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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01화 (201/450)
  • 36화. 신녀 (1)

    “너는...!”

    명도상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좀 전까지 그를 둘러싼 환각이 사라지고, 수면 위로 가라앉았던 기억이 급부상했다.

    ‘내가 한낱 환술에 당했다고?’

    그 사실에 섬뜩함을 느낀 그는 강엽의 눈동자가 다른 색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네놈, 위험한 안법을 익혔구나.”

    기혈이 들끓어서 정상이 아니라고 하나 삼화취정의 고수마저 희롱하는 안법. 그로 인해 혈교의 대계는 물론, 불괴강시가 어찌하여 만들어진 건지 까발려졌다.

    “본교의 대업을 위해서라도 필히 없애야 할 놈이구나. 살려두기엔 너무 위험한 놈이야.”

    “단혼마백과 똑같은 말을 하는걸.”

    “뭣이?”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명도상인은 눈을 부릅떴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네놈이 귀영이라는 놈이냐?”

    “당신은 단혼마백보다는 약한 것 같군. 교성이 된 지 얼마나 안 됐다고 하더니.”

    명도상인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광오하구나. 필시 정당한 방법으로 단혼마백을 죽인 것도 아닐 텐데. 네놈이 격공을 쓰는 것은 놀랍지만, 결국 애송이일 뿐이지.”

    상대는 삼화취정이 아니다. 침착하게 강엽을 살핀 지금은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와닿았다.

    직후 반격이 시작되었다.

    퍼억!

    창졸간에 전권을 뚫은 명도상인의 일권이 강엽의 명치를 관통했다.

    명도상인이 이죽거렸다.

    “방심은 죽을죄다, 애송이. 안법만 믿고 설친 건 큰 실수였다.”

    그때 등 뒤에서 강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당신 말대로 방심은 죽을죄지.”

    “...!”

    명도상인의 눈이 커지는 찰나, 강엽이 시커먼 박쥐 떼로 변했다.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이빨을 박는 박쥐 떼에 명도상인이 노호성을 질렀다.

    “한낱 미물들이...! 저리 꺼지지 못할까!”

    강대한 기파에 휩쓸린 박쥐 떼가 핏물로 화했다.

    그러나 안심하기도 전에 창백한 손이 지면 위로 불쑥 튀어나왔다.

    흐으으-!

    지옥에서 돌아온 시신들이 스스로 일어나는 모습.

    명도상인이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환술이 풀리지 않았군.”

    “난 한 번도 풀었다고 말한 적 없는데. 당신 스스로 환각에서 벗어났다고 착각했을 뿐이지.”

    “흥, 건방 떨지 마라. 환술이라는 걸 깨달은 이상 벗어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야!”

    “그러면 벗어나봐라.”

    강엽이 손을 휘젓자 시귀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가짜인 걸 알기에 명도상인은 무시하려고 했지만....

    터어엉!

    “컥.”

    시귀 중 하나가 강엽으로 바뀌며 옆구리를 강타했다.

    급조한 호신강기를 산산조각 박살내는 족도(足刀).

    암경이 안쪽까지 밀고 들어오자 명도상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딴 잡술 따위로 교성을 넘보느냐!”

    투아앙!

    부지불식간에 터진 경파가 강엽을 튕겨내버렸다.

    내공으로 통증을 누르면서 앞으로 뛰어든 명도상인이 절초를 쏟아내자 빛살이 번쩍였다.

    그러나 강엽은 뒤로 당겨진 듯이 십 보 밖으로 물러나며 도격의 범위에서 벗어난 상태.

    그러나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명도상인은 귀신같이 몸을 뒤집으며 반격초를 날렸다.

    이전에도 환각임을 깨달은 것.

    촤아아악!

    강엽의 어깻죽지를 길게 베어버린 도격. 하지만 강엽이 자세를 한껏 낮춘 채 손톱을 휘두르자 명도상인 역시 옆구리의 살점이 한 움큼 뜯겨나갔다.

    억지로 끌어올린 진기로 기혈이 들끓면서 목구멍에서도 피를 웩 토했다.

    고생하는 명도상인과 달리 혈공진기를 끌어올려 상처를 재생한 강엽은 재차 움직였다.

    터엉!

    “크읍!”

    접근할 거란 예상과 달리 격공권으로 다리를 치고, 하늘 높은 곳에서 뒷꿈치 각법을 날렸다.

    허점을 훤히 드러낸 공격이었지만, 명도상인의 칼날이 뚫고 들어가자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모습.

    문득 자신이 어떤 문제에 빠졌는지 깨달은 명도상인은 아연해졌다.

    ‘감각을 믿을 수 없다.’

    자신이 보는 게 진짜인지 알 수 없다. 상대가 정말 그곳에 있는지, 환술로 자신의 감각을 희롱하는 게 아닌지 의심암귀에 빠지게 된다.

    기감을 끌어올리면 허실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연이은 내상으로 맛이 가버린 상태.

    처음에 당한 혈공독수의 일격이 끝까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정기신 합일이 흔들린다.’

    삼단전의 유기적인 연결이 방해받으면서 오감은 물론 기감 전체가 망가진 실타래처럼 꼬였다.

    그런 와중에 정마안의 환술에 당하자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쿨럭 잔기침을 한 명도상인이 이를 빠득 갈았다.

    “다 쓸어버려주마!”

    주화입마를 각오하고 끌어올린 공력을 칼날에 꾸역꾸역 담아냈다.

    -천도위혈령(天刀威血令).

    넓은 범위를 타격하는 절초.

    순식간에 일어난 수백 개의 칼바람이 사방을 휩쓸어버렸다. 전각도, 나무도, 단단한 기암괴석도 버티지 못하고 잘게 쪼개진다.

    쿠구구구구구궁......!

    그를 중심으로 반경 십여 장이 완전히 폐허가 됐다.

    그 잘난 환술을 펼쳤다고 해도 한 줌의 핏물로 변했을 터.

    “훅! 후욱!”

    땀과 피에 절은 채 거친 호흡을 내뱉은 명도상인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봤다.

    기혈을 다스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자세.

    칭찬받아 마땅한 태도였으나, 강엽에게 신경이 쏠린 나머지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콰아앙!

    적이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하아압!”

    뒤늦게 뒷꿈치를 빼며 회피 신법을 구사하는 명도상인을 추격한 조영옥이, 억지로 빈틈을 열고 들어와서 일도를 휘두른다.

    간발의 차로 도격을 흘린 명도상인은 그녀의 안색이 초췌한 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역시 강기를 쓴 건 상당한 무리수였군!”

    경맥을 다쳐도 재생력으로 치료할 수 있는 강엽과 달리 그녀에게 있어 강기는 최후의 한 수였다. 대환단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흉내조차 못 냈을 기예.

    그럼에도 명도상인을 죽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녀는 강기를 봉인한 채 싸웠다.

    명도상인 역시 연이은 내상으로 강기를 쓰지 못했기에 백중세로 이어지는 사투.

    그녀가 잠시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혈공독수를 완성한 강엽이 재차 뛰어들어 일격을 날렸다.

    투학!

    “...!”

    날카로운 관수를 받아낸 명도상인의 몸이 돌처럼 경직됐다.

    암경처럼 침투한 혈공독수가 경맥을 갉아먹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크억! 크으으윽...! 쿨럭! 너...!”

    “고통스러울 거다.”

    정기신 합일이 끊어지고 있으니까.

    ‘역시 보완할 점이 많아.’

    강기 이상으로 내공을 많이 잡아먹는 것은 그렇다 쳐도, 준비하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조영옥이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다른 수를 써야 했겠지.

    본래는 일행에게 맡기려고 했던 역할을, 어쩌다 보니 그녀가 대신하게 된 셈이었다.

    ‘삼화취정의 고수를 잡는 건 이로써 두 번째.’

    단혼마백은 선천지기를 소진하면서 싸웠기에 막상 시체가 남았어도 흡혈을 하지 못했었다.

    당연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범할 생각은 없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혈공독수를 운용한 상태에서 혈목을 내뻗어 피를 쪽쪽 빨아먹자 명도상인이 비명을 질렀다.

    불괴강시가 그랬듯 강엽 역시 자신의 몸을 통해서 혈목을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안쪽에서 피를 빨아먹는 혈목으로 인해 홀쭉해진 명도상인의 몰골에 조영옥이 경악했다.

    “강 무사, 그건 대체...!?”

    그녀가 경악하건 말건 강엽은 흡혈에 열중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진조의 영성이 속삭이고 있다.

    지금은 남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그 여자가 오고 있다.’

    설령 흡혈욕이 폭주한다 해도 명도상인의 피를 그녀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농밀한 쾌감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피를 빨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던 걸까.

    우우웅...!

    축 늘어진 명도상인의 몸이 끌려간다. 강엽은 붙잡으려고 했으나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허공섭물의 흡입력을 당해내진 못했다.

    움직이는 물건은 허공섭물로 다루기 어렵다는 세간의 인식을 깨고 명도상인을 끌어당기는 손길.

    “.......”

    어느새 나타난 불괴강시의 섬섬옥수가 명도상인을 붙잡는다.

    “시, 신녀....”

    가까스로 목구멍을 쥐어짠 명도상인이 그녀를 바라봤을 때.

    콰직!

    불괴강시가 그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넣었다.

    “끄, 그그극....”

    남은 피까지 빨린 명도상인의 육신을 쓰레기처럼 내던진 불괴강시가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입술 사이로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동족을 만날 줄은 몰랐구나.”

    “...!”

    * * *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명도상인에게 위해를 가한 것도 모자라서 말까지 터진 불괴강시.

    강엽은 충격을 받으면서도, 전장에서 목도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어쩐지 강시답지 않다 싶더니....”

    세상 어떤 강시가 감정을 표현하고, 한계를 벗어나서 점점 강해지겠는가?

    그 시점에서 불괴강시는 술사들의 통제를 벗어나서 자아를 되찾을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이건 본녀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다. 아마 명도상인의 피를 조금이나마 마셨기 때문이겠지.”

    “그것만은 아닐 텐데?”

    고수의 피가 불괴강시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혈교가 실험을 안 해봤을 리가 없었다.

    필시 평교도부터 시작해서 교성, 교왕의 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실험을 해봤으리라.

    하지만 이제야 그녀가 자아를 되찾은 것은 명도상인의 피 말고도 다른 계기가 있어서겠지.

    “바닥에 떨어진 피, 그대의 것이겠지? 부끄럽게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정신없이 맛본 뒤더구나.”

    “...내 피가 원흉이라는 건가.”

    “그렇다. 이게 일시적인 건지 영구적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화아아아아악!

    타오르는 핏빛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는 것과 동시에 무지막지한 기파가 장내를 찍어눌렀다.

    “동족의 피를 마시고 각성한 것도 운명이겠지. 이렇게 된 이상 그대의 피를 취해야겠다.”

    “거참....”

    강엽이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적의 피만 노렸던 입장이었던 자신이 노려지는 신세가 될 줄 어찌 알았으랴?

    ‘흡수한 피는 대략 팔 할쯤.’

    불괴강시와의 격차는 여전히 아득하다.

    조영옥과 함께 싸워도 이길 수 없겠지.

    “공녀,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소.”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조금 전부터 도망치려고 해봤거든요.”

    이 공간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불괴강시가 온 뒤부터 어쩐지 그럴 수 없어졌다.

    식은땀을 흘리는 조영옥의 모습에 불괴강시가 조용히 웃었다.

    “술법이라면 본녀도 제법 일가견이 있어서 말이다. 여기까지는 본능적으로 왔지만... 이제부터 이 공간은 본녀의 것이다. 본녀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거지.”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불괴강시가 술법진의 일부를 빼앗아서 두 사람의 퇴로를 막은 것이다.

    “이름 모를 동족과 여인이여, 교의 대업을 위해 그대들의 목숨을 취할 수밖에 없구나.”

    두 사람을 겨눈 섬세한 손가락. 그 끝에서 큼지막한 핏빛 강구가 쏘아졌다.

    -혈마옥(血魔玉).

    일순간 붉은 광채가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사방이 환해지면서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 * *

    강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해치웠나?”

    아무리 강구를 때려박았다고 하나 흡혈귀가 시체도 못 남기고 죽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설령 맨몸으로 맞았어도 재생력이 있으니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리가 없는데....

    “아니군. 도망친 건가.”

    그녀의 눈길이 허공의 구멍으로 향했다. 꽉 잡고 있던 술법진의 공간에 강제로 문이 뚫린 흔적.

    강구가 터지기 직전 강엽의 눈동자가 서로 다른 색으로 물든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비밀이 많은 동족이로다. 대체 그런 녀석이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왔단 말이냐.’

    신녀로서 시조의 혼백을 떠받들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상고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그녀였다.

    하나 그런 그녀조차 강엽 같은 존재가 어디서 나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흡혈귀의 격만 논한다면 그 사내가 훨씬 높았다. 오히려 그 사내야말로 진정한 순혈이겠지.’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강시의 몸이지만, 스스로는 강시보다 흡혈귀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두근!

    본능에 이끌려 강엽의 피를 마셨을 때부터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는 게 살아있다는 증거라면, 그녀는 틀림없이 살아있는 존재였다.

    그때였다.

    “쿨럭!”

    메마른 기침 소리를 들은 그녀가 몸을 돌렸다.

    그곳엔 반쯤 흙더미에 파묻힌 명도상인이 다 죽어가는 낯빛으로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용케 죽지 않았구나.”

    “하아... 신녀, 정말... 신녀시오?”

    말라붙은 입술을 간신히 움직인다. 삼화취정의 고수로서 위세를 떨친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본 그녀가 불쑥 물었다.

    “살고 싶으냐?”

    “....”

    “살고 싶다고 말하면 살려주마. 대신 온전히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야. 이미 그대는 죽을 만큼 많은 피를 잃었어. 실낱같은 진기로 명줄을 유지할 뿐 아니냐.”

    “하, 하하....”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자 명도상인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소용...없소. 혈라분은, 선천지기를....”

    “결과적으로는 죽어서 강시가 되겠지. 하나 강시가 되더라도 자아를 보전한다면 살아있는 거나 다름없지 않겠느냐.”

    “그게, 된다고...?”

    “본녀가 누군지 잊은 거냐.”

    상고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그녀의 술법적 기량은 모산혈조에 필적한다.

    그녀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마셔라. 그러면 강시가 되어도 스스로가 누군지 잊지 않으리라.”

    “....”

    명도상인의 입이 한숨과 함께 벌어졌다.

    뚝 떨어진 핏방울이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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