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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179화 (179/450)

32화. 잠입 (4)

크르르르릉...!

낮게 울면서 내지른 일격.

사휘간의 늑대가 몸을 둥글게 회전시키면서 휘두른 꼬리가 날카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 순간, 강엽은 바람 속에 숨겨진 경파를 느끼고 철판교의 수법으로 허리를 틀었다.

거의 무릎까지 직각으로 꺾자 그 위로 경파의 칼날이 대기를 가르면서 지나간다.

쐐애애애애액!

궤적에 걸린 나무들은 물론 연못을 장식한 기암괴석들까지 일격에 잘라내는 절삭력.

다른 늑대들과는 격이 달랐다.

‘늑대가 무공을 익혔다고?’

흡혈귀인 자신이 할 생각은 아니지만 듣도 보도 못한 괴사.

느긋하게 고민할 시간 따윈 없었다.

꽈아아앙!

거대한 앞발이 그가 있던 자리를 덮쳤기 때문.

이미 그전에 삼 장 뒤로 피했지만, 무인의 진각마냥 지면이 흔들리는 위력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덩치만 큰 게 아니었군.”

“반은 영물인 녀석이지. 어지간한 절정고수도 이 녀석 앞에선 필승을 장담하지 못할 거다.”

어느새 늑대 옆에 온 사휘간이 이죽거렸다.

“이 또한 본림의 비술이다. 중원의 무인들은 일신의 무공에만 집중하지만, 우리는 달라.”

애랑의 털을 자랑스럽게 쓰다듬는다.

초음으로 늑대를 살펴본 강엽은 심장 어림에 단전처럼 동그란 구슬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어떻게 경파를 쓰나 했더니만....”

사휘간의 말대로라면 맹월림엔 짐승의 몸에 내단을 만드는 비술이 존재하는 것이리라.

놈이 탄 늑대만 특별한 걸 보면 비술을 쓰는 게 까다로운 것 같지만, 그렇다 해도 놀라운 일.

사휘간 자신의 무력도 상당한데, 늑대와 연수합격을 펼치면 적의 입장에선 몹시 부담스러울 수밖에.

기실 이대일이나 다름없는 싸움이었지만 강엽은 개의치 않았다.

“뭐,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이라면 나도 있어서.”

강엽의 뒤에서 몸을 일으킨 혈목이 독사처럼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늑대를 노려본다.

사휘간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누가 더 뛰어난지 알려줘라, 설랑(雪狼).”

아우우우우우!

길게 울음을 토한 늑대가 달려들고, 혈목이 그런 늑대의 사지를 붙잡기 위해 앞으로 쏘아졌다.

늑대가 앞발을 휘둘러 혈목 다발을 갈가리 찢어발겼지만 혈목은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임을 가져간다.

뜯고 베어져도 그보다 몇 배나 많은 줄기들이 사방에서 늑대를 막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그 싸움을 잠시 힐끔거린 강엽을 향해 사휘간이 기습처럼 쇄도하며 일도를 내질렀다.

“하아압!”

실핏줄이 올라온 눈동자.

강엽은 아까처럼 호신강기를 둘렀지만, 사휘간의 도격에 실린 공력은 이전과는 격이 달랐다.

콰아아아아앙......!

호신강기에 균열을 내는 위력.

안쪽에서 충격을 받은 강엽이 미간을 좁히자 사휘간이 더더욱 기세를 끌어올리며 밀어붙였다.

“그아아아아아아!”

반탄력을 이용해서 더 강하게 내지른 참격을 맞은 호산강기의 일부가 이지러졌다.

사휘간의 들숨을 타고 흘러나오는 익숙한 혈향.

살짝 붉은기가 도는 피부 위로 뿜어내는 강인한 공력 파동이 호신강기를 밀어냈다.

“혈라분을 복용했나?”

“죽엇!”

놀랍게도 맹월림의 전사이면서 사휘간은 혈라분을 복용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부작용을 염려하는 듯 소량을 복용했으나, 도격에 실린 힘의 격이 달라진 건 사실.

쩌저저적! 쩌저저저적...!

호신강기의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중단전을 개방한 고수가 혈라분을 복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강엽은 호신강기를 짓누르는 사휘간의 도격에서 태산 같은 무거움을 느꼈다.

공력을 분출하지 않고 칼날 안에 가두고 있었지만, 위력만 보면 강기라고 해도 무방했다.

“혈교와 편을 먹었다더니 혈라분까지 받았나?”

“크흐!”

광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호신강기를 몰아붙인다. 제삼자가 보면 강엽이 호신강기에 의존해서 힘겹게 버티는 모양새였다.

결국 호신강기가 깨졌다. 하지만 사휘간이 깬 게 아니라 강엽이 안쪽에서 터뜨린 것이다.

아까와 같은 양상이었지만 결과는 사뭇 달랐다.

사휘간의 신형이 촛불이 꺼지듯 훅 사라졌다.

강엽은 좌측 배후, 스스로의 기준에서 곤괘(坤卦)의 방향에서 날아오는 적의를 감지했다.

카아아앙-!

자색 검날이 도의 칼날을 튕겨냈다. 천근추의 수법으로 무게중심을 낮춘 채 역습을 전개한다.

우렛소리를 동반한 붉은 벼락이 사휘간의 완맥을 향해 내달렸다. 우렛소리를 인식한 것은 벼락이 완맥을 강타하고도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완맥을 강타하는 힘을 우격다짐으로 버텨냈다. 혈라분의 공능이 호신기를 보조한 것이다.

초음으로 관찰한 놈의 체내에선 정과 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건....’

강엽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사휘간의 양 단전을 잡아먹은 혈라분의 기운이 독맥을 따라 미추골(尾椎骨) 아래에서부터 정수리의 백회까지 일직선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아주 미약한, 마치 실낱 같은 기운이 상단전과 이어지고 있었다.

‘정기신이 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작 비약 하나 먹었다고 삼화취정을 이루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상단전을 조금이나마 자극하는 데는 성공했던 걸까.

‘그렇군. 중단전을 개방한 고수가 혈라분을 복용하면 이런 효과가 나타나나?’

과거 하후진이 혈라분을 복용한 교령을 상대했을 때 강엽은 그 자리에 없었다.

중단전을 개방한 고수가 혈라분을 복용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이제야 관찰하는 셈이었다.

혈라분을 복용한 혈령교위가 한시적으로나마 절정고수에 버금갈 만큼 강해졌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변화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군.”

“뭣이?”

이해되지 않는 말에 사휘간의 미간이 꿈틀거렸지만, 강엽은 말없이 검격을 내치면서 그를 튕겨냈다.

혈라분의 공능으로 사휘간의 육신은 흡혈귀와 비견될 만큼 강건해졌다. 하지만 진짜 흡혈귀와 비교하면 여전히 손색이 있었다.

“네가 쥐꼬리만큼 삼화취정에 가까워진 덕분에 내 실험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하!”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린 사휘간이 악귀처럼 낯짝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설랑, 그딴 나무쪼가리한테 언제까지 묶일 거냐!”

그러면서 강엽의 정면을 향해 뛰어들었다.

잠시 강엽의 주의를 끌기 위한 속임수가 아니었다.

콰직!

산산조각 박살난 혈목 다발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바람처럼 강엽의 등 뒤로 달려왔으니까.

혈라분을 복용한 고수와 사나운 영물의 합공.

하지만 두 인수의 합공이 꿰뚫은 것은 강엽이 암신으로 남겨둔 허상이었다. 아가리에 깨물린 허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지자 늑대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입술을 둥글게 말았다.

-휘이이이익!

깨갱!

고막을 때리는 망혼소의 음파.

늑대가 몸을 돌리다 말고 땅을 뒹굴자 사휘간이 노성을 토해내며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어디서 같잖은 수작을...!”

혈라분을 복용했을 때부터 그는 강엽의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었다. 늑대와 달리 허상에 속지 않고 강엽을 향해 일도양단의 도격을 내리쳤다.

강엽을 감싸듯 앞길을 막은 혈목의 울타리를 뚫고 강엽의 정수리를 쪼개간다.

그러나,

쾅!

“컥.”

아무 전조도 없이 닥친 충격이 턱주가리를 후려친다.

일격필살의 일권은 아니었으나 골통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일순 머릿속이 새하얗게 마비되는 충격.

사휘간의 눈이 흔들렸다.

“격...공?”

그는 격공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그가 상관으로 모시는 천인장과 대련했을 때. 격공을 많이 겪어봐야 기감이 발달한다면서 신나게 두들겨맞았다.

‘설마 이놈이 삼화취정에 올랐단 말인가?’

호신강기에 격공권. 삼화취정의 고수들이나 쓸 법한 기예를 두 가지나 목도했다.

그렇게 잠시 이성이 경직된 틈을 타서 혈목이 발목을 옥죄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든 사휘간이 도를 휘둘러 혈목 다발을 잘라냈다.

“방해하지 마라, 이 잡것들아!”

“이젠 그럴 일 없다.”

잠시 혈목에게 호위를 맡긴 강엽이 옅은 들숨과 함께 전면에 나섰다.

“방금 전에 막 끝냈거든.”

“무슨 엉뚱한 소릴....”

사휘간은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강엽의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핏물이 눈길을 빼앗았다.

병장기를 맞댄 순간 손아귀가 찢어졌던 걸까?

‘아니야.’

사휘간은 강엽의 힘이 자신을 웃돌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묵직한 공방이 오간 것은 맞으나, 자신조차 버틴 힘싸움에서 강엽이 손해를 봤을 리는 만무했다.

‘놈이, 제 손에 일부러 상처를 낸 거다.’

대체 왜?

의문을 토할 새도 없이 강엽이 뛰어들었다.

뛰어드는 속도에 맞춰서 도격을 휘둘렀다.

한 번으로 끝내는 일격이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연환식. 신들린 듯한 만도의 칼춤사위가 강엽의 전신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다가왔다.

단 하나도 맞히지 못했다. 도풍 때문에 살갗이 베이긴 했어도 생채기에 불과했다.

물흐르듯 이어지는 유연한 보법.

태극의 심상을 담아 팔괘의 방위를 밟는다. 발뿐만 아니라 몸까지 물극필반의 이치를 따랐다.

사휘간이 내뿜은 공력 파동을 역이용해서 회피할 수 있는 양분으로 삼은 것.

단전의 공력을 바닥까지 긁어도 소용없었다. 애초부터 공력이나 속도의 차이가 아니었다.

“도법에 비하면 경신법은 빈약하군.”

“...!”

“무리도 아니지. 평소엔 저 늑대랑 함께 싸웠을 테니까. 다른 기랑병들처럼 늑대 위에서 싸웠다면 경신법 수련에 소홀했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닥쳐라!”

“하지만 그 때문에 죽는 거다.”

강엽의 움직임이 일변했다.

버들처럼 낭창낭창했던 보법이 급가속했다. 초와 식을 이루는 구분동작이 전혀 다른 속도와 박자를 가져가면서 필살의 도초를 흘려보낸다.

단숨에 간합을 파고들어, 피로 점철된 손으로 일권을 말아쥐었다.

“......!”

은은한 경악을 품으면서도 사휘간은 칼날을 당겨서 강엽을 베려고 했다. 수천, 수만 번을 수련하면서 몸에 새겨진 습관이 구명절초를 준비했다.

그러나 강엽이 한 수 더 빨랐다.

콰직!

호신기를 뚫고 박히는 일권.

완전히 관통하지는 못했다. 호신기를 박살낸 반동으로 위력이 줄어든 탓이었다.

“크허억...!”

늑골이 부러진 격통에 사휘간의 이마 위로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한 됫박이나 되는 피까지 뿜어냈다.

“이대로 죽이는 건 쉽겠지.”

여기까지 온 이상 죽은 목숨이나 매한가지.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사휘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삼화취정의 고수를 죽이기 위해 준비한 수가 통하는지 알아보는 것.

사휘간이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기에 완벽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실패한다면 삼화취정의 고수에게도 통하지 않겠지.

자신의 피를 묻힌 혈수를 꽂아넣은 그대로 준비한 수를 전개했다.

-혈독(血毒).

상대의 피를 이용하는 혈독의 술법.

본래라면 자신에게 술법이 돌아와야겠지만, 대상을 지정하지 않고 피만 혈독으로 만들었다.

호신기를 뚫고 접촉한 상태에서 혈공진진기를 끌어올렸다. 비복근에서 올라온 회전력이 가미된 발경 일권.

혈공진기와 혈독, 진기와 술법이 하나로 합쳐진 암경이 사휘간의 체내를 내부에서부터 파괴한다.

언젠가 낭왕이 말했던 무공과 술법의 혼용. 그날 들었던 말을 잊지 않고 결국 완성한 것이다.

“크억! 커헉...!”

무릎을 꿇은 사휘간의 칠공에서 피가 쏟아졌다. 만도가 주인의 손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굴러다녔다.

‘시작됐군.’

강엽은 사휘간을 건드리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관찰했다.

혈공진기와 합일한 혈독이 사휘간의 경맥을 갉아먹으면서 놈의 하단전과 중단전까지 파괴하고 있었다.

혈라분의 기운이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끄어어어....!”

중단전과 하단전이 부서지면서 정과 기의 합일이 끊기고, 미미하게 이어졌던 상단전까지 침몰했으니까.

삼화취정을 이루는 연결을 근간부터 파괴하는 수법.

-혈공독수(血功毒手).

강엽은 피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사휘간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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