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난전 (4)
하늘과 땅을 잇는 핏빛의 기둥.
사방 모든 것을 빨아들여 분쇄하는 용오름의 현신에 강엽은 경공을 멈추고 우묵한 눈으로 관찰했다.
‘저건....’
일견 술법으로 여겨지는 국지적인 재난.
그 실체는 주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막대한 공력으로 빚어내는 상승 무학의 총화였다.
‘특수한 진기로 피를 통제하고, 공력으로 기류를 만들어 흡자결의 묘용까지 발휘하는 건가.’
심지어 그렇게 만들어낸 회오리의 칼날은 검기 이상으로 날카로워 닿는 모든 것을 갈아버린다. 시체는 물론 건물의 파편도 말 그대로 가루가 되고 있는 형편.
그러나 강엽이 놀란 건 경세적인 위력 때문이 아니었다.
‘...왜 저렇게 거창한 짓을?’
피를 다루는 것은 혈공진기와 비슷한 심법을 익혔으니 그렇다고 쳐도, 한 사람을 죽이기엔 낭비되는 공력이 너무 심했다.
규모나 위력과는 별개로 삼화취정의 초고수를 상대로는 실속이 없는 공세.
강엽이 안 것을 유이강이 모를 리가 만무했다.
[헛짓거리를 하는군.]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용오름 속에서 한 줄기 전성이 흘러나왔다.
몹시 평온한 목소리였다.
[내공의 화후나 무공 수준은 굉장하지만 한계가 있구려. 제대로 쓸 줄을 몰라.]
무릇 진정한 고수라면 절초를 터득한 걸로만 만족해선 안 되는 법.
어떤 상황에서 어떤 초식을 구사할지, 어떤 변화를 주어야 할지, 초식을 구사하기 위해 어떻게 판을 짜야 할지 모두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불괴강시의 무공은 그런 점에서는 심각하리만치 결점 투성이였다.
[잠시 감정의 편린을 내보였다 하나... 결국은 이지를 잃어버린 강시일 뿐.]
촤아아아악!
종잇장마냥 찢겨나가는 핏빛의 용오름.
한 번의 참격으로 자신을 가둔 용오름을 찢어발긴 유이강이 정단세의 자세로 검을 치켜세웠다.
신검합일을 이룬 초고수의 권역은 팔다리의 간합마저 가볍게 초월했다.
서걱!
절삭음과 함께 너덜너덜해진 혈익이 떨어진다.
반쯤 뭉개진 팔과 함께.
“.......”
어깻죽지부터 잘려나간 단면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나왔음에도 불괴강시는 무표정했다.
아까와는 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여인의 모습에 유이강의 입가를 타고 쓴웃음이 번졌다.
“당신에 대한 평가를 좀 낮춰야겠구려.”
오십 년 전의 정마대전에서 불괴강시가 있었다면 전쟁의 판도가 바뀌었을 거라는 생각.
잠시 합을 나눠본 걸로 그 생각은 깨끗하게 가셨다.
“그럴듯하게 무인 흉내를 내는 강시 나부랭이. 재생의 공능으로 과대 포장된 실패작.”
생전의 무공을 고스란히 구사하지만 시기적절하게 쓰지는 못한다. 생전의 그녀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몰라도, 강시가 된 바람에 더 약해졌을 수도 있었다.
“아마 혈교 내부에서도 당신을 처치 곤란하다고 판단했을 것이오. 폐기되지 않은 게 다행이지.”
성공과 실패 사이 어딘가에 있는 애매한 무언가.
강엽도 유이강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한계가 있다는 말이군.’
홍예칠위만 해도 그렇지 않나.
명령을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지만, 수싸움을 하거나 임기응변을 발휘하진 못한다.
불괴강시와 홍예칠위는 비교할 수 없는 격차가 있지만, 강시인 이상 한계는 존재했던 것이다.
“천하제일인으로 강시를 만들 순 있어도, 천하제일의 강시는 만들 수 없는 법.”
그 한계를 깨지 못하는 한 불괴강시는 절대로 동급의 고수를 당적할 수 없다.
그렇게 경력을 머금은 검이 불괴강시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는 찰나였다.
돌연 발바닥 용천혈로 진기를 분출한 유이강이 몸을 뒤집고, 그 뒤로 강맹한 도강이 날아들었다.
도강의 주인, 명도상인이 강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연달아 도격을 가져가자 유이강 또한 절초로 맞서고....
투카아아아앙......!
용사비등하게 솟구친 검격이 강기와 충돌,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치솟았다.
경파의 폭풍 속을 빛살처럼 누빈 두 사람이 수없이 위치를 바꿔가며 공방을 주고받는다.
불괴강시가 재생을 끝낸 것은 두 사람의 공방이 백여 합을 넘어갔을 때였다.
한 팔이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혈목이 잘려나간 팔을 가져오자 저절로 붙은 것.
뿐만 아니라 전장에 뿌려졌던 선혈까지 빨려들어오면서 그녀를 둘러싼 기파가 한층 거세졌다.
“후우....”
도톰한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숨소리.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린 심연 같은 눈동자가 문득 머리 위쪽으로 향했다.
소리도, 기합도 없이 날아온 인영.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노강호의 양손엔 호신강기도 깨부술 장력이 뭉쳐 있다. 지척까지 접근한 노강호가 굳센 기상을 담아 소리쳤다.
“알아서 피하시오, 유 대인!”
쌍장에서 장력을 폭사한 풍도마장의 경고에 유이강은 즉시 공방을 멈추고 호신강기를 둘렀다.
콰아아아아-!
용린(龍鱗)을 두른 검은 장막 위로 밀어닥치는 어마어마한 경파의 폭풍. 똑같이 호신강기로 막은 강엽은 내심 이를 악물면서 욕을 삼켰다.
‘괴수대전이 따로 없군.’
이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풍도마장이라지만 그가 내뿜은 장력에 사방 오 장의 땅이 주저앉았다.
만약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면 지면 위로 남은 거대한 손바닥 자국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삼화취정에 이른 네 명의 고수들이 얽히고설킨 전장엔 이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크고 단단한 전각이 박살나고, 풍광을 위해 조성했던 분재와 기암괴석은 가루가 된다. 연못 또한 한순간 가해진 열기와 기류에 뒤집어졌다.
이 대 이의 싸움은 비등한 양상이었다.
정확히는 유이강이 명도상인을 몰아붙이고, 불괴강시가 풍도마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유이강이 인상을 썼다.
“풍도마장, 그런 반푼이에게 질 생각이오!?”
아무리 풍도마장이 전성기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그 정도는 이겨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자 풍도마장은 억울해하며 외쳤다.
“그렇게 쉬운 게 아니란 말이외다! 이 마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소!”
“음?”
유이강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의아해하며 명도상인을 바라봤지만 정작 그는 비식거리면서 풍도마장을 조소하고 있었다.
“제 놈이 못 싸우는 걸 이상한 핑계를 대는군. 불괴강시가 강해지는 게 아니라, 네놈이 불괴강시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말하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린 불괴강시가 묘한 표정으로 그들 세 사람을 번갈아 돌아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시, 신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유이강이 그랬듯 명도상인도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강엽 역시 충격을 받았으나, 그러한 모습에서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고 긴장했다.
‘설마...?’
혈교의 신녀라면 격이 다른 영성을 지녔을 터.
비록 그녀가 진조가 아니라 하나, 그에 버금가는 영성을 지녔다면 혼백을 제압한 제령술(制靈術)이 깨졌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아마 몸이 반파될 만큼 어마어마한 충격을 입은 부상을 재생했던 게 계기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불괴강시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풍도마장의 말은 기우가 아니었다.
제삼자로서 지켜보고 있던 강엽도 알아챌 만큼 초식을 운용하는 능력이 정교해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수십여 합을 넘어가자 일순간 여러 변초를 구사하며 간합을 잘라 먹기까지.
거듭되는 파상공세에 풍도마장은 누가 봐도 수세에 몰렸다고 할 만큼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모습이다.
다만 백척간두에 오른 듯 위태로우면서도 다채로운 절기로 위기를 넘기는 솜씨만큼은 네 명의 초고수들 중에선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바.
마치 옷을 갈아입듯 그때그때 전혀 다른 무공을 구사하는 위용엔 강엽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인보다는 무학자에 가깝다더니....’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는 격언이 있다.
바람처럼 빠르되, 숲처럼 고요하며, 불처럼 맹렬하게, 산처럼 묵직하게 군사를 운용하라는 손자병법의 구절.
잠깐 사이에도 수없이 변하는 풍도마장의 무공은 예측할 수 없는 불가해였다.
불괴강시가 지닌 무지막지한 공력에 진땀을 뺄지언정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계속 이런 양상이라면 이기지는 못해도 시간을 끌 수는 있을 터.
‘불괴강시 역시 점점 강해지지만 않는다면.’
무공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물론, 무공을 쓰기 위해 판을 짜는 능력까지 정교해지고 있다.
무작정 강대한 절기를 쏟아붓기보다는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며 흐름을 가져오려고 한다.
강엽이 봤을 때 그것은 강해지는 게 아니었다.
‘회복하는 건가....’
싸우면 싸울수록 감이 살아나는 모습.
유이강도 알아차렸는지 명도상인을 잠시 떨쳐내고 불괴강시의 배후로 침투했다.
절묘하게 파고든 검격이 허점을 노렸으나, 불괴강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양손에 각기 다른 공력 흐름을 가져가서 검격과 장력을 끊었다.
풍도마장의 장력은 물론 신검합일의 검격까지 완벽히 봉쇄하는 시뻘건 와류.
사전에 두 사람의 공력 흐름을 읽고 흡자결의 묘리로 묶은 것이다.
풍도마장이 전율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감각이...!”
상대의 손가락에 병장기를 붙잡히는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의 치욕이었다. 호흡도, 간합도 다른 두 초고수의 공세가 완벽히 막혔다.
이렇게 되면 물러날 수도 없었다.
마치 아교를 칠한 것처럼 손과 병장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검을 놓으면 물러날 수는 있는 유이강마저도 입을 꾹 다문 채 불괴강시를 노려볼 뿐이었다.
신검합일의 약점이다. 검을 놓으면 합일이 깨지면서 빈틈이 드러나는 것. 굵직한 땀방울을 흘리면서 상대의 감각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잘했소, 신녀여. 그대로 있으시오.”
방금까지 싸웠던 적수가 내버려둘 리가 만무.
한껏 공력을 모은 명도상인이 도첨을 치켜들었다. 좀 전에 유이강이 그랬듯이, 이번엔 그가 유이강의 배후를 노리며 절초를 쏟아부을 준비를 했다.
“당신의 헌신과 희생은 교주님께 아뢰겠소이다.”
불괴강시가 웃고 있는 것을 본 그다. 삼화취정의 육감으로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 변했음을 느꼈다.
그것은 실패작이라 낙인 찍힌 그녀가 반등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지만, 명도상인은 괜한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유이강과 풍도마장은 물론, 불괴강시까지 처리해서 후환을 없앨 작정.
-천인혈도위(千仞血刀位).
원거리에서 강기를 퍼부었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사선 베기의 일초였다. 필살의 의념이 집약된 도격. 일직선상에 놓인 세 초고수의 호신강기도 찢어발길 위력을 갖추었다.
쿠구구구구구구궁......!
눈부신 광채가 번쩍한 뒤, 일대를 집어삼킨 진동과 굉음이 흙먼지를 사방에 흩뿌렸다. 위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범위를 한정했음에도 열풍이 작지 않았다.
그렇게 흙먼지가 가라앉을 때쯤.
“너는...?”
명도상인이 이채를 띠었다.
어느새 그의 앞에 있는 백색장삼의 청년.
콰직!
“......!”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 출수에 명도상인이 식겁했다.
의념이 일면 바로 진기를 끌어올리는 심즉발(心卽發)의 공력이 아니었다면 당했을 것이다. 청년의 일수가 호신강기를 박살내고 심장 직전에 치달았다.
아슬아슬하게 멈춘 것은 급하게 짠 호신기와 옷 안에 입은 호신갑 덕분이었다.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청년의 일수가 근육을 뚫고 심장에 박혔을 터.
하지만 완벽히 충격을 상쇄한 건 아닌지라 혈맥 일부가 파열됐다. 목구멍에서 차오른 핏물이 억지로 다물린 잇새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런 비겁한...!”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세 사람이 물고 물린 상태에서 등 뒤를 기습하지 않았나?”
아군인 불괴강시도 내던지고 말이다.
명도상인이 이를 갈았다.
“...넌 누구냐?”
강엽은 잠시 그의 집에 신세를 진 적이 있으나 명도상인과 만난 것은 아니었다.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 당문이다!”
“이놈들은 또 뭐... 크악!”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뒤편에서 빗발치는 비명이, 적들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녹색의 무복을 입고 당문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 사천당문의 무인들. 그 선두에서 시퍼런 염도를 휘두르는 사자머리 청년이 사납게 웃고 있었다.
“사천당문? 사천당문이 왔다고?”
“당문만이 아니야.”
하후진과 함께 들이닥친 일행이 숙정방의 무인들을 이끌고 혈귀들을 격살하고 있었다.
야차마곤이, 청수가, 소창후가, 당묘정이....
“강엽!”
그리고 백서희가.
낭랑한 목소리를 들은 강엽은 웃음이 나왔지만, 이내 언제 그랫냐는 듯 싸늘한 한광을 발했다.
“너희는 너무 설쳤어.”
암시장에 숨은 발상은 좋았지만,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발각됐을 것이다. 다만 강엽이 전격적으로 움직이고, 당문을 비롯한 여러 세력이 호응했기에 그 시기가 더 빨리 찾아왔을 뿐.
“흥, 저깟 놈들은 얼마든지 쓸어주...!”
콧방귀를 뀌었던 명도상인의 입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제로 다물렸다. 당문의 선두에서 길을 여는 절세고수를 발견한 직후였다.
“활수명의다!”
“당문주의 아우가...!”
그를 알아본 혈교도들이 비명처럼 소리치고, 흑룡교도들의 안색도 새하얗게 질렸다.
강엽이 헛웃음을 흘렸다.
“못 온다고 하시더니.”
삼화취정의 고수인 당우경까지 합류한다면 이쪽의 세력도 어느 정도 비등해진다.
그때였다.
[이런, 삼파전이라... 이런 건 계획에 없었건만.]
대기를 흔드는 묘한 울림.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유이강의 목소리가 전장 전역을 강타했다. 명도상인이 퍼부은 필살의 절초를 맞고도 목숨을 부지했던 것이다.
완전히 무사하지는 않았다.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로 내장 조각이 섞인 피를 흘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와 대치했던 불괴강시가 무사하다는 것.
그녀 또한 호신강기를 잃고 몸이 반쯤 날아갔지만, 재생의 공능으로 몸을 치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가장 마지막으로 명도상인의 절초를 맞은 풍도마장은 빈사지경에 처했는지 쓰러져 있었다.
[이런 짓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대들이 날 최후까지 발악하게 하는구려.]
그 말을 끝낸 직후.
유이강을 중심으로 사방에 번져나간 시커먼 어둠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모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