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하산 (1)
“역시 하루의 끝은 온천이지.”
“후우.”
녹초가 된 강엽은 낭왕의 말에 대답도 못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에 몸을 푹 담근 채 양팔을 바위 위에 걸치고 얼굴을 젖힐 뿐.
광명마교의 무리가 돌아간 지도 어느덧 한 달.
그 이전의 시간을 합치면 두 달이나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수련 강도가 강해졌기 때문에 매번 진이 빠졌다.
“며칠 뒤엔 돌아가겠구나.”
“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강엽이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낭왕에게는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랐다.
‘황산에 와서 얻은 게 많아.’
자성검법의 성취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학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깊어졌다.
솔직하게 말하면 일 년이고 이 년이고 계속 배우고 싶었다. 주기적으로 피를 구해야 하는 문제만 아니었다면 가르침을 청했겠지.
낭왕이 껄껄 웃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왕년의 자성검호를 알아서 망정이지.”
그가 자성검호와 교류하지 못했다면, 그리하여 자성검호가 구사했던 검법의 이상적인 형태를 알지 못했다면 조언 한마디 건넬 수 없었을 터.
그 덕분에 강엽은 자성검법의 전반 사초식을 터득한 것은 물론 후반 삼초식도 입문했다.
“그나저나 백가 아이하고는 어디까지 갔냐?
“예?”
“모르는 게냐,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게냐? 당연히 진도 어디까지 뺐냐는 거지.”
“아니, 그게....”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젊은 남녀 둘이 여행하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냐?”
“저흰 그런 사이 아닙니다.”
“뭐라고?”
낭왕이 경악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투였다.
“사천에서 황산까지 며칠이나 걸렸느냐?”
“한 달이 좀 안 걸렸습니다.”
“근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
아무 일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낭왕은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 고자냐?”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니면 사내 좋아하냐?”
“그게 무슨...!”
“아니, 뭐... 십인십색이라고 하지 않느냐. 세상은 넓고 성적 취향은 다양하니 이해... 음, 이해는 한다. 음, 그럴 수도 있지. 취향은 존중해야지.”
“그런 거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낭왕이 꺼림칙한 시선을 보내면서 몸을 뺐던 것이다.
“귀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니면 아니지 왜 소리치고 지랄이야.”
“저도 여자 좋아합니다.”
“그럼 왜 가만히 있는데? 저런 끝내주는 미인을 안 건드리면 그게 사내 새끼냐? 동자공이라도 익힌 게야?”
“어....”
“답답한 놈이로고. 그 나이 먹고 여자를 사귀어본 경험이 없느냐?”
“...한 번 있습니다.”
“그 처자하고는 잘 안 됐고?”
“안 좋게 헤어졌죠.”
“어떻게?”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저 같은 놈과 혼인하느니 부잣집 첩이 되는 게 낫다면서 차였습니다.”
향시에 합격하기도 전의 과거였다. 그게 마음의 상처가 되어서 이를 악물고 경전을 파고들었다.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서 보란 듯이 잘 살아보겠다면서.
나중에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진짜 사정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그녀의 집안은 염왕채 때문에 빚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돈이 급하게 필요했는데, 그녀 자신이 부잣집의 첩이 들어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여인은, 강엽이 무리할까 봐 매몰차게 쏘아붙였던 것이다.
“...그래, 그렇구만. 하지만 그건 오래전의 일이 아니냐? 설마 아직도 잊지 못한 건 아닐 테지.”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얘기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강엽이 쓰게 웃었다.
“예, 오래전의 일입니다.”
“그럼 백가 아이는 마음에 안 들고?”
“....”
강엽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자 낭왕이 폭소했다.
“이놈 숙맥이구만. 이 몸이 네 나이 때는 얼마나 화려했는지 아느냐? 한때 내 별호가 항주 불야성의 정력무적이었다. 수많은 미녀들과 주지육림을 즐겼었지....”
“거 별호 많으셔서 좋으시겠습니다.”
강엽은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저딴 별호를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 젊은 시절 만나본 여인들 중에서도 백가 아이만한 미인은 거의 없었거늘. 내가 진짜 삼십 년, 아니, 이십 년만 젊었어도....”
“부인이 있으신 분께서 할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그 아이가 언제까지나 네 옆에 있을 거란 생각은 버려라. 그전에 다른 놈팽이가 채갈 수도 있음이야.”
“....”
“표정 한번 살벌하구나.”
음흉한 미소를 지은 낭왕이 검지를 치켜세웠다.
“귀 씻고 잘 들어라. 무공 초식보다 수백 배는 귀한 가르침이니까. 일단은....”
* * *
“부탁 좀 해도 될까요?”
“아, 네. 말씀하세요.”
하오문주의 부름에 백서희는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라니?
“다름이 아니라 며칠 뒤면 새해니까요. 입이 많으니 준비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은데....”
하오문주의 설명은 이랬다. 갑자기 하오문의 일로 자리를 비워서 집안일을 돌볼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보통 이런 건 연에게 맡기지만, 연도 낭인전의 일로 산을 내려가서....”
우문극이 죽고 강엽이 새로운 금패가 되었다. 하지만 금패를 준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절차가 복잡한 것이다.
“남편에게 부탁하려고 해도 그이는 장을 보는 데 소질이 없거든요. 흥정도 안 하고 막 사고요.”
“그, 그래요?”
솔직히 백서희도 자신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본 경험도 손에 꼽는데 흥정을 어떻게 하겠는가?
‘근데 낭왕한테 시장을 보라고 하는 것도 좀....’
낭왕이 시장 상인들과 채소값 가지고 흥정하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양이 좀 많을 수도 있어요.”
“뭐,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면 되죠.”
“그러지 말고 강 무사와 함께 가는 건 어때요?”
“...시장이 밤에도 여나요?”
“아뇨. 해가 지기 전엔 파할 거예요. 제가 관천망기를 좀 볼 줄 아는데, 달무리가 진 게 내일은 날이 흐리지 않을까 싶어요.”
기실 장마철이 아닌 이상 하루 종일 흐린 날씨가 이어지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그러나 하오문주의 예상대로 다음날은 대낮부터 우중충한 먹구름이 잔뜩 드리웠다.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에 백서희가 미간을 모았다.
‘비 오기 전에 얼른 가야겠네.’
하오문주는 동이 트자마자 나갔기에 목옥엔 그녀와 강엽, 낭왕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강엽이 나왔다.
“어딜 가려고?”
“시장. 하오문주님이 부탁하신 게 있어서 장 좀 봐야 하거든. 참, 근데 너....”
“...?”
“아, 아냐.”
날이 흐리다가도 언제 다시 햇볕이 쨍쨍해질지 모를 일이었다.
백서희가 얼버무리자 강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라.”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럼 난 간다!”
“기다려.”
흐릿한 하늘을 슬쩍 올려다본 강엽이 방에 들어가서 죽립과 피풍의를 꺼내들고 왔다.
백서희가 눈을 껌뻑였다.
“가려고? 피곤하지 않아?”
“음, 어제는... 다른 의미로 피곤했지.”
온천욕을 하는 내내 낭왕이 젊은 시절 어떻게 여자들을 꼬셨는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혼자 가는 것보단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냐. 너 혼자 들기엔 양이 많을 수도 있는데.”
“어, 응. 고, 고마워.”
백서희가 뺨을 긁적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장에 내려갔다.
* * *
하오문주가 준 쪽지에 적힌 게 워낙 많아서 시장을 돌았을 땐 두 사람 모두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있었다. 심지어 강엽은 대나무로 만든 통발까지 어깨에 짊어졌다.
“괜찮아?”
“버틸 만해.”
“인정해야겠네. 나 혼자 왔으면 몇 번은 왔다 갔다 했을 거야.”
딸린 입이 많기도 하거니와 낭왕이 워낙 대식가라서 많이 샀다.
그렇게 마을을 떠나 황산의 초입을 지나쳤을 때.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는 느낌에 백서희가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쏟아지는 거 아니야?”
“일단 피해야겠다.”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기 전에 암벽 사이의 작은 동굴로 피신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워낙 비가 많이 와서 홀딱 젖어버렸다.
“으, 완전 질척질척해.”
“그냥 마을에서 묵는 게 나았겠는데.”
서둘러 목옥으로 돌아간다는 게 화근이 됐다. 산에 들어오자마자 소나기가 올 줄이야.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강엽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빨리 그치면 좋겠는데....”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까지 어두워지고 있었다.
경지에 오른 두 사람에게 야산이나 비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양손에 가득한 짐이 문제였다.
백서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지금 나가면 우린 무사해도 짐은 운명할 거야.”
“그건 안 되지.”
이것들을 사러 시장에 간 건데 제대로 건사하지 않으면 고생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한 강엽은 문득 빗물에 젖은 백서희를 보고 민망해져서 시선을 돌렸다. 젖은 옷이 몸에 딱 달라붙어 속살이 비쳤던 것.
얼굴이 붉어진 백서희가 눈을 흘겼다.
“어딜 봐?”
“크흠!”
헛기침을 하면서도 강엽은 동굴 안쪽에 불쏘시개가 없는지 살펴봤다.
바깥의 나무들은 젖어서 장작으로 쓸 수 없었다. 다행히 동굴 안쪽에 가느다란 나뭇가지들과 솔방울들이 널려 있었다.
“불 붙이려고? 부싯돌도 없잖아?”
“방법이야 만들면 되지.”
심호흡을 하며 진기를 모았다. 혈공진기에 뇌극의 심상을 부여하자 손끝에 붉은 뇌기가 번뜩였다.
그러모은 나뭇가지들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자 몇 번 팍팍 튀기는 소리가 나면서 불이 붙었다. 솔방울의 잣기름이 불을 좀 더 크게 키워줬다.
뜨거운 불이 동굴 안을 덥히자 조금 창백했던 두 사람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젖은 옷 입으면 고뿔 걸린다던데....”
모닥불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린 백서희는 곧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명색이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비 좀 맞았다고 고뿔에 걸릴 리는 없지만, 비에 찌든 옷을 계속 입는 것도 기분이 안 좋았다. 안 좋은 냄새도 풍기고 있었고.
이내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내적 갈등을 끝냈는지 옷을 훌러덩 벗기 시작한다.
그 대담한 행동에 오히려 강엽이 깜짝 놀랐다.
“뭐 하냐?”
“오, 옷 말려야지. 너도 벗어!”
혼자 부끄러운 것보단 둘이 부끄러운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강엽도 강요에 못 이겨서 바지만 빼놓고 홀딱 벗은 신세가 되었다.
“.......”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 모두 눈 둘 곳을 찾지 못해서 허둥거렸다.
그러면서도 백서희는 강엽을 몰래 훔쳐봤다. 바위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질은 아니지만, 잔근육이 발달한 게 눈요기하기는 딱 좋았다.
그동안 흡수한 고수들의 선천지기가 근골에도 영향을 줘서 이상적인 무인의 신체가 된 것이다.
불현듯 그녀는 의외로 강엽의 몸에 잔흉터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생력이 있는데도 완전히 낫진 않은 걸까.
“...흉터가 은근히 많네.”
“재생력도 완벽하진 않은 거지.”
대부분의 상처는 흉터도 없이 사라지지만, 고수들의 의념이 담긴 진기는 자잘한 흉터들을 남겼다.
“완전히 없애진 못하는 거야?”
“글쎄, 억지로 재생력을 끌어올리면 다 없앨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가 있나 싶더군. 너무 흉지지만 않으면 내버려두는 편이야.”
“...혹시 내가 남긴 상처도 있어?”
첫 만남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두 사람이었다. 당시 강엽은 그녀의 팔을 부러뜨렸고, 그녀는 강엽의 어깻죽지에 칼날을 박아넣었다.
“대충 여기쯤이던가?”
무의식적으로 강엽이 가리킨 곳을 매만진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하지만 매끈한 피부와는 다른 촉감이 손가락 끝에 남아 있었다.
그때 동굴 바깥에 환한 빛이 번쩍이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움찔 떨었다. 뒤이어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우렛소리가 귓가를 우르릉 강타했다.
“...바로 앞에 떨어진 거 맞지?”
“무섭냐?”
“당연히 무섭지. 고수도 벼락 맞으면 골로 간다고. 염라대왕이랑 면담하는 거야.”
천둥벼락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적어도 새벽까지는 내내 이어질 기세였다.
하나 그런 와중에도 추위를 쫓아내는 모닥불의 온도와 자꾸 가까워지는 남녀의 체온은 두 사람을 묘한 분위기로 몰고 있었다.
그건 지난 몇 달 동안의 여정으로 두 사람이 감정적으로 가까워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강호로 돌아가면 언제 무슨 일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동시에 같은 예감을 느낀 두 사람이 서로를 들여다보았고, 상대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강엽의 손이 뺨에 닿자 그녀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굳은살이 박인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의 입술이 한참 동안 이어졌고....
“괜찮겠어?”
“...응.”
검은 장포와 하얀 경장이 겹쳐진 바닥 위.
모닥불에 의존해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두 남녀가 몸에 남은 옷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