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61화 (161/450)

27화. 광명 (4)

밤하늘을 불태우는 듯했던 뇌광.

단순히 검격을 막는다고 끝이 아니라, 뇌기가 병장기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게 문제였다.

상대의 병장기나 신체 일부와 접촉한 상태에서 미끄러지듯 타고 오르며 두 번째 검격을 전개.

첫 번째 검격으로 남은 뇌기와 두 번째 뇌기를 동조해서 위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뇌아의 요결이다.

그 위력은 대결을 관전한 자들이 아찔함을 느낄 정도였지만, 정작 강엽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이걸로 죽진 않았겠지.’

뇌아는 강력한 초식이지만, 초식이 작렬했을 때 무언가 튕겨나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아마도 그건....

“죽을 뻔했군.”

뇌격을 맞고 솟아오른 분진 사이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뇌기를 쓰는 무공이라니... 본교에서도 일사도님 빼곤 쓰는 이가 없는데. 이런 데서 그런 무공을 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흙먼지를 뚫고 나온 인영이 득달같이 덮쳐온다.

투아아앙!

정면에서 부딪치는 일격.

전신에서 금빛 기파를 뿜어내는 우문극이 강렬한 살의를 토해냈다.

“하지만 비기는 네놈만 가진 게 아니야!”

강엽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우문극이 금광을 내뿜자 바늘로 찌르는 듯 살갗이 아려왔던 것.

‘역시 광명마교의 마공을....’

하긴 당연했다. 광명마교의 교도가 마공을 익히지 않았을 리가 있나.

광명마교도 우문극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상승의 마공을 주었을 터.

본래부터 자신이 지녔던 내공과 무리없이 화합했다면 그 성취 역시 작지 않겠지.

지켜보고 있던 팔사도가 흐뭇하게 웃었다.

“훗, 위극광일공(威戟光日功).... 이미 구성의 경지에 다다랐군요.”

강엽의 추측대로 광명마교는 우문극에게 기존 내공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마공을 하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단 비전의 영약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었다.

삼화취정의 경지에 다다르진 못했으나 우문극은 낭인 시절의 본인을 뛰어넘은 지 오래.

들끓는 공력으로 강엽을 튕겨낸 우문극이 바로 달라붙어서 강맹한 검격을 내쳤다.

전신으로 뿜은 가공할 열기가 검에도 옮겨붙어 검신이 주홍빛으로 타오른다.

강엽을 보호하기 위해 혈목 다발이 사방에서 그를 노렸지만....

“꺼져라, 하찮은 미물들!”

위광을 두른 우문극의 검이 휙 움직이자 수수깡마냥 잘려나가며 조각조각 떨어졌다.

그때 섬뜩한 감각이 우문극을 사로잡았다.

“헛!”

경호성을 지르며 고개를 숙이자 한 끗 차이로 칼바람이 그의 머리가 있던 곳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안심할 계제는 아니었다. 묵직한 족격이 그의 배후를 노리고 곡선을 그렸던 것이다.

강엽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어리석음을 체감한 우문극은 신법 경파로 회피했다.

‘이놈의 괴력은 비상식적이다.’

부딪칠 때마다 뼈마디가 나가버릴 듯 욱신거렸다.

공력으로 손목을 보호하고 충격을 해소해도 합을 나눌수록 충격이 배가된다.

‘피하면서 역습하면 돼. 위극광일공의 공력이라면 놈에게도 충분히 치명타를....’

-휘이이이익!

“흐읍!”

고막을 할퀴는 휘파람 소리.

본능적으로 공력을 둘러 귀를 보호했지만 너무 늦었다. 잠시나마 멈칫하는 틈을 타서 강엽이 다시 공방의 주도권을 빼앗았다.

자성검을 쥐지 않은 반대편의 손에 웅혼한 장력이 움텄다.

“흥, 이깟 한기쯤은...!”

광명의 위광으로 날려주리라.

그렇게 생각했던 우문극은 다음 순간 이어진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우우우웅...!

강엽의 손목을 감싼 경파가 태극의 원을 그리면서 한기를 가둔 것.

비스듬한 각도로 태극반을 돌린 강엽이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누구한테나 비기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

한 손엔 한기의 방패를, 다른 손엔 뇌기의 검을 움켜쥔다.

-한천태극패(寒天太極牌).

열양지기를 부리는 하후진과의 비무에서 조금 더 수월하게 대응하기 위해 만든 절기였다.

광명마교의 진기는 염왕도문과는 결이 다르나, 열양지기에 근본을 둔 것은 매한가지.

‘호신강기로 막아도 되겠지만, 그쪽은 공력이 너무 많이 소모되고.’

열기를 막는 데 있어선 한천태극패가 호신강기보다 유효한 절기였다.

우문극은 싸움도 잊고 망연해졌다.

“한기와 뇌기... 전혀 다른 기운을 다룬다고? 극음과 극양의 기운을? 그것도 동시에?”

“해보니까 되던데.”

혈공진기에 뇌극의 심상과 빙백의 심상을 불어넣고 동시에 각각 다른 경맥으로 운용한다.

진조의 영성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감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

우문극뿐만 아니라 팔사도도 경악했다.

“어디서 저런 재능이...!”

“하하, 저런 재능이니까 내가 가르친 게지.”

낭왕의 호탕한 광소에 우문극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역시 낭왕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저런 칭찬을 받진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 싸움은 내가 이긴다!”

강엽의 재능이 출중하다는 것은 몸소 겪었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경험은 그가 윗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다시 부딪쳤다.

쾅! 쾅! 카아아앙!

붉은 유성과 주황색의 유성이 수없이 위치를 바꾸면서 충돌한다.

정면승부를 피하면서 역습을 노렸던 우문극이었지만 막상 싸움이 재개되자 그럴 수가 없었다.

강엽의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그냥 빨라진 게 아니라 호흡을 빼앗으며 엇박자로 찌르고 들어온다.

짜악!

“크읍!”

뺨을 후려치는 손등.

호신기로 막았는데도 골이 울리는 충격에 우문극은 아득해졌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혈목이 기어올라와서 그의 발목을 잡아챈다.

뜨거운 열기에 주춤했지만 수십 다발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우문극도 답이 없었다.

“이 괴물 같은 새끼가!”

도저히 강엽이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낭인패의 등급이 실력에 비례하지 않는다지만, 동천패 따위가 이토록 강한 게 가당키나 한가.

하나 강엽은 그가 이를 갈든 말든 묵묵히 검격을 내려칠 뿐이었다.

꽝! 꽝! 꽈앙!

마치 둔기로 내려치는 듯한 소리.

우문극이 광명마교의 은총을 받아 강해졌다고 한들 전력을 다한 강엽의 검격을 영원히 받아낼 순 없었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깨달았다.

이건 더 이상 싸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처형.

“끄으윽!”

빠지지직...!

자성검에 깃든 뇌기가 점점 강해지고, 우문극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뇌둔(雷鈍).

자성검법의 사초식.

뇌광의 기둥이 우문극을 삼킨다. 호신기처럼 두른 열기는 아무런 도움이 못 되었다. 오히려 뇌기와 반응하여 몸 속에서 엇나갔다.

콰직!

거듭된 충격을 버티지 못한 검신이 끝내 산산조각 박살난다.

죽음을 직감한 우문극의 낯짝에 분노와 열패감의 감정이 묻어났고....

콰아아아아앙!

배다른 형제를 죽이고 가주가 된 야심가는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쪼개지는 최후를 맞이했다.

* * *

팔사도는 넋을 잃었다.

우문극이 무조건 이기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짓밟히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고작 오십여 초.’

차라리 단기 결전으로 끝났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고수들의 싸움은 종이 한 장 차이의 아슬아슬한 승부로 승패가 갈리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 싸움은 강엽이 철저하게 주도권을 쥐었다. 잠시 우문극이 위극광일공의 힘으로 반격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금세 뒤집혔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뇌공과 빙공도 모자라서 음공, 심지어 사술까지 쓰다니....”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문득 한 사람의 수급이 굴러들어오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강엽이 우문극의 목을 잘라 던진 것이다.

“가져가라. 그놈이 우문세가의 가주라면서? 일가의 가주가 죽었는데 장사는 지내줘야지.”

“...오늘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자신을 노려보는 푸른 눈동자에 원독이 서렸지만 강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팔사도를 향해 물었다.

“야율산산과는 무슨 관계지?”

“당신이 그 이름을 어떻게...?”

“한번 만난 적이 있어서.”

“...빙궁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 만났는지 모르겠군요.”

고개를 흔든 팔사도가 교도들에게 우문극의 수급을 챙길 것을 명했다.

“팔사도님, 우문 형제의 몸은....”

“우문세가엔 수급만 전해줘도 될 겁니다.”

막대한 투자를 한 우문극이 죽었지만 팔사도는 냉정했다. 분노한 것과는 별개로 특별히 애도하는 기색은 없었다. 다시 강엽을 흘깃한 그녀가 말했다.

“전 그 아이의 고모입니다. 대답이 됐는지 모르겠군요.”

“충분히.”

호기심에 물어봤을 뿐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강엽이 끄덕이자 팔사도는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더니 짐짓 한숨을 내쉬고는 낭왕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군요.”

“우문세가는 어쩔 셈이냐?”

우문극이 죽었으니 가주의 자리는 공석이다.

팔사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글쎄요. 우문 형제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누가 가주가 되든 본교의 대업에 지장은 없습니다.”

광명마교의 입장에서 우문극은 얼마든지 갈아끼울 수 있는 톱니바퀴였다. 그가 죽어도 대안은 존재한다.

우문세가는 광명마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팔사도의 이야기로 그 사실을 직감한 낭왕은 혀를 차며 말했다.

“역시 네놈들은 마교가 맞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다시 한번 강엽을 흘끔 돌아본 팔사도가 예를 갖추고 교도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낭왕의 폭거로 무릎이 부러진 교도들은 다른 교도들이 업고 하산했다.

“.......”

둘만 남은 공터에 쓸쓸한 바람이 지나간다.

잘려나간 단면에서 내장 조각과 피를 게워내는 우문극의 시신을 굽어보는 낭왕의 얼굴은 씁쓸해졌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더니.”

열흘 붉은 꽃은 없다지만 우문극은 십 년은커녕 일 년도 가주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명심하거라. 강호에서 죽음은 한순간에 찾아온다. 오늘은 우문극이 죽었지만, 내일은 너나 내가 죽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팔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하루살이가 된 것처럼 들립니다만.”

“팔존은 사람 아니더냐?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강할 뿐이다. 강한 사람은 더 강한 사람에게 죽는 법. 백날 열심히 수련해도 나보다 강한 사람은 있다. 당장 광명마교주만 해도 승산을 장담하지 못하는 강자 아니냐.”

“그가 천하팔존보다 강하다고 보십니까?”

“강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강호에 출두할 결심도 못했겠지. 교주 휘하의 일사도만 해도 얼마나 강한지 짐작이 안 된다.”

사도십대고수를 십초지적으로 격하시킨 자가 이인자에 불과했다.

오늘 만난 팔사도 역시 만만치 않은 저력을 지녔다.

“나중에 그 팔사도라는 여인을 다시 만나면 조심하거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데, 하물며 절세고수인 여자가 한을 품으면 얼마나 무섭겠냐. 필시 눈보라가 불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시신은 연에게 치우라고 해야겠다. 괘씸한 녀석이지만 시신마저 능멸하고 싶진 않구나.”

강엽은 반대하지 않았다.

‘뭐, 흡혈이야 혈목한테 맡기면 되니까....’

혈목을 각성한 뒤엔 직접 송곳니를 박고 피를 빨 필요가 없어졌다.

“그보다 삼초식과 사초식을 써본 경험은 어떠냐?”

“담금질을 더 해야 합니다. 쓸 수는 있지만 아직은 미숙합니다.”

“그거야 익숙해지면 될 일이지. 오초식은?”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기약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는구나. 대충 감을 잡았다는 뜻이렷다.”

낭왕에게 가르침을 받는 지금 강엽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어제보단 오늘이 더 강하다. 오늘보단 내일이 더 강할 것이다.

“좋군. 앞으로 한 달만 더 있다 가라. 그때쯤엔 네 녀석 자성검법도 제법 쓸 만해지겠지.”

금패급의 고수를 죽였음에도 낭왕은 만족하지 않았다.

강엽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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