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45화 (243/450)
  • 45화. 사절 (5)

    “저자가 일사도?”

    “흥, 기생오래비처럼 생겼군.”

    “입으로 화를 자초하는구만. 저래봬도 녹림 총표파자를 십초 만에 격살한 절세고수요.”

    통로를 가로질러가는 일사도의 뒤에서 쑥덕거리는 맹방들.

    그들이 내뿜는 기파가 몸을 옥죄고 있는데도 통로를 거니는 일사도의 발길엔 한 줌의 망설임도 없다.

    다만 공교롭게도 그가 지나는 통로의 우측에 강엽이 서 있었기에, 두 사람의 동선이 교차하게 되었다.

    그 순간, 쭉 정면만 보고 있던 일사도가 강엽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

    조용히 부딪치는 시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강엽은 어쩐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히 처음 만나는데도 어딘가에서 마주친 듯한 느낌.

    정확히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사절은 앞으로 오시오.”

    강엽 때문에 잠시 늦추어졌던 걸음이 제갈의현의 목소리에 재개되었다.

    이윽고 맹방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맹주와 마주친 일사도가 가볍게 포권을 쥐었다.

    “무림맹주를 뵙소. 광명교의 일사도요.”

    백도 정파의 상징인 무림맹주에게 취하기에는 상당히 무례한 인사치레.

    그에 맹방들이 불만을 구시렁거리거나 욕설을 중얼거렸지만 일사도의 얼굴은 지극히 무표정했다.

    맹주가 일사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광명마교의 일사도가 절세미남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소문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구만. 그런 얼굴로 살면 인생이 참 편하긴 하겠어.”

    “칭찬은 감사하나, 세속의 미추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소.”

    “이름이 뭔가?”

    “...?”

    “일사도가 이름은 아닐 터. 자네는 내게 이름은 밝히지 않았네. 사절의 도리가 아니지.”

    “없소.”

    “뭐?”

    “일사도는 나의 신분이자 지위이며, 내가 이 땅에 나고 자랐을 때부터 쭉 함께한 이름이오.”

    “...태어났을 때부터 사도였다?”

    “그렇소.”

    두 사람의 문답을 들은 맹방들의 얼굴에도 황당한 감정이 떠올랐다.

    존귀한 신분을 타고나도 그렇지, 어떻게 태어났을 때부터 사도의 지위에 봉해진단 말인가?

    “광명마교는 실력이 아니라 신분으로 사도를 임명하나 보군. 아니면 자네가 특별한 건가?”

    “내가 특별한 거요. 한데 이 이야기는 본래 주제에서 한참 벗어난 것 같소만.”

    “자네의 잘난 교주가 보낸 전언을 가져왔다고 했던가. 하지만 자네 손에 서찰 비스무리한 건 없군. 아니면 구두로만 전할 텐가?”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실 거요.”

    “음?”

    이해하지 못할 말에 맹주가 눈가를 좁힐 때였다.

    불현듯 일사도의 몸에서 상서로운 서광이 뿜어지면서 환한 빛무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게 무슨...!”

    “맹주님과 총군사님을 엄호하라!”

    일사도를 감시하고 있던 선룡대주 호군백과 무인들이 깜짝 놀라서 병장기를 겨누었다.

    좌석에 앉아있는 맹방들도 마찬가지.

    대회합 중이라서 병장기를 휴대하진 않았지만,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막강한 공력 기파로 방벽을 세웠다.

    ‘저건...!’

    휘황한 빛기둥에 휩싸인 일사도의 모습에서 강엽은 비슷한 광경을 이전에 봤다는 걸 깨달았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분명히....

    “경동하지 말라!”

    귓가를 강타하는 우렛소리.

    맹주의 사자후에 충격을 받은 무인들이 주춤했다.

    제갈의현이 엄지와 검지를 맞닿은 수인을 그리며 진언을 읊조렸다.

    -사합봉진(四合封陣).

    후우우웅......!

    사방을 둘러싼 푸른 주력이 빛기둥에 휩싸인 일사도를 앞뒤좌우 완전히 옥죄는 형태로 봉인한다.

    백금의 서광과 푸른 주력이 얽히면서 창백한 뇌기가 사방에 튀자 선룡대의 무인들이 식겁해서 물러났다.

    동시에 제갈의현의 얼굴에선 혈색이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이런, 이건 설마...!”

    “두고 볼 이유는 없겠지.”

    어느새 뒤쪽으로 온 검성이 검결지를 뻗었다.

    절세고수의 의념이 담긴 한 수가 당장이라도 일사도를 꿰뚫을 듯 무지막지한 기세로 뻗어나갔다.

    “장문인, 돕겠습니다!”

    화산의 검성에 이어 황보세가주와 당문주, 현운 도장 등이 차례차례 아래로 내려와 일사도를 둘러쌌다.

    선룡대의 무인들과 달리 그들의 호신기는 일사도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뇌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제갈의현이 사색이 돼서 외쳤다.

    “기다려주십시오! 저건...!”

    하지만 그가 무어라 하기 전에 서광이 사합봉진을 찢어발기며 회당 전체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지나치게 밝은 빛은 사람을 맹인으로 만들기 마련.

    맹방의 고수들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을 때, 또다른 술법이 현현해서 빛을 에워쌌다.

    먹구름처럼 솟은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서광을 집어삼키며 위세를 키웠던 것.

    술법의 대가인 제갈의현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흑무암쇄진!”

    발작적으로 외친 말에 다른 사람들도 경악했다.

    흑룡교의 술법진이 어찌 무림맹의 한복판에서 펼쳐진단 말인가?

    우우우우우웅......!

    그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서광을 잡아먹은 검은 안개는 하늘 높이 떠오르면서 돌고 도는 원을 그렸다.

    아래에서 그 모습을 보던 현운 도장이 홀린 듯이 탄성했다.

    “태극...!”

    백금의 서광과 칠흑의 흑무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천장까지 올라간다.

    이윽고 한계까지 치솟은 흑백의 태극은 천장을 밀어올리다, 저들끼리 뭉치며 부풀어올랐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이 불길함에 사로잡혀 호신기나 호신강기를 끌어올릴 때, 태극을 향해 손을 뻗은 강엽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꾸아아아아아아앙!

    마치 지진이 덮친 것마냥 송두리째 흔들리는 회당.

    경호성을 발하며 납작 엎드리거나 탁자 아래로 피신한 맹방의 고수들은, 곧 그들의 몸에 내리쬐는 검고 하얀 빛가루들을 보고 넋을 잃었다.

    “이게 어찌된....”

    다들 영문을 몰라 황망해하고 있을 때, 극소수의 인물들은 강엽을 향해서 안광을 번뜩였다.

    당천경이 황당해하며 강엽을 돌아봤다.

    “...흑무암쇄진을 익히고 있었나?”

    “무림맹에 거래 재료로 쓰려면 제가 먼저 위험성을 살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서 부득이하게 익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강엽의 철면피에 당천경과 현운 도장이 헛웃음을 흘렸다.

    사정이 어쨌든 무림맹 한복판에서 흑룡교의 술법을 쓰는 담대한 배짱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자네 덕분에 최악의 사고는 피했구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강엽이 시선을 멀리 향했다.

    제갈의현의 술법진을 산산조각내고 드러난 정경.

    천장에서 떨어진 흑백의 빛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일사도가 아니었다.

    이전에 진조가 강엽의 몸을 차지했을 때, 그의 내면에서 간접적으로 봤던 광명마교의 절대자.

    “...원영신인가?”

    현운 도장이 침음처럼 중얼거렸다.

    * * *

    원영신.

    천지의 기운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시전자 자신의 영성을 혼처럼 불어넣어 완성한다는 극치의 술법.

    그 지고한 술법을 사도의 육신으로 이룬 것만 봐도 광명마교주의 기량은 천하를 논할 만했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앞뒤로 에워싸는 형국에서도 느긋한 태도를 견지한 교주는 단상의 맹주를 향해 우아하게 예를 갖추었다.

    “만나서 반갑다, 무림맹의 맹주여.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고 현신한 점을 용서해줬으면 좋겠군.”

    “...광명마교주인가?”

    “그렇다. 본좌가 너희들이 광명마교라 부르는 종파의 주인이니라.”

    선뜻 긍정하는 말에 곳곳에서 경악성과 당혹성이 터져나왔다. 아무리 원영신이라 하나 마교주가 무림맹 한복판에 버젓이 들어오다니...!

    맹주의 신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교주, 자네는 무림맹 한복판에서 맹방의 무인들을 위협했네. 광명마교가 먼저 사절의 예를 걷어차버렸으니 목을 베도 할 말이 없을 게야.”

    맹주가 손을 높이 들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술법의 폭발도 능히 견뎌냈던 천장이 쾅 폭발하면서 한 줄기 빛살이 날아들어왔다.

    장대한 거구와 잘 어울리는 크고 넓적한 대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거대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하하, 그게 맹주의 독문병기인 태왕도(太王刀)인가? 무려 황제가 하사했다는 신병을 실제로 보는군.”

    “질문 하나 하지.”

    한껏 눈매를 좁힌 맹주의 전신에서 숨막힐 듯한 기도가 뿜어져나와 일대를 잠식했다.

    광명마교주의 폭거에 경악했던 맹방들조차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할 만큼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존재감.

    기둥짝만한 대도를 광명마교주의 면전에 겨눈 맹주가, 뜨거운 안광을 뿜어내며 묻는다.

    “자네의 목을 베면 자네가 죽을까, 아니면 자네에게 몸을 빌려준 일사도가 죽을까?”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다.”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뒷짐을 진 광명마교주가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광명마교주와 눈이 마주친 강엽은, 그가 자신을 향해 입꼬리를 치켜든 것을 알고 미간을 좁혔다.

    그때 어깨에 묵직한 손길이 올라왔다.

    “뒤로 물러나라. 네가 감당할 자가 아니다.”

    “전주님?”

    대회합 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낭왕이 마침내 회당에 들어온 것이다.

    “좀 늦었구나. 가려 그 아이가 정신을 잃어서 급히 수습한 뒤에 왔다.”

    한편 낭왕이 난입했음에도 맹주나 검성은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맹주는 낭왕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검성 역시 회당의 지붕에 낭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낭왕과 눈이 마주친 교주가 폭소를 터뜨렸다.

    “장관이로다. 천하에서 여덟 손가락에 꼽힌다는 절대고수들이 세 명이나 모이다니.”

    “광명마교주, 미친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더 미쳤군. 왕년의 흑룡교주도 천하팔존 세 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었다. 네놈도 똑같이 만들어주랴?”

    “싸움을 건다면 피하지는 않겠다. 다만 본좌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길 바란다.”

    멸도와 검성, 낭왕. 당금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절대고수들을 면전에 두고도 교주의 얼굴엔 어떠한 망설임이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에도 자신이 죽을 일은 없다는 확신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교주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보여주듯 어깨를 으쓱이며 두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본좌는 어디까지나 사절로서 온 것이다. 잠시 소란이 일긴 했지만, 그대들을 해할 뜻은 없었어.”

    “...맹주, 어떻게 하시겠소?”

    결국 이 자리에서 싸울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맹주의 몫이었다.

    잠시 검성과 눈짓을 나눈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말은 들어봄세.”

    “고맙군.”

    작게 묵례함으로써 감사를 표한 교주는 대범하게도 맹주가 보는 앞에서 등을 보였다.

    “본좌는 무림맹에 화해를 청하러 왔다.”

    “뭐라고...!”

    다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먼저 맹방을 공격한 주제에 이제 와서 화친을 요구하다니, 제정신이라면 할 수 없는 말이 아닌가.

    검성이 코웃음을 쳤다.

    “망상이 심하시군. 그쪽이 그만 싸우자고 하면 우리가 예, 하고 굽신거릴 줄 알았나?”

    맹주가 이어서 말했다.

    “남궁세가를 비롯한 수십 개의 맹방들이 무너졌네. 핏값을 갚지 않는다면 무림맹은 존재 의의를 잃겠지.”

    무림맹은 백도 정파들이 모인 거대한 연합체. 맹방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연합의 의미가 퇴색할 터.

    흑룡교도들의 처우 문제를 두고서 대립했던 두 천하팔존이 의견을 같이하는 순간이었다.

    “남궁세가를 무너뜨린 건 불가항력이었다. 남궁세가가 먼저 명분을 제공했거든.”

    “무어라?”

    “과거 본교가 어려움을 겪은 시절 남궁 씨족들이 본교의 신물을 강탈한 사건이 있었지. 그럼에도 본좌는 정중하게 사절을 보내서 신물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궁검은 사절의 목을 쳐서 저잣거리 한복판에 효수했다. 그 꼴을 보고 어찌 가만 있을까.”

    “그래서 남궁세가를 짓밟았다는 건가?”

    “본교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자유롭게 포교할 권리와 교도들의 안전을 원할 뿐.”

    “광명마교는 사교다. 사교가 민생을 현혹하고 천하를 도탄에 빠트리는 걸 방관할 것 같은가?”

    “본교가 사교라는 것을 누가 규정하는가? 본교는 민생을 보살폈거늘. 굶는 자에게 양식을 주고, 병든 자에게 약을 주었다. 사리에 어두운 자에게 글을 가르치고, 강자에게 짓밟히는 자에게 힘을 주었다. 그게 혹세무인인가?”

    교주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아니지. 그대들은 단지 기득권을 잃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야. 천하의 질서가 뒤집히고, 그동안 당연히 누리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어.”

    “해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말하지 않았나. 본교는 화친을 원한다고. 다만 기어이 싸우겠다면 받아주마. 본교는 평화를 사랑하지만, 전쟁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군. 차라리 선전포고를 하러 왔다고 하지 그러나?”

    검성이 비아냥거리자 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평화는 말로만 얻어지지 않는군. 다만 본좌는 관대하니 그대들에게 기회를 주겠다.”

    “...기회?”

    “몇 명이 덤비든 상관없다. 맹주와 검성, 낭왕. 그대들이 협공해도 좋다. 본좌는 흑룡교주와 다르다.”

    “이런 광오한 자가...!”

    “아, 그래. 기왕이면 내기도 하는 게 재밌겠지. 본좌를 쓰러트린다면 본교가 점령한 성 중에서 하나를 돌려주마. 가장 최근에 얻은 남직례성은 어떤가?”

    원영신으로 현신한 교주를 쓰러트리면 성 하나를 돌려받을 수 있다. 심지어 협공해도 된다.

    터무니없이 관대하면서도, 무림맹 전체를 능멸하는 오만한 선언.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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