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68화 (168/450)

29화. 귀환 (3)

중경에 돌아온 것은 마을을 떠난 뒤 대략 아흐레가 지나서였다.

이젠 장경을 만나서 초대장을 받을 차례.

“저, 강엽.”

포구에 내릴 때쯤 백서희가 어색한 미소로 양해를 구했다.

“난 잠깐 어디 좀 갔다 올게.”

“혼자서?”

목적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중경이 가까워질수록 고민하는 기색이 짙게 묻어났으니까.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으응. 아니야. 이건 내가 풀어야 할 매듭이라고 생각해. 너랑 같이 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그녀는 강엽의 품에 안긴 채 온기를 나누었다.

턱끝에 닿은 머릿결에서 은은한 울금향이 난다.

“이제 와서 사과하는 건 너무 뻔뻔하겠지?”

흑접으로 인해 그녀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미는 세상을 떠났고, 그녀 자신은 흑접의 살수로서 길러졌다.

하나 그녀 또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였다.

“하오문주님의 말씀이 맞아. 난 홍가려에게 사과해야 해. 피해를 입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록 홍가려를 죽이진 못했지만 그녀를 지켰던 낭인들과 보표들은 목숨을 잃었다.

그녀 자신만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사과해도 용서받지 못할지도 몰라. 아니, 용서받지 못하겠지. 그래도 영영 모른 척할 수는 없어.”

그녀가 강엽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조금만 기다려 줘.”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응.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그녀가 뒷꿈치를 들었다.

짧은 입맞춤 뒤에 엷은 미소를 남기며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그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 강엽은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중경의 불야성이 그를 반긴다.

거의 매일밤 거닐었던 골목길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빈자리가 그만큼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관계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건만.

그렇게 쓴웃음을 흘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풍경 앞에 다다랐다.

“.......”

입구를 가린 주렴을 헤치고 들어가자 소란스러웠던 객잔이 침묵 속에 잠긴다.

유일하게 목소리른 내는 것은 오랜만에 단골 손님을 맞아들이는 대머리 주인장뿐.

“여, 이게 누구야? 하도 안 와서 얼굴 까먹는 줄 알았네.”

* * *

장경이 술병을 떡하니 내놓았다.

독하디 독한 백주였다.

“낭인전 사상 최연소, 최단 기간 금패에 오른 신성이자 우리 분타의 ‘유이’한 금패를 위해 이 형님이 기꺼이 최상급 모태주(茅台酒)를 내놨다. 영광으로 알아.”

“...유이?”

유일이 아니라?

대충 그런 눈빛으로 보자 장경이 음침하게 낄낄거렸다.

“누구 덕분에 두 명이 됐지. 귀양 분타주는 피눈물 좀 흘렸을 거야.”

“이거 그 사람이 갖고 온 건가?”

“선물이라면서 주더라고.”

그럼 그렇지. 모태주라면 귀주성의 명주인데 장경이 발품을 팔면서까지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야차마곤은 괜찮나?”

“한동안 고생했지. 그래도 타고난 강골이기도 하고, 다섯 달이나 지났으니까. 지금은 소일거리 삼아 단기 의뢰들만 맡고 있어. 그리고....”

“남은 건 본인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강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람한 근육질의 거한들이 주렴을 헤치며 들어왔다.

전강과 야차마곤. 둘 다 날숨에서 진한 술냄새가 풍기는 게 주루라도 갔다 온 듯했다.

“강 무사.”

“무탈해서 다행입니다, 전강.”

“강 무사야말로 무탈해서 다행이오. 전해듣기로 광명마교와 충돌했다고 하던데....”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훗, 그런 것 같구려.”

전강은 강엽이 재생력을 지녔다는 것을 안다. 목숨만 붙어있다면 죽을 일은 없었다.

그때 전강과 함께 온 야차마곤이 눈을 빛냈다.

“강 무사라면... 자네가 그 귀영이로군?”

“그렇....”

“으하하! 생명의 은인이구만! 만나서 반갑네! 자네가 단혼마백 마구니를 죽였다는 말을 들었을 땐 얼마나 통쾌했는지 몰라!”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솥뚜껑처럼 두꺼운 손바닥으로 강엽의 어깨를 두드리는 야차마곤이었다.

평범한 필부라면 그 손에 맞고 엄청난 고통을 느꼈겠지만 강엽은 앉은 자세에서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전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 보통 사람은 그렇게 때리면 아파합니다.”

“으잉? 아, 그렇구만. 근데 이 친구는 보통 사람이 아니지 않나? 몸은 호리호리해도 단단한 게 외공을 익힌 것 같은데.”

강엽도 제법 무인의 태가 났지만, 칠척장신을 큼지막한 근육으로 꽉꽉 채운 야차마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물론 흡혈귀로서 괴력을 지닌 만큼 야차마곤과 힘싸움을 해도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자네도 이젠 금패라면서? 낭인전을 배신한 다른 금패를 척살했다는 얘기도 들었네만.”

“전국에 있는 모든 낭인전 분타에 소식이 쫙 퍼졌어. 네가 신무검 우문극을 쓰러트렸다고 말이야.”

장경이 이죽거리며 첨언했다.

사천과 귀주에선 강엽이 세운 공로가 세간에 회자된 덕분에 강엽이 금패에 오를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나.

강엽이 술잔을 홀짝이면서 피식 웃었다.

“네가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니라?”

“나도 힘 좀 썼지. 하오문의 도움을 빌리기도 했고.”

장경이 슥하고 상체를 낮추더니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이젠 너도 금패가 됐으니 알지?”

“...하오문주?”

장경의 턱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강엽이 눈매를 좁혔다.

“이상하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하오문주가 낭왕의 반려라는 사실은 극소수만 아는 대외비다.

장경이 분타주이긴 해도 그의 직위로는 알 수 없을 텐데?

‘야차마곤이 알려줬나?’

반사적으로 뒤쪽을 힐끔거렸지만 야차마곤은 자기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전주님이랑 인연이 있거든. 우리 아버지 살아계셨을 땐 두 분이 막역한 사이였지. 애초에 내가 낭인전에 들어온 게 전주님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군.”

“뭐, 그래도 전주님 부인이 하오문주라는 것만 알지, 정작 하오문주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알았다면 하오문주가 사원루주의 신분으로 청송객잔을 찾아왔을 때 그렇게 주접을 떨진 않았겠지.

목구멍까지 올라온 속마음을 삼키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요즘 혈교도들이 날뛰고 있다고 하던데. 중경은 어떻지?”

“혈귀들? 중경도 난장판이지. 그래도 이 양반 덕분에 큰 피해는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장경은 야차마곤을 향해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허락도 없이 주방에 들어간 야차마곤이 큼지막한 호리병을 갖고 와서는 병나발을 불고 있었던 것.

그 표정은 야차마곤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트름 때문에 더 안 좋아졌지만, 야차마곤은 뻔뻔하게도 철면피를 쓴 채 오히려 억울해했다.

“거참 째째하구만. 자네들이 마시는 그 곡차(穀茶) 내가 가져왔다는 거 잊었나?”

“그렇게 말하면서 얻어먹은 공짜술이 삼백 병을 돌파했지, 아마? 그 술값을 돈으로 바꾸면 얼마나 되는지 계산 한번 해봅시다, 영감님.”

“...험, 그렇게 많았나?”

물론 금패급 고수인 야차마곤이 벌어다주는 수수료에 비하면 술값은 아무것도 아니다.

잔소리를 퍼부긴 했어도 장경 역시 술값을 받을 생각은 없으니 저리 놔두는 것이겠지.

한바탕 촌극을 벌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강엽이 고개를 휘휘 내젓자 전강이 짧게 웃었다.

“티격태격하긴 해도 둘이 나름 잘 지낸다오. 사형도 중경 생활에 만족하시고 말이오.”

“곡차맛이 좋아서 그런 게야.”

순식간에 독한 백주를 비운 야차마곤이 두 번째 호리병을 열며 추임새를 넣듯 대답했다.

강엽이 장경을 돌아봤다.

“하오문주가 맡긴 게 있을 텐데.”

“아, 그거 말이군. 잠깐만 기다려 봐.”

객잔 장궤에 열쇠를 꽂고 뚜껑을 연 장경이 비단 보퉁이로 감싼 꾸러미를 건넸다.

“세어봤는데 총 다섯 장이더라.”

“다섯 장이라....”

강엽은 이미 한 장을 갖고 있다.

문제는 다섯 장을 누구에게 주느냐는 것.

‘서희랑 청수에게 줘도 세 장이 남는군.’

하후진은 뺐다. 숙정방을 지키기 위해선 하후진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니까.

‘그렇다고 청성파가 올 것 같진 않은데....’

적운 도장은 암시장을 통해 비약을 뿌리는 큰손을 잡아야 한다는 대명제엔 공감하면서도, 당장 혈교로 인해 짓밟히는 민생을 외면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럼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생각해보니 함께 싸우면 천군만마와 같은 삼화취정의 초고수가 바로 앞에 있지 않은가?

“전강, 저랑 같이 일 하나 해볼 생각 없습니까?”

“음?”

“실은 제가 낭왕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낭왕에게 받은 의뢰를 설명했다.

이윽고 강엽이 말을 끝내자 전강이 곤혹스러워했다.

“제안을 해준 건 정말 고맙소. 나도 마음 같아선 강 무사를 돕고 싶은데....”

그러면서 장경의 눈치를 보았다. 장경의 옆을 떠나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이리라.

그때 야차마곤이 호리병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놨다.

“나는 어떤가?”

“사형?”

“크음, 뭐 어떤가. 재활도 끝났는데. 뭣보다 생명의 은인에게 보은할 기회가 아닌가.”

“혈교 때문에 바쁘지 않습니까?”

강엽의 물음에 야차마곤이 이맛살을 구겼다.

“혈귀놈들이야 보는 족족 머리통을 부수지. 문제는 약에 중독된 사람들일세. 마구니 같은 놈들이 약을 뿌리는데 잡아도 자꾸 튀어나오더군.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될 게야.”

적운 도장과는 상반되는 의견.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고, 혈교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어쩌면 이게 혈교가 원하는 것이겠지.’

그들을 적대하는 자들이 한쪽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온 사방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

그렇기에 놈들을 막으려면 놈들의 계획을 역으로 거슬러올라가서 핵심을 찔러야 한다.

술잔에 남은 액체를 목구멍에 털어넣은 강엽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이제 두 장 남았군.”

“두 장이라... 내가 추천해도 되겠나? 마침 적임자가 근처에 있는데.”

야차마곤이 운을 떼자 장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영감님, 설마 그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쪽?”

“너도 잘 아는 사람들이야.”

고개를 기울이는 강엽을 향해 장경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소창후를 포함한 아미파 일행이 중경에 있거든.”

“...소창후?”

사마외도를 증오하는 아미파의 젊은 비구니.

장경의 말에 야차마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의기가 굳센 아이지. 사마외도를 적극적으로 소탕하는 참된 복호승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야차마곤도 사마외도를 마구니라 부르며 지독하게 싫어하는 성품이었다.

‘...둘이 죽은 잘 맞겠군.’

하지만 암시장에 잠입해서 조용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과연 두 사람을 데리고 그럴 수 있을까.

야차마곤 한 명이라면 어떻게든 통제한다고 쳐도, 비슷한 성격의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면 대체 어떤 수라장이 벌어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나 전력면에서는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

“...일단 의사를 묻는 게 먼저겠지.”

청성파가 그랬듯 아미파도 민생 보호를 이유로 거절할지 모른다. 소창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도 있는 거고.

장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근처라고 했었지. 어디 있지?”

“글쎄, 아미파는 잘 모르겠다. 근데 소창후는 우연히 거리에서 봤는데... 사원루로 가던데?”

“...어디?”

“사원루. 홍가려가 아미파에 신세진 적이 있잖냐. 사원루도 요즘은 장원을 보수한다면서 영업을 안 하거든. 아미파의 비구니가 가도 괜찮은 거지. 나도 몰랐는데 소창후가 홍가려와 제법 친분이 있는 것 같더라.”

“이런 젠장.”

어떻게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지?

강엽이 난데없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래?”

“먼저 실례하지. 급한 일이 생겨서.”

“어? 그, 그래. 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돌아와서 자세히 알려달라고.”

강엽은 장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주렴을 헤치고 달려갔다.

* * *

“먼저 찾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불러주셨다면 제가 나갔을 텐데....”

“시절이 하수상하니까요. 홍 시주는 유명하니 혈귀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설마요. 혈교도들이 저 같은 힘없는 아녀자를 뭐하러 노리겠어요?”

“예, 사실 핑계입니다. 홍 시주와 만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부득불 찾아온 거지요.”

소창후가 농담으로 응수하자 홍가려는 쿡쿡 웃으면서 시비를 시켜 다과를 내놨다.

“바깥 소문은 듣고 있어요. 본루를 찾아온 손님들도 그것 때문에 말이 많았죠. 혈귀들이 사람들을 습격하고 다닌다던데 거리엔 이상한 약까지 돌고 있고... 정말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강호 전체가 난세입니다. 사천뿐만 아니라 귀주와 운남도 마찬가지지요.”

“대륙 동쪽에선 광명마교라는 무리가 기승을 부린다면서요?”

“얼마 전에 항주가 함락됐다는군요. 무림맹도 연일 대책을 고심하고 있다는데... 아마 그 때문에 혈교의 일은 좀 뒤로 밀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강호 무림 그 어디에도 평온한 곳은 없었다. 지금은 천하가 난세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하루 빨리 해결돼야 할 텐데.”

“그래야죠.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기....”

갑자기 소창후의 눈매가 좁아졌다. 계인이 찍힌 이마에 골이 패이자 홍가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밤손님이 온 모양입니다.”

“네?”

불과 몇 달 전에 암살 위협을 받았던 홍가려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

옆에 놓인 창대를 잡고 일어난 소창후가 대뜸 창문 너머 나무를 향해 벼락같은 창격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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