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48화 (246/450)

46화. 심검 (2)

적들의 반격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곳곳에 숨겨둔 분신들의 죽음을 감지한 괴뢰마가 쓰게 웃었다.

“...우연히 찾아낸 게 아니었군.”

“말하지 않았나.”

부서진 돌담 위에 엎드린 그의 위로 나타난 고목처럼 메마른 사내.

암독쌍절 당천경, 사천 무림을 대표하는 절세고수인 그가 온몸 가득 시커먼 독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괴뢰마가 울컥 피를 토했다. 내상도 내상이지만, 독기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던 것이다.

“하아... 이 육신도 글렀는가.”

“네놈이 분혼대법이라는 걸로 분신을 조종한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런 짓을 수십 년간 해오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무당의 양의심공을 익혀 마음을 두 개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괴뢰마와 같은 짓은 못할 테지.

괴뢰마가 피를 흘리면서 웃었다.

“불광불득(不狂不得)이라고 하지. 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해. 비원을 추구하기 위해 법도와 천륜을 능멸하는 게 마인이란 족속이다.”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걸 참 고상하게 말하는구나.”

당천경은 더는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이 시커먼 독수로 괴뢰마의 천령개를 내려쳤다.

뇌수와 피를 뿌린 괴뢰마의 시신을 뒤로하고 하늘 위로 시선을 돌렸다.

푸드득 날개를 홰치는 박쥐의 모습.

괴뢰마가 죽는 것을 보자마자 천천히 몸을 돌려 저편으로 날아간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속도를 조절하는 박쥐의 모습에, 당천경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범상치 않은 녀석이란 건 알았지만 보면 볼수록 양파 같은 놈이군.”

교주의 원영신을 봉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최대한 많은 일손을 빌려줄 것을 요구하더니, 대뜸 어디선가 불러온 박쥐 떼를 붙여주었다.

박쥐들이 광명마교의 주구들을 찾을 수 있다면서.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적들을 색출하긴 했지만, 이런 일을 겪으니 강엽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젊은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른 건 재능이나 좋은 사부를 만나서 그런 거라도 쳐도, 이런 신묘한 재주는 또 어디서 익혔는지....

“문주님.”

불쑥 솟아오른 그림자.

시커먼 흑립과 피풍의를 뒤집어쓴 암객이 서둘러 보고했다.

“맹에 있던 광명마교의 교도들이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선룡대와 무환대(武奐隊)가 나섰습니다.”

“선룡대는 그렇다 쳐도 무환대까지?”

일사도를 보필했던 광명마교의 교도들은 스무 명뿐. 그들이 전원 고수라고 해도 이백여 명의 선룡대가 제압하지 못할 리가...?

“상대한 적들이 전부 괴뢰마의 분신이었습니다. 그중에 세 명은 삼화취정에 가까운 무위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특히 마지막엔 자폭을 감행해서 피해가 큽니다.”

“자세히.”

“선룡대주가 중상을 입었고, 선룡대 무인들도 절반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무환대도 십수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심각하군.”

다른 곳도 아니고 무림맹의 한복판에서 이만한 피해가 발생한 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무림맹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건 물론이고, 맹주와 총군사 등 수뇌부들이 책임져야 할지도 모르는 일.

전시에 준하는 상황인 만큼 당장 맹주와 총군사의 자리를 갈아치우지는 않겠지만, 한동안 무림맹이 시끄러울 것은 불보듯 뻔했다.

“아가씨께선 소식을 듣자마자 부상자들을 치료하러 가셨습니다.”

“당문의 의원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당천경이 여상스럽게 대꾸하는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들이닥친 거대한 힘. 무지막지한 굉음이 천지를 울리고, 시야가 일순간 하얗게 명멸했다.

“으헉!”

“큭...!”

암객이 고통스러워하며 고꾸라지고, 당천경도 감각을 보호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잇몸이 으스러지도록 이를 꽉 물면서 간신히 돌담을 잡은 그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참상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사 장 높이의 성벽과 그 너머에 있던 웅장한 전각군들이 정확히 반으로 쪼개져 있는 광경.

머나먼 태곳적에 하늘을 떠받들었다는 최초의 거인 반고가 검격을 내치면 이렇게 될까.

초월적인 의념의 파동에 닿은 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혼절하거나 쓰러진 채 경련하고 있었다.

“...사람의 힘이 아니군.”

당천경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 * *

강엽도 충격을 받기는 매한가지였다.

‘심상절예.’

진조의 기억 속에서 겪었던 심상절예.

당시 겪었던 것과 형태가 다르긴 하나, 심령을 깊숙이 헤집은 충격은 거의 비슷했다.

심상절예에 함축된 의념의 파동을 접한 것만으로도 혼백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듯한 충격.

그나마 이전에 한번 겪어본 덕분인지 그럭저럭 버틸 만했지만, 함께 움직였던 백서희는 정신을 잃은 채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소용없는 짓거리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괴뢰마가 냉소했다.

그 역시 심상절예의 충격에서 자유롭진 않은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강엽을 향한 눈빛엔 승리에 대한 확신이 돋보였다.

“심상절예는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지. 똑같이 심상절예를 얻은 자만이 대응할 수 있다.”

흔히 하수들이 아무리 뭉쳐도 벽을 넘은 초절정의 고수에겐 상대가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

괴뢰마는 교주의 심상절예가 작렬한 순간부터 검성에게 승산은 없었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무림맹은 맹주와 검성을 잃는다. 덤으로 낭왕까지. 천하팔존 중 절반이 사라지는 거다.”

백도 정파엔 소림의 불권과 무당의 검선만이 남는다.

나머지 두 명의 천하팔존 중 패군(覇軍)은 황실을 섬기며, 신유(神遊)는 강호를 자유롭게 떠도는 신비고수로서 행방이 묘연했다.

“교주가 신위를 드러냈으니 제아무리 백도 정파라 한들 함부로 전쟁을 일으킬 순 없을 터. 이제 광명교는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대계를 진행할 수 있다.”

복수도 급이 맞아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맹주를 포함한 주요 고수들이 사망하면 복수심이 들끓겠지만, 당장 광명마교로 쳐들어가진 못할 터.

이 와중에 혈교까지 기승을 부린다면 이제 무림맹은 광명마교에게만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글쎄, 일이 너희들 뜻대로 될지는 두고 봐야지.”

“저런 걸 보고도 말인가?”

괴뢰마가 강엽의 뒤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교주의 심검을 정통으로 맞은 무림맹의 건물들이 성벽 너머까지 분단되어 흙먼지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필시 저 궤적에 걸린 이들은 시체도 못 남기고 먼지가 되어 흩어졌으리라.

“패배를 인정해라.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무림맹의 고수가 모래알처럼 많다고 한들 결국 모래알일 뿐. 천년의 거암에 비하지는 못하지.”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대화를 나눠서 정보를 유도하기엔 괴뢰마 또한 만만찮은 심계의 소유자였다.

당장 그를 막으러 온 것도 강엽을 이대로 내버려두면 교주에게 방해가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강엽을 중심으로 무림맹 안팎에 널리 퍼진 고수들이 광명마교의 교도들을 색출하고 있지 않나.

“네가 사도만큼 강하다는 건 알겠지만, 기절한 계집을 끼고 나와 싸우는 건 어리석은....”

괴뢰마는 더는 빈정대지 못했다.

콰아아아앙!

바닥을 통째로 뒤집으며 솟구친 붉은 줄기들.

저들끼리 뭉친 혈목 다발의 물량 공세에 미간을 좁힌 그가 쌍장을 내뻗었다.

막대한 장력을 맞은 혈목 다발이 주춤한 것도 잠시.

이내 기세를 회복한 혈목 다발이 사방팔방에서 넓게 쏟아지며 괴뢰마를 추격했다.

‘이전과는 다르지. 혈목도 함께 성장했다.’

강엽이 벽을 깨고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르면서 혈목 또한 영향을 받아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졌다.

뿐만 아니라 이전과는 격이 다른 움직임을 가져가며 효과적인 압박을 수행했다.

상대하는 입장에선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창술?”

정체불명의 붉은 줄기들이 실로 정교한 창술을 구사하고 있었으니까!

-관영신창.

과거 흑룡교와의 정마대전에서 산화한 전대 고수가 남긴 청동무인상.

한중의 암시장에서 손에 넣을 뻔했지만, 돈이 부족했던 바람에 코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청동무인상을 손에 넣은 염왕과는 무림맹에 오는 여정 동안 여러 얘기를 나누었고, 개중엔 관영신창에 대한 것도 있었다.

‘염왕이 욕심이 없는 게 다행이었지.’

염왕은 함께 싸웠던 전우의 유산이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했을 뿐, 딱히 자신이 관영신창을 익혀서 뭔가 이루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언젠가 관영신창을 이을 만한 기재를 만나면 전우의 유산을 물려줄 생각이었을 뿐.

혈목의 움직임이 한층 기민해졌다는 걸 깨달은 강엽은 염왕을 설득하여 한 가지 조건을 걸고 청동무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언젠가 관영신창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아직 완벽히 복원한 건 아니나, 혈목으로 하여금 전반부 초식들을 구사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강엽이 일일이 조종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의지로 관영신창을 구사하는 단계.

수십, 수백 개의 혈목들이 날카롭게 벼려진 끝부분을 창날 삼아 덤벼들자 괴뢰마가 당황했다.

“...뭐지?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

마치 똑같은 창술을 익힌 무인들을 상대하는 것만 같은 기분. 이런 식으로 숫적 열세에 처한 적은 없었던 만큼 대처하는 게 늦고 말았다.

이내 수십의 혈목에게 둘러싸여 피떡이 된 그를 일별한 강엽이 위로 떠올랐을 때였다.

“으음....”

백서희의 눈꺼풀이 잘게 흔들렸다.

“정신이 드나?”

“...어떻게 된 거야?”

“교주의 심검이다. 충격이 컸으니 정신을 잃은 것도 무리는 아니야.”

“심검...?”

눈살을 찌푸린 백서희는 이내 두 동강이 난 성벽과 전각군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런 게 우릴 덮쳤단 말이야?”

“직격은 면해서 망정이지. 조금만 닿았어도 목숨을 잃었을지 몰라.”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

강엽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일행 중에 저기에 휘말린 사람이 아예 없다고 장담할 순 없었으니까.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고루거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교주의 심검으로 부서진 거리와 쓸려나간 사람들로 인해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단 한 사람이 이 거대한 무의 대지를 생지옥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제 어떡할 거야? 박쥐들도 쓸려나간 것 같은데.”

“...차선책을 써야지.”

지금 이 순간에도 교주와 교도들을 잇는 빛무리가 무램맹의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일일이 찾아갈 수 없다면 한꺼번에 그물질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이 방법을 쓰면 교주도 알 거다.”

그렇기에 한꺼번에 그물질을 하는 방법이 있는데도 무림맹의 고수들에게 협력을 부탁했던 것이다.

백서희의 낯빛이 하얗게 굳어졌다.

“잠깐, 그 말은...!”

“팔존들이 잘 해주길 바라야지.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도...!”

“교주가 문제가 아니야. 나는 잠시 동안 무력해질 거다. 적들이 오면 네가 날 지켜줘야 해.”

강엽이 무저갱처럼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자 백서희는 순간 먹먹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때였다.

“나도 힘을 보태지.”

혈화가 꽃핀 연분홍색 도포 자락.

격전의 흔적을 뒤집어쓴 옥청선자가 내려섰다.

“장문인... 아니, 사부님의 기파가 흔들린 걸 느꼈네. 목숨을 다해 자네를 지킬 테니 교주를 막아주게.”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 혹시나 검성이 잘못되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조바심과 자신이 가봤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만약 강엽이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였다.

“나도 부탁하겠네, 강 무사.”

옥청선자의 뒤를 이어 나타난 현운 도장이 피곤한 안색으로 말했다. 무당제일검도 청색 도포와 송문고검에 피를 흠뻑 묻힌 채 두 사람의 곁에 섰다.

그리고 당천경과 거구의 사내가 지붕을 밟았다.

“이거야 원, 광명마교주가 괴물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저건 걸어다니는 재해가 따로 없구만. 방금 전엔 정말 삼도천 건너는 줄 알았네.”

“...황보세가주께서도 오셨군요.”

대회합에서 만난 황보세가의 가주.

정도십대고수의 일인이자 산동 무림에서는 권왕이라 불리는 파산권패(破山拳覇) 황보혁이 씩 웃었다.

“그래, 오면서 슬쩍 들었는데 아직 방법이 있다고? 뭔지 몰라도 빨리 해보게. 정도십대고수 네 명이 자네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울 테니까.”

현운 도장과 당천경, 그리고 황보혁.

그들이라고 무림맹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되지 않을 리 없다. 제자와 자식들이 저 생지옥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교주를 막는 게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매사 제쳐놓고 달려온 것.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백서희도 차마 말리지 못하고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길만 보냈다.

강엽이 말했다.

“무림맹 전역을 제 감각으로 덮을 겁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은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으니 여러분께서 절 지켜주셔야 합니다.”

“알겠으니 어서 시작하게. 말 섞을 시간도 아깝군.”

당천경의 종용에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심호흡을 하고, 괴뢰마를 죽였던 혈목 다발을 조종했다.

그렇게 잠시 후.

-혈라지망.

무림맹 전역에 붉은 거미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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