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사절 (6)
“흠, 이건....”
어딘가 먼 곳을 향한 중얼거림.
무섭게 몰아치다 말고 갑자기 몸을 돌려버리는 염왕의 모습에,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던 하후진이 의아해했다.
“...사부?”
“가만히 좀 있어봐라.”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문 하후진은 속으로 구시렁거렸으나, 얼마 안 있어 사부가 바라보는 방향이 무림맹 쪽이라는 것을 알고 표정이 변했다.
‘아니, 암만 그래도 무림맹까진 이백 리가 넘는데....’
두 사람이 있는 숭산은 무림맹이 있는 정주와 맞닿아 있긴 해도 실제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염왕의 기감이 초월적이라고 해도 그만한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지할 수 있을까?
‘근데 무림맹이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뭐가 있나?’
염왕을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봤지만, 일견 보이는 것은 쏟아질 듯이 빛나는 별들의 군락과 반쯤 어둠 속에 파묻힌 푸르스름한 달뿐.
그때 눈부신 빛살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아, 소원 빌 시간 놓쳤다.”
뒤늦게 별똥별이 떨어졌다는 걸 깨달은 하후진이 퍽 아쉬워하며 염왕을 곁눈질했다.
다소 굳은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고 있던 염왕이 쯧하고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넌 어찌할 셈이냐?”
“엥? 저, 저요?”
“너 말고. 네 뒤에 있는 놈.”
아니, 여기에 그들 말고 다른 이가 있을 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무심코 몸을 돌린 하후진은 자신의 뒤에 있는 귀신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목내이처럼 바짝 마른 괴인이 배후를 점거한 채 긴 음영이 드리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
“이런 시발, 이건 또 뭐...!”
저도 모르게 칼부터 휘둘렀지만, 칼은 괴인을 베지 못하고 주름진 손가락에 막혔다.
강인한 공력이 움튼 도격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손가락에 생채기도 입히지 못한 것이다.
“...호신기나 호신강기도 없이 막았다고?”
눈을 부릅뜬 채 경악성을 토하는데, 등 뒤에서 염왕의 목소리가 나직이 이어졌다.
“그런 건 동격의 고수들 사이에서나 유의미한 거지. 네놈이 만전의 상태로 싸워도 저 땡중의 몸엔 상처도 못 입힐 거다. 땡중이 허락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땡중이라니....”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하후진은 그제서야 괴인이 입고 있는 게 헤질 만큼 낡은 가사이며, 목에 길쭉한 염주 목걸이를 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얼굴의 주름이 흘러내릴 정도로 늙긴 했어도 귀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 나 방금 스님한테 욕한 건가?’
거칠 게 없는 하후진이라지만 승려에게 욕을 했다는 건 찝찝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전에 이 노승이 기척도 없이 다가온 게 근본적인 이유였지만 말이다.
염왕이 짝다리를 짚으며 말했다.
“불권, 역시 네놈도 느낀 모양이군.”
하후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미친, 불권이라니...!’
흑룡교와의 정마대전에서 염왕과 함께 흑룡교주를 쳐죽인 영웅이자, 오늘날까지 천하팔존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절대고수.
자신이 천하팔존에게 칼을 휘둘렀다는 걸 깨달은 하후진은 눈앞이 아득해졌으나, 불권은 후배의 무례는 개의치 않는 듯 반장을 세우며 무량수불을 읊조렸다.
“그 녀석의 결례는 내가 대신 사과하지. 하지만 법공 네놈의 장난도 도를 넘었다. 몰래 접근해서 다 늙은 상판대기를 들이대면 백이면 백 다 경기를 일으킬 텐데.”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지는 불권의 입매.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하후진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허리를 넙죽 숙였다.
“...초면에 죄송했습니다, 스님.”
“마음 쓰지 마시게. 염왕 시주의 말씀대로 노납이 기척도 없이 접근했으니까.”
눈가엔 검버섯이 가득한 데다 주름은 자글자글한 걸 넘어 밑으로 흘러내릴 지경.
그럼에도 불권의 목소리는 더듬거리거나 발음이 새는 일 없이 또박또박 이어졌다.
“선재, 선재로다. 염왕도문은 강골이 아니면 입문조차 불가능한 무맥. 염왕 시주께선 훌륭한 제자를 찾아내셨구려.”
“얼굴에 금칠은 적당히 해라. 너무 금을 발라줘서 대웅전에 있는 불상과 똑같이 보일 것 같군.”
뜻 모를 미소를 짓는 불권이었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지만, 하후진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내 제자 녀석이 아니지. 땡중 넌 어쩔 생각이냐? 가볼 거냐?”
“노납이 끼어들 자리는 아닌 것 같소.”
“어째서?”
“.......”
염불을 쥔 불권이 조용히 불호를 읊조리자 염왕의 이마에 깊은 고랑이 패였다.
“네놈, 수명이 얼마 안 남았구나.”
뜻밖의 말에 하후진의 눈이 쥐방울 만해졌다. 그가 볼 땐 불권은 늙긴 했어도 아직은 정정했던 것이다.
적어도 근시일 내에 덜컥 죽을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무량수불... 작금의 시대에 늙은 승려가 설 자리가 어디 있겠소.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 새로운 시대의 주역들이 이 늙은이의 자리를 밀어낼 것이오.”
“그러게 진작에 금분세수나 할 것이지. 무슨 미련이 남아서 방장 자릴 차지하고 있나?”
“허허, 염왕 시주의 말씀이 맞소이다. 번뇌를 떨치지 못한 못난 늙은이의 투정이지.”
“네놈이라면 반로환동은 하고도 남을 텐데... 스스로 기회를 걷어찬 것 같군.”
“쏟은 물을 주워담을 순 없는 법. 세월을 거스르는 건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오.”
“그 말을 내 앞에서 하는 거냐?”
염왕이 기가 차다는 듯 썩어문드러진 미소를 짓자 불권 역시 허허 웃으며 허연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러는 염왕 시주께선 어찌하실 생각이시오?”
“가볼 생각이다. 신경 쓰이는 놈도 하나 있고.... 아,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그 뒤부터는 육성으로 말을 나누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입술을 우물거리는 시늉도 하지 않았지만, 하후진은 그들이 전음을 나누고 있다는 걸 알고 조용히 찌그러졌다.
“...염왕 시주는 열정적이시구려. 불제자가 품을 마음은 아니지만, 가끔은 그 열정이 부럽기도 하오.”
“모르는 일이지. 어쩌면 땡중 안에도 조금은 젊은 시절의 열정이 남아있을지도.”
그 말을 남긴 직후 밤하늘을 가로질러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지는 염왕의 신형.
졸지에 방치된 하후진이 눈을 껌뻑이자 불권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염왕 시주께선 금방 돌아오실 걸세.”
“아, 네. 뭐...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은 양반이니까 그러려니 합니다. 근데 아까 두 분이서 무슨 얘기를 나누신 겁니까? 물어봐도 됩니까?”
“별 건 아니고 잠시 자네 수련을 봐달라고 하더군.”
“...스님께서요?”
“왜, 이 늙은 땡중으로는 성에 안 차나?”
“헉! 아, 아니 그건 아니고...!”
“걱정 말게. 이래봬도 사대나한을 가르친 몸이니까.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면 자네도 쑥쑥 성장할 게야.”
민간에서 부처로 여겨지는 신승(神僧)답게 불권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하후진은 왠지 걸려선 안 될 사람에게 걸린 기분에 오싹해졌다.
불권의 뒤에 흉악하게 웃고 있는 사천왕상이 보인다면 기분탓일까?
“염왕 시주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바로 시작하세. 가볍게 대련부터 하는 게 좋겠군.”
“아니, 제가 스님을 이길 리가....”
“최선을 다하게나. 노납의 가사라도 스치면 소환단을 주겠네. 생채기라도 입히면 대환단을 주고.”
꿀꺽.
무의식적으로 목울대를 크게 움직인 하후진이 깊이 심호흡을 했다.
얼떨떨하긴 해도 천하의 불권이 허언을 내뱉진 않을 테니 죽을힘을 다할 작정이었다.
* * *
‘성 하나를 주겠다....’
자신을 비무에서 이길 시에 돌려주겠다는 내기.
자존심만 내려놓는다면 무림맹의 인사들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몇 명이서 합공을 하든 교주를 꺾는다면 전쟁을 벌이지도 않고 성 하나를 돌려받을 수 있으니.
“.......”
하나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한다.
천하팔존을 격살한 교주를 누가 쓰러트릴 텐가.
맹방의 무인들 중 고수가 아닌 이가 없음에도, 합공의 치를 범하면서까지 교주를 잡을 엄두를 못 낸다.
“왜들 그러나. 본교와 전쟁을 하겠다고 이리 모인 것 아니었나? 그대들 앞에 마교의 우두머리가 있다. 본좌를 꺾지 못하고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는가?”
호기로운 도발에 몇몇 인사들이 발끈했으나, 교주와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굴욕만 삼켰다.
“...그런가.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지. 나서지 않겠다면 그걸로 됐다. 이로써 그대들이 본교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교주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저벅.
뒤쪽에서 거리를 좁히는 인기척.
“검성...!”
“장문인!”
교주를 향해 걸어가는 검성의 모습에 옥청선자와 중인들이 기함했다.
맹주와 낭왕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찰나, 검성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이 싸움은 온전히 내 것이오.”
“무모한 결정이외다.”
맹주가 우려를 표했으나 검성은 오히려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전의를 불태웠다.
“천하팔존씩이나 되어서 합공을 퍼붓는다면 세인들이 비웃지 않겠소. 게다가 상대 역시 본신이 아니오.”
원영신으로 강림한 교주가 과연 얼만큼 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뭣보다 마교도 따위가 저리 도발하는데 응수하지 않는다면 정파의 무인이라 할 수 없을 터.”
맹주가 뒤편에 있는 옥청선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부를 만류할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낯빛 가득 먹구름이 드리웠다.
검성이 손을 들자 요란한 충돌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앙......!
벽면을 부수고 질주하는 섬광.
경호성을 발한 중인들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듯이 날아오는 검이 검성의 수중에 잡혔다.
아까 전 맹주가 그랬듯 초월적인 허공섭물로 모처에 보관했던 독문병기를 회수한 것이다. 시퍼런 검날이 바깥으로 자태를 드러내며 서늘한 기도를 뿜어냈다.
“.......”
모두가 숨을 죽이는 순간이었다.
마교의 우두머리답지 않게 거룩한 서광을 두른 교주와, 도문의 종사답지 않게 패력을 드러낸 검성의 대치.
한편 강엽은 초음으로 교주의 전신을 살폈다.
이쪽이 초음을 쓴다는 걸 알아차린 듯 강엽을 힐끗거리는 눈빛에 기광이 감돌았다.
강엽은 개의치 않았다.
‘상중하 삼단전이 이어져 있지만, 상단전은 또다시 외부와 이어져 있다. 교주의 본신과 이어져 있나?’
육안으로는, 심지어 기감으로도 헤아릴 수 없다. 오직 초음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희미한 연결고리.
교주를 관찰하던 강엽의 오른쪽 동공에서 청광이 뿜어져나왔다.
이 세상 모든 술법을 파훼하는 정안의 현현이다.
교주의 원영신에 술법의 이치가 깃들었다면 정안으로 분석하지 못할 리가 없다. 사도의 육신을 그릇으로 삼은 교주의 영성이 그에 반응하듯 꿈틀거렸다.
“진조의 후예, 삿된 짓을....”
찰나였다.
투아아아아앙!
아무런 전조도 없이 교주의 면전에 나타난 일검이 방점을 찔렀다. 강엽에게 신경이 분산되었던 교주의 빈틈을 절묘하게 파고 들어온 한 수.
두 절대고수 사이에 무지막지한 반탄력이 일어나며 반경 삼 장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콰콰콰콰콰콰쾅!
“피해랏! 휘말리면 죽는다!”
“커억!”
경고를 발하는 목소리와 피를 토하는 자들의 신음성이 뒤를 따른다.
이에 맹주와 낭왕이 손을 뻗어 두 절대고수의 충돌로 터져나온 기파를 상쇄했다.
“장문인!”
대답은 없으나, 검성은 맹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듯 교주를 향해 일장을 뻗었다.
교주 역시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장력에 몸을 맡기며 앞서 무너진 천장을 향해 비상했다.
그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하늘 높이 떠오른 뒤에야 남아있던 사람들이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갔군.”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네.”
검성은 혼자 싸우기를 바랐다. 세 명이서 합공해서 이긴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머릿속에 없었다.
설령 패하더라도, 그 결과 목숨을 잃더라도 정파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리라.
맹주가 침통한 얼굴로 한탄했다.
“지켜만 볼 텐가?”
“달리 방법이 없지 않소? 상대가 마교주라 하나 일대일 비무에 끼어드는 건 도리가 아니외다.”
낭왕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때였다.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으음?”
장내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낭왕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설마 이제 와서 합공하자는 말은 아닐 테고... 어떤 방법으로 검성을 돕겠다는 거냐?”
“원영신을 봉쇄하겠습니다.”
지고한 술법을 막겠다는 대담한 발언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선룡대주의 부축을 받은 제갈의현이 급히 물었다.
“쿨럭, 그게 무슨 말인가!?”
앞서 교주의 현신을 막으려다가 실패한 충격으로 피를 토한 그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씀드린 그대로 교주의 원영신을 파훼할 겁니다. 다만 그러려면 맹주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설명. 강엽이 맹주와 낭왕, 제갈의현에게 전음을 보내자 다들 침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