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난전 (3)
갑자기 혈교의 고수들을 양단해버린 빛살의 등장에 일행은 충격을 받았다.
“저, 저거... 설마 어검술이야?”
거리가 멀기도 했거니와 워낙 출수가 빨랐기에 자세한 과정을 보진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제 스스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움직인 검이 혈교 고수들을 베고 지나간 뒤였다.
‘어검술이라....’
삼화취정에 이른 고수들조차 아무나 쓰지 못한다는 비상식적인 기예.
-이기어검(以氣馭劍) 말이냐? 그런 게 있긴 하지. 공력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잘 쓰진 않는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검의 경지를 물었을 때 낭왕이 어떻게 말했는지 떠올렸다.
-나를 비롯해서 천하팔존은 모두 이기어검이나 그 비슷한 기예를 쓸 수 있다. 물론 우리 말고도 쓸 수 있는 놈들이 있지. 예를 들면 혈교의 교왕이나 광명마교의 사도 같은 놈들.
-그놈들 모두가 어검술을 쓰진 못하겠지만, 쓸 줄 아는 놈들도 있을 거다. 만나면 어쩌냐고?
-어쩌긴 뭘 어째. 꽁지 빠지게 도망쳐야지.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이루기 전엔 싸울 생각 버려라.
낭왕이 경고했던 어검술을 쓰는 경지.
이는 유이강이 혈교의 교왕, 그중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할 만한 고수라는 뜻이었다.
“강엽, 이러면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겠는데? 교성이든 불괴강시든 싹 정리하는 거 아니야?”
어검술을 쓰는 고수가 작심하고 손을 쓰는데 버틸 수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강엽은 낙관하지 않았다.
“그렇게 쉽진 않을 거야.”
유이강이 어검술을 쓴 것은 분명 놀랍지만,
“저것들은 환각이니까.”
정안으로 본 명도상인과 혈교의 고수들은 어디까지나 술법으로 만든 환술일 뿐.
궤적에 베여나간 그들의 모습이 흐물거리듯이 사라지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새롭게 등장한다.
“이게 무슨 괴상망측한...!”
“마교끼리 싸우면 이 정도는 예사겠지. 수싸움에선 혈교가 이겼군.”
상대를 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비기를 지녔는지 알아낸 것이다. 하지만 강엽은 혈교가 준비한 수가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석관을 운반하는 한 무리의 혈령교위들.
‘불괴강시.’
한없이 흡혈귀에 가까운 강시가 명도상인이 있는 곳까지 옮겨진다. 흑룡교의 무인들이 길을 뚫고자 애쓰고 있지만, 혈교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안 되겠군. 내가 가봐야겠어.”
“저길 가겠다고?”
일행이 뜨악하든 말든 강엽은 개의치 않았다.
“변수가 너무 많아.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나면 그땐 대응하는 게 늦어져.”
“멀리서 지켜보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요?”
당묘정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녀의 말대로 멀리서 지켜보면서 언제 개입할지 정하는 게 안전하리라.
“누가 이길지 예측할 수 없소. 한쪽이 압도한다면 아군 역시 위험해지겠지. 만약을 대비해서 근처에서 전황을 살펴야 할 것 같소.”
“하지만 강 무사님이 가신다고 해도....”
“하, 씹... 진짜 엿 같네.”
갑작스레 튀어나온 백서희가 말을 끊자 당묘정이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백서희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적거렸다.
자신이 짐이 된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번엔 강엽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가 봐. 대신 무사할 거라고 약속해야 해.”
“그래.”
그렇게 강엽이 몸을 돌려 암벽 아래로 떨어지자 백서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러고 있어요? 우리 할 일만 생각하면 돼요.”
“우리 할 일이요?”
“뒤를 쳐야죠. 슬슬 흑룡교 새끼들이 굼떠지는 게 힘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흑룡교가 여태껏 잘 싸우긴 했어도 사상자가 쌓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살아남은 자들 역시 멀리서 봐도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 * *
“시작해라.”
“예, 대제자님.”
무거운 석관을 짊어진 여섯 명의 혈령교위들이 수뇌부의 앞에 당도했다.
뒤를 이어 술사들이 음산한 목소리로 무어라 알 수 없는 진언을 읊조렸고,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이라는 말을 끝으로 손뼉을 치자 석관이 저 스스로 열리기 시작했다.
석관으로 다가간 심윤이 심호흡을 하며 그 안에 누운 사람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신녀여.”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닫혀있던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가며 불괴강시가 몸을 일으켰다.
피로 염색한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등 뒤로 흘린 경국지색의 절세가인. 강엽이 지하에서 봤을 때와 달리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비단 궁장을 입고 있었다.
흑상과 혈교도들이 헛바람을 삼킬 때, 불괴강시가 석관을 넘어오다 발이 걸리는 바람에 쿵 쓰러졌다.
서안전장주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봤지만 명도상인은 아랑곳 않고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피를 냈다.
그리고는 뜨거운 선혈이 뚝뚝 흐르는 손바닥을 땅에 안면을 처박은 불괴강시에게 가져갔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오, 신녀.”
“....”
몽롱한 눈으로 흘러나온 피를 보고 있던 불괴강시가 혀를 내밀어 손바닥을 핥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쯤 피를 마셨을까.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는지 명도상인이 손을 거두고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저자를 상대해주시오.”
저 너머에 있는 유이강을 가리켰다.
심연을 닮은 눈빛으로 유이강을 시야에 둔 불괴강시가 허리를 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덤벙거렸던 때와 달리 스스로 벌떡 일어나서는 똑바로 걸어갔던 것.
유이강 역시 불괴강시가 만만치 않은 적수임을 느끼고는 혀를 쯧쯧 찼다.
“한 방 먹었군. 괜히 허세만 떤 꼴이 됐어.”
심계와 술법이 깊어 귀산자로 불렸던 그가 적의 술법에 농락당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썼던 환각의 술법과 비슷한 수법으로 말이다.
양 세력의 최고수들이 서로에게 접근하는 그때, 두 마교의 고수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양갈래로 나뉘면서 좌장을 위한 길을 터주었다.
이윽고 십 장 앞에서 마주한 두 초고수가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고,
“강시로군. 살아있는 사람을 소재로 삼았는가.”
불괴강시의 정체를 깨달은 유이강의 말을 시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농밀한 기파가 부딪쳤다.
-......!
소리는 없었다. 아득한 공력의 부딪침이 소리조차 집어삼키는 충격파를 흩뿌렸으니까.
두 초고수가 충돌한 지점을 중심으로 수없이 겹친 격공이 크고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여파에 휘말리는 것만으로도 무인들이 피를 토하고, 경파를 맞은 건물들이 폭삭 무너진다.
은어처럼 가느다란 불괴강시의 손가락 끝부분이 날카로운 기운을 머금고 허공을 그었다.
삼 장 위 공중에 있던 유이강이 섬뜩함을 느끼고 신형을 뒤집자 거대한 짐승이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담벼락과 전각의 벽이 쪼개졌다.
격공의 무리를 담은 조법의 현신.
평범한 격공의 규모를 아득히 초월한 경파에 유이강이 헛웃음을 삼켰다.
“이건 삼화취정 수준이 아닌데?”
어검술로 대응할까 싶었지만....
‘쓸 시간이 없겠군.’
깊어지는 내공과 함께 어검의 경지에 도달했으나, 잘 쓰려면 검과 몸을 일체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검합일에 들기까지 시간이 걸리기에 잠깐 사이에도 수십 합씩 주고받는 격전에선 쓸 겨를이 없는 마당.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이강은 수십 년간 함께했던 애검에 감각을 집중하며 상단전을 고조시켰다.
찰나 술법으로 기척을 숨긴 그가 공간을 접듯 배후에 나타나서 검을 휘둘렀다. 검강을 발출하진 않았으나 호신강기를 부수기엔 충분한 강검.
하나 불괴강시의 몸을 가르기 전에, 땅에서 튀어나온 붉은 다발이 강검을 막아섰다.
콰아아아앙!
“......!”
산산이 부서진 파편 속에서 얽히는 두 고수의 눈빛.
그 순간, 유이강은 불괴강시의 입매가 움찔하는 것을 똑똑이 볼 수 있었다.
“웃어?”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미처 못 봤을 미소.
그마저 찰나에 사라졌지만, 착각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든 강시라고 하나... 죽은 사람이 감정을 표현한다고?’
살아있는 채로 강시로 만들어졌어도 강시가 된 시점에선 심장이 멈춘 송장이다.
육신에 봉인된 혼백이 주인의 명령을 알아듣기 때문에 움직이긴 해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강시술의 계파를 떠나서, 그 누구도 이런 강시는 만들 수 없다. 만들어져서도 안 돼.’
정말 그런 강시가 존재한다면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고 독립을 꾀하려 들지도....
그가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이었다.
-혈익천시공(血翼天時功).
붉은 입술이 신공의 호흡을 내뱉자 들불처럼 일어난 핏빛의 날개가 전신을 감싼다.
박쥐의 날개처럼 피막이 길게 늘어진 호신강기.
불괴강시의 몸을 다 덮고도 남을 커다란 피막의 날개가 활짝 기지개를 켜는 것과 동시에,
콰아앙!
여인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작은 핏빛 구슬이 유이강의 전면을 향해 치달았다.
‘강구(罡球)...!’
강기를 구슬처럼 모아서 쏘아보내는 최상승 기예. 손톱만한 강구에 천년거암도 부숴버릴 거력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파악한 유이강은 망설이지 않았다.
한순간에 검권을 펼쳐 강구를 가두고, 폭발하기 직전에 물극필반의 이치에 따라 그 힘을 되돌린다.
자신이 쏘아보낸 강구가 고스란히 돌아가자 불괴강시가 무표정한 얼굴로 일장을 뻗었다.
한순간 빛이 번쩍이며 거대한 충격파와 열기가 불괴강시를 삼키고....
그 너머에서 호신기로 열기를 흘려보낸 유이강은 허연 연기가 가시면서 드러난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불괴강시를 감싼 혈익이 무참하게 박살난 모습.
본인의 강구에 휘말린 불괴강시 본인 역시 무사치 않아서, 옷이 찢겨지고 살점이 떨어져나갔다. 부러진 뼈가 밖으로 튀어나오고 얼굴 반쪽이 뭉개졌다.
불괴라는 이명에 어울리지 않는 참혹한 부상이지만, 유이강이 경악한 것은 어지간한 고수조차 즉사할 치명상이 시간을 거스르듯 아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생의 공능을 지녔군. 한없이 불사에 가까운 초절정의 강시라....”
만약 오십 년 전에 흑룡교에 이런 강시가 있었다면 전황은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무림의 전쟁이 고수들의 승부에 향방이 갈리듯, 크고 작은 전투들도 영향을 받았으니까.
결정적인 국면에서 적측의 고수 두세 명만 죽였어도 흑룡교가 지금처럼 비참하게 몰락하는 일 따위는....
“아니.”
이미 과거는 지났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이상 지나간 일에 미련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
심마처럼 다가온 미혹을 떨쳐내고 눈앞의 생사대적을 향해 온전히 집중한다.
우우우우웅!
검과 한 몸이 된 초고수가 기감을 곤두세우는 것만으로도 대기가 숨을 죽인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나 또한 삶에 미련이 많아서 말이오. 회복할 시간은 줄 수 없겠구려.”
적이 완전히 부상을 털고 일어나기 전에 필살의 일격으로 끝낸다.
그렇게 다시 한번 고조된 정신으로 검과 심령을 연결할 무렵이었다.
“......!”
별안간 시야를 가린 핏방울들.
전장 전역에 고인 핏물들이 하늘의 섭리를 거스르듯 점점이 치솟는 모습에 유이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허공섭물? 아니야. 허공섭물은 형태가 정해진 물건만 들어올릴 수 있다. 물은 들어올리지 못해.’
먼 곳에 있는 물체를 들어올리는 허공섭물은 고절한 기예지만 한계도 명확하다. 대상이 움직이면 공력으로 이어진 실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사람을 들어올리기는 힘들다. 움직이면 허공섭물이 깨지니까. 하물며 그게 형태가 고정되지 않은 핏물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뜻밖의 이적에 상단전에 깃든 신(神)이 불길하니 조심하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괴강시를 공격하기도 전에,
쿠아아아아아아......!
사방에서 쇄도한 핏방울의 폭풍이 유이강을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