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00화 (200/450)
  • 35화. 난전 (5)

    ‘너무 어두운데....’

    주변은 온통 칠흑색이었다.

    고개를 내려봐도 자신의 몸조차 보이지 않는다.

    밤눈이 밝은 흡혈귀의 감각조차 이 안에선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손발을 움직이는 감각은 선명했다.

    ‘진기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혈공진기가 오른쪽 눈가의 동자료혈에 쏠리자 푸르스름한 광채가 어둠을 물리친다.

    정안으로 어둠의 본질을 꿰뚫어본 강엽은 자신이 무슨 수에 당했는지 깨달았다.

    ‘술법진이군. 자신의 몸을 축으로 삼아서 펼친 건가.’

    워낙 급속도로 퍼진 탓에 몸을 뺄 틈새도 없었다.

    유이강과 가까이 있던 불괴강시와 풍도마장은 물론이고, 명도상인 역시 어둠에 갇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휘말렸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순식간에 퍼져나간 속도로 봤을 땐 최소 수백 명이 삼켜졌을 것이다.

    어쩌면 일행 역시 휘말렸는지도 모르는 일.

    “.......”

    함부로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지만, 한 장소에 오래 있는다고 달라지리란 보장도 없다.

    정안으로 술법진의 구성을 파악하고, 어디로 가야 이 어둠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헤아린다.

    올바른 방향을 찾고서야 발을 내딛은 강엽은 그때부터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보폭을 조절하거나 방향을 바꾸기만 할 뿐.

    ‘실수하면 함정에 빠진다.’

    정안의 능력이 없었다면 강엽 자신도 감에 의존해서 생로를 더듬어야 했을 터.

    그렇게 한 시진쯤 걷고 나서야 강엽은 생로의 끝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고 걸음을 멈추었다.

    손가락을 들어 한 지점을 찍자 움푹 파이는 질감과 함께 어둠이 씻겨내려간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나온 곳은, 암시장의 전장과는 전혀 다른 미지의 장소였다.

    ‘복도?’

    먼지가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사람이 생활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것치곤 지나치게 조용하다.

    감각을 곤두세워도, 초음으로 일대를 둘러봐도 사람의 기척은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좌우의 방들을 한번씩 둘러봤음에도 특이점을 찾지 못하고 마지막 문을 앞두었다.

    드르르륵....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간 정방(正房).

    활짝 열린 창을 통해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자 강엽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

    타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다.

    이 가짜 햇살이야말로 이 공간이 가짜임을 알려주는 증거겠지.

    쓴웃음을 지은 강엽은 서가에 꽂힌 책들로 시선을 돌렸다. 손때가 가장 많이 묻은 책을 꺼내자 손자병법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제가 가장 많이 봤던 책이랍니다.”

    홀연히 들린 목소리에도 강엽은 놀라지 않았다. 책을 펼쳤을 때부터 기척을 감지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도 손자병법을 많이 보라고 하셨죠. 패도를 걷고자 한다면 공맹은 멀리하라고 하셨어요.”

    이목구비가 선명한 여인. 하얗고 오밀조밀한 얼굴이 강엽을 향해 빙그레 웃는다.

    때마침 창문을 통해 들어온 산들바람이 그녀의 검은 장삼을 부드럽게 흔들고 지나갔다.

    “제 방에 들어온 소감이 어떤가요? 진짜는 아니지만, 한없이 진짜에 가깝거든요. 가족들 말고 외간 남자가 제 방에 들어온 적은 없어요.”

    “생각보다는 평범하군.”

    값비싼 자단목으로 만든 가구나 비싼 자기병이 눈에 띄긴 해도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 그런 것들보단 어째서 술법진 안에 그녀의 방이 있는 건지 더 궁금했다.

    “사실 조금 전까지 다른 곳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편히 운기조식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원하는 공간을 떠올리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고 하던데 저도 놀랐어요.”

    “그럼 이 방이 공녀의 기억이라는 말이군.”

    “네, 일단은요. 근데 이렇게 보니까 조금 다르네요. 가령 여기 있는 화분만 해도....”

    그렇게 말하며 한쪽에 놓인 자기병을 들어올린 조영옥이 웃었다.

    “얼마 전에 시비들이 실수로 깨트렸거든요. 제 기억으로 만든 거다 보니 현실과는 다르네요.”

    사람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장소를 떠올려도 그랬다.

    조영옥의 방에도 구체적인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이 난잡하게 섞여 있었고, 후자는 물감이 번진 것마냥 흐릿할 뿐이었다.

    “사실 강 무사를 만난 게 그리 놀랍진 않았어요. 경매장에서 강 무사를 봤거든요. 그땐 인상이 좀 달라서 긴가민가했었는데.”

    “그때는 변장을 했으니까.”

    강엽은 놀라지 않았다. 가벼운 변장이었으니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아봤을 수도 있으리라.

    “흑룡교의 편을 든 건 대환단 때문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대환단 말고는 조영옥이 흑룡교의 편에서 혈교와 싸울 이유가 없었다.

    “맞아요. 강 무사도 경매장에 있었으니 제가 대환단을 원했다는 건 알고 있겠죠. 하지만 꼭 대환단 때문에만 흑룡교... 아니, 유이강을 도운 건 아니에요.”

    그녀는 그 이상을 말하진 않았다.

    어찌 됐든 강엽은 외인이었고, 대공자가 혈교와 손을 잡았다는 치부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할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실소했다.

    조영옥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무슨 말을 나눠야 할지 모르겠네요. 여기가 진짜였다면 엄청나게 비싼 차를 대접했을 텐데, 알다시피 죄다 가짜라서요.”

    “내가 유이강을 죽이겠다면 어쩔 거요?”

    “제 앞에서 죽이는 건 참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저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공녀가 안 보는 데선 죽여도 괜찮고?”

    “한시적인 동맹이거든요. 전쟁이 끝난 뒤에 강 무사가 그를 죽이든 말든 전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그전에 구천호법을 죽일 능력이 있어야겠지만.”

    “...구천호법이었소?”

    “놀랍죠? 저도 놀랐어요. 구천호법은 전멸했다고 알려졌는데 생존자가 있더군요.”

    “하긴 구천호법쯤은 되어야 어검술이나 신검합일을 쓸 수 있겠지.”

    의외로 강엽이 쉽게 납득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조영옥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그려졌다.

    “강 무사는 여길 나가고 싶죠? 그래야 유이강이든, 혈교의 마녀든 죽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보내줄 수 있소?”

    정안으로 이 공간을 훑었기에 알 수 있었다.

    술법진의 중심은 유이강이지만, 술법진 안에 존재하는 이 작은 공간의 중심은 조영옥이라는 것을.

    “음, 제가 허락한다면요. 하나 동맹을 맺었으니 강 무사를 막을 수밖에 없군요. 미안해요. 그래도 유이강이 혈교의 마녀와 교성을 제거한다면....”

    “얼마나 걸린다고 하오?”

    “뭐가요?”

    “놈들을 죽이는 데 걸리는 시간. 굶어죽을 때까지 놔둔다는 소린 아닐 테고.”

    “하하, 설마요. 그들은 유이강이 설계한 특별한 함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요.”

    “온통 어둠뿐인 공간 말이오?”

    “...알고 있었군요.”

    “좀 전에 통과했으니까.”

    “아니, 어떻게....”

    조영옥이 황당해했지만 강엽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창문 쪽을 돌아봤다.

    “그자가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믿지 않는 게 좋겠소.”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나요?”

    “그것까진 모르겠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자의 말이 틀렸다면?”

    “...?”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던 조영옥이 강엽을 따라 고개를 홱 돌렸다.

    정원에 있는 커다란 도화나무가 쩍 벌어지더니 그 안에서 웬 혈인이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맙소사, 명도상인이 어떻게?”

    조영옥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설마 유이강이 거짓말을 했던 걸까?

    “글쎄, 자력으로 빠져나왔을 수 있겠지. 아니면 저자를 마무리하라고 보냈을 수도 있고.”

    “뭐든 간에 마음에 들진 않는군요.”

    유이강과 손을 잡았다고는 하나 조영옥이 술법진에 갇힌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술법이 피아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조리 빨아들였기에 덩달아 갇힌 것.

    비록 유이강이 그에 대해 사과하고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다지만, 그의 뱃속이나 다름없는 술법진에 들어온 것 자체가 불쾌한 일.

    강엽의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지만 만약 술법진을 나갈 방법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행동했을 것이다.

    “강 무사, 좀 전에 했던 말을 취소할게요. 여기서만 기다릴 수는 없겠어요.”

    유이강이 거짓말을 했는지, 결과적으로 틀린 건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이유가 뭐든 간에 이렇게 되면 태화문도들의 안전 또한 보장할 수 없었다.

    “풍도마장 노사와 부하들을 찾아야겠어요. 유이강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단단히 따져야겠군요.”

    “그전에 저자부터 넘어야 할 것 같소만.”

    부상을 입었다 하나 상대는 삼화취정의 고수. 상대가 혈교의 교성인 만큼 방심할 수는 없었다.

    ***

    명도상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놈들은....”

    내상을 입은 탓에 안색이 퀭하긴 해도 형형하게 번들거리는 눈빛.

    자신을 부상입힌 강엽과 얼굴을 드러낸 조영옥을 번갈아 쳐다본 명도상인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군. 유이강 본인도 아니고, 후기지수에 불과한 연놈들이 감히 나를 잡으러 온 것이냐?”

    “그 후기지수한테 당한 놈이 할 말은 아니지.”

    “한 방 먹었다는 건 인정하마. 하나 그건 내가 방심해서 생긴 일이다.”

    명도상인이 허리를 펴자 태산같은 기세가 정원을 찍어누른다.

    강엽은 굴하지 않았다.

    “방심만큼 꼴불견도 없지.”

    비무대 위의 싸움도 아니고 전장에서 기습을 대비하지 않은 것은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짓거리.

    물론 강엽이기에 명도상인의 감각을 속이고 몰래 접근할 수 있던 것이기도 했다.

    “공녀, 혹시 혼자 싸우고 싶으시오?”

    “지금은 객기를 부릴 때는 아닌 것 같군요. 유이강을 찾을 때까진 손을 잡는 게 어떨까요?”

    “그 뒤엔 다시 유이강과 한 편을 먹으시겠다?”

    “그 작자가 하는 거 봐서요.”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조영옥과 대립한다 해도 지금은 손을 잡는 게 이득이리라.

    만에 하나 유이강이 사기를 쳤다면 조영옥을 한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테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싸우는 걸 보는 건 처음이군.’

    조영옥의 성취를 초음으로 가늠하긴 했지만 무공을 견식하는 건 처음이다. 이번 기회에 그녀의 무공을 봐두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합을 맞추는 건 걱정하지 마시오. 어지간하면 내 쪽에서 맞출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조영옥이 병장기를 빼들었다. 현철(玄鐵)로 만든 묵직한 대태도가 섬섬옥수에 쥐어졌다.

    명도상인 역시 수중의 도파를 고쳐쥐고 두 사람의 기도를 가늠했다.

    선공은 조영옥의 몫이었다.

    콰앙!

    발을 내뻗은 순간 이미 전권을 파고들었다. 한순간에 가해진 도격이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가히 빛살과도 같은 일격이었으나 명도상인을 잡기엔 부족한 게 사실. 명도상인은 발도 떼지 않은 채 신기루처럼 움직였다. 그가 움직이고 나서야 조영옥의 대도가 땅을 파내고 흙과 잡초를 사방에 뿌렸다.

    강엽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혈공독수만이 놈을 죽일 수 있다.’

    첫 기습에선 실패했다. 내상을 입히는 데는 성공했으나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영옥이 함께 싸우는 데다, 명도상인은 중한 내상을 입은 상황.

    우우우우우우웅...!

    중단전을 감싼 여섯 개의 용환이 고속으로 회전, 일대의 공간을 의념으로 장악한다.

    재차 이어지는 도격을 튕겨낸 명도상인이 강엽의 기도를 느끼고 미간을 씰룩거렸다.

    “오냐, 아까의 빚을...!”

    그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쾅!

    허공을 격하고 날아온 일권이 안면을 후려친 것이다.

    “격...공?”

    호신강기를 둘렀기 때문에 피해가 크진 않았어도 정신적인 충격을 받기엔 충분했다.

    ‘시간 끌어서 좋을 게 없어. 무조건 초장에 끝낸다.’

    아직 놈이 방심했을 때, 전력을 발휘할 틈도 주지 않고 밀어버리는 게 최선이다.

    조영옥 역시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몸은 명도상인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강엽이 만든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 절초를 쏟아붓는다. 어마어마한 공력을 머금은 도격이 쏟아지자 명도상인도 방심하지 못했다.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핏물을 삼키고 억지로 뽑아낸 강기로 도격을 막을 따름.

    그러면서 격공으로 응수하고....

    터엉!

    강엽 역시 똑같이 격공으로 맞대응하며 그 시도를 좌초시켰다.

    운 좋게 막은 것도 아니었다.

    텅!

    두 번.

    터터텅!

    네 번.

    터어어어어엉!

    동시에 쏟아진 격공의 조짐을 사전에 간파하여 막아낸다.

    명도상인의 동공이 태풍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놈이 삼화취정에 올랐다고?”

    직감은 놈이 삼화취정에 오르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부정할 순 없는 노릇.

    허공섭물로 강엽의 움직임을 잠시나마 옭아매려고 했으나 조영옥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굉력무월극(轟力武越克).

    초상승의 절학. 한순간 폭발적으로 뻗어나간 도격 경파가 명도상인의 도세를 힘으로 박살냈다.

    강엽에게 집중하느라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탓에 약간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도격을 받아낸 것.

    그 와중에도 천근추의 묘리로 땅을 굳게 딛고 도격을 받아냈으나, 그런 식으로 흘려내기엔 조영옥의 도격이 지나치게 강맹했다.

    한순간 단단한 기운이 응집된 도격. 묵청색의 강기가 어린 도격이 명도상인의 도강을 튕겨내고 호신강기 깊숙이 틀어박혔다.

    쩌저저저적!

    “가관이군. 설마 네년까지...!”

    안 그래도 내상을 입어서 진기 수발이 여의치 않은데 격공에 강기까지 막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자신이 삼화취정의 고수와 싸우는 게 아닌지 의심마저 들 지경.

    하지만 두 사람의 합공이 무적은 아니다.

    짧은 공방이었지만 명도상인은 두 사람의 호흡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걸 알아봤다. 이 틈을 잘 파고들면 우열을 뒤집을 수도 있을 터.

    “......!”

    그 순간, 각기 붉고 푸른색으로 물든 강엽의 눈동자를 본 명도상인은 감각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해지고 몸이 흐느적거린다. 시간이 한없이 느려지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싸우던 두 사람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자신이 왜 싸웠는지, 뭘 하고 있었는지도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나 그 와중에도 한 사람의 목소리만은 유독 또렷하게 귓가에 꽂히고 있었다.

    “명도상인, 괜찮은가?”

    “...신녀?”

    ***

    명도상인이 흠칫 굳어졌다.

    시조의 은총을 받아 신녀가 된 아름다운 적발의 여인이 입가를 가린 채 웃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한 게 꼭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이구나. 악몽이라도 꾸었느냐?”

    그제서야 명도상인은 자신의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것을 알고 멋쩍게 웃었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기억이 나진 않는군요.”

    “또, 또 그러는구나.”

    “예?”

    “말투 말이다. 그대도 이제 교성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느냐. 조금은 편하게 대해도 된다.”

    “어찌 감히 신녀께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명도상인은 그런 자신의 태도에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신녀가 건재하던 시절엔 언제나 그녀를 존중했으니 자신을 낮추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으윽.”

    머리가 어지럽다.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은 명도상인이 비틀거리자 신녀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정말 괜찮은 게 맞느냐?”

    “예. 쉬면 나아질 겁니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어. 마실은 다음에 나가야겠다.”

    그 말을 듣고서야 명도상인은 이제 며칠 뒤에 신녀가 대법을 치른다는 것을 떠올렸다. 교주, 나아가 교의 대업을 위해서 그녀는 스스로를 공양할 것이다.

    운명의 날이 정해지고 그녀는 교주의 배려로 모든 업무를 놓고 그동안 몰랐던 즐거움을 누렸다.

    뭐를 먹고 싶다, 어디를 가고 싶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지고한 신분임에도 자유를 억압받는 신녀는 그런 사소한 즐거움에 굶주려 있었다.

    문득 명도상인은 궁금해졌다.

    “두렵지는 않으십니까?”

    “두렵다.”

    뭐가 두려운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신녀는 명도상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강시가 된다는데 어찌 두렵지 않을까. 다만 이 몸을 공양하여 교의 대업을 앞당길 수 있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임할 뿐이다.”

    “실패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그 실패조차 대업을 이룰 밑거름이 될 것이니 무의미한 희생은 아니리라.”

    “....”

    광신으로 무장한 신녀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설사 설득한다고 해도 그 뒤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대도 알지 않느냐.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시조께서 부활하시지 못한다면 광명마교의 종자들이 천하를 훔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늦고 말아.”

    명도상인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혈교는 광명마교와 자웅을 겨루고 있었으니까.

    “광명마교가 그 터무니없는 계획을 성공시키겠습니까. 그놈들의 계획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하나 그들이 성공한다면 우리에게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겠지.”

    신녀와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교성급의 고수들이 그녀를 번갈아가며 호위했기에 명도상인은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시일이 지나서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고, 신녀는 산 채로 강시가 되었다.

    부하가 가져온 소식에 명도상인은 씁쓸한 감정을 곱씹으며 떠날 채비를 했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강엽은 혈교가 뭣 때문에 흡혈귀를 닮은 강시를 만들었는지 깨달았다.

    “혈마를 부활시키기 위해서였군. 혈마의 혼백을 온전히 담을 육신을 만들기 위해 실험을 해본 거야.”

    대상의 기억을 이용해서 환각을 투사하는 마안(魔眼)의 능력. 그를 이용해서 명도상인의 기억을 엿본 강엽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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