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55화 (375/450)

47화. 용서 (5)

휘우우우우웅......!

장내를 잠식하고 있는 거센 기류.

검성의 몸에서 역류한 교주의 심상은 공간을 휩쓰는 것을 넘어, 맹주전 전체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피를 토하는 흑룡교도들이 속출하고, 이 노사는 정신을 붙잡으며 진언을 외우는 게 한계였다.

함께 가부좌를 튼 맹주와 옥청선자가 교주의 심상을 조금씩 부담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걸로 끝나지 않았을 터.

“총군사님, 대체 어떻게 해야...!”

“방도를 일러주십시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채고 달려온 무인들이 보챘지만 제갈의현은 아무 말도 못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대법이 어째서 실패의 향방으로 기울었는지 짐작했기에 섣불리 손을 댈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뭐라도 해야...!”

“일단 멀리 떨어지게.”

“예?”

“어서!”

노기가 묻어나는 경고에 무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맹주와 옥청선자를 보며 입술을 깨문 제갈의현이 강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각기 붉고 푸른 광채를 뿜어내는 한 쌍의 눈동자.

무림맹의 총군사이자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견문이 넓은 제갈의현조차 이런 안법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형태나 기운이 아니라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

술법의 문외한이라면 바로 앞에서 봐도 모르겠지만, 제갈의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있었다.

장내를 폭풍처럼 휩쓴 교주의 심상이 낱낱이 쪼개지면서 강엽에게 흘러들어가고 있었던 것.

심상절예에 대해서는 토막적인 지식만 알고 있기에 이 현상을 명확히 규정할 순 없었으나, 강엽이 교주의 심상을 흡수하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대법이 감당하지 못한 교주의 심상을 흡수하는 거다.’

말하자면 제방 너머로 범람하는 물을 홀로 쓸어담는 격이었다.

‘아니, 그런 수준도 넘어섰다.’

강엽이 손을 들어 무언가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자 흑룡교도들을 덮친 심상이 쑥 뽑혀나온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듯한 광경에 제갈의현이 아연해할 때.

“멈추게!”

가부좌를 틀고 있던 맹주가 눈을 번쩍 뜨는 것과 동시에 사자후처럼 경고를 질렀다.

제갈의현이 입을 쩍 벌렸다.

“맹주님!?”

“그를 막아야 하네, 총군사! 가만히 두면 교주의 심상에 잡아먹히고 말아!”

제갈의현의 안색도 급변했다.

‘이런...!’

강엽을 건드리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도 일단은 맹주의 명을 받드는 게 급선무이리라.

수인을 맺을 시간도 없다고 판단한 제갈의현은 즉시 몸을 날렸다. 쭉 뻗은 손가락으로 강엽의 마혈을 짚어 행동을 제약할 생각이었다.

콰아아아아앙!

“크읍!”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강엽의 몸에서 터진 공력 파동에 밀려났다.

정도십대고수의 일원답게 표홀한 경신술로 균형을 잡은 그의 얼굴은 낭패감에 휩싸여 있었다.

“...호신강기?”

공력 파동이 일어난 직후.

훤히 드러난 공간엔 강엽을 감싼 뇌기가 붉게 명멸하고 있었다. 먼지가 닿자 불꽃이 파직거린다.

-뇌벽.

자성검법의 육초식이자 공방일체의 호신강기.

맹주와 제갈의현은 본능적으로 흑룡교도들을 살폈지만, 뇌기가 애먼 사람들에게 튀는 일은 없었다.

“이보게, 강 무사! 내 말 들리는가?”

“.......”

애탄 부름에도 답은 없다.

교주의 심상을 조각조각 분해하여 빨아들이는 데만 집중할 따름.

맹주의 고함이나 제갈의현이 접근한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 모습에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안색이 백짓장처럼 질린 흑룡교도들이 식은땀에 절은 채 쓰러지자 제갈의현이 얼른 달려가서 그들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명줄은 붙어 있습니다.”

“어찌된 건지 알겠나?”

“송구합니다. 저도 이런 현상은 처음 겪어보는지라... 맹주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그럭저럭 버틸 만하네. 그래도 나랑 옥청선자가 받아들인 심상은 못 뽑....”

갑작스레 줄어드는 말꼬리.

바로 앞에 앉은 옥청선자의 몸에서 희미한 빛무리가 뽑혀나오더니 강엽에게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두고 봐야 하는 겁니까?”

“이미 손을 쓸 기회는 지났네. 적어도 옥청선자의 몸에 해는 없을 게야.”

오히려 심신을 좀먹는 심상이 뽑혀나갔으니 옥청선자에게는 좋은 일이겠지.

다만 교주의 심상을 받아들인 강엽이 어찌 될지 모르다는 게 문제였다.

그때 속눈썹을 바르르 떤 옥청선자가 힘겨운 들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자네 눈에 보이는 그대로일세.”

맹주가 턱짓으로 가리키자 고개를 돌린 옥청선자가 탄식했다.

“대체 어쩌자고...!”

그때였다.

“...그래, 대충 알 것 같다.”

굳게 다물려 있던 강엽이 입을 연 것은.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한 모습에 세 사람의 마음속에 의구심이 싹튼 순간.

“어엇!”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던 무인들이 경호성을 터뜨렸다.

하나 목소리보다 허리춤의 날붙이가 빠져나오는 게 훨씬 빨랐기에,

추아아아아악-!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뻗어나온 은빛 섬광이 맹주전의 천장을 박살내는 것을 막지 못했다.

뒤이어 어기충소의 수로 천장의 구멍을 빠져나가는 강엽의 신위.

“.......”

한 호흡에 이어진 광경에 맹주와 제갈의현, 옥청선자는 얼빠진 모습으로 굳어졌다.

“...저 친구, 어검술도 쓸 줄 알았나?”

“선자께서 강 무사가 어검술을 쓰는 걸 봤다고 하셨지요. 엄청나게 빠른 출수였습니다.”

아직 대법의 구속에 묶여있는 맹주는 그렇다 쳐도, 제갈의현은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었다.

“만약 그 검이 저를 노렸다면 막지 못했겠지요. 최소 목어검(目馭劍)으로 보였습니다.”

어검술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손으로 검을 다루는 수어검의 경지, 눈으로 검을 다루는 목어검의 경지, 그리고 마음으로 검을 다루는 심어검의 경지까지.

덥수룩한 수염을 쓸어내린 맹주가 이맛살을 굳혔다.

“으음....”

“왜 그러십니까?”

“내 일전에 그 친구를 봤을 때 강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어검술을 쓸 정도는 아니었네. 그 친구가 워낙 기도를 철저히 숨겨서 자세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잘 쳐줘도 정도십대고수의 중간쯤이라고 봤었지.”

한데 어검술 중에서도 두 번째 단계인 목어검의 경지에 오른 것을 두 눈으로 똑똑이 목도한 것이다.

과연 그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최소한 정도십대고수의 수좌. 어쩌면....”

말하다 말고 돌연 목소리를 흐렸지만, 제갈의현과 옥청선자는 뒷말을 짐작했다.

천하팔존의 자리에 공석이 생긴 지금, 강엽은 그 자리에 도전할 만한 고수라고 말하려고 했을 터.

광명마교주의 등장으로 천하팔존의 존재감이 조금 퇴색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서른도 안 된 청년이 그 자리에 오르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총군사, 난 교주의 심상을 감당하느라 움직이지 못하네.”

태연하게 얘기하는 것처럼 보여도 맹주의 이마와 목덜미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검성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교주의 심상을 절반 이상 감당했기 때문.

강엽처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흡수하진 못했으나, 맹주는 무한에 가까운 공력으로 심상을 통제하며 조금씩 자신의 내면에서 녹여내고 있었다.

“아, 예. 그럼 제가....”

“아니, 자네는 맹주전을 지켜주게.”

“예?”

“마침 저 친구를 감당할 사람이 온 것 같거든.”

하늘을 향해 뻥 뚫린 천장.

그곳으로 고개를 들어올린 맹주는 멀리서 찾아오는 기척을 감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염왕 선배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지.”

* * *

노을이 저물어가는 하늘.

먼 서쪽에서부터 시뻘겋게 타오르는 하늘을 바라본 강엽이 짓씹듯 내뱉었다.

“빌어먹을 태양.”

전신 경맥에서 화산처럼 들끓는 미증유의 거력.

교주의 심상에서 비롯된 힘이 태양을 만나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를 치고 있었다.

사아아아아아-!

그에 혈공진기가 이빨을 드러낸 독사처럼 격하게 날뛴다.

태극의 심상을 되뇌이며 이종진기를 다스리려고 했지만, 두 힘 모두 극심하게 반발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지금이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이라는 것.

달과 태양이 같은 하늘에 떠오르고, 동쪽에서부터 시작된 어스름이 태양을 뒤쫓듯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

음과 양이 공존하는 하늘 아래 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바짝 곤두섰다.

마치 손만 뻗으면 닿을 듯이 육안이 미치지 않는 거리까지 폭발적으로 확장한다.

지평선 너머로 반쯤 모습을 감춘 태양 저편에서 시커먼 점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타악!

구멍을 사이에 두고 맹주전의 지붕에서 마주친 두 사람.

높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사내가 강엽을 보며 피식거렸다.

“갑자기 교주놈의 기척이 느껴져서 와봤더니 이건 또 개판이 벌어졌군. 검성의 치료가 잘못된 거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목구멍을 쥐어짜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온몸을 폭발시킬 듯이 솟구치는 기운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그런 강엽을 유심히 들여다본 염왕이 고개를 주억였다.

“치료가 잘못됐다기보다는, 네놈이 교주의 심상을 죄다 먹어치운 것 같군. 그 과정에서 상단전이 활짝 열리는 바람에 뜻밖의 수확도 얻은 것 같고.”

“.......”

더 물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 염왕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공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강엽은 시퍼런 칼날이 미간을 노리는 느낌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억누르기만 해선 답이 없지. 네놈도 그걸 알고 밖에 나온 것 같은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보여주마.”

염왕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심상절예가 뭔지 말이다.”

“후우....”

길게 호흡을 내뱉는 찰나.

어느덧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강엽이 눈을 떴다.

시뻘건 안광이 타오르듯 떠오르고,

-심상절예....

교주의 심상을 흡수하고, 진조의 영성을 통해 편법으로 체득한 기예.

모래로 지은 누각처럼 부실하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한순간이나마 손에 쥔 절대적인 권능이었다.

언젠가 심상지경에 오르면 체득할지도 모르는 심검을, 지금 이 순간 끌어와서 휘두른다.

-무광암(無光暗).

태양을 증오하는 흡혈귀는, 빛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태양을 베었다.

* * *

“음?”

교주가 턱을 들어올렸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만 있었지만, 그는 흥미거리를 찾은 아이처럼 재밌어했다.

그런 교주의 반응에 권좌 아래에서 보고하던 육사도가 당혹스러워했다.

“교주님, 속하가 혹시 실수를....”

“아니다. 너 때문이 아니니 괘념치 말거라. 무림맹에 남겨두고 온 선물이 말썽을 일으켰구나.”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육사도는 다시 묻지 않았다.

권좌에 등을 파묻은 채 한 손으로 턱을 받친 교주가 호오 하고 감탄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본좌의 심상을 발판 삼았나. 이러면 적을 키워준 꼴인가?”

혀를 차고 있지만 딱히 분개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교주는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태양을 먹어치우는 심상. 본좌의 심상과는 정반대지만 그 형태는 놀랍도록 비슷하구나.”

* * *

쩌저저저저적......!

밤하늘에 검은 선이 아로새겨진다.

끄트머리만 남겨둔 태양은 물론, 총총히 내리쬐는 별빛과 달빛마저 집어삼키는 참격.

단지 벤 것에서 끝나지 않고, 허공에 먹물처럼 남아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

강엽은 말없이 잇몸을 악다물었다.

까무러칠 것 같은 고통. 근육과 뼈가 끊어지고, 전신 경혈이 폭주하면서 봉합된 심흔이 터졌다.

감당할 수 없는 권능을 휘두른 대가는 그토록 혹독했다.

“하아, 하아....”

붉게 물든 시야.

실핏줄이 터지면서 흘러나온 핏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비단 안구만 터진 게 아니라, 온몸이 쩍쩍 갈라지면서 피를 폭포처럼 게워냈다.

“우웨에에에엑!”

양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토했다. 어긋난 균형감각으로 인해 머리가 왱왱거리는 게, 마치 말벌 떼가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사아아아아아....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빌린 철검은 먼지가 되었다.

“크읍! 우욱!”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한 끝에 턱을 들어올린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철가루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염왕의 모습.

죽을힘을 다해 내쏜 심상절예를 손으로 막고 있었다.

아니, 손으로 막는 것이 아니다.

‘심도...!’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칼날.

심상의 도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저갱을 밀어내고 있었다.

깨진 기왓장과 철가루, 심지어 먼지까지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는 무저갱을 깊이 들여다본 염왕이 턱을 매만졌다.

“그렇군. 이게 네놈의 심상절예란 말이지... 마음속에 뭘 품었는지 대충 알 것 같구나.”

하지만, 이라고 짧게 중얼거리며 덧붙인다.

“아직 불완전하다. 세월을 끌어당긴 심상절예이니 오죽하겠냐만은.”

그렇게 심도를 쥔 손을 안쪽으로 돌려세운다.

-일도무겁살.

찰나와 같은 의념이 덮치는 순간.

‘아.’

천지를 가득 메운 칼날의 폭풍.

강엽은 온 산천초목을 둘러싼 칼날의 폭풍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군집한 칼날의 폭풍이 전신을 난도질하고,

쩌어어어어엉!

무광암의 먹선이 염왕의 손짓을 따라 으깨지면서 사방에 검은 파편을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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