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밀담 (6)
“.......”
싸늘하게 식어버린 장내의 공기.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입 안에 고인 침만 삼켰다.
일대를 장악한 무겁고 이질적인 기도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압박했던 것이다.
밤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앞머리 사이로 비치는 싸늘한 안광이, 속내를 꿰뚫을 듯이 파고들어온다.
일행도 눈동자만 뒤루룩 굴릴 때, 진산권이라 불린 사내와 드잡이질을 하고 있던 야차마곤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어... 후배, 그러니까 이건 평범한 비무일세.”
“비무요?”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용봉지회의 후기지수와 싸운단 말인가?
“그 뭐냐. 술김에 싸우기도 하지 않나. 서로 언쟁이 붙고, 그러다 보니 한판 대거리한 게지.”
“아무리 그래도 후기지수랑 드잡이질을 하는 건 좀....”
한마디로 나잇값 좀 하라는 뜻.
그러나 야차마곤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자네도 없는데 뭘 어쩌겠나? 그렇다고 여인들에게 대신 싸우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무시하지 그러셨습니까?”
“처음엔 그러려고 했지. 근데 우리더러 정도의 기치를 내다버린 배신자라고 욕하는 게 아닌가?”
야차마곤이 억울한 듯이 항변했다. 아예 듣지 못했다면 모를까, 들으란 듯이 대놓고 중얼거리는데 무작정 피하기만 하면 겁쟁이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백서희가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진짜야. 특히 당 소저와 청수 도장, 소창후에게는 근본도 없는 종자들이란 붙어먹었다고 하더라.”
근본도 없는 종자들이라.
아마 강엽과 백서희처럼 신분이 불분명한 이들을 비꼬는 말이겠지.
후기지수들을 향한 강엽의 안광이 더욱 차가워졌다.
“사실인가?”
“...우리가 실언을 했음은 사과하겠소. 하나 당신들이 마교도를 무림맹에 끌어들이지 않았소?”
강엽과 마주한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긴장으로 등이 축축해졌음에도 눈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 자리한 군중을 둘러보며 당당하게 외쳤다.
“자고로 근묵자흑이라고 했소이다! 백도 정파의 무인들이 더러운 마교도와 어울리는 게 가당키나 하오!? 당신들이 정녕 수치를 안다면 지금이라도...!”
“더는 못 들어주겠군.”
강엽이 말을 자르자 후기지수가 불만스러운 기색을 띠었지만, 뭐라 항변하기 전에 강엽이 먼저 말을 이었다.
“소림엔 ‘참회동(懺悔洞)’이란 암굴이 있다지. 사마외도의 마인들을 잡아다 가두는 곳이라고 들었다. 이름 그대로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라는 뜻에서 말이야.”
“...그게 어쨌다는 말이오? 마교도들이 과거를 반성하니 풀어줘야 한다는 뜻이오?”
“아니.”
고개를 가로젓고는 상상도 못할 폭언을 내뱉었다.
“너희들을 거기 가둬야 한다는 뜻인데.”
“뭐, 뭣...!”
“마교와 붙어먹은 배신자라고 했나? 근데 그 배신자들이 쓰러트린 마인들의 숫자가 너희들이 이제껏 살면서 말 섞은 사람들보다 곱절은 많을 거다.”
“이익! 우릴 모욕하지 마시오!”
“왜, 억울한가? 뭣도 모르면서 뒷담이나 깐 주제에 면전에서 욕먹는 건 못 견디나 보군. 참 대단한 철면피야. 철면신공을 익혔다고 해도 믿겠어.”
강엽이 짐짓 감탄했다는 듯 손뼉을 두들기자 터질 듯이 달아오르는 후기지수들의 낯짝.
모르긴 몰라도 저들뿐 아니라 수많은 무림맹의 무인들이 흉중에 비슷한 생각을 품었겠지.
“너희 같은 부류를 일일이 설득할 생각은 없다.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런 데 할애하는 심력이 아까워.”
“아니, 이자가 보자 보자하니까 뚫린 입이라고...!”
“너희들 중에.”
붉으락푸르락하는 후기지수들을 깔끔히 무시한 강엽이 과시하듯 두 팔을 벌린 채 주변을 둘러싼 군중을 심드렁한 시선으로 오시했다.
“혈교의 교성과 광명마교의 사도를 죽여본 경험이 있는 자만 내게 돌을 던져라.”
“.......”
오만하다 못해 광오하게 들리는 폭언.
후기지수들과 군중들은 물론, 일행까지 입을 떠억 벌리고 멍하니 강엽을 쳐다보았다.
뿐만 아니라 어느새 군중들 틈으로 들어온 남궁상아와 소란을 듣고 찾아온 무일기 등 다른 후기지수들도 황당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
하나 그들이 끼어들기 전에 강엽의 목소리가 잔잔이 울려 퍼졌다.
“교성이나 사도는커녕 교령과 대교도 쓰러트린 적 없는 놈들이 백도 정파를 대표하는 것마냥 협의를 부르짖는 꼴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일이다.”
쓰러진 진산권의 등짝에 걸터앉아 비아냥거리자 군중 속에 있던 누군가가 발끈했다.
“자신이 너무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하수는 얌전히 입 닥치고 있으란 건가?”
“무림이 원래 그렇지 않나?”
익명을 뒤집어쓴 채 따지는 자를 어렵지 않게 발견한 강엽이 입매를 당겨 웃었다.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고 싶으면 실적으로 증명해라.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들이 밖에서 피 흘리며 싸운 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건....”
굳이 억지를 쓰자면 못할 것도 없긴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강엽 쪽으로 넘어온 마당.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구경꾼들의 모습만 봐도 말을 섞어봤자 자신의 주장만 논파당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더는 말을 잇지 못한다.
입술을 깨문 자를 일별한 강엽은 시선을 내려 자신이 깔아뭉갠 자를 툭 건드렸다.
“그쪽은 뭐 할 말 없나?”
“....”
“깼다는 건 알고 있다. 기절한 척해봤자 쪽팔리는 건 매한가지야.”
“...하, 인정하지!”
터어엉!
의자 삼아 깔고 앉은 거구가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막강한 경파가 강엽을 높이까지 날려버린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사뿐히 착지한 강엽과 맞은편에서 대치한 굴강한 근육질의 사내.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 진산권이라 불렀던 사내가 짧은 수염을 매만지면서 쯧하고 혀를 찼다.
“네놈 말대로 말만 앞서는 자는 무림에서 인정받지 못하지. 자신의 말을 관철하고 싶다면 실적으로 증명하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의외로 말이 통하는군. 하지만 내 일행을 모욕한 건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그건 사과하지.”
잇몸까지 드러낸 웃음은 쾌활하기 짝이 없지만,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위협적이었다.
“너희들의 공로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흑룡교에 원한이 있는 문파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내 조부님도 구천호법의 손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문이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근데 원수놈들의 후손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무림맹을 활보하는 꼴을 보라고?”
“해서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
“당신들은 분란거리를 가져온 거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영웅으로 대접받았겠지.”
딱히 영웅으로 대접받을 생각은 없지만, 공을 세웠는데도 욕을 먹는 것도 마뜩치 않기는 마찬가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싸워보자.”
“음?”
진산권이 엄지로 뒤쪽에 있는 야차마곤을 가리켰다.
“금패급 낭인이라고 했던가? 상당히 강한 고수임에는 틀림없지만, 저쪽 일행의 대장은 그쪽이니까. 그래서 누구 말이 맞는지 무공으로 견주어보자는 거다.”
눈앞에서 상대를 잃은 야차마곤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산권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강엽을 향해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뿜으며 호전적으로 웃을 뿐.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 강엽이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싫다.”
“그래, 싫... 뭐?”
진산권이 눈을 껌뻑거렸다.
설마 이렇게까지 밑밥을 깔아뒀는데 강엽이 대놓고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당혹스러워했다.
“귀영,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무인의 도전을 거부하겠다는 거냐-!”
“착각하지 마라.”
강엽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날 싸움판에 끌어들이고 싶다면 혹할 만한 판돈을 걸어야지. 그런 것도 없이 대뜸 도전하면 내가 얼씨구나 하고 받아줄 줄 알았나?”
“어, 어어....”
“그리고 넌 조금 전에 기절했다. 나와 맞설 만한 실력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대응했어야 했어.”
“그건 네놈이 비겁하게 기습을 해서 그런 거고!”
“별로 공격하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그냥 뒀으면 네가 사람들을 깔아뭉갤까 봐 막은 거지.”
“....”
“추해서 못 봐주겠군. 정말 나한테 도전하고 싶으면 교성쯤은 죽이고 와라. 목을 들고 오면 성의를 봐서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줄 테니까.”
거듭되는 진실 폭격에 진산권이 망연자실하자 일행이 수군거렸다.
“와, 나라 잃은 표정 좀 봐.”
“흠흠, 황보 공자도 언변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어서... 음, 그래도 조금은 보기 그렇네요.”
백서희와 당묘정이 쑥덕거리는 소리에 진산권은 주먹을 꽉 쥐면서 굴욕을 짓씹었다.
철기둥처럼 우람한 근육을 불끈거리는 모습은 실로 위압적이지만, 혼백이 쏙 나가도록 강엽의 말에 두들겨맞았기 때문인지 어째 처량하게만 보인다.
이윽고 속으로 열을 셀 동안의 시간이 지났을 때, 무언가 결심을 내린 듯 짓씹는 어조로 말했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내기를 하자.”
“좀 전처럼 누구 말이 옳은지 비무로 판가름하자는 말은 아니겠지?”
이미 말로 두들겨팬 시점에서 비무를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용한 행위일 뿐.
하지만 이어지는 진산권의 말은 놀라웠다.
“너희들이 한 일에 대해서 앞으로도 절대 시비를 걸지 않겠다. 만약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 중에 시비를 거는 놈이 있다면 내가 목숨 걸고 막아주겠다.”
“아니, 황보 형!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로서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일행도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그때, 진산권이 강엽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대신 내가 이기면 흑룡교도들을 두둔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제갈의현이 총군사로서 흑룡교도들의 안전을 보장했어도 여론이 뒤집히면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진산권은 그런 때에 흑룡교도들을 위해 나서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생긴 것 답지 않게 머리를 좀 굴렸군.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뭐 그 정도라면야.”
“잠깐, 기다리시오!”
군중을 헤치고 나온 화산검룡 무일기가 노기가 서린 얼굴로 진산권을 질타했다.
“황보 형, 어찌 경솔하게 그런 약속을 하는 거요? 용봉지회의 입을 막겠다니!”
“시끄럽다! 이기면 되는 일 아닌가!”
“호승심도 정도가 있지! 저자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시끄럽네.”
갑작스레 귓가에서 속삭이는 묘령의 목소리에 무일기는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가 눈치채지도 못할 사이에 뒤를 점한 백서희가 비침을 들어 마혈 부위를 콕콕 찌르고 있었던 것.
아무리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기감이 흐려졌다고 해도 화산의 일대제자인 그가 눈치채지 못했다니?
“그냥 보고만 있어. 망신당하기 싫으면.”
“....”
무일기의 잘생긴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백서희가 작정하면 그의 마혈을 눌러서 제압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 * *
“정식으로 소개하지. 황보세가의 황보진악이다. 별호는 잘 아는 대로 진산권이고.”
“강엽.”
상대 역시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 구구절절한 자기 소개는 넘어갔다.
중인환시에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삼 장 거리에 선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본다.
“선공은 양보해주지. 와라.”
“흐아아압!”
한순간 끓어오른 기합성과 동시에 급격하게 커지는 일권.
솥뚜껑만한 주먹이 일으킨 강렬한 풍압에 머리카락이 마구 나부꼈지만, 강엽의 신색은 평온했다.
황보진악의 주먹을 부드럽게 휘어감고는 사량발천근의 한 수로 위로 흘려버린다.
극점에 이른 막강한 권격이 휘어지는 순간, 교묘하게 파고든 강엽의 발끝이 정강이를 후려쳤다.
본디 황보세가 고수들의 육신은 철포삼을 익힌 소림 승려마냥 강건했으나, 족도를 허용한 황보진악은 자세가 무너졌다.
“흐읍!”
호신기로 완전히 틀어막았는데도 불구하고 강엽의 암경이 여지없이 파고들어온 것.
자세를 바로잡아 전사경 일권을 날렸지만, 그보다 먼저 강엽이 팔목을 잡고 남은 손으로 황보진악의 복부에 일장을 때려박았다.
“쿨럭!”
숨이 막힌 나머지 마른 기침을 토한 황보진악의 옆구리엔 회오리를 닮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나선타(螺旋打).
무당 면장에서 영감을 얻어 창안한 장법이었다. 종아리 비복근에서부터 끌어올린 전사경에 태극의 심상을 담고, 수십 겹으로 꼬아 한꺼번에 분출하는 장법.
황보진악이 피 섞인 가래침을 퉤 뱉으며 일어났다.
“무슨 무당파와 싸우는 것 같군.”
극강의 권을 추구하는 황보세가의 무공은 유능제강의 이치를 품은 무당의 신공과 상극.
그럼에도 황보진악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달려들어 쉴 새 없는 연환격을 퍼부었다.
그 대부분은 강엽의 몸에 닿지도 못했으나 일부는 전권을 뚫고 그의 몸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북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강엽의 몸이 조금씩 흔들리자 군중들이 황보세가의 소가주도 마냥 밀리진 않는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반면 일행은 강엽이 의도적으로 황보진악의 수준에 맞춰 싸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러는지 의문을 품기도 전에, 불현듯 강엽의 몸에서 이전과는 다른 기파가 폭사되었다.
쿠우우우우우웅......!
“크허헉!”
별안간 황보진악이 볼썽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고, 경파에 휘날렸던 먼지들도 가라앉았다.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 그중에서도 남궁상아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나갔다.
“저, 저거 설마!”
“남궁세가의 제왕검형이 아니오!? 저자가 어떻게...?”
황보진악의 거구를 찍어누르는 강대한 압력.
진땀을 뻘뻘 쏟아내는 황보진악 역시 경악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강엽을 올려다보았다.
“하,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못할 것도 없지.”
일전에 연가휘를 상대했던 남궁상아의 제왕검형.
강엽은 먼발치에서 경파의 짜임새를 살피고, 진기 운용을 헤아려서 제왕검형을 모방한 것이다.
‘오의를 모르니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지만... 부족한 건 다른 걸로 채우면 돼.’
남궁상아가 제왕검형을 대성했다면 제아무리 진조의 영성이 있어도 어림도 없었겠지만, 역으로 어설펐던 무공이 제왕검형의 요체를 파악할 기회를 준 것이다.
무거움의 신공절학. 음유함과 빠름을 추구했던 강엽의 무공과는 정반대에 있는 중압(重壓)의 심상.
피를 향한 욕망 만큼이나 탐욕스러운 진조의 영성은, 상반된 무공조차 제 것으로 삼고자 했다.
“불리한 걸 알고도 도전한 건 칭찬해주지. 다만 이번엔 상대가 안 좋았어.”
강엽은 머리 높이로 들어올린 일권을 황보진악의 면상에 가차없이 꽂아넣었다.
빠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