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맹행 (4)
“으아, 늘어진다아....”
하얀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옥색 온천.
뜨거운 물에 몸을 담은 백서희는 나른한 기분에 기지개를 쭉 켰다.
맞은편의 단목정이 그런 백서희의 몸매를 부러운 듯이 바라봤다.
“언니 몸은 볼 때마다 감탄스럽네요.”
진심이 담긴 한마디였다. 단지 피부가 곱다거나 늘씬한 걸 넘어서 비율 자체가 좋았으니까. 키도 적당히 커서 뭘 입어도 잘 어울렸다.
백서희가 씨익 웃었다.
“나야 열심히 움직이니까.”
“그래도 타고나야 하잖아요.”
“어휴, 동생도 예뻐. 노주 제일의 미녀로 불리잖아. 그리고 내가 몸이 좋아도 당 소저만 하겠어?”
“네? 저요?”
잠시 몸을 식히려고 바깥에 나온 당묘정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백서희가 진지하게 끄덕였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당묘정의 몸은 잡티 하나 없이 눈부셨던 것이다.
백서희가 비율이 좋긴 해도 몸 여기저기에 자잘한 흉터들이 많은 데 반해 당묘정은 말갛기만 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소창후도 당묘정을 힐끗 보고는 말없이 동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묘정이 귀밑머리를 배배 꼬며 눈을 피했다.
“딱히 제 몸이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서... 전 오히려 백 소저가 부러운 걸요.”
백서희에 비해 다소 아쉬운 부분으로 시선을 내린 그녀의 입에서 시름 섞인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단목정도 시무룩해진 건 매한가지.
“하긴 가슴은 언니가 더....”
“흐음, 두 사람보단 내가 조금 더 큰가? 그래도 가장 큰 사람은 따로 있잖아?”
“누구요?”
“조 소저.”
“...아.”
얼마 전에 헤어진 조영옥을 떠올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억거렸다.
돌담에 기댄 백서희가 입맛을 쩝 다셨다.
“처음 봤을 땐 기함을 금치 못했었지... 보통 그렇게 크면 축 처질 텐데 그렇지도 않고....”
“저기, 그런데....”
단목정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바깥이 훤히 드러난 온천인데 누군가 훔쳐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풋, 이제 와서 묻기는 늦지 않았어?”
“그건 그렇긴 한데... 저쪽이 너무 훤히 뚫린 것 같아서요.”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이 멀리 향했다. 대나무로 만든 가림막이 병풍처럼 주변을 감쌌지만, 높은 고지대까지 가리진 못했던 것이다.
온천 주변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절벽을 슬쩍 돌아본 백서희가 실소를 흘렸다.
“그러게. 저쪽에선 우리 알몸이 훤히 보이겠네.”
“그럼 큰일...!”
“그래서 은혼사를 쳐두고 왔어. 누구든 훔쳐보려고 오는 순간 발목과 영영 이별할걸?”
아무렇지 않게 살벌한 말을 늘어놓자 단목정이 해쓱해졌지만, 백서희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 소저도 협력해줬지.”
단목정뿐만 아니라 소창후도 황당한 낯빛을 숨기지 않은 채 당묘정을 바라보았다.
당묘정이 살짝 부끄러워했다.
“으음, 독이랑 암기를 조금... 그래도 살상력은 없으니 목숨을 잃진 않을 거예요. 많이 고생하긴 하겠지만요.”
“그러니 안전하다는 말씀.”
“아, 네.”
“그보다 아까 못했던 이야기 좀 해봐. 하후진한테 몰래 만두 갖다줬다며? 그다음엔 어떻게 됐어?”
“흡...!”
한순간에 짓쳐들어온 기습. 무방비한 허점을 찔린 단목정이 헛바람을 들이키자 백서희의 입꼬리가 음흉하게 휘어올라갔다.
“호오, 왜 이렇게 놀라실까?”
“아, 아니 그게....”
단목정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자 백서희가 깔깔 웃으면서 그녀의 등짝을 두드렸다.
“잘 해봐. 난 동생 응원하고 있으니까. 혹시 뭐 궁금한 거 있으면 기탄없이 물어보고.”
“사실 궁금한 게 있긴 한데....”
“엥? 벌써?”
“예. 남자랑 할 때 어떤 기분인지....”
“어....”
백서희가 눈을 껌뻑였다.
설마 단목정이 이런 대담한 질문을 할 줄이야?
말은 안 했지만 당묘정과 소창후도 궁금한 듯 마른침을 꼴깍 삼키면서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백서희의 이마 위로 열기로 인한 땀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걸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고 해야 하나?
“끄응,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필사적으로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을 쥐어짤 때, 운무처럼 깔린 연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겁게 하나?”
“선자님!?”
수건으로 몸을 가린 당묘정과 소창후가 당혹스러워하며 일어났다.
옥청선자와 여제자인 하윤이 온 것이다.
“다들 술은 깬 모양이군. 씻으려고 왔는데 마침 자네들이 먼저 와 있었구만.”
“아하하, 저희도 우연히 발견해서....”
“땅밑 깊숙한 곳의 지열과 태백산(太白山)의 영험한 기운이 녹아든 온천이지. 단지 몸을 씻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운기요상에도 효과가 있다네.”
곧 옥청선자와 하윤도 뜨거운 물 속에 들어와서 몸을 뉘였다. 한군데에 시선이 모인 네 여인은 왠지 압도당하는 걸 느끼면서 겸허하게 쪼그려 앉았다.
“.......”
옥색의 수면 위로 작은 기포만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 * *
여인들이 온천에 가있을 무렵, 강엽은 청수를 찾아가서 그날 있었던 싸움에 대해 말해주었다.
“무당의 파문제자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무당혈검이니 뭐니 하던데.”
청수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혈음마군의 이름은 처음 듣지만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혈음마군 본인이 말한 겁니까?”
“아니, 괴뢰마가 밝혔다. 하지만 본인도 부정하진 않았어. 심기는 불편한 것 같았지만.”
“으음....”
“옥청선자도 모르는 것 같던데.”
옥청선자가 혈음마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그가 등장했을 때 가장 먼저 말했을 터.
청수가 침음했다.
“옥청선자께선 아직 불혹도 되지 않으셨습니다. 제 사부님보다 십 년은 젊으시지요. 아마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엔 화산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셨을 겁니다. 무당혈검을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아신다 해도 얼굴은 모르실 겁니다.”
“그런 일이 있긴 했다는 말이군.”
“...이십 년 전의 일입니다.”
청수의 입에서 피곤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확히는 이십일 년... 아니, 이십이 년쯤 된 것 같군요.”
청수에게는 까마득한 옛일이었다. 그가 젖먹이 아기였을 때 일어난 사건이었으니까.
“제가 이걸 알고 있는 건 사부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무당혈검, 본산의 파문제자는... 사부님의 사형이었습니다.”
-무당제일검 삼청검(三淸劍) 현운 도장.
무림에서의 배분은 옥청선자와 비슷했으나, 정도십대고수의 반열에 든 것은 그녀보다 오래되었다.
옥청선자가 정도십대고수의 말석이라면, 삼청검은 차기 천하팔존의 일좌를 노려볼 만한 절세고수.
한데 청수는 그런 삼청검을 눈아래로 격하시킨 고수가 있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사부님께선 언젠가 과거의 그림자가 찾아오는 걸 우려하셨습니다. 한데 그자가 혈교에 귀의했었다니... 방문좌도에 빠진 것도 모자라 본산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군요.”
“무당이 알면 좌시하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배신자가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둘 리가 만무.
사실을 안다면 무당파는 무당혈검, 아니 혈음마군을 잡기 위해 총력을 다하리라.
“광명마교의 사도와 싸울 때 그자는 팔 하나를 잃고 도망쳤다. 아무리 양손잡이라도 치명적이겠지.”
무인의 생명이 끝장나진 않더라도 기량이 떨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흡혈귀처럼 재생력이 있어서 팔을 새로 돋게 할 수 있다면 몰라도.
청수가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강 도우,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말라고?”
“...예. 어른들께선 이 일을 가급적 조용히 해결하려고 하실 겁니다.”
사문의 치부를 묻는 일이다.
소문이 퍼져서 좋을 게 없었다.
“나야 상관없는데... 만약 전장에서 마주치면 나도 봐줄 수 없어. 그럴 상대도 아니고.”
팔을 잃었다고 하나 팔대교왕이다. 무공이 다소 쇠했어도 여전히 위협적일 터.
청수도 무작정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그것까진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어른들께선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고 하실 겁니다. 어쩌면 사부님... 아니, 장문인이 하산하실지도 모릅니다.”
“무당 장문인... 검선 말이지?”
상대가 상대인 만큼 천하팔존이 나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림의 정상들이 움직이는 건가.’
바야흐로 난세였다.
이미 화산의 검성이 뜻을 일으켰고, 어쩌면 무당의 검선 역시 천하에 출사표를 던질지 모른다.
‘그리고 무림맹엔 멸도가 있지.’
무림맹을 수호하는 천하팔존.
이 여정의 끝에서 또다른 절대자를 만날 것 같다는 예감이 상단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 * *
장대한 거구의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창문 밖을 오시하고 있었다.
드넓은 무의 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고루거각.
바깥에서 노인이 있는 곳까지 들어오려면, 필히 ‘맹주전(盟主澱)’이라 적힌 현판을 지나쳐야 했다.
무림맹주로서 이 땅을 이끌고 있는 시대의 거인.
가슴께까지 반백의 수염을 기른 홍안의 노인이 시선을 바깥에 둔 채 말문을 열었다.
“호송단은 언제 온다고 하던가?”
“사흘 뒤에 도착할 겁니다, 맹주님.”
-멸도(滅刀) 혼원도왕(混元刀王) 팽무강.
팔가인 하북팽가의 태상가주로서, 옛날엔 황실의 대장군으로 군을 지휘했던 경력도 있었다. 관직을 내려놓고 유유자적하게 지내다 맹과 황실을 잇는 가교로서 맹주위에 오른 절대자.
혼원도왕 역시 황제가 하사한 왕호다. 단순히 강해서 왕이라 불리는 게 아니라 진짜 왕이었다.
“그들이 온다면 여기서도 보이겠군. 호송단을 이끄는 친구의 별호가 귀영이라고 했던가?”
“예. 본명은 강엽이라고 합니다.”
“껄껄, 참 놀랍지 않은가? 젊은 친구의 이름이 맹주전에 올라오는 보고서에 적혀 있다니.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말일세.”
“귀주의 안개 사태 말씀이군요.”
“개방주도 그 친구 이름을 언급했었지. 전에도 장한 일을 몇 번이나 했다던가?”
“장강의 조운대전에서 활약했고, 사천의 흑접을 토벌하는 일을 주도했지요.”
“그래, 총군사가 보기엔 어떤가?”
총군사 제갈의현이 즉답했다.
“정상적인 행보는 아닙니다.”
“음, 어떤 면에서? 그 친구가 하는 일이 대의에 어긋난 적은 없지 않나?”
“짧은 기간에 여러 일을 해낸 건 그렇다 쳐도, 무공의 성장세가 지나치게 빠릅니다. 귀주의 일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역시 암시장의 건이 걸리나 보군.”
“풍기는 기도가 사마외도에 가깝다는 평이 보고서마다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마공을 익혔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쩔 텐가?”
“고양이가 검든 하얗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지요. 물론 그가 마공을 익혔다면 훗날 배제해야 할 경우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일단 내버려두자는 소리구만.”
“문제는 검성입니다.”
같은 천하팔존의 이름이 나오자 맹주의 주름진 미간에 더욱 깊은 고랑이 파였다.
“도문 출신답지 않게 성급한 친구지. 가끔은 나와 그 친구의 성격이 바뀐 게 아닐까 싶어.”
혈기방장한 기질로 유명한 하북팽가 출신답지 않게 팽무강은 냉철했다. 물론 그도 젊은 시절엔 혈기가 넘쳤지만, 강호의 세파와 조정의 권력다툼을 겪으며 점차 그러한 기질을 버리고 노련해졌다.
“사실 그 친구도 나이 먹어선 많이 유해졌지. 마교와 엮이면 젊은 시절의 기질이 되살아나는 게야.”
“만약 검성께서 귀영을 징치하고자 하신다면 낭왕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엔....”
“낭인전을 끌어들이는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제자도 아닌데 낭왕이 극단적으로 굴까?”
“낭왕이 그를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자칫 천하팔존 중 둘이 충돌할 수도 있는 일.
물론 반대로 귀영의 일을 구실로 낭왕을 끌어들일 수도 있겠지만, 제갈의현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사실 낭왕도 낭왕이지만, 염왕이 더 문제입니다.”
“으음...!”
염왕의 이름까지 나오자 맹주는 태사의에 주저앉아 골치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솔직히 그 선배는 부담스러운데....”
이미 오십 년 전에 천하팔존에 올랐던 염왕이다.
은거한 탓에 ‘전대’로 취급받긴 하지만, 왕성하게 활동했다면 지금도 천하팔존으로 대접받았으리라.
‘아니, 천하제일인이 됐을 수도 있겠군.’
당금 무림엔 천하제일인이 없다.
혹자는 소림 방장인 불권을 천하제일로 추앙하지만, 불권은 수십 년간 강호의 일에 나서지 않았기에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었다.
수십 년 전부터 절대고수였기에 그러려니 할 뿐.
“총군사, 염왕 선배의 비위를 거슬러선 안 되네. 만약 광명마교주가 전면에 등장한다면 그를 막을 자는 염왕 선배밖에 없음이야.”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군요.”
“그러니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거 아닌가. 광명마교주가 궁검을 격살했네. 나도 궁검을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하지는 못해. 그건 광명마교주가 나보다 한참 더 고수라는 의미일세.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맹주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눈을 감고는 무겁게 시름했다.
“그는 심상절예를 완성했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