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사절 (4)
“다음은 전향한 흑룡교도들의 문제입니다.”
장안의 화제가 도마 위에 오르자 좌중의 눈빛이 바뀌었다.
사정을 아는 이들은 당천경의 뒤에 시립한 강엽을 힐끗거리기도 했다.
제갈의현 역시 잠시 강엽에게 눈길을 주고는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도 적지 않으니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입에서 한중의 암시장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나오자 좌중의 안색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강엽이 광명마교의 오사도를 격살하고 팔대교왕을 이겼다는 대목에선 곳곳에서 장탄성이 터졌다.
“저렇게 젊은 청년이 사도를 꺾었다고?”
“내공으로 노화를 억누른 게 아닙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실제 나이는 더 많을지도....”
“어쨌든 대단하지 않소? 정도십대고수의 좌가 비었다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텐데.”
백도 정파를 대표하는 고수들의 감탄이 쏟아졌음에도 강엽은 무던하게 받아넘겼다.
지금은 타인의 칭찬에 일희일비할 때가 아니니까.
“흑룡교의 후예들은 선조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마교와의 최전선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마교일진대 덜컥 받아들이는 건 좀....”
“흑룡교도 지독한 놈들이오. 그런 놈들을 받아준다니. 맹원들이 반발할 것이오!”
적잖은 맹방들이 반대 의사를 표했지만, 제갈의현의 한마디가 장내를 뒤집었다.
“우리에겐 그리 여유가 없습니다. 이십여 일쯤 전에 점창파의 장문인께서 맹월림주에게 살해당하셨습니다.”
“......!”
“뭐, 뭐라고 했소?”
맹방들 대부분이 이제 막 무림맹에 올라온 이들.
변방의 사정에 어두웠다.
“여러 맹방들께서 우려하시는 점을 압니다. 하나 광명마교와의 대전을 앞둔 지금 구파의 이탈은 치명적이지요. 우리는 속히 점창을 구원해야 합니다.”
운남성과 가까운 곳에 터전을 둔 맹방들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들도 맹월림이 들불같은 기세로 점창파를 압박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점창파의 장문인이 타계하다니?
“맹월림이 운남을 장악하면, 그들은 사천으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이미 밀정들이 그들이 사천 진출의 야욕을 품었다는 정황을 여럿 발견했습니다. 그리 되면 대륙 서쪽에 다른 전선이 생기겠지요.”
“.......”
누구도 감히 대꾸하지 못한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좌중을 둘러본 제갈의현이 힘주어 발언했다.
“맹월림은 혈교와도 손을 잡은 사마외도의 무리. 그들이 대륙 서쪽을 넘보기 전에 처단해야 합니다!”
“그러니 흑룡교놈들을 투입하자는 말씀이오? 하나 그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외다!”
모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줌도 안 되는 병력으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총군사.”
갑작스레 장내를 떨친 목소리.
전성을 발한 것도 아니건만 그 목소리에 사로잡힌 중인들은 움찔 떨었다.
제갈의현이 침중한 얼굴로 검성을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장문인.”
“점창파를 구원해야 한다는 주장엔 십분 동감하오. 하나 흑룡교를 투입하는 건 자칫 아군의 사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 백도의 기치를 위해서라도 사마외도와 손을 잡는 건 단호히 배격해야 하오.”
“하지만 그들에게는....”
“본산의 제자들을 운남에 보내겠소.”
검성의 발언에 장내가 다시 술렁거렸다.
과연 화산파의 제자들을 보내면 안심할 수 있다며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검성은 아예 몰아치듯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일월마교도 내분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만큼 당장 대륙으로 나오진 못할 것이오. 강북의 문파들이 합심하여 전선에 투입되면 두 마교를 막을 수 있소.”
“흑룡교도들이 흑무암쇄진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흑룡교가 멸문한 지금도 세간에 회자되는 절진.
그걸 선뜻 내놓겠다는 말에 좌중은 머리에 둔기를 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졌다.
“흑무암쇄진은 광명마교의 천적. 광명마교와의 대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불이 났다고 무조건 물만 뿌리란 법은 없소. 광명마교의 마공을 막는 방법이 흑무암쇄진만 있는 건 아니외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은 부정할 수가....”
“흑무암쇄진은 마교의 술법진이외다. 무림맹의 총군사께서 사마외도의 절진을 쓰겠다는 것이오?”
검성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했지만 제갈의현, 그리고 뒤에 있는 맹주를 싸잡아서 훈계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무림맹이 이렇게 약해졌는지 모르겠군. 내 다른 안건은 다 찬성해도, 이것만은 받아들이지 못하겠소. 마교놈들의 뭘 믿고 받아준다는 말이오?”
“검성 대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마교의 손까지 빌릴 정도로 곤궁해졌단 말입니까? 이러고도 우리가 정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옳소이다! 총군사께서는 부디 체통을 지켜주시오!”
곳곳에서 검성의 주장에 동조하는 의견이 빗발치자 제갈의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면서 냉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천경과, 뒤에 있는 강엽을 향해 은밀한 시선을 보냈다.
준비한 패를 얼른 까보라는 의미.
‘결국 이것까지 써야 하나?’
그토록 많은 공을 쌓았고, 달콤한 대가까지 내걸었는데도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고 있었다.
강엽은 내심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지만, 여론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원점에서 뒤집을 수밖에.
“흑룡교도들이 공을 쌓았다니 처형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하나 그들의 단전을 폐하고, 병장기를 몰수하여 흑룡교의 맥을 완전히 끊어버려야...!”
점점 고조되는 열기 속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검성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콰아앙!
문을 부술 듯이 달려온 무인.
제갈의현이 짐짓 인상을 쓰며 일갈하려는 찰나, 사색이 된 무인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제갈의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지고, 맹주를 향해 다시 보고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걸까.
강엽이 검성을 힐끔거렸다.
‘검성도 영문을 모르는 눈치다.’
급작스레 난입한 무인으로 인해 연설을 방해받은 검성이 언짡아하는 것만 봐도 확실했다.
무겁게 침음한 맹주가 몸을 일으켰다.
“문제가 생겼구려. 장문인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대회합을 잠시 중단해야 할 것 같소.”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검성이 불쾌한 심경을 숨기지 않고 묻자 맹주가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고 한숨처럼 대답했다.
“광명마교의 사절단이 방문했다고 하오.”
“무어라?”
급격하게 치솟는 목소리.
그야말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 사태에 소리 없는 경악성이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그러나 맹주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사도가 교주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는구려.”
“......!”
* * *
“제정신이 아니군.”
무림맹 십이전대의 일익인 선룡대(旋龍隊)의 대주이자 종남파의 제자인 호군백은 아연해졌다.
금색 태양을 수놓은 하얀 도복을 입은 무리가 무림맹에 방문했다는 소식이 들어온 뒤에, 그는 군사부의 지시로 선풍대를 이끌고 왔다.
‘어쩌면 뭔가 착오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로 현실성이 없었다.
한데 성문에 오니 웬걸?
“진짜로 광명마교, 게다가 일사도라니....”
무림맹의 성문 밖에 도열한 무리.
스무 명 남짓한 마교도들의 앞에 군계일학의 존재감을 내뿜는 사내가 있었다.
남녀를 떠나서 넋을 잃을 만한 초월적인 용모에 긴 장발을 허리까지 드리운 장신의 사내.
타고난 골격만 아니었다면 여인이라 해도 믿었을 출중한 용모의 사내가 눈을 반개한 채 서 있었다.
광명마교의 출현에 혼비백산했던 정주의 군중들도 신령스러운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할 지경.
‘여인으로 태어났다면 천하제일미라 불렸겠어.’
호군백 역시 젊은 시절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로서 숱한 미인들을 본 적 있었지만, 남녀를 떠나서 그 누구도 저토록 아름답진 않았다.
저만하면 존재 자체로 섭혼술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답은 아직인가?”
듣기 좋은 미성이 성벽을 울렸다.
여전히 눈꺼풀을 반만 들어올린 채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일사도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호군백은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묻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주님....”
“굳이 말을 섞을 필요는 없겠지.”
아직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다.
이대로 성문을 굳게 걸어 잠글지, 아니면 힘으로 내쫓을지.
그도 아니면....
“선룡대주님, 군사부에서 온 지급입니다.”
군사부의 무인이 직접 총군사의 전갈을 가져왔다.
맹주와 총군사의 직인이 찍힌 공문을 찬찬히 훑은 호군백의 눈이 태풍을 만난 것처럼 요동쳤다.
“여기 적힌 내용이 정말 윗선의 의지인가?”
“전 공문에 무슨 내용이 적혔는지 모릅니다. 다만 맹주님의 명령이니 따르셔야 합니다.”
“...휴우, 알겠네.”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한숨을 내뱉은 호군백이 성벽의 경비를 책임지는 무인에게 말했다.
“성문을 여시오. 저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라는 맹주님의 전언이오.”
“으음!”
주변에 있던 모두가 동요했지만 맹주령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
곧 성문의 경첩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쿠우웅...!
좌우로 활짝 열리는 성문의 모습에 놀란 군중들이 수군거리고, 무림맹의 무인들이 바짝 긴장했다.
아래로 내려온 호군백이 일사도를 노려보면서 낮게 으르렁거렸다.
“무림맹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겠소. 하나 안전을 위해 귀 사절단의 병장기를 모두 수거하겠소.”
상대는 사도들의 수장이다. 병장기가 없어도 여기에 있는 무림맹의 무인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터.
그럼에도 병장기를 압수하는 것은 무림맹 안에선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우회적인 경고였다.
무인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병장기를 압수하겠다는 말에도 일사도는 동요하지 않았다.
“여기 있다.”
허리춤에 걸어놓은 장검을 순순히 풀어 내놓는다.
찬란한 금색의 검갑 위로 고풍스러운 나무 문양을 새겨넣은 화려한 보검.
“본교의 신물인 광수검(光樹劍)이다. 귀한 물건이니 소중히 다뤄줬으면 좋겠군.”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요.”
퉁명스럽게 대꾸한 호군백이 선룡대의 무인들에게 턱짓하자 그들이 서둘러 병장기를 수거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맹주님과 총군사를 뵐 거요. 경고하건대 허튼 수작은 부리지 마시오. 사절이든 뭐든 바로 목이 날아갈 테니까.”
제아무리 대단한 일사도라도 천하팔존의 앞에서 재간을 부리고 살아남을 수는 없을 터.
일사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 * *
백금의 서광이 내리쬐는 화려한 전당(殿堂).
한 손으로 뒷짐을 지고, 반대편의 손을 따스한 빛 속으로 넣는 교주를 향해 마의가 물었다.
[일사도를 적들의 한복판에 던져놓을 줄은 몰랐다. 설마 버리는 돌로 쓰려는 건 아니겠지?]
상대가 지고한 신인임에도 언사에 거침이 없다.
광명마교의 교도들이 봤다면 마의가 삼사도의 신분이라도 불경을 입에 담았을 대죄.
하나 교주는 역정을 내는 대신 어이가 없다는 표정만 내보였다.
“본좌가 어째서 그런 짓을 하겠나?”
[상식적으로 교주 다음으로 강한 전력을 그런 식으로 소비하는 건 말이 안 되지. 하지만 네 녀석은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 아닌가?]
“하하, 제법 위험하긴 하겠지만 잘 빠져나올 걸세.”
[다행이군. 난 또 ‘구천회생관(九泉回生關)’만 믿나 싶었는데.]
“그건 오사도 때문에 못 쓰지.”
교주가 슬쩍 시선을 굴렸다.
그가 선 곳에서 불과 한 치 앞에 놓인 깊은 못.
뜨거우리만치 밝은 서광이 내리쬐는데도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안에 무엇이 있는지 헤아릴 수 없다.
눈부신 옥색광을 발하는데도 그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는 연못은 어찌 보면 심연을 닮아 있었다.
그 심연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교주가 입을 뗐다.
“맹방대회합이 열리는 지금이야말로 본교의 입장을 알리기 가장 좋은 기회일세. 설령 그들이 본교를 적대한다고 해도 시간은 벌 수 있겠지.”
[겸사겸사 혈교에도 한 방 먹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군. 혈마가 부활하면 골치 아플 텐데.”
[그냥 혼자 가서 혈교를 쓸어버리는 건 어떤가? 네놈의 신공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쯧쯧, 혈교를 너무 만만히 보지 말게. 본좌가 현신해도 그들의 본거지를 뚫기는 힘들어. 지금은 그들의 계획을 망치는 걸로 충분해.”
[만약 혈마가 부활하면 막을 순 있나?]
“모르겠군.”
[음?]
“시조께서도 혈마를 경계하셨네. 오직 진조만이 혈마와 대적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
[...그 정도인가?]
“그들은 불가해의 괴물일세.”
그리고 교주는 얼마 전에 전설의 괴물들 중 한 명을 만나봤다.
손속을 겨루지 않아서 얼마나 강한지는 몰라도, 그대로 붙었다면 막심한 손해를 봤겠지.
다만 진조 역시 타인의 몸을 차지한 만큼 전성기의 힘을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말이 샜군. 어쨌든 일사도를 걱정할 필요는 없네. 설령 천하팔존, 아니 무림맹 전체가 덤벼도 녀석을 죽일 순 없을 테니까. 그건 본좌가 내버려두지 않아.”
[네놈 설마...?]
그제서야 교주의 계획을 짐작한 마의가 팔짱을 풀고 자세를 바꾸었다. 가면 속 노란 안광에 감탄과 황당함 등 온갖 감정들이 교차했다.
교주가 빙그레 웃었다.
“함께 볼 텐가?”
[네가 사도와 시야를 공유할 수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남한테도 보여줄 수 있었나?]
“본좌가 허락한다면.”
그 순간, 마의는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지면서 의식이 아득한 상공으로 도약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