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사냥 (6)
진조에게 들은 이야기는 백서희에게도 전해졌다.
“그래서 염탐하겠다고?”
“기회는 지금밖에 없으니까.”
몇 시진 뒤엔 싸움에 나서야 한다.
흡혈귀 비슷한 존재가 장원에 있다면 그전에 어떤 존재인지 파악해야 하리라.
“들킬 염려는... 뭐, 없겠네.”
삼화취정에 오른 단혼마백도 강엽을 찾아내지 못했었다.
하물며 강엽은 그때와 비교도 안 되게 강해졌으니 들킬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야. 막말로 그 흡혈귀 비슷한 놈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잖아.”
진조가 따로 경고할 정도라면 필시 범상치 않은 힘을 갖고 있을 터.
한동안 강엽을 걱정스럽게 바라본 백서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오면 운기하고 있다고 말할게.”
“부탁한다.”
“잠깐 기다려봐.”
머리를 끌어당기자 얼굴에 와닿는 풍만한 감촉에 강엽이 실소했다.
은은히 코밑을 간질이는 울금향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뭔데, 이건?”
“음, 나름대로의 응원?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나참, 내가 애도 아니고.”
하지만 강엽의 입매는 어느덧 많이 풀려 있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줄곧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강엽은 쓰게 웃으며 백서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간다.”
“응. 조심해.”
그렇게 백서희를 뒤로하고 어둠 속에 숨어든 강엽은 객당을 빠져나와 장원 깊숙이 들어갔다.
처음 오는 장소인 데다 길안내를 해주는 사람도 없으나 길을 헤매지는 않았다. 진조가 경고를 해줬기 때문인지 어떤 촉이 느껴졌기 때문.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감각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스치는 하인들과 시비들, 무인들은 강엽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각군 곳곳에서 감시의 시선을 번뜩이는 고수들도 마찬가지.
이미 강엽의 암신은 스스로 기척을 드러내지 않는 한 어지간한 고수들은 감지하지 못할 영역에 있었다.
그렇게 내원의 연못 어림에 온 강엽이 눈을 빛냈다.
주위를 둘러봐도 혈라분을 제조할 만한 시설 따위는 보이지 않았으나, 진조의 영성은 여기에 자신이 찾는 곳이 있노라 속삭이고 있었다.
허락받은 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내원이라고 해도 중요한 시설을 그냥 드러낼 리가 만무.
전각을 하나씩 뒤져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드르르르륵....
귓가를 자극하는 작은 기관음.
소리를 따라간 곳엔 연못 아래로 떨어지는 작은 폭포가 있었다.
‘암시장에 들어왔던 것과 같은 방식인가?’
비경 안의 비경이라고 할까.
기관진식이 작동하자 폭포가 갈라지며 그 안에서 도복 차림의 사내들이 나왔다.
일견 평범한 도사로 보였지만 강엽은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익숙한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모산파.’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산파의 술사들은 저들끼리 작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조정 작업이 예정보다 늦어져서 큰일입니다. 교성께서 역정을 내지 않으실지....”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느냐.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어서 다행이지.”
두 사람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선 놈들을 붙잡아서 문초하고 싶었지만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
폭포가 닫히기 전에 두 사람을 지나친 강엽이 안쪽으로 쏙 들어가자 중년 술사가 움찔 떨었다.
“음...!”
“왜 그러십니까?”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져서 말이다.”
“네? 아무도 없습니다만?”
“쯧, 응달진 곳이니 귀기가 들기 얼마나 좋겠느냐. 일이 끝나면 제령술을 한편 펼쳐야겠다.”
귀기가 강하다는 것은 망자들이 많다는 것이니, 이는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뜻이 된다.
중년 술사가 소름이 돋아난 팔뚝을 쓸어내리자 젊은 술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보탰다.
“솔직히 저도 여기 올 때마다 으슬으슬 떨립니다. 근데 귀기보다는 그 ‘물건’이 원인 아닐까요? 이전엔 이 정도까진 아니지 않았습니까.”
“...음, 그럴 수도 있겠지.”
그그그그긍......!
중년 술사가 마지못해 수긍하는 그때 폭포의 기관진식이 닫혔다.
잠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중년 술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젊은 술사의 등을 쳤다.
“가자. 어차피 이 짓도 조만간 끝날 테니.”
* * *
한편 강엽은 계단을 통해서 연못 아래의 공간에 내려와 있었다.
안쪽의 구조는 딱 봐도 개미굴처럼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은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지렁이나 두더지가 굴을 판 것 같다고 할까. 강엽은 오래전 청송객잔의 동패무고에서 땅을 파는 무공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지둔공(地遁功)이라고 했었지?’
본래는 땅밑에 숨어 달아나거나 기습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인데 그걸 굴을 파는 데 쓴 것이다.
감을 따라간다지만 길이 이토록 복잡하면 헷갈리기 마련.
때론 막다른 길을 맞닥뜨리거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심지어 검은 장포를 걸친 무인들과 맞닥뜨리는 일도 벌어졌다.
‘혈령교위....’
기밀장소인 만큼 신분이 낮은 평교도는 감히 출입하지 못하는지 마주치는 모든 무인들이 혈령교위였다.
끼아아아아아...!
불현듯 안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에도 혈령교위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납덩이처럼 굳은 안색으로 입술을 꽉 깨문 채 전방을 주시할 따름.
강엽은 그들이 임무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동안 겪었던 혈령교위들이 사람을 죽이는 걸 즐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꽤나 생소한 풍경.
그런 놈들이 이토록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는 건, 저 안쪽에 두려워할 만한 뭔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혈령교위들을 피해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마주치는 혈령교위의 숫자는 늘어만 갔고....
‘여기는?’
수많은 약재들이 쌓인 약방.
당묘정이 혈라분을 제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해준 약재들이, 지하 약방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때쯤 도복 차림의 술사들이 수레를 가져와서 약재를 한아름 싣더니 갈림길로 빠져나갔다.
강엽이 급히 그들의 뒤를 미행하자, 예의 한맺힌 절규가 다시 한번 고막을 강타했다.
-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도착한 은밀한 곳에선 의식이 한창이었다.
혈령교위들이 누더기로 은밀한 부위만 겨우 가린 사내를 끌고 오자 술사가 단검을 치켜들었다.
양팔을 붙잡힌 채 무릎 꿇은 사내가 벌벌 떨며 애원했다.
“제, 제발! 살려주시오, 빚은 꼭 갚을 테니까!”
“목숨으로 갚거라.”
무심하게 대꾸하면서 사내의 심장을 천천히 찔러가는 술사.
아무것도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심정이 얼마나 공포스러울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이윽고 심장을 관통당해서 즉사한 사내를 들여다본 술사가, 한 손으로 수인을 맺은 채 중얼중얼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흉물스럽게 갈라진 심장에서 쏟아진 핏덩이가 바닥에 파인 골조(骨彫)를 통해 원의 중심부로 나아간다.
동시에 죽은 사내의 몸에서 급속도로 생기가 빠져나가면서 목내이처럼 비쩍 말라갔고,
-까아아아아악!
정수리를 통해 희끄무레한 기운이 빠져나왔다.
구석에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강엽은 술사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영혼백육(靈魂魄肉)을 분리하는 건가.’
모산파의 술법으로 희생자의 혼백을 뽑아내서 피에 담긴 선천지기와 함께 섞는 술법.
그렇게 분리된 혼백과 선천지기는, 십수 명이 몸을 뉘일 만한 커다란 욕탕의 약물과 섞이고 있었다.
“명월초와 작약을 삼 대 일의 비율로 섞는 것을 잊지 마라. 조금만 배합이 틀려도 약효가 크게 떨어진다.”
“말린 독황고(毒荒菇)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라고 했을 텐데? 여기 큼지막한 조각이 남았잖아!”
커다란 절구통에 약재를 빻고, 그렇게 빻은 약재를 일정한 비율로 섞고 있는 술사들의 모습.
한쪽에선 사람을 죽이고, 다른 한쪽에선 약재를 배합하는 등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죽여서 그 피와 혼백을 약재로 삼는 목불인견의 참상에서도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사람을 식재료 정도로 보지 않고서야 어찌 이토록 무심할까.
창살에 갇힌 채 오들오들 떠는 사람들, 그중 어린 소년을 발견한 강엽은 쓴맛이 감도는 걸 느꼈다.
‘외통수로군. 지금 모습을 드러내면 잠입은 실패인데....’
지금 당장 저들을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의식을 잠깐이라도 지체한다면 시간은 벌 수 있지 않을까?
강엽은 한순간 떠올린 방법의 성공 가능성을 냉정히 판별했다.
‘술법의 흐름에 개입해서 술법진이 망가지면 바로 술법을 쓰지는 못하겠지. 고치려면 시간이 걸려.’
문제는 외부에서 개입한 흔적을 절대로 남겨둬선 안 된다는 것.
암신을 유지한 채로 기감을 곤두세운 강엽이 술법의 흐름에 조금씩 끼어들었다. 순풍에 몸을 싣듯 자연스럽게. 술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희생자 자신의 피가 술법이 망가진 원인이 되도록 꾸며야 한다.’
또다시 술법의 희생양이 된 사람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골조에 고였을 때, 주력의 흐름을 절묘하게 파고든 감각이 기운을 크게 뒤틀었다.
“이, 이건...!”
역류된 흐름을 느낀 술사가 경악성을 토하는 찰나.
희생자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선천지기가 도리어 술사 자신의 몸으로 역류하면서 술법을 뒤흔들었다.
순간 뒤틀린 주력의 흐름을 느낀 모든 술사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망할, 술법진의 흐름이...!”
주력의 흐름에 누구보다 민감한 술사들이 술법진이 뒤틀렸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희생자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선천지기가 갑작스레 폭주하자 막을 방도가 없었다.
폭주한 기운은 술사에게 향하고, 그 영향을 받은 술사의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오르는 상황.
“으으으으읍!”
“저놈을 당장 술법진에서 떼어내라!”
술사들의 호들갑에 덩달아 당황한 혈령교위들이 얼른 술사와 죽은 시체를 빼냈지만, 한번 폭주한 기운은 진정되지 않고 술법진을 파괴했다.
콰지지지지직......!
이윽고 골조를 새겨놓은 술법진이 부서지자 술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아, 안 돼!”
콰아아아앙!
안 된다는 외침이 무색하게도 술법진이 터지면서 주변에 몰린 술사들과 무인들을 날려버렸다.
몇 됫박은 족히 될 듯한 핏물을 토하는 자들의 모습에 멀리 있던 자들도 황망해졌다.
뒤늦게 소란을 듣고 온 혈령교위들은 장내의 참상에 말문이 막힌 듯 목소리를 떠듬거렸다.
“이, 이게 무슨... 어찌된 일인가?”
“술법이... 술법이 폭주했소.”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난 술사가 저간의 사정을 말하자 혈령교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술법진은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나?”
“경위는 조사해봐야 알 것 같소. 아마 방금 전에 죽인 놈의 피가 원인인 것 같은데... 무지막지한 선천지기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이런 일은 벌어질 수 없소.”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부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리라.
“알겠다. 다친 자들을 수습하도록. 이 일은 교성과 대제자님께 보고해야겠다.”
“으음, 그럽시....”
쿠구구구구궁......!
갑작스럽게 닥친 흔들림.
술사가 말을 잇지 못하고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이런, 설마 ‘불괴(不壞)’가...!”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빌어먹을! 이럴 게 아니오! 당장 서둘러야 하오!”
그 혼자만 난리가 난 게 아니었다.
몸이 멀쩡한 술사들 모두가 사색이 되어서는 혈령교위들을 밀치고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창살에 갇힌 이들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강엽 역시 몸을 돌려 술사들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불괴라고?’
뭔지는 몰라도 아마 굉음의 진원지가 있는 곳일 터.
한참을 달린 끝에 더 깊숙한 심처에 도착한 강엽은 술사들이 말한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술법진 한가운데에 있는 큼지막한 석관.
자박하게 핏물이 깔린 바닥 위의 석관에 균열이 생기면서, 안에 있는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투명하리만치 창백한 여인의 손이었다.
“이런, 아직 조정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하아.”
경악한 술사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미려한 한숨.
마치 곡조처럼 들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꽂힌 순간, 심령에 타격을 입은 술사들은 다리에 힘이 풀린 것마냥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이 정도면 망혼소와 거의 대등한 효과인데...?’
이문혈에 공력을 집중해서 귀를 보호한 강엽만이 잔뜩 눈살을 찌푸린 얼굴로 석관을 응시했다.
반쯤 부서진 석관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 사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긴 적발의 여인이 몽롱한 얼굴로 장내를 돌아보고 있었다.
* * *
“.......”
석관에서 등장한 의문의 여인.
당장이라도 석관을 박차고 난리를 칠 것 같았지만, 의외로 몸을 일으키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졸지에 그녀를 정면에서 마주본 강엽은 굴곡진 나신 때문에 꽤나 곤혹스러웠지만, 시선을 피하거나 몸을 돌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 강시인가?’
목소리를 낸 걸로 보아 살아있는 사람 같은데, 특이하게도 심장은 뛰지 않는 모순.
절세가인의 용모를 지니고 있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여인은 강시였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초음을 흘리면서 체내를 살피자 상중하 삼단전이 이어진 게 느껴졌다.
삼화취정에 이른 강시가 존재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여인의 진기가 혈공진기와 한없이 비슷하다는 것.
심지어 혈라분을 복용한 혈교도보다도 혈공진기와 비슷한 게, 같은 심법을 익혔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세세하게 따져보면 차이가 있어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으으으으윽!”
그때 바닥에 드러누운 채 괴로운 신음을 흘린 술사들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젠, 장.... 이대로... 폭주... 어서 조, 조정을....”
띄엄띄엄 말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으나 강엽은 앞서 그들이 내뱉은 말로 대강 알아들었다.
조정이란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여인이 미쳐 날뛴다는 뜻이겠지.
그녀가 혈교도들을 몰살시킨다면 나쁠 게 없지만, 이곳엔 무고하게 끌려온 사람들도 있다.
만에 하나 여인이 위층까지 부수고 올라간다면 백서희나 모처에 있는 일행도 휘말릴 수 있는 일이었다.
한데 술사의 목소리에 움찔한 여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술사를 향해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었다.
콰직!
“끄어억!”
버둥거리다 생기를 쭉 빨려 목내이가 되어버린 술사의 몰골.
강엽은 술사의 죽음보다도, 여인의 손가락에서 튀어나온 붉은 줄기를 집중해서 바라봤다.
진조가 한없이 흡혈귀에 가깝다고 한 강시는, 놀랍게도 혈목을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