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67화 (167/450)
  • 29화. 귀환 (2)

    “사백, 마을에서 연기가...!”

    “으음!”

    짙은 청색 도복을 입은 도사들이 마을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며 신음했다.

    밥 짓는 연기와 타는 연기는 색부터 다르다.

    저건 명백히 후자였다.

    “설마 저 마을도 혈귀들에게....”

    “확인해봐야겠지.”

    그들은 단순한 도사가 아니었다. 전원이 검을 패용하거나 권장에 굳은살이 박힌 무인들.

    무리를 인솔하는 중년 도사가 뒤를 돌아봤다.

    “준비는 됐는가, 청수 도장?”

    “물론입니다.”

    상투를 튼 청년이 대답했다. 다른 도사들과 달리 새하얀 도복을 나부끼는 젊은 도사였다.

    그 역시 허리춤에 고동(古銅)에 태극의 문양이 새겨진 송문고검을 패용하고 있었다.

    “한데 사백, 흔적을 보면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습니다. 어쩌면 혈귀놈들이 마을 사람들을 이미 납치한 게....”

    “일단은 가자꾸나. 설령 늦었더라도 놈들을 따라잡으려면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마을로 접근한 도사들은 다수의 인기척을 헤아리고는 본능적으로 검파로 손을 가져갔다.

    가까이 갈수록 도사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마을 곳곳에 핏자국을 포함해서 싸움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멀쩡했던 것이다.

    ‘아니, 멀쩡한 건 아니군.’

    곳곳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이들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옮겨지고 있었다.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뉘, 뉘십니까?”

    무림인들의 출현에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질려 얼어붙었다.

    차림새만 봐도 도사임을 알 수 있었지만, 무림인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마을 사람들에겐 검을 패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중년 도사가 도호를 읊조리며 나섰다.

    “원시천존, 마을의 비극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저흰 도강언의 청성산에서 온 도사들이온데....”

    “허억!”

    구파 중 하나인 청성파.

    사천에선 무림과 연이 없는 양민들조차 신선처럼 추앙하며 깊이 존경하는 도가 문파였다.

    “어이쿠, 청성의 신선님들이셨군요! 소, 송구합니다! 마을이 큰일을 겪어서 그만...!”

    “경황에 찾아와서 저희가 송구하지요. 혹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그게....”

    눈치를 본 마을 장정이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말주변이 좋지 않았지만, 중년 도사는 중간중간 질문을 던져서 듣고 싶은 답변을 유도했다.

    그때 청수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마을을 구한 사람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왜 그러시는가?”

    중년 도사가 의아해했다.

    “아무래도 제가 아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흑포를 입은 장신의 청년과 쌍검을 쓰는 아름다운 여인.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같이 모아놓고 보면....

    ‘청년은 강 도우 같은데... 쌍검을 쓰는 여인은 흑접의 그 살수인가?’

    흑접의 멸문 이후 백서희를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왠지 그녀일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청수가 물었다.

    “두 사람은 어디로 갔습니까?”

    * * *

    두 사람은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원래는 갈 길이 바빠서 바로 떠나려고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은인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면서 하룻밤이라도 머물러주길 간청한 것이다.

    청수가 청성파의 중년 도사와 함께 찾아갔을 때는 강엽 홀로 촌장의 집에 있었다.

    백서희는 볼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그럭저럭 잘 지냈지. 다섯 달 만에 보는 건가?”

    “하하, 거의 그쯤 된 것 같습니다.”

    청수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흑접 토벌 이후였다.

    하후진과 셋이서 모여 가볍게 대련하고 그날 밤에 진탕 술을 마신 뒤에 헤어졌다.

    “하후진에게 얘기 들었다. 청성파에 갔다면서?”

    “예, 그렇게 됐습니다.”

    “성취가 있었나 보군.”

    하후진이 그랬듯 청수 역시 중단전을 개방했다.

    심지어 형태를 잡아가고 있는 게, 개방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심상을 빚어낸 듯했다.

    청수의 눈이 반짝였다.

    “...알아보셨군요.”

    “기도가 변했으니까.”

    초음에 대해 밝힐 순 없었기에 에둘러 대답했다.

    “나름대로 숨겼는데도 알아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강 도우도 역시....”

    청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엽 본인이 중단전을 개방하지 않고서 어찌 다른 사람의 성취를 가늠하겠는가?

    “계속 사천에 있을 건가?”

    “예, 시국이 몹시 어지러우니... 일신의 수련만 고집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긴 어딜 가나 마교가 미쳐 날뛰고 있으니까.”

    강엽은 그쯤 말하고 청수가 데려온 중년 도사를 향해서 시선을 던졌다. 마음 같아선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고 싶었지만 그의 존재가 걸렸다.

    청수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멋쩍게 웃었다.

    “이분은 청성파의 적운 도장이십니다. 세간에선 서하무량검(瑞霞無量劍)이라 불리시죠.”

    강엽도 들어본 적 있는 별호였다.

    청성파 장문인의 의발전인.

    ‘아미파의 난풍혜검과 비견된다더니....’

    중단전의 형태가 상당히 뚜렷했다.

    무공만으로 싸운다면 강엽도 십 할의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고수. 심지어 술법을 써도 무조건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원시천존, 적운이라 하네.”

    “강엽입니다. 도장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허명일 뿐이지. 강 도우야말로 흑접을 토벌해서 사천 무림의 오랜 근심을 털지 않았는가? 귀주에선 단혼마백을 비롯한 혈교의 무리를 쓰러트리고 수많은 무림 동도들을 구했다고 들었네.”

    “그 소문이 청성산까지 들어갔군요.”

    “어디 청성산뿐이겠나. 이미 사천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지.”

    시일이 꽤 지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천지 사방에서 혈교도들이 날뛰고 있는 탓이었다.

    혈교를 증오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강엽의 활약에 대한 소문이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었던 것.

    청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그 때문에 하후 도우가 꽤 고생한 걸로 압니다. 강 도우와 숙정방이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혈귀들이 숙정방에 몰려갔다고 하더군요.”

    “으음!”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조금 더 서둘렀어야 했나?’

    하지만 그래봤자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낭왕에게 가르침을 받는 기간을 줄일 수도 없었던 노릇.

    “...피해는?”

    “다행히 숙정방은 무사합니다. 저도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하후 도우가 모두 내쫓았다고 하더군요. 그를 도운 신비 고수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홍예칠위를 말함이었다.

    강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씌웠는데, 덕분에 정체 모를 신비고수들로 소문이 퍼졌다.

    강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줄초상을 치를 뻔했군.’

    결과적으로는 하후진과 홍예칠위를 숙정방에 머무르도록 한 게 신의 한 수가 됐다.

    * * *

    백서희가 돌아온 건 세 사람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흘러갈 무렵이었다.

    낮에 움직이지 못하는 강엽 대신에 마을 사람들을 도왔던 것이다.

    사실 그녀가 한 일은 혈교도들의 시체를 치우거나 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가까운 도랑을 찾아서 물고기와 가재를 잡은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에겐 굉장히 큰 힘이 되었다.

    세상을 떠난 가족과 이웃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데, 어찌 원수의 시신을 치우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데 심력을 쓸 수 있겠는가?

    아이들과 함께 돌아온 백서희는 마을 사람들을 돕는 청성의 도사들을 발견하고 얼떨떨해졌다.

    그리고 방에 돌아와서 청수와 적운 도장을 봤을 땐 깜짝 놀랐다.

    “무당 도사가 왜 여기서 나와?”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만....”

    청수도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했다.

    강엽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 그녀일 거라 추측은 했었지만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던 것.

    적운 도장이 물었다.

    “소저는 뉘신가?”

    “제 동료입니다.”

    적운 도장은 백서희가 흑접 출신임을 모른다. 괜히 부스럼을 긁을 필요는 없으리라.

    청수도 말을 삼갔기에 적운 도장은 그런가 보다 하며 백서희와 통성명을 나누었다.

    백서희가 붉은 가루가 들어있는 병을 건넸다.

    “혈귀놈들 품에 있던 거야.”

    엄지손가락만한 호리병이 우수수 쏟아졌다.

    마을 사람들이 건드릴까 봐 따로 모아둔 것이다.

    비약이 든 호리병을 본 청수와 적운 도장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걸 안 가진 혈귀들이 없군요.”

    “답답한 노릇일세. 하루 빨리 놈들의 본거지를 찾아내서 뿌리를 뽑아야 하거늘.”

    두 사람이 한탄하자 강엽이 관심을 보였다.

    “역시 본거지는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하오문주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사천에서 혈교도들이 날뛰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본거지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적운 도장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출귀몰한 놈들이네.”

    “그들을 잡으려고 해보긴 했습니다.”

    청수가 말을 보탰다.

    “혈귀들을 잡아다 문초하기도 했고, 놈들의 뒤를 몰래 미행하기도 했죠. 실제로 성과를 보기도 했고요. 그들이 작업장이라고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인신공양의 술법으로 희생시키고, 피와 약재를 섞어 비약을 만들었던 악의 소굴.

    “지금까지 세 군데를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청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실제로는 더 많겠지.”

    “예, 저희가 찾아낸 곳들의 규모로는 사천 전역에 비약을 뿌릴 수가 없었습니다.”

    비약 생산에 차질이 없으려면 한 군데에서 모두 만드는 것이 좋겠지만, 사람의 피를 쥐어짜내야 하는 이상 어떻게든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만들 수 있는 비약이 어느 정도나 될까?”

    “...?”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청수와 적운 도장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강엽이 계속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사천 전역에 비약을 뿌리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하겠지. 비약은 소모품이니 계속 만들어야 할 테고.”

    “그래서 혈귀들이 사방팔방 들쑤시며 양민들을 납치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저항에 부딪쳤지요. 당장 청성파가 하산하지 않았습니까? 청성파가 나섰으니 아미파를 비롯해서 다른 문파들도 나섰을 것 같습니다만.”

    “강 도우의 말대로 아미파도 산문을 나섰네.”

    “당문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혈교도 이 사태를 예상했을 겁니다. 약을 뿌리면 사천의 무림 문파들이 나설 거라고 말입니다. 놈들의 입장에서 보면 재료 수급에 차질을 빚는 셈입니다.”

    “그럼 강 도우의 말은?”

    “좀 전에 적운 도장께서 말씀하셨듯 놈들의 본거지는 따로 있을 겁니다. 거기서 비약을 대량으로 만들겠지요. 굳이 작업장을 여러 곳에 둔 건 부족한 분량을 보충하고, 시선을 끌기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대도강(李代桃僵)...!”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강엽의 말대로라면 혈교는 사천 무림이 자신들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일부 교도들을 미끼로 던져주며 본거지를 숨겼다는 말이 된다.

    “얼마 전에 정보를 하나 들었습니다. 비약을 뿌리는 큰손이 한중의 암시장에 있다고요. 그럼 그자는 본거지에 끈이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 세력이 얽혀있는 한중의 암시장.

    강엽이 청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마침 나한테 암시장에 들어갈 수 있는 초대장이 몇 장 있는데. 같이 갈 생각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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