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하산 (4)
“실패했다고요?”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팔사도에게 보고한 자들이 자라목을 움츠쳤다.
그들이 잘못한 건 아니었지만, 팔사도의 심기가 상하자 방의 기온이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자세히 말해봐요.”
“황매현(黄梅縣)의 포구 마을에서 교도들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잠깐, 황매현이라면....”
고운 얼굴을 찡그린 팔사도가 뒤를 돌아봤다.
병풍처럼 둔 거대한 그림.
그것은 각 지역의 명칭과 세력을 자세히 표기해둔 중원 전도였다.
은어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이 장강 북쪽에 면한 작은 현을 짚었다.
“좀 멀리서 싸웠군요.”
“낭왕이 개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 듯 보입니다. 만약 놈들이 도망친다면....”
“십중팔구 황산으로 도망쳤겠죠.”
같은 입장이라면 그녀도 낭왕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좀 먼 곳에서 싸웠으리라.
문제는 그랬는데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십이위를 감시했던 교도들은 전원 사망. 십이위의 시체는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교도들이 죽은 곳과 멀지 않은 곳에 격전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귀영은?”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난 걸로 확인됐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사천에 들어갔겠죠.”
교도들의 시신을 발견한 게 며칠 전이었다. 연통이 끊긴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지금은 사천 북부로 접어들었다고 봐야 했다.
“후우, 제가 그 남자를 과소평가한 모양이군요. 십이위 정도라면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과한 전력을 투입하기엔 광명마교의 전력도 그리 여의치 않았다.
광동, 강서, 절강. 삼성을 터전으로 삼은 무림 문파들이 광명마교의 진출을 기를 쓰고 막고 있었다.
여기에 장강수로채의 권력 투쟁에도 한 발 걸치고 있으니 가용 전력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무리한다면 어떻게든 투입했겠지만....’
그러려면 다른 사도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데, 금패급 하나 잡자고 아쉬운 소리를 하긴 싫었다.
그렇지만 휘하의 대교들을 움직이는 것도 마땅치 않았기에 최선의 수를 동원한 건데..,.
결과적으로는 강엽의 목을 취하기는커녕 아까운 전력만 잃어버렸다.
“일륜패와 수호신갑은 빼앗겼겠군요.”
어쩌면 파괴됐을지도 모르지만, 최악을 가정하는 게 맞겠지.
“뭐, 잃어버린 건 어쩔 수 없지요. 사천까지 도망친 인간을 잡자고 더 많은 전력을 보낼 수도 없고. 알겠으니까 나가보세요.”
교도들이 예를 표하고 나갔을 때까지 허리를 꼿꼿이 세운 팔사도는 문이 닫히자마자 방만하게 앉았다.
얼굴을 쓸어올리면서 짓씹듯 중얼거렸다.
“개 같은 새끼... 넌 내가 반드시 죽여버린다.”
손가락 사이로 북해의 바닷물처럼 차가운 한광이 쏟아졌다. 한 사람에게 이런 굴욕을 맛본 것은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도....
“젠장.”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도망치듯이 떠나야 했던 고향, 그녀를 두고 저주받았다고 헐뜯고 손가락질했던 사람들....
왜 하필이면 지금 그 시절의 악몽이 떠오른단 말인가.
‘그놈이 산산의 이름을 꺼내지만 않았어도.’
공연히 조카의 이름이 언급되는 바람에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나버렸다.
그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뭐 해?”
“...들어와요.”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팔사도는 우아한 미소를 가장했다.
나무문이 삐걱 열리며 예리한 눈매의 단발 여인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요, 오사도?”
“일할 시간이야.”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군요.”
“참, 조금 전에 네 방을 나간 녀석들을 봤는데... 다들 안색이 창백한 게 혼쭐이 난 것 같더군. 그 녀석들이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나?”
“약간 불쾌한 일이 있었지요.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요.”
“흠, 그래. 우문세가의 가주가 죽은 것 때문은 아니겠지? 너무 자책하진 말라고. 네 탓이 아니니까.”
교단의 협력자를 잃은 것을 팔사도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도 돌았지만, 교주가 그녀를 비호했기에 무탈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어차피 낭왕은 바로 설득할 수 있는 작자가 아니었어. 그보단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지.”
“옳은 말씀이에요.”
두 여인이 나란히 복도를 거닐었다. 귀족가의 공녀처럼 고운 비단 궁장을 입은 팔사도와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 경장을 입은 오사도. 언뜻 보면 물과 기름처럼 전혀 다른 두 사람이지만 가장 친한 사이였다.
나무 계단 아래엔 이미 백여 명의 교도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사도가 짧게 물었다.
“지부대인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항주의 지부대인. 정사품의 고관으로서 항주부를 통치하는 지체높은 권력자였다.
“나가지. 호종하도록.”
“존명.”
* * *
두 명의 사도와 백 명의 교도들이 오열을 맞추어 객잔을 나서는 길.
항주의 대로엔 객잔에 있는 숫자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이 운집하고 있었다.
물경 천 명에 달하는 군세.
어지간한 대문파도 눈 아래로 내려다볼 병력 사이에, 살이 뒤룩뒤룩 찐 지부대인이 있었다.
어디에서도 쉬이 보지 못할 미인들의 등장에 지부대인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하지만 사갈처럼 날카로운 빛을 품은 오사도와 눈이 마주치자 천적을 만난 짐승처럼 화들짝 놀아서 눈을 내리깔았다.
비굴한 모습에 오사도가 코웃음을 쳤다.
“항주의 지부대인?”
“그, 그렇네. 본관이 항주부를 이끄는 황수찬일세. 위명이 자자한 사도들을 만나서 기쁘기 한량없구만.”
황제로부터 부를 통치할 권한을 위임받은 지부대인의 신분으로도 감히 눈아래로 보지 못한다.
이미 이웃한 복건성의 포정사가 광명마교의 교도임이 밝혀졌다. 군을 지휘하는 도지휘사와 형법을 관장하는 안찰사도 광명마교에 입교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복건의 포정사가 두 번째 사도라는 소문까지 있던데....’
일성을 책임지는 권력자들이 몽땅 광명마교의 수중에 떨어진 셈이다.
절강성도 마냥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바.
“야, 약속대로 관부는 귀교의 행사에 끼어들지 않겠네. 대신 약속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팔사도의 확답에 지부대인이 내심 가슴을 쓸어내린 찰나, 오사도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의 자리는 안전할 거야.”
항주의 지부대인이 광명마교가 항주를 장악하는 것을 모른 척 눈 감아주는 대가였다.
다만 항주를 얻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쿠르르르릉...!
흡사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고루거각의 지붕 위로 한 사람이 떨어졌다.
[비루한 마교도 놈들이.......]
대기가 웅웅 흔들렸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절세고수의 분노는 뭇 군웅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침묵 속에 빠진 항주의 대로,
지붕 위에 현신한 절세고수의 존재감이 일대를 잠식하자 지부대인의 턱살이 덜덜 떨렸다.
가항(街巷)을 가득 메운 광명마교의 교도들도 심령을 옥죄는 기세를 억지로 버텨낼 따름.
오직 두 사람만이 아무렇지 않게 흘려낸다.
“사도십대고수라. 일사도가 패력산군인지 뭔지를 십 초에 꺾었다고 했던가?”
“정확히는 구 초라고 하던데요.”
“어쨌든. 저자도 나름 사도십대고수인데, 저자를 십 초 안에 꺾으면 일사도와 비견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일사도가 그 싸움에서 전력을 다했을 리가 없잖아요.”
“하긴.”
어깨를 으쓱 추어보인 오사도가 고개를 들어 고루거각 위에서 뒷짐을 진 절세고수를 바라봤다.
언젠가 하오문주가 강엽에게 말했던 대로, 항주를 비롯한 강동 일대에 대문파는 없었다.
그러나 절세고수는 존재한다. 그 자신은 독보강호를 고집하되, 항주 일대의 흑도 사파들을 굴복시켜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자.
팔사도가 그 이름을 읊조렸다.
“대력쇄(大力鎖) 묵야강....”
수백 줄기는 될 법한 사슬의 군세가 햇볕을 난반사하며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쇠사슬의 군세가 대력쇄가 발을 디딘 고루거각을 구렁이처럼 옥죄면서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목재로 만들었다지만 칠층 누각이 무너지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야말로 재해를 인간의 형상으로 뭉뚱그려놓은 듯한 신위에 군웅들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오사도가 황당해하며 중얼거렸다.
“멀쩡한 누각을 왜 무너뜨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고 싶었나 보죠.”
팔사도 역시 아랑곳하지 않은 얼굴로 소매를 휘저었다. 손짓을 따라 일어난 바람이 누각의 붕괴로 인한 흙먼지를 일도양단하듯 갈라버렸다.
그때 오사도가 먼지 너머를 보며 말했다.
“온다.”
대력쇄가 무너뜨린 누각 저편.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각양각색의 무복들과 병장기로 무장한 무인들이 진군하고 있었다.
머릿수만 보면 광명마교에 꿀릴 게 없다. 사도십대고수가 여기까지 대동할 정도면 그에 합당한 무공 또한 갖추었으리라.
“항주 전역의 흑도 사파들을 모았군요. 그중에서도 정예들만 모은 것 같은데....”
“몇 명이 오든 상관없지 않나?”
쇠사슬을 지면에 박아넣으면서 하강하는 노인.
노기를 숨기지 않는 절세고수의 현현에도 오사도는 입술 끄트머리를 말아올렸다.
“저 노친네만 죽이면 나머지는 다 오합지졸인 것을.”
“광명마교의 사도들아.”
앞서와 달리 조곤조곤한 음성. 그러나 이십 장의 거리를 격하고 두 사람의 귓가에 또렷이 꽂혔다.
“패력산군을 꺾은 일사도도 아니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들이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구나.”
“저런. 우리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는데. 팔사도, 네 나이가 몇이더라? 불혹은 안 되지?”
“그런 걸 말해서 뭐해요?”
“아, 기억 났다. 서른다섯이었지?”
“오사도, 당신 정말...!”
“후후, 겉모습만 보면 방년인데 말이야.”
픽 웃은 오사도가 등에 멘 대궁을 꺼냈다. 짐승의 뿔을 깎아만들어서 어지간한 검보다 거대한 각궁.
“염라대왕이 누가 당신을 죽였냐고 묻거든, 작염마궁(炸炎魔弓) 추삼랑이라고 대답하도록.”
작염마궁이라는 별호가 튀어나오자 대력쇄를 따르는 흑도 사파의 진군에 제동이 걸렸다.
대력쇄의 주름진 눈가에 기광이 일렁거렸다.
“그 별호... 들어본 적 있다. 악룡맹주의 어깨를 꿰뚫었다는 계집이로구나.”
“그래, 바로 내가 그랬지.”
해남도의 명문 검파인 해남파를 멸한 해적 선단.
악룡맹은 해안을 습격하여 치안을 어지럽히고 사람들과 재물을 약탈하는 자들이었다.
아직 광명마교가 복건성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던 시절, 악룡맹주를 위시로 한 악룡맹의 해적 선단이 복건의 해안을 약탈했다가 광명마교와 충돌했었다.
당시에 사도십대고수였던 악룡맹주가 정체불명의 궁수한테 화살을 맞고 도망쳤는데, 그 궁수가 오사도였던 것이다.
“팔사도, 저 노괴는 내가 먼저 상대하고 싶은데 허락해주겠어?”
“제가 허락하지 않아도 혼자서 싸울 거잖아요? 마음대로 하세요.”
“고마워.”
씨익 웃은 오사도가 대궁을 겨누었다.
화살은 재지 않았지만, 대력쇄는 머리를 노리는 살의를 느끼고 사슬로 앞을 막아섰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사슬들이 출렁거렸다.
“격공시(隔空矢)!”
대력쇄가 신음처럼 목구멍을 쥐어짜내고, 오사도는 곤란한 듯 단발 머리를 긁적거렸다.
“생각보다 단단한걸.”
“대력쇄의 쇠사슬은 공방일체의 병기. 저게 호신강기 역할도 한다는 걸 잊지 마세요.”
“참, 보고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지. 이러면 격공시로는 재미를 못 보겠는걸.”
전통(箭桶)에서 길쭉한 화살이 한 대 뽑혔다. 만년한철을 가공한 한철시였다.
열양지기를 머금어 붉게 타오르는 화살이 대력쇄의 머리를 겨눈다.
그 순간, 수십 줄기의 쇠사슬이 그녀를 노리고 홍수처럼 범람했다.
분기탱천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네년 마음대로 하게 놔둘 성싶으냐-!”
“오사도.”
대력쇄가 이쪽으로 쳐들어오면 아군도 큰 피해를 입는다. 애써 포섭한 지부대인이 죽을지도 모르는 일.
팔사도의 의중을 헤아린 오사도가 시위를 겨눈 채 발바닥 용천혈로 진기를 내뿜었다.
육감적인 다리를 감싼 혁대에서 수십 자루의 비도가 솟아올라 사슬을 막아냈다.
궁술을 성명절기로 삼은 오사도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마련한 비책이었다.
“악룡맹주는 꼬랑지에 불 붙은 망아지처럼 도망치던데. 대력쇄 당신은 그러지 않길 바라지.”
“이년...!”
항주 터전으로 삼은 대력쇄가 목숨이 아까워 도망친다면 항주 무림에 대한 영향력을 잃을 터.
시위를 힘껏 당긴 오사도가 차갑게 뇌까렸다.
“이 시간부로 항주는 본교의 영역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흑도 사파를 대표하는 사도십대고수 대력쇄 묵야강이, 광명마교 오사도와 혈전을 벌이다 사망했다는 소식이 무림 전역에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