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49화 (149/450)
  • 24화. 부름 (2)

    “전멸했다고?”

    명부(冥府)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에 교위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납작 엎드렸다.

    눈앞의 사람은 혈교에서도 열여섯 명밖에 안 되는 교성의 일좌.

    교성들 중에선 비교적 말석이라 하나, 한낱 교위에 비하면 지고한 신분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흉수는?”

    “...당문입니다.”

    “당문?”

    “속하는 냉혼서생의 명으로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반나절쯤 지났을 때 당문의 무인이 마을에 달구지를 빌리러 왔습니다.”

    “달구지는 왜?”

    엉뚱한 말에 교성이 시선을 갸우뚱 기울이자 엎드린 교위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놈들이 제물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군.”

    혈교도들이 표국을 위장하면서 끌고 갔던 짐마차는 하후진의 창염에 깡그리 불타버렸다.

    해서 당문은 납치된 사람들을 옮기기 위해 마을에 들러 대량의 달구지를 구했다.

    차마 당문에 접근할 수는 없어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본 교위는 그렇게 전후사정을 알아낸 뒤에 사천 총타로 귀환했다.

    “하면, 놈들이 혈라분에 대해 알았을 수도 있겠어.”

    위기에 처하면 혈라분을 복용하라는 지침을 내리지 않았던가.

    교성이 시선을 흘깃 돌렸다.

    “당문놈들이 시체를 조사해서 혈라분의 정체나 약재를 알아낼 수 있나?”

    “불가능합니다.”

    교성의 옆에 공손히 선 술사가 단언했다.

    “섣불리 장담하지 마라. 당문은 독에만 정통한 게 아니야.”

    “교성께서도 아시잖습니까. 혈라분의 약재는 의외로 평범합니다. 설령 당문이 혈라분에 어떤 약재가 들어갔는지 알아낸다고 해도....”

    길쭉한 얼굴에 달린 가느다란 눈매가 둥근 호선을 그렸다.

    “그게 전부지요. 혈라분의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놈들은 독과 약에만 정통할 뿐 술법에는 무지하지요.”

    “술사를 대동시킨다면?”

    “마찬가지입니다. 본파의 술법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술사는 알아볼 수 없지요. 구파의 술맥이라고 다를 것도 없고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또한 그들이 알아낸 혈라분은 기껏해야 한 종류입니다. 교도들이 지닌 혈라분에만 집중한다면, 가장 중요한 걸 놓치게 될 겁니다.”

    혈라분은 한 종류가 아니다.

    혈교는 두 가지의 약을 만들었고, 그중 하나만 교도들에게 지급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하나였다.

    “다른 혈라분은 암시장을 통해 퍼져나갔습니다. 당문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쯤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사천 전역에 그들이 만든 혈라분이 퍼져 있으리라.

    그제서야 교성의 입가에도 한 줄기 미소가 걸렸다.

    “그 옛날 흑룡교는 멍청한 짓을 했었지. 천하를 석권하려면 강호 무림과 전쟁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건만. 본교는 놈들과 다르다.”

    드넓은 천하에 비하면 강호 무림은 한 줌에 불과하다. 혈교는 그 한 줌을 정복하는 데는 관심 없었다.

    진정으로 천하를 얻으려면, 천하를 이루는 민중들부터 손에 넣어야 하는 법.

    “아미와 청성은 산에서 고상이나 떨고 있고, 폐쇄적인 당문은 방구석에서 독이나 만지고 있지.”

    사천삼패의 힘은 강대하지만,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는다면 두려울 게 없었다.

    “태화문의 공작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각별히 유념하도록. 모든 일들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져야 대계(大計)가 성공한다.”

    혈라분은 대계의 전초였다.

    사천 전역에 혈라분을 뿌리는 것을 시작으로 이 땅에 다시 한번 피의 바람이 몰아치리라.

    교성은 가까운 미래를 예감하며 낮게 웃었다.

    * * *

    강엽은 숙정방에 오자마자 교위의 시신을 창고에 넣어뒀다.

    숙정방 한 켠엔 전대 방주가 만든 빙고(氷庫)가 있었는데, 땅 깊숙한 곳에 만든 장소였기 때문에 얼음을 채우지 않아도 일년 내내 서늘했다.

    물론 그런 조치를 해도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혈라분으로 인해 변질된 진기의 영향인지 부패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어때? 뭣 좀 알아냈어?”

    백서희가 물었다.

    강엽이 보름 동안 끼니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교위의 시신만 만지작거렸던 것이다.

    보름은 무언가를 알아내기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엽은 막힘 없이 대답했다.

    “한 가지 알아냈지.”

    “뭔데?”

    “혈라분을 만들 때 모산파의 술법이 쓰였다는 것. 아마 모산혈조가 관여했을 거야.”

    시체에 깃든 미약한 술법의 흔적. 모산파의 술법을 익힌 강엽은 익숙한 자취를 느꼈다.

    “모산파는 강시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우리 무지개 꾸러기 같은?”

    “...그래, 뭐 걔들처럼.”

    무시무시한 강시들을 친근하게 말하니 지독한 괴리감이 몰려온다.

    강엽은 떨떠름한 기분을 애써 숨기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많이 다르긴 해. 모산파의 강시술은 본래 망자를 고향으로 인도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니까.”

    모산파가 개파한 시기는 중원이 통일되지 않아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터지는 난세였다.

    전쟁터에서 죽은 대량의 시신을 일일이 운반할 수가 없어서, 시신에 남은 혼백을 이용하여 잠시 일으켜세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든 강시는 싸울 힘도 없고,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웠어.”

    “아, 이렇게 움직이지?”

    백서희가 두 손을 앞으로 뻗고 껑충껑충 뛰었다.

    아무래도 홍예칠위처럼 인간적인 것보다는 이쪽이 더 전통적인 강시의 움직임에 가까웠다.

    “그래, 그렇게 만든 강시술이 후대로 가서 사특한 비술로 쓰였다는 게 문제지만.”

    “잠깐, 그럼 모산파의 술법이 약에 쓰였다는 건....”

    “이건 흡혈귀를 만드는 약이 아니야. 강시를 만드는 약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강시로 만든다고?”

    “생강시(生僵尸)라고 있어.”

    엄밀히 말하면 홍예칠위 역시 생강시의 일종이었다.

    살아있는 무인을 강시로 만들었으니까.

    “한번 복용한다고 강시가 되진 않지만 한꺼번에 대량을 복용하거나, 소량이라도 자주 복용하면....”

    강시로 만들기에 적합한 그릇이 된다.

    술사가 술법으로 일으키면 완벽히 강시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흡혈귀의 성질까지 갖고 있고.”

    강엽이 한쪽에 놓아둔 호리병의 마개를 열고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시체에 쏟아넣었다.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냄새에 백서희가 콧잔등을 한껏 찌푸렸다.

    “피야?”

    “맞아. 종류별로 구해놨지. 평범한 사람의 피도 있고, 무림인의 피도 있고....”

    단목정에게 요청해서 의원에서 사혈(瀉血)로 짜낸 피를 대량으로 구해놓은 것이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시체에 상처를 내고 피를 들이붓자 딱지가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 각쯤 지나자 새살이 돋는 게 아닌가?

    “세상에, 이게 뭔 일이야?”

    상리를 초월한 괴사였다.

    이미 죽은 시체가 재생력을 발휘하다니?

    “단전의 진기가 살아있기 때문이야. 나와 비교하면 새 발의 피지만....”

    강엽이었다면 피를 마실 것도 없이 이보다 깊은 상처도 눈 깜짝할 새에 아물었을 것이다.

    “단목정의 피도 써봤고, 고섭풍의 피도 써봤지. 축기량이 많은 사람의 피일수록 효능이 뛰어나.”

    그리고 강엽은 일련의 관찰로부터 하나의 가정을 이끌어냈다.

    “모르긴 해도 입맛도 흡혈귀처럼 변했을 거다. 피냄새를 맡으면 군침이 돌거나, 피맛이 나는 고기를 찾거나....”

    “....”

    백서희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비약을 먹은 걸로 그 정도라면, 진짜 흡혈귀가 느끼는 흡혈욕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표정으로 그녀의 생각을 읽은 강엽이 팔짱을 끼며 쓰게 웃었다.

    “나도 꽤나 고생했지. 그래서 피를 주기적으로 마셔야 했고. 그래도 고수의 피를 먹으면 한동안은 버틸 만해.”

    흑룡교의 일로 두 자릿수에 달하는 절정고수의 피를 흡수했기 때문에 몇 달은 안전했다.

    “피 대신 먹을 수 있는 건 없어?”

    “글쎄, 찾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지만....”

    태양에 약한 약점이 생존과 직결됐다면, 흡혈의 약점은 인간성과 직결되었다.

    “어떻게든 찾아내야지. 언제까지고 이런 괴물로 살 수는 없으니까.”

    영원히 못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십 년이 걸리든, 백 년이 걸리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에 비하면 혈교는 자신이 가는 길을 막고 있기에 치워야 하는 돌부리에 불과할 뿐.

    “.......”

    낮은 목소리에서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굳은 결기를 엿본 백서희는 말문이 막혔다.

    강엽이 평생을 맞서 싸워야 할 일생일대의 대적.

    그것은 모산혈조도, 혈교도, 다른 사대마교도 아니라 흡혈귀의 굴레 그 자체였다.

    ‘흡혈귀로서의 자신이 극복해야 할 적이라니....’

    과연 가능할까 싶은, 어쩌면 평생 이루지 못할 목표를 짊어지고 사는 건 어떤 심정일까.

    특별한 목표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그녀로선 상상하지 못할 무게로 다가왔다.

    “...아무튼 원래 얘기로 돌아가지. 이제 마지막으로 시험해볼 게 남았어.”

    “뭐, 뭔데?”

    “내 피.”

    지금까진 인간의 피만 썼다.

    하나 흡혈귀의 피를 먹였을 때 교위의 시체는 어떤 변화를 보여줄 것인가.

    백서희의 목이 꼴깍 움직였다.

    “위험한 거 아니야? 그거 강시나 다름없다며? 막 되살아나서 공격하는 거 아냐?”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조심해야겠지.”

    엄지손가락을 질끈 깨문 강엽이 교위의 시체에 다시 상처를 내고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렇게 피가 상처 위로 떨어지는 순간.

    “그르르르...!”

    교위의 시체가 눈을 번쩍 뜨며 발광했다.

    “우, 움직인다!”

    “일단 지켜보자고.”

    기겁해서 멀찍이 물러난 백서희에 반해 강엽은 느긋하게 다시 깨어난 교위를 관찰했다.

    사지가 잘렸기 때문에 놈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마당.

    그래도 혹시 모르는 사태를 대비해서 손짓을 하자 혈목이 바닥을 뚫고 올라와서 교위를 옥죄였다.

    “그아아아아!”

    “이성은 없는 것 같은데....”

    울긋불긋 핏줄이 돋은 얼굴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만두처럼 부풀어오르는 꼴에 불길함을 느낀 강엽이 백서희의 앞을 막고 호신강기를 둘렀다.

    콰아아아아앙......!

    * * *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난데없는 충격이 굉음이 장원을 강타했다.

    하후진과 단목정 등을 비롯한 굉음의 진원지가 강엽이 있는 빙고라는 사실을 알고 달려갔다.

    안쪽에서 일어난 폭발로 인해 철문이 우그러진 빙고에서 기침 소리가 새어나왔다.

    “콜록! 콜록! 어우, 이게 뭔 난리야?”

    “괜찮나?”

    “하나도 안 괜찮아. 갑자기 왜 그게 폭발해가지고.”

    “미안하다. 내 불찰이야.”

    예상을 뛰어넘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건 각오했지만 설마 시체가 폭발할 줄은 몰랐다.

    경파처럼 터져나온 충격파와 그 안에 섞인 뼛조각들은 벽력탄 못지않게 파괴적이었다.

    제때 호신강기를 펼치지 않았다면 강엽 자신은 몰라도 백서희는 크게 다칠 뻔했다.

    “야, 잠깐. 너 등짝이....”

    백서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엽이 그녀를 감싸면서 등으로 충격을 받아낸 것이다.

    “호신강기 덕분에 무사해.”

    “아니, 그래도...!”

    “걱정 마라. 다쳤어도 나아.”

    “그거랑 이건 별개지!”

    흡혈귀라고 고통을 못 느끼겠나. 강엽이 재생력을 지녔어도 아픈 건 아픈 것이다.

    “안 다쳤으니까 된 거지.”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어험험!”

    돌연 바깥에서 들려온 기침 소리에 강엽과 백서희 모두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우그러진 철문을 뜯어버리고 들어온 하후진이 불퉁하게 꼬나보고 있었다.

    “남들 다 보고 있는데 애정행각은 작작하지 그러냐. 보는 사람들은 생각 안 해?”

    그 말에 흠칫한 백서희가 고개를 돌리자 단목정이나 고섭풍 등이 시선을 돌렸다.

    “저, 저는 아무것도 안 봤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꼭 붙어있던 강엽과 백서희가 전광석화처럼 떨어졌다.

    강엽이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크흠,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어휴, 아무렴요. 무지하게 놀랐습죠. 웬 화탄 터지는 소리가 나서 달려왔는데 철문은 찌그러졌지, 걱정하며 들어왔는데 웬 연놈들이 입맞춤 쪽쪽할 기세로 껴안고 있지. 좀만 놔두면 아주 그냥 신방을 차릴 기세더만.”

    하후진이 짐짓 과장되게 느끼한 표정으로 껴안는 시늉을 하자 단목정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백서희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하후진.”

    “...응?”

    “넌 곱게 죽지 못할 줄 알아.”

    얼굴은 화사하게 웃는데 싸늘한 살기가 뼛속까지 파고든다.

    하후진이 등골이 오싹해져서 강엽을 돌아보자 그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충 살아남을 생각은 버리라는 턱짓이었다.

    “...나, 난 중요한 볼일이 생각나서 이만!”

    “야, 어딜 도망가!?”

    하지만 백서희는 하후진을 쫓지 않았다. 쫓으려다 멈칫하곤 강엽을 돌아보며 멋쩍어했다.

    “그, 구해줘서 고마워.”

    “신경 쓰지 마라. 애초에 내 실수였어.”

    “예상하지 못한 일이잖아.”

    “그래서 귀중한 실험체를 날려버렸잖냐.”

    교위의 시체가 있던 곳엔 약간의 핏자국과 뼛조각만 남아 있었다.

    강엽이 아쉬움의 한숨을 흘렸다.

    “당문에 가야 하나....”

    * * *

    “어디서 벼락이 쳤나....”

    풀잎을 문 사내가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먹구름이 끼기는커녕 구름 한 점 없이 청량했다.

    이내 별것 아니라고 여긴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대문 위로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는 대문 위쪽에 걸린 현판을 천천히 읽었다.

    “숙정방.”

    사천에서 오래 활동했지만 처음 방문하는 곳.

    노주의 흑도가를 지배하는 노주삼흑에 대해선 얼핏 들어봤으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근자에 노주 흑도가에 풍운을 부른 ‘그’가 아니었으면, 그리고 위에서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다면 이쪽으로 걸음할 일도 없었겠지.

    허리춤에 검을 찬 사내가 터벅터벅 걸어가자 문지기들이 경계했다. 조금 전의 폭발음 때문에 그들의 신경도 곤두선 상태였다.

    “약속을 잡고 오셨소?”

    “아니.”

    “그러면....”

    “안쪽에 전갈을 넣어줬으면 하는데. 금파검 능정각이 찾아왔다고.”

    “...!”

    금파검 능정각.

    사천 무림에 단 두 명밖에 없는 금패급 낭인의 등장에 문지기들은 혼이 쏙 빠졌다.

    그러나 충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내가 왜 왔냐고 집주인이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면 될 거야. 낭왕이 귀영을 찾는다.”

    강호 무림에서 가장 강한 여덟 명의 절대자, 천하팔존.

    그중 한 명인 낭왕이 강엽을 보기 위해 금패급 낭인을 사절로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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