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81화 (181/450)

32화. 잠입 (6)

숙정방의 방도들을 한중으로 보낸 뒤, 강엽과 백서희는 뱃길을 통해 중경에 도착했다.

약속 장소인 사원루로 향하자 익숙한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수가 도호를 외면서 반겼다.

“원시천존. 어서 오십시오, 강 도우, 백 소저.”

“우리가 늦게 도착했나?”

“저희도 막 도착했습니다.”

대답한 사람은 소창후였다.

여염집 아낙들이 입는 궁장을 입고, 가발로 이마의 계인을 감춘 모습에 강엽이 실소했다.

“그렇게 입으니 몰라보겠군.”

“백 소저가 변장을 해야 한다면서 알려주더군요.”

민망한지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대답하는 소창후였다.

백서희가 코웃음을 쳤다.

“암시장에 아미파의 비구니가 왔다고 동네방네 소문 낼 일 있나.”

“저는 그렇다 치고 청수 도장은요?”

“예? 저도 변장합니까?”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청수가 펄쩍 뛰었지만 소창후는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당연한 말씀을. 도장께선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도사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청수는 반박하지 못하고 끙 앓기만 했다.

하지만 백서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지 않을까?”

“예?”

“암시장에 도사가 온다고 대뜸 구파의 도사라고 의심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보단 사이비 말코 도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사, 사이비....”

청정도량 무당의 제자가 사이비로 몰릴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대략 아득해진 모양이다.

눈을 질끈 감은 청수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백 소저, 변장이, 변장이 너무 하고 싶습니다...!”

“잘 생각했어.”

엄지를 치켜든 백서희가 씩 웃었다.

“너무 억울해하진 마. 나랑 강엽도 변장할 거니까.”

“두 분은 왜요?”

“내가 너무 예뻐서 그런 데 가면 엉뚱한 놈들이 달라붙거든.”

실로 뻔뻔하게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하는 언행에 소창후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청수는 진지하게 공감했다.

“하긴. 백 소저도 저희 못지않게 눈에 띄겠군요. 한데 강 도우는 왜...?”

“소문 때문에.”

“...?”

“내 차림새에 대한 소문이 퍼진 모양이더군.”

당가타에서 만난 은천패급 낭인 잔섬이 강엽을 알아보지 않았던가.

같은 낭인이기 때문에 소문을 더 자세히 접했을 수도 있지만, 강엽에 대한 명성이 퍼지면서 평소 옷차림에 대한 소문도 덩달아 퍼지고 있었다.

“자성검과 용린투 모두 빼놓고 가야겠지.”

“기왕 하는 김에 인상도 바꾸고.”

백서희가 추임새를 넣듯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간단한 변장은 화장 몇 번만 하면 충분해. 굳이 인피면구를 쓸 것까지도 없어.”

네 사람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변장이 필요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홍가려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실례할게요. 손님이 오셨는데요?”

백서희의 모습에 잠시 복잡한 기색을 띠었지만, 특별히 날을 세우진 않는 모습. 백서희도 살짝 어색한 얼굴로 귀밑머리를 꼬았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도 뒤이어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파묻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여기 있었구만! 들어가겠네!”

머리가 천장까지 닿을 듯한 근육질의 거한이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문지방을 넘어선다.

장내를 둘러본 야차마곤이 텁석부리 수염을 쓸었다.

“허어, 나 말고는 선남선녀밖에 없구만.”

“뉘신지요?”

소창후는 야차마곤과 안면이 있지만, 청수는 초면이었다.

야차마곤이 두터운 입술을 당겼다.

“야차마곤이라고 하네.”

“아! 알고 보니 야차마곤 선배님이셨군요. 무당에서 사사한 무림말학 청수입니다.”

“선풍룡 청수 도장의 명성은 나도 익히 들어봤네. 아, 한 가지 더 말해주자면 난 소림에서 사사했네.”

그 말엔 청수는 물론 소창후도 깜짝 놀랐다.

야차마곤의 사문에 대해 알고 있는 강엽과 백서희만 태연했다.

“소림이라면...?”

“외소림이라고 아나?”

“...들어본 적 있습니다.”

외소림의 전설은 구파의 제자들에게도 전설이었다.

소림의 암검으로서 사마외도를 벌하기 위해 불살계를 범한 파계승들.

두 사람의 눈빛이 새삼스러워졌다.

“솔직히 당혹스럽습니다. 외소림의 이름은 어릴 적에 어른들께 들어본 게 전부라서....”

“이해하네. 외소림의 이름은 더 이상 강호에 존재하지 않지. 내 이리 말해주는 건 함께 싸우면서 사문의 무학을 펼칠 수도 있기 때문일세.”

어떻게 보면 소림, 무당, 아미의 세 구파가 힘을 합친 상황.

여기에 한 사람이 더 합류했다.

“제가 가장 늦게 왔군요?”

단아한 이목구비를 지닌 녹색궁장의 미인이 야차마곤의 뒤를 이어 안에 들어왔다.

“당 시주?”

“오랜만이에요, 혜심 스님. 잘 지내셨나요?”

온화한 미소를 지은 당묘정이 자기 소개를 하며 장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예를 표했다.

야차마곤이 껄껄 웃었다.

“구파 셋에 팔가인 당문까지. 가히 작은 무림맹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구성이 아닌가!”

“아직 합류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음? 하지만 초대장은....”

“싸움이 나면 바깥에서 호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은 먼저 한중에 갔습니다.”

“그렇군. 안쪽에서 흔들고 바깥에서 들이치는 전술인가.”

“당문도 힘을 보탤 거예요.”

이미 당문의 정예 타격대 이백 명이 정체를 숨긴 채 한중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묘정만 일행에 합류하기 위해 홀로 중경에 온 것.

일행의 말문이 일순간 막혔다.

“당문의 정예 이백 명이라....”

“절대독지가 되겠군요.”

“네, 혹시 모르니 여러분께는 피독주를 드릴게요.”

강엽은 이미 최상급의 피독주를 갖고 있었고, 백서희는 이전에 당문이 보낸 불침단을 복용했다.

세 사람이 당묘정이 건넨 피독주를 받자 강엽이 말했다.

“숙정방의 전력은 일흔 명이오.”

“걱정 마세요. 피독주는 넉넉하게 챙겨왔거든요. 상황이 발생하면 그분들께도 지급할 거예요.”

강엽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당묘정이 물었다.

“알아보니 암시장의 지리는 미궁처럼 복잡해서 현지인들도 길을 헷갈린다고 하던데요. 저희끼리 가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길잡이를 고용했소.”

하오문주를 통해서 구한 길잡이.

암시장에 들어가면 길잡이와 접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 * *

가릉강을 통해서 광원으로 간 일행은 그때부턴 대파산의 산길을 넘나들며 섬서성의 경내로 접어들었다.

‘그나마 겨울이라서 망정이지.’

구름이 치덕치덕 낀 음울한 하늘.

백주였지만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지 않은 탓에 두꺼운 털옷으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꺼운 털옷을 뒤집어쓴 강엽의 모습에 야차마곤이 의외라는 기색을 내비쳤다.

“추위를 많이 타는구만. 자네 정도면 한서불침(寒暑不侵)은 진작에 이뤘을 것 같은데.”

두꺼운 털옷을 입고도 끙끙 앓는 것을 추위 탓이라고 여기는 걸까.

“...버틸 만합니다.”

햇볕에 약하다고 의심받는 것보다는 추위에 약하다고 의심받는 게 차라리 낫다.

그렇게 험준한 산길을 힘겹게 통과해서 한중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보름이 되기 전날 밤이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항우와 대적하기 위해 힘을 길렀던 곳이자, 삼국지의 조조가 계륵이라 일컬었던 한중.

밤이 되어 생기를 되찾은 강엽은 객잔의 창가에 기대서 만월에 가까워진 달을 힐끗 올려다봤다.

흡혈귀는 밤에 가장 큰 영향을 받지만, 음기를 주관하는 달의 주기에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저렇듯 달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는 만월이 되면 음기 역시 최고조에 이르는 형국.

감각뿐 아니라 진조의 영성도 여느 때보다 민감했다.

‘저기에 있다.’

오래된 고택들이 지평선처럼 늘어선 한중의 전경.

녹아내릴 것 같은 달빛 아래에서 진조의 영성이 속삭인다.

이 광활한 고도의 깊숙한 곳에 널 위협할 적수가 있노라고.

‘혈교.’

당묘정의 우려가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 고도의 고아한 정경 뒤에 가려진 음지. 피비린내와도 비슷한 예감이 코끝을 스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강엽.”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백서희가 배시시 웃으며 나타났다.

“변신할 시간이야.”

“변장이겠지.”

“아무렴 어때. 근데 뭐로 변할지는 생각해봤어?”

강엽의 고개가 삐뚜름하게 기울어졌다.

“간단한 변장이라며?”

요컨대 귀영이라는 티만 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인상만 좀 바꾸면 충분하지 않은가?

“아니, 그래도 우리가 일행인데 수상한 티를 안 내려면 그럴듯하게 꾸며야지. 우리끼리 상의를 해봤는데 당묘정이 부잣집 영애를 연기하기로 했거든? 나랑 소창후는 시비가 되고. 청수 도장과 야차마곤은 호위무사로 변장할 거야.”

“그럼 나도 호위무사....”

“기왕 하는 김에 여장은 어때?”

“뭐?”

순간 강엽은 자기가 잘못 들었나 생각했지만, 백서희는 이미 들어와서 치맛자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넌 얼굴도 괜찮고 몸도 호리호리해서. 여장해도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해.”

“....”

상상하지도 못한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생사대적을 마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위기감이었다.

어쩌면 진조의 영성이 경고했던 자신을 위협할 적수는 바로 백서희가 아닐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농담이겠지?”

“후후, 잘 생각해봐. 여자로 꾸미면 아무도 널 귀영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거야. 진신무공을 펼쳐도 말이지. 누가 어여쁜 여자를 귀영이라고 생각하겠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광기 어린 웃음을 띤 백서희가 다가오자 강엽은 흠칫해서 뒤로 주춤거렸다.

자연스레 여장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는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혀를 깨물고 싶은 수치심이 솟구쳤다.

본능적으로 창문을 돌아봤지만, 육 척에 이르는 건장한 사내가 탈출을 도모하기엔 택도 없는 크기.

그 사이 훌쩍 다가와서 강엽을 침상에 쓰러트린 백서희가 그 위에 올라왔다. 사냥감을 노리는 구미호처럼 요염하게 입술을 핥는 그녀였다.

“흐흥, 우리 엽 가가 긴장했나 보네?”

실로 고혹적인 얼굴이었지만, 묘한 압도감을 느낀 강엽은 목울대를 꿀꺽 움직였다.

“잠깐, 이럴 때가 아니야.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있는데....”

“정말로? 그런 것치고는 반항도 안 하는데... 실은 즐기는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너무 긴장한 것 같아서 풀어주려고 장난 좀 쳐봤어.”

“이게 진짜....”

강엽은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자신의 위에 쓰러져서 깔깔거리는 백서희를 잡고 단숨에 위치를 바꾸자 그녀가 꺅 하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여장이 잘 어울릴 거라고? 혼쭐이 나봐야 그런 소리 안 나오지.”

“어떻게 혼쭐을 내주게?”

“몰라서 물어?”

그렇게 두 사람이 침상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찰나 바깥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당묘정의 얼굴이 문 틈으로 살짝 들어왔다.

“두 분, 아직도 안 끝났....”

별 생각없이 고개를 들이밀었던 당묘정은 반쯤 흐트러진 두 사람을 보고 얼어붙었다.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그녀가 재빨리 문을 닫았다.

“...조,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니, 오해야! 오해라고, 당 소저!”

바로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당묘정은 문을 닫고 도망친 상황.

백서희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너무 장난이 심했나 봐.”

“...여장은 안 한다.”

“응. 나도 실제로 시킬 생각은 없었어. 들키면 쪽팔린 건 둘째치고 운신도 여의치 않잖아.”

결국 강엽이 맡은 역할은 당묘정의 정혼자 노릇을 하는 공자였다. 호위무사를 하지 못한 것은 이런 암시장에 젊은 소저만 오는 건 의심을 살 소지가 있었기 때문.

그렇지만 철없는 공자가 정혼녀를 데리고 온 거라면 말은 된다.

백서희가 입술을 삐죽였지만, 야차마곤은 나이 때문에 안 되고, 청수는 인상은 둘째치고 연기를 전혀 못했기 때문에 강엽이 낙점된 것이다.

이튿날 만난 단목정에게 자성검과 용린투를 맡기고, 보석으로 치장한 검과 섭선을 챙긴 강엽은 그렇게 삼류무가의 망나니 공자가 되었다.

* * *

“잘 부탁하오.”

“아, 네. 잘 부탁드려요.”

전날 있었던 사건 때문인지 민망해하는 당묘정이었다.

두 사람이 특별한 사이라는 것은 여자의 감으로 눈치챘지만, 하필 자기가 들어갔을 때 그런 광경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나마 거사 직전에 들어간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서 더 나아갔다면 말도 섞지 못했을 것이다.

강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일은 사과하겠소.”

“아뇨, 아뇨. 함부로 들어간 제 잘못이죠.”

따지고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닌 두 사람이 이런 주제로 계속 갑론을박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었다.

당묘정이 마차에 오르고, 시비로 변장한 백서희와 소창후가 뒤를 이었다. 강엽은 무가의 공자답게 푸른 비단으로 짠 장삼을 입고 말을 탔다. 청수와 야차마곤은 호위무사로 변장해서 마차의 좌우에 시립했다.

그렇게 공자와 정혼녀, 그들을 호종하는 사람들로 분한 일행은 암시장의 입구로 향했다.

암시장이라고 해서 으슥한 뒷골목에 있진 않았다. 오히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의심하지도 못할 곳에 버젓이 자릴 잡고 있었다.

“표국이 암시장의 입구라니.”

야차마곤이 세상 말세라면서 한탄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반대쪽에 있던 청수와 마차 안에 있던 여인들도 내심 동의했다.

강엽만 생각이 달랐다.

‘머리를 잘 썼지.’

사람들이 먼 곳에 표물을 보내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 표국이다. 신분이나 소속을 떠나서 누가 표국을 찾아오든 수상쩍게 여길 건덕지가 없었다.

한편 꽤나 귀해 보이는 마차의 등장에 표국의 대문을 지키는 보표들은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평범한 보표들이 아니다. 암시장으로 가는 손님들을 판별하는 문지기들.

강엽이 거만하게 턱짓을 하자 청수가 나섰다.

“초대장을 받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비단으로 감싼 종이를 내밀자 문지기들이 진위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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