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39화 (237/450)

44화. 밀담 (5)

제갈의현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흑무암쇄진에 대한 건은 그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

맹방들의 의견을 수용하기에 앞서 맹주의 재가를 받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대담한 발언이었어요.”

비밀 회합이 파한 뒤 하오문주는 나눌 말이 있다면서 잠시 강엽을 붙잡고는 그렇게 운을 뗐다.

“흑룡교의 무공이 광명마교의 천적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죠. 특히 흑무암쇄진은 흑룡교의 고위 마인들만 쓸 수 있었던 지고한 술법진. 그렇기에 광명마교의 사도들도 구천호법만큼은 꺼려했었고요.”

흑룡교가 건재하던 시절에 두 마교가 사사건건 충돌했던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

비사(祕史) 축에도 끼지 못하는 만큼, 밀실에 있던 명숙들 모두가 알아차렸을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고자 한다면 강엽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성과 감성은 달라요.”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모두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검성이 과거의 경험 때문에 흑룡교를 증오하는 것처럼, 무림맹의 맹방들 중 상당수가 흑룡교에 적대감을 품고 있어요. 그들이 과연 순순히 흑무암쇄진을 쓰려고 할까요? 사마외도의 무학인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태연자약한 반문에 하오문주가 불의의 일격을 맞은 것처럼 두 눈을 껌뻑이자 강엽이 실소했다.

“저는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받아들일지 말지는 그들의 몫이지요. 명분도 주고 실리도 줬는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뭔 수로 설득하겠습니까?”

“으음, 그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결과를 중시해서 과정을 등한시하는 건 위험하지만, 과정만 중시해서 결과를 등한시하는 건 천치나 할 짓입니다. 생존이 걸린 일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무림맹이 그런 천치들만 모인 소굴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요.”

“.......”

뜻밖의 폭언에 하오문주의 얼굴에 곤란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후후, 총군사와 다른 분들께서 진작에 나간 게 천만다행이네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강엽은 하오문주를 지나쳐서 누군가의 온기가 남아있는 걸상을 가만히 응시했다.

“복건, 절강, 강서, 남직례. 네 개의 성이 광명마교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팔가인 남궁세가는 풍비박산이 나고, 천하팔존인 궁검이 살해당했죠.”

태상가주와 가주를 연달아 잃은 남궁세가는 멸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참혹하게 망했다.

“남궁세가처럼 모든 걸 잃은 문파들이나 위기에 처한 문파들에게 흑무암쇄진은 사마외도의 절학이니 죽어도 쓸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이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물론 흑무암쇄진이 인신공양 같은 사특한 짓거리를 해야 쓸 수 있는 거라면 다르겠지만,

“흑룡교의 고위 인사들만 쓸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흑무암쇄진은 사실 술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투명한 기광이 일렁거리는 하오문주의 눈을 마주한 강엽이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흑룡교주의 독문무공인 전륜구룡공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혈공진기로 흑무암쇄진을 펼쳐도 술법진은 아무런 이상 없이 발동된다.

‘백도 정파의 심법으로도 발동이 되는지는 봐야 하겠지만... 익히지 못해도 상관없다. 여차하면 부적에 담을 수도 있으니까.’

초상승의 술법을 부적에 담으려면 많은 품이 들겠지만, 그건 무림맹이 알아서 할 일.

“마침 명분도 좋지요. 과거를 뉘우친 흑룡교도들이 자발적으로 흑무암쇄진을 바친다... 무림맹이 세간의 비난을 받을 일은 거의 없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 내다보고 거래를 제안했었군요....”

황산에서 한중의 암시장을 운운했던 일이 여기까지 흐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하오문주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여러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가능했습니다.”

“그게 더 놀라운 일이에요.”

세 치 혓바닥으로 제갈의현의 추궁을 돌파하고, 역으로 그를 구워삶지 않았는가.

어지간한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재주였다.

“하지만 검성을 넘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는 총군사와는 다른 의미로 까다로우니까요.”

“그건 문주님의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

“제가 말인가요?”

“문주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건 낭인전도 무림맹과 행보를 같이하기로 했다는 뜻이겠지요. 낭왕께서 검성을 막아주셨으면 합니다.”

상대가 오해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검성을 힘으로 어떻게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자가 무력으로 저흴 핍박하지 못하게 막아주십사 부탁드리는 거죠.”

“...그이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나요?”

“운남성 낭인들의 목숨값으로 그 정도면 수지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만.”

운남성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는 지금, 운남성의 낭인들이라고 무사할 리가 만무하다.

“무림맹에 오기 전에 알아봤습니다. 운남성 낭인전의 낭인들 중 상당수가 점창파에 고용됐더군요.”

그들 역시 점창파처럼 고립되어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지금 지원군이 절실한 건 매한가지.

“제가 그들을 구하겠습니다.”

“하아.......”

쓴웃음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온다.

답답한 심정을 토해내기 위해서인지 면사를 벗은 하오문주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올렸다.

“저를 설득할 준비도 되어 있었군요.”

하오문주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강엽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사태.

그런데도 즉석에서 이러한 답이 나온 것은, 이전부터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리라.

“원래는 사천삼패와 제갈의현에게 부탁하려고 했습니다.”

하나 낭왕이 나서준다면 무게감이 다를 터.

여기에 사천삼패와 총군사, 무당제일검까지 힘을 보태준다면 제아무리 독불장군 같은 성품을 지닌 검성이라도 무력으로 강엽을 찍어누르지는 못하리라.

“일단 그이에게 말은 전해볼게요. 다만 장담은 못해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강엽이 감사의 뜻을 담아 두 손을 맞잡자 하오문주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다시 면사를 썼다.

“아쉽네요. 려아가 있었다면 반가워했을 텐데.”

“...?”

고개를 갸웃거리는 반응에 하오문주가 설마 하고 중얼거리면서 눈꼬리를 치켜떴다.

“가려 말이에요. 벌써 잊은 건 아니죠?”

“아?”

누구를 말하나 했더니만.

가자미눈처럼 자신을 흘겨보는 하오문주의 모습에 살짝 머쓱해진 강엽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행이네요. 앞으로 그 아이와 종종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 미리 말씀드린 거예요.”

“홍 소저는 중경에 있지 않습니까?”

잠시 사원루가 장사를 접었다고 해도 홍가려가 중경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더 이상 예인이 아니에요. 강 무사가 암시장에 쳐들어가기 전에 하오문의 소문주가 되었답니다.”

“...!”

하오문주가 그녀를 수양딸처럼 아끼긴 했지만, 정말 후계자로 삼을 줄이야?

의외의 말에 강엽의 턱이 반쯤 벌어지자 하오문주가 재밌다는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었다.

“강 무사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군요?”

“처음부터 소문주로 삼으실 생각은... 아니셨겠군요. 그랬다면 더 일찍 움직이셨을 테니.”

“맞아요. 원래는 당주들 중에서 유명한 이를 지목하려고 했죠. 개인적으로는 그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기를 바랐어요.”

하나 작금의 강호는 난세였다.

멀리서 지켜줄 수 없다면 곁에 두고 지켜줄 수밖에.

“그 아이가 정말 소문주의 재목이 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재능이 없는 아이는 아니에요.”

혼란이 예고된 시대에서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발버둥치고 있다.

홍가려가 정말 하오문을 이끌 만한 후계자로 성장할 수 있을지는 지켜보면 알 수 있을 터.

강엽은 과거 홍가려가 사원루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당돌하게 가출을 감행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띠었다.

* * *

하오문주와 헤어진 뒤, 강엽은 안가를 나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볼일이 끝났으니 일행이 있는 주루로 가볼 생각.

하지만 채 열 걸음도 내딛기도 전에 우뚝 멈춰서서 전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한테 볼일이 있소?”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 우두커니 선 여인.

명숙들과 함께 일찌감치 안가를 나섰던 남궁상아가,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소월루로 가신다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가는 길이 복잡해서 초행이라면 좀 헤매실 수 있어요.”

“동생이 기다리고 있지 않소?”

“늦게 돌아가니 먼저 자라고 했습니다. 제가 없어도 시비들이 알아서 재울 테고요.”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얼굴은 아름답지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 만큼 표정이 없었다.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강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워낙 높은 양반들이 많았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속시원히 말하기는 어려웠겠지. 괜찮으니 말해보시오.”

그 말에 강엽의 옆모습을 힐끔거린 남궁상아는 호기가 샘솟았는지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저와 싸운 분이 집법원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흑풍랑이라고 하셨던가요?”

“본명은 연가휘요.”

“그렇군요. 기회가 된다면 그분께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다음엔 대등한 조건에서 겨루고 싶다고요.”

기껏 기다린 이유가 전언을 전하기 위해서였다니.

필시 남궁상아 역시 그때의 비무가 공정하지 않다는 걸 알고, 내심 찜찜하게 여겼다는 뜻이겠지.

“소가주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서로 만전일 때 싸우면 연가휘가 낙승할 텐데.”

“길고 짧은 건 겨루어봐야 알겠지요.”

다시 겨루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때의 남궁상아는 이전의 그녀와는 다를 것이다.

그녀가 부친의 내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한 강엽은 초음으로 내부를 살펴봤다.

‘역시 다 소화하지는 못했군. 하단전의 공력은 엄청나지만, 그보다 막대한 기운이 혈도 곳곳을 노닐고 있어.’

격체전력을 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진기가 소실되었을 텐데도 남궁세가주가 전한 공력은 그녀의 진원을 한참 웃도는 수준이었다.

밤낮으로 부단히 노력해도 저 기운을 온전히 수습하려면 적잖은 시간이 걸리겠지.

‘그래도 중단전의 형태는 또렷하니 어떻게든 해내겠지. 이만하면 녀석들과 맞먹는 재능인데....’

연배를 고려하면 일행 중에서도 남궁상아와 비견할 만한 인원은 오직 넷뿐이었다.

하후진과 청수, 연가휘, 그리고 백서희.

온갖 험지를 겪으며 생사의 고비를 넘긴 그들처럼 남궁상아도 알게 모르게 고생했을 것이다.

“연가휘에게는 꼭 전해주겠소. 아마 그 친구 성격상 거절하지는 않을 거요.”

“감사합니다.”

어째 그녀가 이겼음에도 설욕전을 하는 모양새가 됐지만, 남궁상아는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어린 가느다란 미소를 곁눈질한 강엽이 문득 물었다.

“맹방대회합 때 우릴 도와줄 의향이 있소?”

현 시점에서 광명마교에 대한 적개심을 가장 크게 불태울 세력은 누가 뭐래도 남궁세가였다.

맹방대회합에서 그녀가 어깃장을 놓는다면 동조하는 문파들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

“저는 광명마교를 증오합니다.”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시퍼런 살의.

가족과 가문을 잃고, 어린 동생을 데리고 타향살이를 하고 있으니 원수들을 증오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일 터.

그럼에도 남궁상아는 하지만, 이라고 짧게 여지를 두었다.

“무림맹에서도 본가를 동정할지언정 남궁 씨족들의 핏값을 받아내야 한다며 복수를 주장하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더군요. 심지어 그들조차 말만 앞설 뿐 적극적으로 행동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를 위로하고, 광명마교를 타도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을 비난하고 싶진 않습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저도 그들처럼 행동하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고요. 다만 말만 앞서는 사람보다는, 뭔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두둔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닐까요?”

비록 그 행동이 광명마교가 아니라 혈교를 향한다는 것은 아쉽긴 해도, 남궁상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흑무암쇄진이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저 간악한 광명마교에 한 방 먹이기만 한다면요.”

“.......”

강엽의 만면에 쓴웃음이 번졌다.

‘단단히 칼을 갈았군.’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하던가.

원수를 갚기 위해 쓸개를 핥는 심정으로 괴로움을 견뎌야 한다면 능히 그럴 여인이었다.

“일이 잘 성사된다면 광명마교와 싸울 때 남궁세가를 돕겠소.”

“꼭 기억해두겠습니다.”

마치 잊으면 각오하라는 듯한 분위기에 강엽이 시선을 멀리 향했다.

순간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기 있는 오층 건물이 소월루요?”

보름달을 등진 화려한 고루거각.

강엽이 돌연 미간을 좁히며 심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자 남궁상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예, 그렇긴 한데... 왜 그러시는지?”

“먼저 가봐야겠소. 밤이 늦었으니 살펴가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강엽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어둠과 동화된 몸은 화살처럼 쏘아져서 순식간에 소월루의 앞에 도달했다.

그렇게 도착했을 땐 이미 저잣거리 한복판에 모인 수많은 군중들이 무림 고수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콰아앙!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날아오는 육중한 거구.

깔릴 위기에 처한 구경꾼들이 깜짝 놀라 어어 하는 그때, 가판대 위에 올라선 강엽이 태극반의 묘리로 등근육을 부드럽게 받아냈다.

경파의 회전력에 따라 사내의 거구를 그대로 패대기친다.

“끄헉!”

호신기고 뭐고 등근육을 문대고 들어오는 암경에 사내가 억눌린 비명을 토하자, 그제서야 장내의 이목이 강엽에게 집중됐다.

“당신은...!”

“강엽!”

오 장 거리를 두고 대치하는 양단의 무리.

하나는 먼저 소월루에 갔던 일행이었고, 다른 하나는 용봉지회였다. 강엽이 메친 인물은 용봉지회의 후기지수였던 것이다.

“이게 무슨 사태지?”

“놈, 진산권을 놓지 못하겠...!”

빠악!

강엽을 덮치듯 달려간 후기지수가 뒤로 쿵 넘어간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깐 채 정신을 잃은 동료의 모습에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 욕설을 내뱉는 찰나,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가 그들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너희한테 묻지 않았다.”

“.......”

소란이 단숨에 죽는다. 터질 듯이 뜨거웠던 저잣거리의 공기가 창백하게 질려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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