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80화 (180/450)

32화. 잠입 (5)

혈공독수.

삼화취정의 고수를 죽이기 위해 술법과 무공을 엮어낸 술법무공.

씨실과 날실을 짜서 면포를 이루는 것처럼, 전혀 다른 것들을 합쳐 새로운 걸로 만들었다.

낭왕이 지나가듯 흘린 말에서 얻은 단초를 굴리다 보니 여기까지 이르렀지만, 돌이켜보면 술법무공을 아예 안 썼던 건 아니었다.

‘망혼소.’

휘파람에 주력을 싣어 심령을 타격하는 술법.

처음 망혼소를 접한 자들이 음공이라고 오인했다.

음을 이용해서 타격을 가하는 게 음공의 이치였기 때문이다.

‘음공이나 망혼소나 기저에 깔린 오의는 비슷해.’

즉, 망혼소야말로 음공과 술법을 합친 술법무공이었다.

모산파의 술법서엔 망혼소 말고도 비슷한 술법이 존재하는 바.

강엽은 그 술법들을 근본부터 해체해서 술법무공의 무리를 터득하고, 가장 강력한 술법인 혈독과 혈공진기를 합일시키는 데 성공했다.

처음엔 시범용으로 생각했으나 뼈대를 세우는 과정에서 혈공독수가 경혈을 잠식해서 내부에서부터 파괴하는 공능을 지녔음을 확인했고,

그게 혈공진기와 혈독이 합일되면서 파생된 성질임을 깨달았다.

‘문제는 이게 실전에서 통하냐는 건데....’

단전 역시 경혈의 일부.

혈공독수는 기해혈과 단중혈을 부쉈고, 사휘간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드러난 양상만 보면 처음으로 만든 술법무공치곤 보기 좋게 성공했다고 봐도 좋겠지.

그러나 혈공독수는 완벽한 무공이 아니었다.

‘삼화취정의 고수에게 통해도 이렇게 극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 없어.’

삼화취정의 고수라면 필시 호신강기를 두를 터.

혈공독수로 치명상을 입히려고 해도, 호신강기를 벗겨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하물며 삼화취정의 고수가 이룬 정기신 합일은 중단전만 개방한 무인과는 천지 차이.

낭왕이나 팔사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전강이나 단혼마백, 당우경만 해도 거대한 나무로 여겨질 만큼 굳건한 합일을 이뤘다.

그만한 강자들에게 혈공독수가 통할지는 실전에서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노릇.

중단전을 개방한 고수에게는 굉장히 잘 통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들에게도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에 만족해야 하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강엽이 몸을 돌렸을 때.

아우우우우우...!

주인의 주검 앞에서 낑낑거린 하얀 늑대가 달을 향해 구슬프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남아 있었지.”

크르르르릉...!

“덤빌 테냐?”

이만한 영물을 죽이는 건 아쉽지만, 주인에게 충성하는 놈을 길들이기는 어렵겠지.

그러나 설랑이라 불린 늑대는 강엽의 생각보다 똑똑했는지 미련하게 싸우기보다는 주인의 주검을 물고 저 멀리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뭐, 그래. 도망가라.”

어지간한 절정고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도주하는 늑대를 쫓기엔 그의 상태도 그리 좋진 않았다.

부상은 그렇다 쳐도 혈공독수를 쓴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하단전의 공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중단전을 감싼 여섯 개의 용환도 삐걱거렸다.

차라리 죽이는 것만 신경 썼다면 쉬웠을 텐데 너무 무리했다.

“후우.”

뻐근한 근육을 주루르며 강엽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맹월림의 잔당들은 도망쳤다.

바깥에서 백서희가 홍예칠위를 이끌고 지원군을 막고 있을 때 사휘간의 주검을 문 설랑이 등장한 것이다.

몇몇은 분노에 눈이 뒤집혀서 동귀어진할 기세로 달려들었으나 일부는 대주의 시신이라도 고향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에 설랑을 호위하며 퇴각했다.

그렇게 싸움이 마무리된 뒤.

“아아악! 내 팔! 내 팔이...!”

“어어? 저쪽 잡아라. 내장 흘러나온다!”

숙정방의 경내는 부상자들이 비명을 지르거나 흐느끼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새벽에 급하게 데려온 의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비교적 부상이 경미한 방도들이 피곤한 정신을 붙잡고 의원들을 돕고 있었던 것.

방주인 단목정과 이인자인 고섭풍도 쉬지 못하고 퀭한 눈동자로 동참하고 있었다.

“아, 이건 꿰매야 하는데...!”

“비켜봐요. 이런 건 내 전문이니까.”

백서희가 의원을 밀치고 실과 바늘로 쩍 벌어진 상처를 봉합했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에 의원이 턱을 다물지 못했다.

“호, 혹시 의원이시오?”

“평소에 실을 무기로 쓰거든요.”

사람의 신체 구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니 의원보다 잘할 수밖에.

상처를 완벽히 봉합한 그녀는 이마에 난 땀을 훔쳤다.

“고생했다.”

문득 어깨 위로 위로하는 손길이 닿았다.

“아, 강엽.”

“이제 좀 쉬어.”

“쉬라니?”

“이제부턴 내가 할 테니까.”

고개를 갸웃하는데 강엽은 다른 부상자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상처 부위에 손을 가져갔다.

“으, 주, 주군....”

허벅지와 옆구리에 자상을 입은 방도가 울상을 짓자 강엽이 작게 고갯짓을 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좀 뜨거울 수도 있는데, 그 정도는 참아봐라.”

“예?”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방도의 자상 위에 손을 올린 채 작게 진언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상처 부위를 중심으로 묘한 열기가 뿜어져나오면서 허연 김까지 피어오르는 게 아닌가.

“끄읍? 끄어어어억...!”

“이보시오, 지금 상처를 태우는 거요?”

의원이 황당해하며 따졌다.

물론 쇳독을 막기 위해 인두로 상처를 지지는 치료법이 있긴 해도 아무 때나 쓰는 게 아니다.

그러나 강엽이 손을 치웠을 때, 약간의 자국을 제외하면 상처는 씻은 듯이 사라진 뒤였다.

“어? 아, 아니...!”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백서희도 신기하게 바라봤다.

강엽이 자신의 상처를 재생하는 모습이야 여러 번 봤지만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활명술(活命術)이라는 술법이다.”

“헤, 그거 하나만 배우면 편하게 의원 노릇 하겠는데?”

“그렇게 만능은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도록 전음으로 진실을 전했다.

[선천지기를 소모하는 거니까.]

[뭐?]

[평범한 사람이 이걸 쓰면 단명할걸.]

[...!]

술법은 아무 대가도 없이 편하게 쓸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간단한 술법은 공력으로 때울 수 있지만, 강대한 술법은 제물을 요구한다.

강엽이 쓴 활명술이 요구하는 것은 선천지기.

심지어 술사 자신의 선천지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함부로 남발할 수 없는 술법이다.

백서희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잠깐, 아무리 너라도 선천지기를 막 쓰면...!]

[내 선천지기는 안 썼어.]

[엥? 방금 전엔 선천지기를 쓴다면서?]

[맹월림 놈들의 시체를 써먹었거든.]

[아...!]

맹월림 전사들의 시신에 남은 선천지기.

혈목을 이용해서 고스란히 뽑아낸 선천지기를 이용해서 부상자들을 치료한 것이다.

강엽 자신의 성장에는 큰 도움이 안 되지만,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데는 써먹을 수 있을 터.

물론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약손(?)을 지닌 걸로 보일 뿐이었다.

“주군! 감사합니다!”

“오오, 찬양하라! 주군이야말로 화타와 편작의 재림이시다!”

심지어 의원들마저 기적 같은 광경에 넋을 잃거나 볼을 꼬집으며 현실을 의심할 지경.

대청에서 웃옷을 벗은 채 단목정의 보살핌을 받고 있던 하후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 술법으로 별별 짓을 다 하는구만.”

물론 활명술이라고 완벽한 건 아니었다.

얕은 상처는 바로 나았지만 목숨이 오가는 중상은 선천지기를 퍼부어도 효과가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뒀다면 삼도천을 건넜을 사람들의 명줄을 붙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찬사받을 만했다.

그때 단목정이 물었다.

“상처는 어떠신가요?”

“뭐, 버틸 만하우.”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본래라면 하후진이 부상을 입었을 일은 없었다.

그러나 단목정은 방도들을 구하기 위해 무리하게 뛰어들었고, 그 탓에 적에게 허점을 노출했다.

하후진이 그녀를 노렸던 적을 쓰러트렸지만 그 대가로 등에 불의의 일격을 먹은 것이다.

“자책하진 마쇼. 깊이 베이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훗, 방주가 살았으니 된 거지.”

좋아, 계획대로다.

자신이 말하고도 꽤 멋있다고 생각했다. 이 한마디를 위해 돌아가지도 않은 머리를 얼마나 쥐어짰던가?

사실 호신기만 제대로 둘렀어도 다치지 않았겠지만, 마음에 둔 여인을 위해 어떤 희생이든 불사하는 사나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칼날이 깊숙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만 호신기를 약하게 둘러서 살짝 상처를 낸 건데....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주군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응?”

“하후 무사님께도 기적을 베풀어달라고요.”

“아, 아니...!”

물론 강엽이 저 술법을 쓴다면 이따위 상처는 금방 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쓴다면 칼침을 먹은 의미 따위 사라져버리지 않겠는가.

“그, 방주! 나, 나 말고 다른 부상자들도 많고...! 나는 목숨에 지장도 없으니 나중에! 나중에 받겠수다!”

그 간절한 애원이 무색하게도, 얕은 수작을 박살내러 온 저승사자가 이미 뒤에 있었다.

“중상자들은 다 치료했다.”

“뭐? 벌써!?”

“등짝을 보자.”

“아, 안 돼!”

“돼!”

중단전을 개방한 고수의 호신기가 얼마나 단단한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피아가 구분되지 않은 난전이라지만 하후진쯤 고수가 이런 싸움에서 다칠 리가 없지 않은가.

‘단순한 놈 같으니, 속일 거면 머리라도 잘 굴리든가.’

시선을 돌리자 단목정이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도 하후진이 사기를 쳤다는 걸 아는 것이다.

솔직히 황당하긴 했지만 하후진이 고생한 걸 알기에 밉지는 않았다. 엎드린 채 울상을 짓는 하후진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쓰게 웃었다.

“부탁드립니다, 주군.”

“특별히 신경 써서 꼼꼼이 치료하지.”

강엽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 * *

“방도들을 데리고 갈 수 있겠어?”

백서희가 우려를 표했다.

강엽의 술법 덕분에 부상자들이 줄었다고 해도 다들 바로 싸울 만한 몸 상태는 아니었다.

“지원자만 받아야지.”

“그래도....”

백서희가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 문 너머에서 단목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준비됐습니다.”

“그래.”

이른 아침의 옅은 햇살이 대청 너머 정원을 비추었다.

최대한 햇살이 몸에 닿는 일 없도록, 온몸을 흑색 장포로 꽁꽁 감싼 강엽이 대청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부상을 입지 않은, 혹은 부상을 입었으나 강엽 덕분에 건강을 되찾은 방도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주군, 혈귀놈들을 치러 간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이다.”

“저희도 가고 싶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가겠나?”

“혈귀놈들한테 복수하고 싶습니다.”

“어제 쳐들어온 놈들은 맹월림이었는데.”

“압니다. 근데 둘이 편을 먹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희에겐 이놈이나 그놈이나 똑같습니다.”

“방주, 몇 명이나 동원할 수 있지?”

한쪽에 우두커니 선 단목정이 대답했다.

“일흔 명입니다. 홍예칠위를 포함한 서른두 명은 방을 지키기 위해 남기로 했습니다.”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당문에서 보내기로 한 무인들에 비해 크게 못 미치는 병력. 그러나 이들은 당문과 달리 자신의 명령만을 듣는다.

“너희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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