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66화 (166/450)

29화. 귀환 (1)

[욕망에 솔직한 놈 같으니.]

천둥처럼 메아리치는 전성.

강엽은 뚱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간만에 만난 진조에게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었다.

딱히 그를 만나고 싶어서 온 건 아니다. 운기조식을 하다 보니 왠지 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온 것이다.

한데 만나자마자 대뜸 혀를 차면서 과연 흡혈귀답게 욕망에 충실한 놈이라고 매도하는 게 아닌가?

“그딴 말이나 하려고 불렀으면 난 돌아가겠다.”

[중요한 말이 남았느니라.]

뒤를 돌았던 몸이 우뚝 멈춰섰다.

[네 녀석은 마음 한구석에 인간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지. 흡혈귀의 굴레를 벗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 말이다. 일가를 이루고, 평범하게 늙어죽는 삶.]

“그게 잘못됐다는 건가?”

[불가능한 욕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태양의 속박에서 벗어나거나, 피를 안 먹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넌 점점 완성되고 있다. 그리고 네가 완성되는 날, 넌 과거의 짐이 그랬듯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 되겠지.]

“.......”

[태양도 굶주림도 너를 해하지 못하리라. 천하제일의 고수조차 널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얌전히 목을 내밀더라도 말이다. 그게 쉬웠다면 짐이 죽으려고 흡혈귀의 운명을 네놈에게 물려주었겠느냐?]

강엽과 대화하는 것은 진조의 잔재일 뿐 본인이 아니다. 진짜 진조는 강엽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면서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평범한 삶을 꿈꾸지 마라?”

[너 자신을 부정하지 말라는 소리다.]

“후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흡혈귀로 만든 장본인에게 이런 소리를 듣다니.

비록 눈앞에 있는 게 진조 본인이 아니라 그 잔재라고 해도, 강엽에게 있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당신 면상이 찌그러지는 꼴을 보고 싶군. 내가 겪은 모든 고통을 되돌려주고 싶어.”

[해볼 수 있으면 해보려무나.]

끌끌 웃으면서 도발을 넘긴 진조가 등받이에 몸을 뉘였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강해져야 할 게다. 그러나 네놈이 짐에게 복수할 만큼 강해진다면, 이미 그땐 진조로서 완성된 뒤일 게야.]

“.......”

[아, 그래. 말해주는 걸 깜빡했구나. 흡혈귀의 명맥이 이어지는 일은 없다.]

“뭐?”

[네놈이 여자를 품고 자식을 봐도 말이다. 네 후손은 흡혈귀가 아닐 것이다. 흡혈귀의 계보는 그런 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뭣보다 네놈은 흡혈귀를 만들 권능을 계승받지 못했지. 짐이 주지 않았으니까.]

“...그건 다행이군.”

진심이었다. 흡혈귀의 굴레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진 않았으니까. 태양볕에 고통받으며, 살기 위해 피를 마셔야 하는 삶을 겪는 것은 자신으로 족했다.

그렇게 강엽이 심상 공간을 빠져나간 뒤.

홀로 남은 어둠 속에서 진조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흡혈귀는 아니겠지만, 평범한 인간도 아니겠지.]

먼 태곳적에도 흡혈귀와 인간 사이에 자손이 태어나는 일은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자손들 중엔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이름도 있었다.

[혈마.]

흡혈귀와 인간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되, 그 어떤 흡혈귀보다도 괴물 같았던 마귀.

수백의 흡혈귀를 죽이고, 수만의 인간을 죽이고, 시체의 탑 위에서 혈교를 개파한 시조.

결국 진조 자신의 손에 한 많은 생을 마감했으나, 언젠가 부활하겠다는 예언을 남긴 선지자.

진조는 그가 예언한 운명의 날이 가까워졌음을 그 자신의 영성으로 헤아렸다.

[강해져라, 후계자야. 저승에서 돌아온 혈마는 반드시 네 녀석을 노릴 것인즉.]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어둠 속에서 진조의 목소리가 쓸쓸한 바람처럼 맴돌았다.

* * *

눈을 떴을 땐 한낮이었다.

암막을 친 창문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햇볕을 보건대 날이 저물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은 듯싶었다.

운기조식을 끝내자 중단전을 감싼 용환도 회전을 멈추고 잠잠해진다.

그러나 이전과는 꽤 차이가 있었다.

‘육룡환.’

중단전을 감싼 여섯 번째 고리.

우문극과 십이위라는 광명마교의 고수를 죽이고 그들의 피를 소화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여섯 번째 고리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삼화취정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앞으로 남은 용환은 세 개.’

용환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다음 경지로 나아가는 것은 어려워진다.

구룡환을 완성해서 삼화취정을 이루려면 더 많은 피를 흡수해야겠지.

‘이 길의 끝에 뭐가 있든....’

지금은 끝까지 갈 수밖에 없으리라.

똑똑!

“강엽, 끝났어?”

“방금 전에 끝났다.”

강엽이 운기 삼매경에 빠진 동안 밖에서 지키고 있던 백서희였다.

방 안쪽의 기파가 갈무리된 것을 알아차리고 강엽이 운기를 끝냈는지 확인한 것.

고개를 빼꼼 내민 그녀의 손엔 괴황지로 감싼 음식이 들려 있었다.

“그건?”

“전병이랑 오리고기. 아래 내려가면 밥도 못 먹잖아.”

그들이 머무르는 객잔 식당엔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사각이 없었기에 내려갈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불편을 겪었어.”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어차피 아래쪽도 사람들 바글거려서 앉을 자리도 없었어.”

그렇게 배를 채운 뒤에 차로 입가심을 하는데, 강엽이 한쪽에 놓인 물건을 내밀었다.

“이건 그놈이 입은 호신갑이잖아?”

십이위가 입었던 호신갑. 갑옷답지 않게 가볍고 유연하면서도 내가중수법까지 막을 만큼 단단했다.

“입어봐라.”

“엥? 나한텐 너무 크지 않아?”

살아생전의 십이위는 강엽과 비슷한 신장에 바위처럼 단단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백서희가 호신갑을 입어봤자 맞지 않는다.

“입은 다음에 공력을 주입해보면 알 거야.”

강엽이 작게 웃으면서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호신갑이 수축되면서 늘씬한 몸에 딱 맞아떨어지는 게 아닌가?

“어라?”

“착용감은 어때?”

“음, 과장이 아니라... 정말 깃털처럼 가벼운데? 얇아서 그런가? 입은 느낌이 거의 안 나.”

“내가 입었을 때도 그랬어.”

공력을 주입하면 착용자의 체형에 맞게 변모하는 것이 수호신갑의 공능이었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쓰는 데 문제가 없다는 걸 알고 나선 백서희에게 주기로 결심했다.

“이젠 서희 네 거다.”

“나한테 주려고?”

“난 재생력이 있으니까. 호신강기도 있고. 나보단 네가 입는 게 더 효과적이잖냐.”

“흐응, 뭐야? 갑자기 예쁜 짓을 하네?”

부드럽게 눈웃음을 치며 옆구리를 찌르자 겸연쩍은 듯이 먼 산을 돌아보는 강엽이었다.

백서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부끄러워하기는. 참, 근데 방패는?”

“쟁여두긴 했는데 쓰려고?”

“내가 방패 써서 뭐 하겠어? 음, 근데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해도 방패를 쓰는 사람이 없으니... 처치 곤란이네. 그래도 꽤 귀한 물건 같은데. 광명마교 녀석들도 교의 보물이니 뭐니 했었고.”

다만 방패는 광명마교의 심법을 익히지 못하면 제 효과를 내지 못하는 반쪽짜리였다.

강엽도 한번 써보려고 온갖 시도를 다 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 살펴볼 구석은 있어. 나도 확신은 못하겠지만... 잘하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다만 그러려면 방패의 원리를 규명해야 하는데, 초음으로 구조는 대충 살펴볼 수 있어도 어떤 원리인지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얘기를 들은 백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장인을 섭외해봐야겠네. 근데 평범한 장인이 이런 걸 알아낼 수 있을까?”

“으음....”

“당문이 야금술이 발달했다고 하던데.”

민가엔 사천제일의원으로 명성높은 당문이지만 야금술도 못지 않게 발전했다. 자체적으로 암기를 제조하기 때문에 당씨 혈족 중엔 장인도 많았다.

“그 사람들한테 광명마교의 보물을 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 않겠어?”

“그렇군. 말해볼 가치는 있겠어.”

물론 당문의 장인들이 신병이기의 이치를 규명한다면 당문도 그 혜택을 누리겠지만, 혼자서 끙끙대는 것보다는 백번 나으리라.

“그러고 보니 식당에서 사람들 말을 좀 엿들었는데, 혈귀들이 여기저기서 날뛴다더라. 요즘 사천에선 호환마마와 같은 취급을 받는 모양이야.”

“혈교라....”

“사람들을 납치하거나 작은 산골 마을을 덮친대. 혈귀놈들과 충돌한 무림 문파도 많다 하더라고.”

사람들을 납치하는 것은 필시 비약을 제조하는 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리라.

“광명마교 다음은 혈교인가?”

“그러게. 이놈의 마교는 왜 이렇게 많담? 이러다 강호 무림 망하는 거 아닌가 몰라.”

아닌 게 아니라 세간에선 이러다 마도천하가 도래하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삼마교 중 누가 천하를 제패하든 미래는 없다.

“차라리 도망칠까?”

“...진심이야?”

“무림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새외로 도망치면....”

“정말 그럴 수 있어?”

모산혈조와 혈교에 대한 원한을 내려놓고, 강호에서 맺은 인연도 다 내려놓고 도망칠 수 있겠는가. 진지하게 묻는 눈빛에 강엽은 쓴웃음을 지었다.

“못하겠지.”

“응. 이젠 혼자가 아니잖아.”

나란히 침상에 걸터앉아 강엽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댄다. 이젠 두 사람 모두 나름대로 강호에서 발을 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 * *

곳곳에 여울과 암초가 있는 장강삼협은 작은 배로도 지날 수 없는 구간들이 있다.

그런 곳은 어쩔 수 없이 육로를 통해서 지나야 했다. 당연히 그런 행객들이 하룻밤 신세 지는 객잔이나 마을도 꽤 많은 편이었다.

그 마을 중 하나가 난데없는 횡액을 겪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 아악!”

습격자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전원이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이었다.

낫이나 도리깨 등으로 무장한 마을 사내들이 덤볐으나 속절없이 피를 뿌리고 쓰러진다.

흑포를 입은 혈령교위가 아비규환의 참상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노인들은 살려둘 필요 없다. 나이 많은 것들은 공양해봤자 그다지 쓸모가 없어.”

“존명.”

명령을 받은 혈교도들은 마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잡아갔다. 사내들은 사지를 부러뜨려서 제압하고, 여인들은 머리채를 붙잡고 우리에 처넣었다.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한 혈교도가 울고 부는 아이의 뺨을 후려치며 으르렁거렸다.

“뒈지기 싫으면 울지 마라, 어린 죄인들아.”

대가 약한 아이들이 무인의 협박을 어찌 버티겠나. 사색이 된 아이들이 히끅거리자 혈교도들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어린 아이들도 제물로 쓰나?”

“그런 것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지. 근골이 뛰어난 놈들은 따로 골라낸다. 장차 본교를 위한 동량으로 삼아야지 않겠나.”

별 생각없이 대답하던 혈교도는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질문한 목소리가 낯설었던 것이다.

“넌 누구... 커억!”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섬전처럼 날아온 일권이 안면을 뭉개버렸다. 콧등이 부러지고 피 섞인 이빨 조각들이 허공에 우수수 떨어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선 회색 피풍의를 입은 여인이 아이들을 끌고 온 혈교도들을 격살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혈령교위가 격분했다.

“웬놈들이 본교의 재산을 넘보느냐!”

“염병할 새끼가 미친년 칼 물고 널뛰는 소리 하네. 이 사람들이 왜 니들 재산이야?”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입술에서 걸쭉한 쌍욕이 나오자 아이들은 심각한 상황도 잊고 입을 쩍 벌렸다.

“아차, 이건 이 누님의 실수. 착한 아이들은 고운 말 바른 말 써야 한다. 알겠지?”

“네, 넵!”

아이들이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늠름하게 웃은 여인이 혈령교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입가의 웃음기는 사라진 지 오래.

“요즘 혈귀들이 역병처럼 창궐했다더니. 니들 이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얼마 전이었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었다. 아무리 관부의 영향이 덜 미치는 산골 마을이라지만 대놓고 양민들을 납치하려고 하다니?

여인과 시선이 얽힌 혈령교위는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강한 고수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렇게 된 이상 혈라분을...!”

“그렇겐 안 되지.”

은밀하게 다가온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혔다. 억센 힘에 당겨진 혈령교위는 뿌리칠 새도 없이 허공을 부유하는 경험을 했다.

직후 흑포 청년의 장심에서 격발된 경파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낙법도 취하지도 못하고 피떡이 되어 추락한 혈령교위.

몇몇 아이들이 눈을 돌리거나 얼굴이 새파래졌지만, 나이가 찬 아이들은 선망의 시선을 보냈다.

마을에 쳐들어와서 패악질을 부리는 악당들을 혼내주는 정의로운 협객처럼 보였던 것이다.

혈령교위가 죽자 남아있던 혈교도들이 동요했다.

“순순히 항복하면 유혈사태는 없을 거다... 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놈들이 아니겠지?”

“죽어어엇!”

과연 남아있는 혈교도들은 도망치거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생채기라도 내겠다는 듯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악귀처럼 달려든다.

갈고리처럼 손가락을 굽힌 강엽이 냉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 혈교지.”

마을을 덮친 혈교도들이 전멸하기까지는 반의 반 각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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