 할 친구는 아니라니까.”

    낭왕이 이죽거리면서 한마디 거들자 맹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도를 들어올렸다.

    “그래도 혹시나 싶었지. 믿어서 손해볼 게 없긴 했지만, 그 친구를 돕기 위해 정도십대고수만 네 명이 나서지 않았는가?”

    * * *

    “크헉! 너, 이교의 죄인...!”

    빠득 이를 간 광명마교의 교도.

    강엽은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교도의 심장에 일장을 때려박았다.

    피를 토하고 쓰러진 교도의 몸 한쪽에서 몽환적인 청염이 일어나서 부적을 태워버린다.

    교도의 시체를 일별한 강엽은 건물을 나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술법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정안이 저 먼 곳에서 싸우는 교주와, 무림맹 바깥의 저잣거리에 숨은 자들의 연결을 샅샅이 파헤친다.

    “대충 다 끝났어. 이것들 정말로 꽁꽁 숨어 있었네.”

    별안간 골목으로 떨어진 백서희가 투덜거렸다.

    강엽과 함께 무림맹에서 나온 그녀는 방금까지 강엽이 알려준 곳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네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거야. 설마 마교 새끼들이 양민으로 위장해서 교주를 돕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전부 다 찾기 전까지는 안 끝나.”

    교주의 원영신은 일신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와 일사도를 잇기 위해 광명마교의 교도들이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영신을 만드는 건 교도들의 도움이 필요 없겠지. 하지만 멀리서 사도의 몸에 강림하는 건 아무 대가도 없이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야.”

    문제는 가교 역할을 하는 마교도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 개중엔 무시할 수 없는 고수도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폭음을 들은 강엽이 미간을 좁히자 백서희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저긴 당문주님이 가신 곳인데....”

    “괴뢰마다.”

    “엥?”

    “놈도 와 있었던 모양이군. 교도들만 믿지는 못했던 거겠지. 당문주가 놈과 충돌했어.”

    수많은 분신을 조종해서 불사에 가까워진 괴뢰마.

    놈의 기파가 당문주의 기파와 충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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