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사냥 (5)
‘이미 이만큼 피해를 입은 이상 장주가 죽고 사는 건 문제가 아니야.’
호연 장주의 죽음이 결정타가 되었지만, 호연장은 적잖은 무인들이 죽고 다친 시점에서 힘을 잃었다.
호연 장주가 원한에 휩싸여 복수를 천명했다 해도 보탤 수 있는 힘은 얼마 되지 않았겠지.
그렇기에 강엽은 바로 늙은 총관을 찾아갔다.
호연 장주가 죽은 시점에서 앞으로의 중대사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총관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갑작스러운 적습과 장주를 잃은 고통 탓에 총관은 더없이 시름에 잠긴 기색이었다.
“시비들은 모두 어디 갔습니까?”
“모두 모처에 가둬놨네.”
“바로 죽이실 줄 알았습니다만.”
“마음 같아선 그 배은망덕한 것들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죽이고 싶네만, 배후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심문한 뒤에 목을 칠 것이네.”
강엽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총관이 장주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시비들에게 사주한 건지, 아니면 이 기회에 장주를 치워야겠다고 생각해서 놔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총관이 호연장을 대표한다면 오히려 죽은 장주보다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합니다. 장주님의 초청을 받고 왔는데 이런 일이 생겨 송구할 뿐입니다.”
“음, 아닐세. 적들이 설마 벽력탄을 쓸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암시장에 벽력탄을 비롯한 화기류가 암암리에 거래된다는 건 비밀이 아니지만, 강호의 전쟁에서 화기가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이 탄로나면 정사마를 막론하고 관부에 의해 수배되기 때문.
“그나마 이 장원이 본장이 아니라서 망정이지. 장주님이 돌아가신 건 뼈아프지만, 여기가 무너졌다고 호연장 전체가 무너진 건 아닐세.”
“장주님의 장례를 치르면 새로운 분이 장주가 되시겠군요.”
“장주님의 자제분들이 계시네.”
호연장은 손이 귀해서 죽은 장주는 아우가 없었다. 누이가 있긴 하나 지금은 혼인해서 출가외인이 되었다.
따라서 후사를 이을 자는 죽은 장주의 자식들뿐인데, 문제는 이들이 적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장주님께선 혼인을 하지 않으셨다네. 그분의 자식들은 시비들이 낳은 사생아지.”
명문가의 자제, 특히 가문의 독자는 일찍 혼례를 올리지만 호연 장주는 시비들을 통해서 자식들을 봤기에 혼인을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그 아이들 중 하나가 후사를 이을 걸세.”
“.......”
혼인을 하지 않았으니 외척도 없는 셈. 장주가 타계하면 실권은 가신들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총관이야말로 가장 큰 실권을 쥔 권력자가 될지도 모르는 일.
거기까지 상황을 내다본 강엽은 어떤 식으로 대화를 끌고 가야 자신에게 유리할지 순식간에 판단했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군요.”
“음? 그게 무슨 말인가?”
뜬금없는 말에 총관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엄연히 장주님의 의뢰를 받고 왔는데 의뢰인이 덜컥 죽어버린 상황이 아닙니까? 하지만 의뢰를 받았는데 그냥 물러나는 건 도리가 아니지요. 해서 신임 장주님을 새로운 의뢰인으로 삼으려 했습니다만....”
강엽이 말끝을 흐릴 때쯤엔 총관도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은 듯 침중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하지만 본장이 받은 피해가 너무 크네.”
“압니다. 하지만 장주님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셨는데 복수해야 하지 않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장주를 죽인 것은 시비들이지만, 발단이 된 것은 유이강이 보낸 살수들이었다.
“누가 후사를 잇든 선대의 원수를 갚아야 명분이 설 것 같습니다만... 하나 후사를 이을 재목들이 그토록 어리다면 강요할 수 없겠지요.”
“.......”
그제서야 강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은 총관이 허연 눈썹을 치켜올렸다.
장주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총관이 가문의 실권을 쥐려 한다면 복수를 해야 명분이 서지 않겠는가?
“소마동 선배가 죽긴 했지만, 남은 이들과 가내무사들의 힘을 모은다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군. 초청장을 받은 이들을 다른 흑상에게 보내라는 건가. 하지만 다른 자들이 응하겠나?”
“정 안 되면 저와 사매만이라도 가겠습니다. 한 번 당한 건 갚아주지 않으면 안 되는 성미인지라.”
그렇게 말하는 강엽의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가 그어지자 총관이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완수금은 본장이 줘야겠지?”
“그래야 하겠지요. 참고로 저와 사매가 받기로 한 금액은 십만 냥이었습니다.”
“뭐, 뭣? 십만 냥이라고...!?”
“왜 그렇게 놀라시는지 모르겠군요. 둘이 합해서 십만 냥입니다.”
“듣자듣자하니까...! 농담하지 말게! 소마동도 팔만 냥이었어! 아무리 자네 둘을 합친다고 해도 소마동보다 비싼 게 말이 되는가!”
“농으로 들리십니까?”
강엽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자 총관은 묘한 압력을 느낀 듯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소마동 선배가 살수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럴 선배가 아니지만 벽력탄에 당황했고, 비겁한 기습을 당해 몸이 절반으로 갈라졌지요. 저희가 그 복수를 했는데... 저희 몸값이 소마동 선배만도 못합니까?”
한마디로 둘이 힘을 합치면 소마동보다 강하다는 것이니 십만 냥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주장이었다.
“하나 자네들은 무명(無名)인데....”
“장주님께서 저흴 초청하셨습니다. 총관님께서 보시기엔 장주님이 전쟁을 앞두고 단순히 친분만으로 누군가를 초청할 분 같습니까?”
“으음,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시지. 알겠네. 십만 냥이라... 그 십만 냥이 완수금은 아니겠지? 선금도 받지 않았나?”
“선금은 아직 안 받았습니다. 완수금도 나중에 호연장으로 가서 받자니 귀찮고요. 지금 전부 주십시오.”
“이보게, 그건....”
“대신 일은 확실히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추천장이나 써주시지요. 장주의 직인이 찍혀 있다면 다른 흑상들도 별말없이 받아줄 겁니다.”
그 말에 총관이 깊은 고민에 빠졌지만, 칼자루를 쥔 건 강엽이었다. 선금도 받지 않았기에 장원을 떠나도 붙잡을 명분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엽과 백서희를 대체할 만한 고수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강엽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추천장까지 써줬는데 도망치진 않을 거라 믿네.”
만약 강엽이 전장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흑상에 의해 제거될 거라고 생각했다. 추천장의 말미에도 만약 두 사람이 도망친다면 죽여도 좋다고 써놨다.
“사람들을 붙여줄 테니 같이 서 대인의 장원까지 가게나. 서로 아는 사이이니 자네를 들여보내줄 걸세.”
“감사합니다. 그럼....”
새 치 혀로 장주의 직인이 찍힌 추천장은 물론 십만 냥을 벌어들인 강엽이 입꼬리를 올렸다.
* * *
‘그야말로 복마전이군.’
암시장에선 서 대인이라 알려진 명도상인의 장원.
여기저기에 포진한 고수들이 은연중 흘리는 기도가 살갗을 찔렀기에 굳이 초음을 쓸 필요도 없었다.
여기 있는 고수들 중 일부만 나서도 호연장 따위는 하룻밤 사이에 짓밟을 수 있으리라.
백서희도 쉽지 않다는 걸 알았는지 눈알을 굴리다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전음을 보냈다.
[여기는 잠입하지 못하겠는걸.]
고수들의 숫자는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무인들의 수준도 호연장의 무인들을 웃돌고 있었다.
몰래 주변을 살피는 동안 호연장의 무인들로부터 두 사람을 인계받은 장원의 무인들이 곧장 그들을 장원 한구석에 있는 전각으로 안내했다.
“서 대인을 뵙지 않는 것이오?”
“대인께서는 바쁘시오.”
그렇게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들어간 곳엔 가느다란 실눈의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서희를 보고 이채를 띤 그가 섭선을 살랑살랑 흔들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어서 오게. 난 심윤이라고 하네. 서 대인의 심복이지. 자네들은 호연장에서 왔다고?”
“그렇습니다. 장주님께서 돌아가셔서... 부득이하게 이쪽에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외부에서 왔다는 말이군.”
“호연장의 무인들도 일부 참전할 겁니다.”
“그건 들었네. 호연장의 일은 정말 안타까워. 장주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군. 한데 자네들은 호연장의 사람도 아닌데 왜 장주의 복수를 하러 여기까지 온 겐가?”
“복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기도 그래서 온 겁니다.”
“훗, 돈이 목적이라는 건가?”
“십만 냥을 받았습니다.”
“십만 냥이라... 웬만큼 큰 도시에서도 그럴듯한 장원을 살 수 있겠군.”
“예, 저와 사매가 작은 무맥에서 사사했는지라... 일이 끝나면 적당한 도시에서 문파를 개파할 겁니다.”
“그렇구만. 자네들의 동기는 이해했네. 낭인으로 일하면서 한탕 거하게 뛰겠다는 건가. 한데 낭인전으로 가지 않고 암시장에 온 건 특이하군.”
“낭인전도 가봤습니다. 한데 낭인패라는 게 실력에 비례하지 않더군요. 윗등급으로 올라가려면 공을 세워야 하는데, 그럼 한 세월이 걸릴 거 아닙니까?”
“하하, 그게 낭인전의 단점이지.”
심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엔 무조건 동패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규칙에 낭인전에 입단하려던 고수들도 반감을 갖고 그만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십만 냥이라... 이건 호연장과 나눈 약속이니 내가 뭐라 할 계제가 아니군. 어쨌든 고수가 늘어나는 건 반길 일이지. 자네들을 환영하겠네.”
“오늘 바로 싸운다고 들었습니다만.”
“전쟁은 예정대로 할 걸세. 흑상들은 호연 장주를 빼면 전부 무탈하시거든. 본가 역시 적들의 습격을 받았지만 큰 피해 없이 격퇴했지.”
실제로 장원 외곽이 약간 부서진 게 전부였다.
적들이 내원으로 침입하기도 전에 고수들이 나서서 전부 격살해버린 것이다.
“예상치 못하게 한 방 먹긴 했으나, 전열을 가다듬으면 유이강의 세력쯤은 낙엽처럼 쓸어버릴 수 있네.”
“저들이 태화문과 손을 잡진 않았습니까?”
자신이 유이강이라면 조영옥의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터.
물론 자기 앞가림도 급한 조영옥이 남의 전쟁에 한손을 보탤지는 의문이지만,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내민다면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흠, 호연 장주가 언질을 줬나 보군. 그래, 태화문이라... 그쪽 행방이 확실하진 않지. 하지만 저들이 적대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먼저 건드릴 생각은 없네.”
달리 말하면 조영옥의 세력이 유이강의 세력과 힘을 합치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는 뜻.
“어쨌든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할 생각이야. 그때까지 휴식을 취해두게나.”
* * *
거처를 배정받은 두 사람은 차례로 운기조식을 하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특히 강엽은 간밤에 흡수한 소마동의 피를 소화해야만 했다.
반푼이긴 하지만 어쨌든 삼화취정에 일부나마 발을 걸친 고수의 피.
이제껏 취했던 고수들의 피와 비교도 안 되는 강인한 선천지기가 깃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체내의 진기를 외부로 발산하지 않기 위해 세심히 갈무리하며 운기하기를 한참.
어느 순간 강엽은 심상세계의 진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눈을 뜨자....
[왔구나, 후계자야.]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왕좌에 앉아 턱을 괴고 있는 진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도 그런 표정을 짓는군. 늘 비웃거나 심드렁한 표정만 짓는 줄 알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장난할 기분이 아니구나.]
“그런 것 같군. 무슨 일로 날 불렀지?”
[새로운 흡혈귀가 나타났다.]
“...!”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강엽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 순간, 진조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완전한 흡혈귀라고 하기는 어폐가 있는가. 어쨌든 흡혈귀에 근접한 존재인 건 확실하다.]
“구체적으로.”
이 세상의 흡혈귀는 진조가 다 죽이고 포식했기에 강엽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한데 이제 와서 새로운 흡혈귀라니?
[짐도 조금 전에야 알았다. 네 심상세계 안에 있는 잔영이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면 이전엔 존재도 몰랐다는 건데. 지금에서야 알아챈 건 당신이 나를 통해 바깥세상을 인지하기 때문인가?”
[그렇다.]
“그럼 상황의 변화를 알아차린 것은, 내가 있는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봐야겠군.”
소마동의 피를 마시긴 했으나 강엽 자신이 이전에 비해서 월등히 강해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진조가 상황을 알아차린 것은 내부의 요인이 아니라 외부의 요인과 관계가 있을 터.
[그나마 말귀는 통하는 놈이라 다행이군.]
“호연장에 있을 때는 몰랐다가 지금에서야 알아차린 건... 내가 서태진이란 자의 집에 왔기 때문이겠지. 그럼 여기에 당신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는 거고. 당신이 말한 흡혈귀에 가까운 존재가 여기 있는 건가?”
[그래, 어렴풋이 존재감이 느껴지는구나.]
“....”
[네놈도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지?]
“장원에 들어왔을 때 꺼림칙한 느낌이 들긴 했지. 오자마자 바로 알았다.”
이 장원이야말로 혈교의 본거지라는 것을.
장원의 무인들에게서는 혈교도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진조의 초월적인 기감은 땅밑의 기운까지 샅샅이 훑어보고 숨겨놓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혈라분이 만들어지고 있었어.”
또한 진조의 짐작대로라면, 흡혈귀에 가까운 존재 역시 이 장원 어딘가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