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63화 (163/450)
28화. 하산 (2)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강엽은 눈을 떴다. 동굴 바깥이 아직 어두운 걸 보면 동이 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빗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비는 그쳤겠지. 거기까지 확인했을 때 옆에 있는 하얀 어깨가 뒤척이면서 몸을 덮은 천자락이 떨어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름다운 나신엔 열락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처음엔 부드럽게 합일했지만, 갈수록 둘 다 뜨겁게 타올랐던 것이다. ‘피냄새 때문에 좀 취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그녀의 첫 남자라는 증거. 감정적으로 충만해지다 보니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 간밤의 격정을 떠올린 강엽이 내심 쓴웃음을 흘릴 때, 백서희 역시 잠에서 깼는지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약간 몽롱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으음...?” “....” 잠시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은 침묵. 열락에 휩싸인 채 서로를 갈구했던 간밤이 떠오르면서 어색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등을 돌리거나 몸을 가리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부끄러움을 타기엔 간밤에 볼 꼴 못 볼 꼴 다 봤던 것이다.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거라서 안색이 살짝 상기된 두 사람이었다. “어, 어제 좋았어. 잘 하더라.” “그런가?” “...으응.” 그야 강엽의 체력이 워낙 강건하니 그럴 수밖에. 알몸으로 누운 채 서로의 체온을 나눈 두 사람이 일어난 것은 일 각이 더 지나서였다. 백서희는 약간 다리가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앓는 소리를 내지 않고 옷을 입었다. 모닥불의 온기 덕분에 두 사람이 벗어둔 옷은 말라 있었다.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켠 그녀가 입구 안쪽에 놓아둔 바구니들을 확인했다. “어서 가자. 낭왕 할배 혼자 기다리겠어.” “넌 여기 잠깐 있어라.” “뭐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통발에 바구니까지 전부 짊어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런 움직임은 한식경에 걸쳐 계속되었다. 두 사람이 들었던 짐을 전부 황산 깊숙한 골짜기에 있는 목옥에 가져다놓은 뒤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빗물 때문에 미끄러워진 지형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칫 삐끗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지만, 초감각을 지닌 그는 빗물에 젖은 비탈길 위에서도 실수 한번 하지 않고 짐을 옮겼다. 그렇게 두 번을 왔다 갔다 한 뒤에야 어안이 벙벙해진 백서희를 업고 질주했다. 정신을 퍼뜩 차린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땐 강엽에게 업힌 채 하늘 높이 솟아오른 뒤였다. “우와앗! 뭐, 뭐야!?” “꽉 잡아.” “이미 잡고 있어어어어!” 바람결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 어느새 속도감에 흠뻑 취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사뿐하게 지면을 미끄러지는 강엽의 목에 손을 단단히 두른 채. 작게 주먹을 들어올린 그녀가 외쳤다. “야호, 달려!” * * * 낭왕은 두 사람이 뭘 하고 있었는지 짐작한다는 듯 실실 쪼갰지만, 구체적으로 캐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돌아온 다음 날에 하오문주가 돌아오고, 이틀 뒤엔 연이 도착했다. 그 다음 날은 새해 첫날이었다. “이렇게 또 한 살 먹는군.”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진수성찬 앞에서 낭왕은 허허롭게 웃으면서 수염을 어루만졌다. 또 그러면서 자리에 배석한 사람들의 술잔에 아끼는 명주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너희도 한 살씩 먹은 것 추천한다. 강호 명숙을 향해 한 발짝 내딛었구나. 한 살 두 살 먹다 보면 언젠가 강호 명숙이 된 스스로를 발견할 게다. 그러다 노강호가 되고, 또 십 년쯤 지나면 금분세수하는 게지.” “나이를 드신 게 서글프신 모양입니다.” “서글플 게 뭐 있겠느냐. 나 또한 젊은 시절이 있었던 것을. 단명하지 않는 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걸 어찌 쓰는지가 다를 뿐이지.” 낭왕의 인생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든 덕담이었다. 비루한 낭인으로 시작해서 천하팔존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역경을 겪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고 극복했기에 낭왕이 된 것이다. “내일 떠나면 어디로 갈 게냐?” “딱히 계획은 없습니다.” “옛부터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고 했었다. 기왕 예까지 왔으니 두 도시를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야.” 그 말에 백서희가 눈을 반짝였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들이에요. 항주가 그렇게 대단하다면서요?” “대륙에 수많은 고도(故都)들이 있다지만 항주만큼 화려한 곳은 찾기 힘들지. 개봉이나 장안, 사천에 있는 성도까지. 황제가 거하는 북경을 제외하면 항주만큼 화려한 도시는 없을 게다.” 강엽도 항주와 소주는 가본 적이 없는 만큼 호기심이 들었기에 두 사람의 대화를 얌전히 경청했다. 그때 하오문주가 충고했다. “항주에 가는 건 좋지만 조심해야 해요. 광명마교도들이 슬슬 절강성도 넘보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식탁의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백서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벌써요?”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죠. 강동엔 구파나 팔가 같은 대문파가 없으니까요.” 그나마 남직례성엔 남궁세가가 있고, 호광성엔 모용세가가 있어 광명마교를 견제하고 있지만 효과적으로 억누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강서까지는 광명마교가 차지할 공산이 커요. 이 문제로 무림맹도 시끄러운데....” “그들이 결론을 내렸소?” “일단 광명마교에 집중하겠다는군요. 삼마교 중 광명마교가 가장 가시적인 위협이니까요.” “혈교는 덜 신경 쓰겠다는 말이군.” “사천과 운남엔 대문파가 네 곳이나 있으니까요. 쉽게 함락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사천삼패와 점참이라면 믿을 만하지. 하지만 혈교가 본격적으로 발호하면 그들만으로는 역부족일 텐데....” “내부에서는 부족한 병력은 낭인전을 고용해서 충원하겠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어요.” “정보력은 하오문에 의존하고?” “아마도요. 개방의 역량은 광명마교에 집중할 거예요.” “이러면 우리가 결정권을 쥔 셈인가.” 밥상머리에서 천하 정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세 사람은 젓가락도 놀리지 못했다. 그때 강엽이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거라.” 낭왕의 허락을 얻은 강엽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그리고 낭왕과 하오문주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저번엔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혈교의 비약에 대해서입니다.” “혈교도들이 먹있다는 비약 말이냐?” “그건 모산파의 술법으로 만든 약입니다. 술법의 정체는 강시술과 관련이 있습니다.” “...!” “그게 정말인가요?”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낭왕은 침중하게 안색을 굳혔고, 하오문주는 아연해졌다.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그 약을 장기 복용하거나 대량으로 복용한다면 강시의 소재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산파엔 강시를 일으킬 수 있는 술법이 있지요. ‘구령환혼시법(口令還魂尸法)’이라는 술법입니다.” 본래는 전쟁터에서 죽은 망자들을 고향으로 되돌려보내기 위해 창안된 수법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지도 모르는 일. 하오문주가 의아해했다. “한데 강 무사는 그걸 어떻게....” “그렇군.” 강엽이 대답하기도 전에 낭왕이 이제야 답을 알겠다는 듯이 이채를 띠었다. “네 술법은 모산파의 것이었구나.” “...!” 하오문주와 연의 얼굴에 놀람의 감정이 떠올랐다. “모산혈조와는 은원이 있습니다. 그가 본거지를 비웠을 때 술법서를 훔쳤지요.” 원수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진득한 살의가 스쳐지나가는 눈동자.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는 것마냥 끈적한 증오가 엿보였다. 낭왕이 그런 강엽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묻지 않으마. 은원을 푸는 일이야 네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지. 하지만 구태여 그 말을 꺼낸 이유가 있으렷다?” “제 이름이 나오지 않는 선에서 비약에 대한 소문이 퍼졌으면 합니다.” “하오문의 힘은 필수적이겠구나.” 강호의 소식을 모으는 데 능하다는 것은, 반대로 소식을 퍼뜨리는 데도 능하다는 뜻. 다소 두루뭉술하더라도 비약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면 사람들도 경각심을 가질 것이다. “혈교는 두 가지의 비약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을 중독시켜 혈교에 대한 충성심을 심는 용도고... 다른 하나는, 아직 추측이긴 하지만 멀쩡한 사람을 강시로 만드는 비약입니다.” 두 가지를 합치면 무시무시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연이 진저리를 쳤다. “...맙소사, 강시 대군을 만들려는 거군요!” 정말 그렇다면 혈교의 위협이 광명마교보다 작다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의 계획이 성사된다면 강시의 해일이 사천 일대를 휩쓸어버릴 터였다. 사천삼패의 힘이 대단한들 노도처럼 몰려오는 강시 대군을 막을 수는 없는 법. “혈교의 음모를 파훼하려면 비약이 제조되는 곳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안 그래도 암시장에서 비약을 퍼뜨리는 자들을 조사했어요. 비약 자체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퍼지고 있지만 가장 큰 손은 한중의 암시장에 있어요.” 한중이라는 말에 강엽이 멈칫하자 하오문주가 심유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 무사가 생각한 곳이 맞을 거예요. 장안대상회가 한 발 걸친 곳이죠.” 일전에 홍가려가 장안대상회의 대공자에게 초대받은 곳. 그녀의 의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 암시장에 들어갈 수 있는 초대장을 손에 넣지 않았던가? “장안대상회, 천금상단, 태화문... 각 성을 대표하는 세력들이 관리하는 만큼 들어가는 게 만만치는 않아요. 만약 강 무사가 거기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본문에서 초대장을 준비해드릴 수 있어요.” “이미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 더 있어야 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눈동자를 굴리는 백서희를 슬그머니 돌아보는 하오문주였다. “초대장은 한 사람당 하나씩이거든요. 다른 사람도 들어가려면 더 필요하죠.” “많이 필요하진 않을 겁니다.” 우르르 몰려가봤자 괜한 경각심만 살 뿐. 수많은 세력들이 관여하는 암시장에서 뻔뻔하게 혈교의 비약을 퍼뜨리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유통책이 암시장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강 무사는 낭인전 중경 분타주랑 친하다고 했죠? 초대장은 그를 통해서 보낼게요.” “대강 정해진 것 같구나.” 어느 순간부터 듣기만 할 뿐 참견하지 않았던 낭왕이 다시 입을 열며 좌중의 이목을 모았다. 낭왕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네 녀석에게 줄 의뢰 말이다.” 금패급 낭인들도 받기 힘들다는 낭왕의 의뢰. 그 첫 번째 의뢰는 혈교의 비약을 유통하는 큰손을 잡는 것이었다. * * * 백서희는 아쉬워했지만, 괜히 광명마교와 충돌할 수 있는 만큼 항주 여행은 훗날을 기약했다. 황산을 나온 두 사람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 장강의 뱃길을 타고 서쪽으로 갔다. 아직 시커먼 어둠 속에 가라앉은 새벽. 홀로 일어난 강엽은 옆에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고 있는 백서희를 돌아봤다. 옅은 호흡을 따라서 이불로 가린 상반신이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깨울까 봐 차마 얼굴을 만지진 못하고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만 매만진 강엽은 이내 침대를 나와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대충 바지를 허리까지 끌어올렸을 때였다. “...가려고?” 어느새 눈빛이 또랑또랑해진 백서희가 강엽을 보며 물었다. 잠기운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간 신색이었다. 강엽이 옷을 입는 소리에 깬 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전에, 바깥에서 암기처럼 내쏜 은밀한 적의가 그녀의 감각을 건드렸다. 옅은 쓴웃음을 머금은 강엽이 말했다. “안 가면 쳐들어올 기세니까.” “나도 준비할게.” 이불 속에서 나오자 달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알몸이 시야를 사로잡는다. 하나 그 원초적인 아름다움은 척척 움직이는 손짓에 따라 순식간에 가려졌다. 이제 그곳에 자리한 것은 경장 위로 쌍검을 패용한 늠름한 여고수였다. “나 혼자 가도 될 것 같은데.” “흥,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건 질색이야. 그리고 상대가 예상 외로 강하면 어쩌려고?”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강엽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옷을 입었다. “가자. 어떤 놈인지 보자고.” 완전히 무장한 두 사람은 객잔을 빠져나가 언덕길로 올랐다. 그들이 묵었던 포구 객잔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였다. 휘이이이이.... 마침 장강에서 불어온 바람이 살갗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눈길을 돌린 곳엔 선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명을 불렀는데 두 명이 나왔군. 이런 절세미녀와 함께 다니다니 소형제가 부러워지는걸.” “누구냐?” “아, 당황한 거 이해하네. 처음 보는 사람이 친한 척하니 얼마나 당혹스럽겠나? 나는 자네를 아는데 자네는 나를 모르니 그럴 만도 하....” “흰소리는 그만하지. 네가 황산을 내려왔을 때부터 우릴 쫓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 사실 적시로 사내의 입을 닥치게 한 강엽은 한심스럽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처음엔 미행하는 사람이 하오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엔 미행하는 실력이 형편없었다. 적어도 하오문주라면 이따위 인선을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혈교가 먼 황산까지 와서 미행하는 것도 뭔가 이상했다. “광명마교에서 왔겠지.” 도중에 족칠까 생각도 해봤지만 상대가 같은 배에 따라 타진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나 여겼는데, 기어이 다른 배를 타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이건 뭐, 거짓부렁을 주워 섬길 수도 없구만.” 간접적으로 시인한 사내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내 살기등등한 미소를 매달았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숨길 것도 없겠지. 팔사도님의 명령을 받고 네놈을 처리하러 왔다. 아, 물론....” 잠시 말끝을 흐린 그가 백서희의 자태를 훑어보고는 음침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네 여자는 내가 잘 받아가마.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몸매도 훌륭해. 딱 내 취향이다.” 백서희는 콧방귀만 흥 하고 뀌었다. “미친 새끼가 지랄하고 자빠졌네.” “앙칼지군. 하지만 그래서 매력적이야.” 히죽거린 사내가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검은 평범한데 황금빛 태양을 새긴 둥근 방패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림인들은 방패를 잘 쓰지 않는다. 몸을 다 가리지 못하는 건 둘째치고, 어지간한 초식은 보신경으로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호신기나 호신강기로 막을지언정 방패를 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특별한 방패인가? 아니면 방패술을 익힌 건가?’ 아마 둘 다겠지. 강엽이 사내의 체내를 초음으로 살필 때, 사내가 오연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죽이기 전에 말해두마. 난 우문극 따위와 다르다. 그놈은 바깥에서 굴러들어온 뜨내기였지만, 난 신교 안에서 나고 자란 성골이다. 근본이 다르다는 거지.” 곧 시커먼 밤하늘 위로 황금색 기파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강엽이 피식 웃었다. “낮에 찾아오는 게 낫지 않나?” “광명의 신공이 태양 아래서 강해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밤이라고 특별히 약해지진 않아.” 실제로 금색의 서광이 어린 방패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밤하늘에 작은 태양이 뜬 것만 같았다. “더 궁금한 게 있나, 이교의 죄인?” “팔사도가 날 죽이면 뭘 주겠다고 하던가?” “하하, 이교의 죄인을 벌하는 일에 어찌 상을 논할까. 다만 자비로우신 팔사도님께서는 네놈을 죽이면 대교(大敎)의 지위를 약속하셨다.” 보통 대교라면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설파한 화엄경을 뜻하지만 광명마교에선 지위를 뜻했다. 혈교에 비유하면 교령과 교성을 합친 고위직. “대교라... 팔사도가 대충 나를 그쯤으로 본다는 거군.” “영광으로 알도록, 이교의 죄인. 너는 신교의 존귀한 성골인 나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신교의 선봉장이 되어 구주팔황에 신교의 위엄을 떨치겠다!” “잘 됐군.” “그래, 그러니 목 빼고 검을 받을 준비나....” “안 그래도 목이 칼칼하던 참이거든.” “...뭐?” 고개를 갸웃하는 사내를 무시하고 한 걸음 내디딘 강엽이 팔을 살짝 들어올렸다. 손목에 찬 검은 팔찌에서 맑은 금속음이 울려 퍼지면서 검은 안개가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흑무에 휩싸인 강엽의 모습에 사내는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파르르 경련했다. “그건 설마...!” “우문극과 싸울 땐 쓸 기회가 없었지.” 낭왕은 그렇다 쳐도 팔사도가 보는 앞에서 흑무암쇄진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 지금이야말로 흑무암쇄진이 광명마교의 마공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지 시험할 때였다. “최선을 다해라, 광명마교의 주구.”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