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기억 (3)
진조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강엽이 물끄러미 응시하자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처럼 대답했다.
[...사람은 변하는 법이다. 영원히 불변하는 사람은 없다. 짐조차 그렇지. 얼마나 빨리, 얼마나 급격하게 변하는지 차이만 있을 뿐.]
그렇다 해도 뭔가 변하는 계기가 있었겠지.
말을 잇기 전에 잠시 사이를 둔 진조가 천장의 어둠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네놈도 대충 짐작하겠지만 천 년 전 짐과 그 녀석들은 온 천하의 사마외도를 족쳤다. 하지만 그 과정이 늘 순탄하진 않았지. 특히 혈마와 관계된 놈들은 만만치 않았다.]
“혈마?”
[일전에 보지 않았느냐. 혈마의 후예들이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어떤 짓을 했는지.]
“....”
암시장에서의 사건.
강룡방주를 잡은 이후 혈교가 흑상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대가를 제시했는지 알게 되었다.
건강과 젊음을 되찾게 해주었다고 했던가.
[지금도 그럴진대 천 년 전이라고 달랐겠느냐?]
“똑같았겠지....”
씁쓸한 웃음을 흘린 강엽이 표정을 굳히면서 물었다.
“그래서 그들이 타락한 게 혈마와 관련 있다는 건가?”
[그래, 네놈이 본 사명궁 역시 혈마에게 충성한 놈들이었다. 혈마는 혈교뿐만 아니라 온 천하의 사마외도에게 충성을 받았고, 마의 제왕으로서 군림했던 자.]
진조는 자신이 아니라 혈마야말로 일세를 풍미한 마의 대종사였노라고 담담하게 고백했다.
[그 시절은 대륙이 여러 나라로 쪼개진 난세였지만, 혈마는 막후에서 모든 것을 지배했다.]
전쟁도, 반란도, 나아가 권력자의 죽음도.
끊임없이 전란을 일으켜 온 천하를 파탄으로 몰고 가며, 자신이 원하는 만큼 시산혈해를 쌓았다.
[짐이 그걸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지. 진작에 알았다면 놈이 커지기 전에 끝냈을 텐데. 일대일이라면 몰라도, 세력전으로 싸운다면 놈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해서 영면을 대가로 예사란에게 협조한 거다.]
“혈마의 정체가 뭐길래?”
흡혈귀와 인간의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마라는 것은 알겠다. 진조의 기억에서 봤으니까.
하지만 진조마저 경계할 정도로 강했다고?
‘물론 강하니까 혈교를 세웠겠지만....’
하지만 막연히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강한 것 같았다.
진조와 삼대마교의 시조들이 협력해야만 했었다니.
[그놈은....]
진조가 미간을 좁혔다. 떠올리기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짐의 오래된 제자였느니라.]
“....”
[우리의 모든 여정은 놈을 죽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혈마는 강하고 교활했지. 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소진시켰다.]
아끼는 사람을 잃고, 감정이 상해서 관계가 틀어지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
[자신이 지켰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심정을 아느냐? 믿었던 동료에게 등을 찔리고, 아끼는 사람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해서 시신마저 능욕당하고, 자신이 하던 일이 알고 보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짓거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비극적이겠지.”
실제로 그런 일을 겪는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하리라.
그러나 강엽은 동정심을 품기보다는 사리를 헤아렸다.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진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은밀히 독을 풀었다. 이대로는 자신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판을 짰지. 녀석들이 마도에 빠지도록 절묘하게 설계했다.]
“뭐?”
[네놈이 지키는 곳을 향해 십만 명의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생각해봐라. 네놈이 꽤 강하긴 하지만 십만 명이나 되는 적으로부터 네 사람들을 지키는 건 무리다.]
“그러면 피신을 가지 않나?”
[보통은 그렇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후방의 아군이 적이 되어 등을 찌른다면?]
“...그야말로 사면초가로군.”
[그래, 하지만 우린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지.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도에 손을 댔다고?”
[인신공양을 통한 대법.]
그릇된 길일지라도 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모로 가도 경성만 가면 된다는 격언도 있듯이 목적을 이룰 수는 있었으니까.
[의협심을 버린다면 그만큼 효율적인 것도 없지. 수십 명을 희생시키면 수백 명을 죽일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하물며 전원이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른 일행이라면 그 효과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처음엔 죽여야 하는 자들을 죽이고, 그다음엔 죽여도 되는 자들을 죽이지. 그런 일을 계속 반복하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쓸 만한 자원으로 보게 된다.]
“....”
강엽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진조의 말은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기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피를 마셔서 생을 연명하고 힘을 기르는 흡혈귀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많았지. 예를 들어 우리가 쳐들어간 곳에 의도적으로 마도의 깨달음이 적힌 경문을 남겨둔다거나....]
“당신이 있었는데도 막지 못했나?”
[그 녀석들 전부를 일일이 감시하겠느냐? 게다가 그놈들은 짐을 껄끄럽게 여겼다. 친분을 나누긴 했어도 마음을 터놓지는 않았지. 그렇게 우리는 분열했고, 혈마와 싸울 때는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하긴 진조의 정체를 알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나마 예사란만 예외가 아니었을까?
“그럼 예사란이 광명마교를 만들었나?”
[아니다.]
강엽 앞에선 언제나 거만했던 진조의 얼굴에 처음으로 짙은 피로의 기색이 드리웠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짐과 함께 싸웠고, 우리는 함께 혈마를 죽였다. 이후엔 조용히 은거했지. 다만 그녀가 제자를 몇 명 거두었는데, 아마 그놈들이나 그 후손들이 광명마교를 만든 것 같구나.]
“그건 말이 안 돼.”
[음?]
“나도 광명마교의 교리를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초대 가루라의 화신이 광명마교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게 거짓부렁이 아니라면....”
[당연히 거짓부렁이다. 짐이 그녀의 마지막을 기억하거늘. 예사란은 광명마교와 무관하다.]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궁해졌다.
‘그래도 찜찜한데....’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꺼림칙한 예감이 가시질 않는다.
“그래도 당신이 이렇게 버젓이 있는 걸 보면 그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모양이군.”
[...그렇지.]
심상절예라는 지고한 무공으로도 결국 진조를 죽이지 못한 것이다.
‘못 죽인 건지, 안 죽인 건지.’
만약 그녀가 진조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면 후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
진실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시간이 됐군.]
“...?”
[네놈이 기절한 지 나흘째다. 깨어났으니 슬슬 돌아가야지.]
“...나흘이나?”
진조의 기억을 엿보며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는 건 짐작했지만 설마 그렇게 길었을 줄이야.
[바깥에 나가면 깜짝 놀랄 인간이 있을 게다. 그런 녀석이 이런 시대에 있을 줄은 짐도 몰랐구나.]
“누군데?”
[흐흐, 먼저 말해주면 재미없지 않느냐?]
“아니, 그게 뭔...!”
강엽이 어이가 없어 따지려는데 그보다 먼저 진조가 손가락을 튕기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후계자야.]
* * *
“크읍!”
“꺄악!?”
눈을 뜨자마자 이마가 얼얼했다.
‘평범하게 깨면 어디가 덧나나?’
진조의 기억을 엿보고, 구질구질한 과거 이야기를 듣더니, 이젠 깨자마자 이마를 부딪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딱히 힘을 준 건 아니라서 그냥 아픈 걸로 끝났다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당문의 공녀가 박치기에 절명하는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당 소저가 여긴 웬일이오?”
“끄응, 정신이 드세요?”
붉게 부어오른 이마를 부여잡고 울상을 짓던 당묘정이 깜짝 놀란 얼굴로 강엽의 용태를 확인했다.
다만 눈동자의 초점이 살짝 풀린 게, 강엽과 부딪친 충격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한 듯싶었다.
강엽이 검지와 중지를 모아 좌우로 까딱였다.
“이게 몇 개로 보이시오?”
“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
부루퉁하게 대답하면서도 제대로 두 개라고 말하는 걸 보면 심각하진 않은 모양이다.
강엽이 상반신을 일으키자 몸을 가린 이불이 떨어지면서 잘 발달한 근육이 드러났다.
쓸데없이 크기만 불려 우락부락하지도 않고, 보기 좋게 잘 빠진 날렵한 근육.
‘그러고 보니 이것도 약빨인가?’
선천지기가 스며든 뼈와 근육은 날로 강해지고 있었다. 딱히 열심히 몸을 갈고 닦은 것도 아닌데.
“크흠, 강 무사님, 옷을 좀....”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당묘정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훔쳐봤지만, 강엽은 다른 데 신경이 팔리느라 미처 그것까진 눈치채지 못했다.
“...서희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소?”
“으음.”
백서희가 옆자리의 간이침상에서 새근새근 잠들고 있었던 것.
당묘정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강 무사님이 정신을 잃었던 이후부터 쭉이요.”
“...쭉?”
“그동안 백 소저가 간병을 했어요. 저도 옆에서 조금씩 돕긴 했는데, 강 무사님께서 부상을 입지 않으셔서 한 건 별로 없었어요.”
그럴 것이다. 재생력 덕분에 목숨을 앗을 만한 부상도 알아서 나아버리니까.
거기까지 말한 당묘정이 잘 익은 능금처럼 얼굴을 붉혔다.
“크흠, 정신을 잃어도 기본적인 생리 현상은 하는지라... 제가 의원이긴 하지만 그쪽은 좀... 그래서 백 소저가 많이 고생했어요.”
“한마디로 똥오줌 받아줬다는 거지.”
별안간 말을 자르고 들어온 목소리. 강엽이 시선을 내리자 잠에서 깨어난 백서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녀가 민망해서 먼 산을 돌아보는 당묘정을 보며 키득거렸다.
“에이, 당 소저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요? 내가 뭐 틀린 말을 한 것도 없구만.”
“아, 예. 틀린 말은 아니죠....”
“들었지?”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라....”
강엽은 한숨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말한 건 백서희인데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이란 말인가.
그래도 궂은 일을 해준 백서희가 고마워서 등허리를 토닥이자 그녀의 입매가 풀어졌다.
“당 소저도 좀 쉬어요. 요 며칠간 부상자들 돌보느라 힘들었잖아요? 이 사람, 몸 하나는 기막히게 튼튼하니까 이젠 걱정할 필요 없어요.”
“휴우, 알겠어요. 그래도 탕약은 꼭 드셔야 해요.”
“굳이 그럴 필요는....”
“괜찮다고 그냥 넘기면 나중에 속병 나는 법이에요. 원기를 보충하는 탕약이니까 꼭 드세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내려다보는 게 거절하면 한바탕 혼낼 기세였다. 묘한 압박감을 느낀 강엽은 결국 순순히 항복했다. 탕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 해도 상대의 호의를 한사코 거절하는 것도 도리는 아닐 테니까.
“알겠소. 꼭 먹겠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당묘정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후훗, 푹 쉬세요. 나가볼게요.”
그렇게 당묘정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 백서희가 강엽이 덮은 이불 안을 쏙 파고들어왔다.
“뭐하냐?”
“피곤해. 나도 잠은 자야지.”
“...아까 잔 거 아니었나?”
“그건 뜬잠. 안전한 곳에 왔어도 안심할 수는 없잖아. 마교 새끼들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사실 말은 안 했지만 당 소저 왔을 때부터 깨 있었어.”
“...무슨 일이 있었지?”
오사도와 싸우던 중에 충격을 받고 내면의 심상세계에 곤두박질쳤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진조가 대신해서 오사도를 쓰러트렸고....
‘광명마교주.’
당금 강호의 절대자 중 한 명으로 군림하는 광명마교의 교주가 갑자기 현신했다.
그걸 끝으로 완전히 의식을 잃었던가.
“전혀 기억이 안 나나 보네.”
강엽의 이야기를 들은 백서희의 안색도 자못 심각해졌다.
“어디 보자. 진조가 네 몸을 차지한 것까진 알고 있으니 설명할 필요 없겠고... 그 이후부터 말해줄게.”
백서희는 강엽의 몸을 차지한 진조가 옥청선자를 돕고, 일행이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고 말해주었다.
“다들 경악하더라. 네가 갑자기 전설의 어검비행을 하니까 놀라 자빠지더라고. 근데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전에 엄청난 사람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거든.”
엄청난 사람이라.
하지만 강엽이 묻기 전에 한 줄기 전성이 방 안을 파고들었다.
[정신 차렸으면 나와라, 애송이. 깨자마자 계집이랑 나뒹굴다니 제정신이냐?]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는 아니다.
기억을 곰곰이 되돌아본 강엽은 곧 누구의 목소리인지 깨닫고 눈썹 사이에 주름을 잡았다.
백서희가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저 영감님은 투시안이라도 있나. 무서워서 뭘 하지를 못하겠네. 사생활 존중은 엿 바꿔 드셨어.”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전성이 울린 방향을 역으로 훑어보니 무려 오 리 너머에서 들려왔다. 삼화취정의 기감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거리에서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보고 전성을 날린 것이다.
‘고수라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이토록 어마어마한 고수일 줄이야.
백서희가 걱정하며 말했다.
“조심해. 오자마자 너... 아니, 진조랑 푸닥거리했어. 도중에 장소를 바꿔서 자세히 보진 못했는데, 말도 안 되게 강하더라. 하후진이 자기 사부라고 하던데.”
“뭐?”
“빌어먹을 우리 선조님을 죽인 염왕 말이야. 정체 밝히니까 옥청선자도 기절하려고 하더라.”
흑룡교주를 격살했던 전대의 천하팔존.
고고한 절대자의 부름을 받은 강엽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