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64화 (164/450)

28화. 하산 (3)

스스로 우문극보다 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내의 말은 근거 없는 자신감만은 아니었다.

방패로 구사하는 공방일체의 무공 초식.

모서리를 날카롭게 벼려낸 방패는 단순히 검격을 막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섬뜩한 반격을 날려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검격이 방패를 때릴 때마다 공력이 툭툭 끊기고 있다는 것이다.

억지로 검신에 공력을 불어넣기 위해선 필요한 양보다 몇 배를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

아무리 강엽이 동급의 고수들을 능가하는 내공을 지녔어도 이런 식으로 싸우면 오래가지 못한다.

‘방패도 방패지만 공력이 독특한 것 같은데....’

초음으로 사내의 내공 경로를 엿봤기에 단순히 방패만의 공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봤다.

독특한 내공 운기법과 신병이기의 조화가, 강엽이 전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 고수들을 만나봤지만 이렇게 싸우는 자는 처음이었다.

방패를 힘으로 비틀거나 틈새를 노려보려고 해도 면면부절 장중하게 이어지는 초식은 쉬이 허점을 노출하지 않았다. 설령 티끝만한 빈틈이 있더라도 다른 손에 쥔 검이 부족한 부분을 메꾸었다.

정면에서 상대할 수 없다면 자신이 잘하는 걸로 상대할 수밖에.

강엽의 신형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그 수법은 팔사도님께 들었다!”

사내가 방패를 내밀자 태양처럼 찬란한 휘광이 어둠을 걷어냈다.

강엽을 감싼 흑무암쇄진은 파훼되지 않았지만, 사방이 환한 곳에선 암신을 쓰기가 마땅치 않았다.

“거기냐!”

신속하게 거리를 좁힌 사내의 검이 안개를 양단했다.

그러나 두 쪽으로 나뉜 안개 사이에 강엽은 없다.

눈썹을 까딱거린 사내는 불현듯 낌새를 눈치채고 방패를 높이 치켜들었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벼락이 일도양단의 기세로 정수리를 갈라왔다.

자성검법의 사초식인 뇌둔.

꽈아아아아아앙-!

“크윽...!”

사내는 우문극도 버티지 못한 절초를 버텨냈다.

방패로 검격을 막고, 호신기로 전신을 보호한다.

그럼에도 전부 막지는 못해서 머리카락이 쭈뼛 섰지만, 자성검을 감싼 벼락은 그의 몸을 헤집지 못하고 지면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움직임이 잠시나마 굼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뻔히 드러난 허점을 놓칠 강엽이 아니었다.

투아아앙!

호쾌한 족격이 방패로 막지 못한 하복부를 강타, 사내를 저 멀리 날려버린다.

발끝에 닿는 묵직한 감각.

직감적으로 그 정체가 뭔지 깨달은 강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건 뭐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병이기로 도배한 것도 아니고....”

사내가 뇌둔을 완벽히 막아낼 수 있었던 건 결코 그의 무공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을 보호할 수단을 확실하게 갖춰놨기 때문.

“방패로도 모자라서 호신갑이냐?”

찢겨나간 앞섶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흉갑.

홍예칠위 또한 비슷한 종류의 호신갑을 걸치고 있기에 타격 순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발끝에 내가중수법의 묘리를 담아 후려쳤는데도 딱히 내상을 입지 않은 것을 보면 귀한 물건이리라.

사내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네놈...!”

“웃기는 놈이군. 신병이기에 의존하면서 성골이니 근본이니 지껄여?”

“닥쳐라, 네놈이 뭘 안다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내가 방패를 통해 찬란한 휘광을 내뿜었다.

거리가 제법 있는데도 살갗이 따끔거리는 고통.

빛이 내리쬔 부분에 울긋불긋한 화상이 흉지기 시작하자 사내의 눈이 유리알처럼 번들거렸다.

“그렇군! 네놈, 신공의 기운에 유난히 취약하구나!”

강엽은 대답 대신 흑무암쇄진의 기운을 다시 한번 둘렀다.

검은 안개에 휩싸인 얼굴에서 붉은 안광이 스쳐지나간다.

“짜증나는 놈.”

광명마교의 최상층부도 아닌, 이제 막 대교의 지위에 오를락 말락한 놈이 이만큼 위협적이라니....

‘한천태극패만으로는 힘들겠어.’

구우우우웅...!

다섯 고리의 용환이 공명, 몸 바깥에 불그스름한 호신강기를 둘렀다.

사내의 안면에 경악이 번졌다.

“호신강기? 삼화취정에 오른 놈도 아닌데...!?”

흑무암쇄진만으로는 힘들다고 판단한 끝에 꺼낸 호신강기.

하지만 휘광에 닿은 호신강기는 몹시 불안정하게 흔들거렸다. 혈공진기로 빚어냈기 때문에 태양과 닮은 열양지기에 놀랍도록 취약했다.

사실상 전력을 절반 이상 깎고 싸우는 것과 다름없다. 만약 한낮에 싸웠다면 훨씬 부담스러웠으리라.

왜 낮에 습격하지 않았던 걸까?

‘배에서 싸우긴 싫었나?’

한낮엔 배를 타고 이동하는 만큼 좁은 선상에서 싸워야 하는데, 그들 같은 고수들이 싸운다면 배에 구멍이 나거나 배에서 튕겨질 수 있었다.

장강 곳곳엔 숙련된 뱃사람들도 두려워하는 여울과 암초지대가 곳곳에 있는데, 그런 곳에 빠진다면 아무리 절정의 고수라도 위험했다.

물론 진짜로 낮에 싸우지 않은 이유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어쩌면 밤에 싸워도 이길 수 있으리란 자신감의 발로였을지도 모르지.

잠시 턱을 다물지 못한 사내가 눈을 빛냈다.

“삼화취정도 아닌데 호신강기를 쓰다니 놀랍군. 하지만 완전하진 않은 모양이지?”

약점을 발견했다고 여겼는지 사내의 입꼬리가 이죽거렸다.

촤악!

혈목이 적의 움직임을 늦추기 위해서 바닥을 뚫고 나왔지만 시간벌이도 되지 못했다.

그나마 우문극을 상대할 땐 뭉쳐서라도 버텼는데, 휘광이 너무 강렬한 탓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탕! 카앙! 캉캉캉!

검과 검이, 검과 방패가 무수히 겹치면서 불똥과 경파를 튀겼다.

이젠 강엽도 사내처럼 한 손에 한기에 깃든 태극반의 방패를 두르고 있었다.

한 가지는 인정해야 했다. 신병이기의 힘을 빌렸으나 사내가 만만한 적수가 아니라는 것. 적어도 신병이기를 휘두를 자격은 갖춘 고수였다.

그럼에도 공방이 오갈수록 승부의 추는 강엽에게 기울고 있었다.

촤악!

“흡!”

검날이 호신기를 뚫고 팔뚝을 벤다.

강엽의 검이 자신의 투로를 절묘하게 파고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내는 이맛살에 깊은 계곡을 만들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빈틈을 드러낼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다. 약간 주춤하는 척하면서 자신이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붓도록 미끼를 던졌고, 언제 수세에 몰렸냐는 듯이 가속해서 괴이한 각도로 검을 찔렀다.

도중에 팔의 간합이 달라졌다.

“네놈, 설마 팔을...!”

검을 찌르기 전에 났던 두둑거리는 소리.

일부러 손목 관절을 탈골시켜 정상적으로는 꺾을 수 없는 검로를 가져간 것이다.

‘한데 왜 팔을...?’

차라리 목을 노렸다면 이해하겠는데 목숨과 관련없는 팔뚝을 노렸다.

물론 중요한 급소는 호신갑과 방패로 가렸다지만 손목을 탈골시켜가면서 팔뚝을 노리는 건 비합리적이지 않은가?

“슬슬 지겨워져서 말이야. 쉽게 끝낼 수 있는데 정면대결만 고집하는 건 미련한 짓이겠지.”

“대체 뭔 소릴...!?”

의문에 찬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팔뚝을 깊이 가른 자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이 돌덩이가 된 것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혈독.

대상의 피를 이용한 술법이, 사내의 몸뚱이를 잠식해서 판세를 뒤집었다.

원래는 피를 얻은 뒤에도 수인을 맺고 진언을 외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손목에 찬 흑룡비환으로 귀찮은 과정을 생략해버렸다.

“이, 이런...!”

반사적으로 공력을 자상 근처의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經)으로 보내려고 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게 패착이었다. 삼화취정에 이르렀던 단혼마백도 혈독을 바로 풀지는 못하지 않았던가.

사내가 금패급의 고수이긴 하지만 혈독을 바로 풀 정도는 안 되었다.

차라리 거리를 벌리고 도망쳤다면 나았을 텐데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적기를 놓쳤다.

촤아악!

사내가 주춤한 틈을 타서 자성검이 그의 어깻죽지를 정확히 베어냈다.

방패를 쥔 손이 하늘 높이 솟구치자 사내의 낯짝이 흉신악살처럼 사납게 일그러졌다.

“시발, 내가 고작 이따위 잔재주에...!”

강엽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고통으로 흉진 미간을 향해 자성검을 겨누었다. 한 치만 앞으로 내밀면 관통할 수 있는 거리.

미간에 어린 살기를 느낀 사내가 움찔 떠는가 싶더니 실성한 것처럼 입꼬리를 히죽 찢었다.

“큭... 난 죽겠지만 네놈도 곱게 죽진 못할 거다. 네놈의 모든 게 낱낱이 본교에게 보고될 테니까! 네놈이 흑룡교의 잔당이라는 것도 말이다. 아니, 본교가 나설 것도 없이 소문만 내도 네놈에겐 치명타겠지?”

진실을 모르는 사내는 흑무암쇄진을 익힌 걸로 강엽이 흑룡교의 잔당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흑무암쇄진을 익혔다는 사실이 소문나면 좋을 게 없으리라.

“큭큭, 협객을 자처하는 백도의 위선자들이 네놈을 찾아가겠구나. 그놈들의 손을 빌려서 네놈을 죽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

“그렇겠지. 소문이 난다면.”

말이 끊긴 사내가 불쾌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강엽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저걸 믿고 있겠지?”

그의 눈길이 멀리 향했다.

절정고수들의 싸움으로 주변은 다 뒤집어졌는데도 나뭇가지 위를 떠나지 않은 야조.

부리부리한 황금색 눈알을 지닌 올빼미가 그들이 있는 곳을 관찰하고 있었다. 밤잠을 자던 새들은 놀라서 한참 전에 도망쳤는데도.

강엽은 올빼미와 가느다란 선으로 이어진 술법을 감지했다. 그가 얼마 전에 익혔던 사역술과 비슷했다. 짐승과 감각을 동조해서 먼 곳을 감시하는 술법.

비밀을 들킨 사내가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걸 알고 있었다고...?”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냥 뒀단 말인가?

“이미 조치했다.”

사내의 의문을 짐작한 듯한 대답.

주변을 둘러본 사내는 그제서야 위화감을 깨달았다.

“계집을...!”

백서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저런 술법은 거리의 한계가 있지. 술사와 짐승이 무작정 멀리 떨어지진 못해.”

강엽의 경우엔 삼십 리가 한계였다.

사내를 따라온 술사의 거리는 더욱 짧았다. 올빼미와 이어진 선은 그들이 싸운 곳에서 위쪽에 있는 산등성이를 향해 뻗어 있었으니까.

“나를 감시하려고 보냈다기보다는, 널 감시하려고 보낸 것 같은데.”

“....”

입을 다문 건 부정할 수 없어서였을까.

굳이 여럿이 몰려오지 않고 사내 혼자 왔으며, 감시하는 인원을 따로 둔 걸 보면 그 역시 시험받는 입장이었겠지.

“네 윗선은 아무것도 모를 거다.”

“빌어먹을.”

사내가 욕지거리를 지껄이는 것과 동시에 검끝에서 발출한 공력이 미간을 꿰뚫었다.

* * *

가부좌를 튼 염소 수염이 눈을 번쩍 떴다.

검은자위가 없는 하얀 안구. 눈매의 동자료혈은 핏줄이 불거져서 흉물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십이위(十二位)가 실패했습니다.”

“으음!”

“실패작이라고 하나 열두 번째 서열까지 갔던 자가 패배했단 말인가?”

염소 수염을 둘러싸고 술렁임이 일었다.

비록 삼화취정의 고수는 아닐지언정 십이위라 불리는 사내는 만만찮은 고수였다. 무공만 보면 대교의 자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

“얼마나 버텼나?”

“공방이 너무 빨라서 일일이 살펴보진 못했지만 삼십여 합이 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상대가 그렇게 강했던가?”

“일륜패(日輪牌)와 수호신갑(守護神鉀)이 없었다면 십 초식도 못 버텼을 겁니다. 그리고 흑룡교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흑무암쇄진을 쓴 걸 봤습니다.”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군.”

실패작이라고 깎아내리긴 했으나 머지않은 시간 내로 삼화취정에 오를 거라 내다본 인재였다.

그런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참패를 당할 줄이야.

“중교(中敎)님, 일륜패와 수호신갑을 회수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서라. 우리도 십이위의 뒤를 따라갈 거다. 그깟 병장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을 거냐?”

“하지만 그것들은....”

“귀한 보물들이지. 하지만 유일한 보물은 아니다. 다시 만들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목숨 걸고 회수할 만한 물건들은 아니야.”

수호신갑은 그렇다 치고 일륜패는 광명의 신공을 익혀야만 제 위력을 낼 수 있는 만큼 적의 손에 들어가도 크게 위협적이진 않았다.

애초에 반드시 회수해야 하는 물건이라면 십이위가 실패하는 경우를 상정하고 그를 대신할 고수나 타격대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때 염소 수염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엇...!”

“왜 그러나?”

“계집이 보이지 않습니다.”

싸움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백서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감시했다.

그렇다 해도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피신했을 거다. 별일 아닐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여상스럽게 중얼거렸던 중교는 불현듯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안색을 바꾸었다.

그를 둘러싼 교도들이 허수아비처럼 털썩 쓰러지고 있는 게 아닌가?

“주, 중교님!”

염소 수염이 애타게 부르는 찰나, 그의 목에 한 줄기 혈선이 그어졌다.

혈선이 선명해지면서 아래쪽으로부터 천천히 분단되는 머리.

목이 달아난 시체가 형편없이 널브러졌다.

“.......”

중교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욕설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대체 언제?’

얇은 강사가 올가미처럼 그의 목을 휘어감고 있었다.

움직이면 살갗을 파고들어 혈맥을 끊어버릴 것 같다는 위기감.

식은땀을 흘리는데 등 뒤에서 싸늘한 조소가 들려왔다.

“숨으면 안전할 줄 알았어?”

“이교의 죄인...!”

날카로운 뭔가가 목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과 함께 중교는 자신의 의식이 칠흑 속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