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부름 (1)
싸움이 끝났지만 바로 자리를 뜨진 못했다.
동굴에서 구한 사람들을 내버려둘 수도 없을뿐더러,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당우경은 혈교도들의 시체를 당문으로 가져가서 연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만약 이 약이 혈교도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다면 간과할 수 없소. 대책을 세워야지.”
냉혼서생이 입을 나불거린 덕에 약의 이름이 ‘혈라분’이라는 것까지는 알아냈다.
이제는 이 약의 정체가 무엇인지, 복용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아내야 할 터.
강엽은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시죠.”
“내친김에 교령의 시체도 가져가고 싶소만....”
“안 됩니다.”
단호한 거절에 당우경이 멈칫했다.
“...정말 안 되오?”
은근히 부탁하는데 말에도 강엽은 난공불락의 철옹성처럼 딱 잘라 거절했다.
“저도 가져가서 연구할 겁니다. 대신 당문은 네 구나 가져가지 않습니까?”
“끄응, 그래도 비교군은 넉넉해야 하거늘.”
당문이 확보한 시체는 교위 한 명과 평교도 세 명이었다. 그래도 교령의 시체가 있다면 혈라분의 효능을 더 상세히 분석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얼마나 간곡하게 부탁하든 강엽은 요지부동이었다.
“안 됩니다. 시체를 해부할 수도 있는데, 망가지면 다시 봉합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러지 말고...!”
어떻게든 교령의 시체를 해부해보겠다고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빈말로도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서 활수명의라는 별호까지 얻은 당우경이 교령의 시체를 노골적으로 욕심내자 백서희와 하후진은 할 말을 잃었다.
‘와, 의원이 아니라 미친놈인데?’
‘이놈이나 저놈이나....’
두 사람이 암야대로 시선을 주자 다들 먼 산을 돌아보거나 딴청을 피우는 시늉을 한다.
자기들도 쪽팔리지만 차마 가문의 어른을 욕되게 할 수는 없어 참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묘정도 곤란한 미소를 띠우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숙부님이 새로운 연구과제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변하시는지라....”
“아, 아니. 그럴 수도 있죠. 강엽 쟤도 가끔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백서희도 계면쩍게 웃었다. 서로를 향해 애쓴다는 이심전심의 미소를 나누는 두 여인이었다.
그제서야 분위기가 이상해졌음을 깨달은 강엽과 당우경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물러났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크흠, 그렇구려. 내 잠시 체통을 잃었소.”
“그래도 시체는 못 드립니다.”
“본가의 최신 설비와 촉망받는 의원들을 동원하면 비약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소. 개인이 연구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말이오.”
“그쯤은 저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당문보다 빠르게 알아낼 겁니다.”
“공자가 이쪽으로 얼마나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는 게 아닌가 싶소만. 본가는 이쪽 분야의 전문가요.”
“혈교의 비약이니 술법의 힘이 담겼을지도 모릅니다. 당문에 저명한 술사가 있습니까?”
“그러는 공자는 술법을 쓸 줄 아시오?”
“예.”
강엽이 발치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서 무어라 진언을 중얼거리자 불씨가 확 타올랐다.
당우경이 당황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술사는 초빙하면 되오.”
다시 시체의 소유권을 놓고 말씨름을 할 조짐이 보이자 결국 하후진이 나섰다.
“저 새끼 족친 건 난데 왜 댁들끼리 주네 마네 하는 건데?”
짝다리를 짚고서 삐딱하게 노려보자 강엽과 당우경이 서로를 곁눈질하면서 무언의 합의를 봤다.
“여태껏 함께 싸운 전우를 버리고 잘 모르는 사람한테 귀중한 시체를 넘겨주진 않겠지?”
“크음, 하후 무사. 무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하루 속히 저 비약의 비밀을 알아낼 필요가 있소. 본가에 시신을 인도하면 본인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약의 비밀을 알아내어 온 무림에 알릴 것이오.”
강엽은 친분을, 당우경은 대의를 걸고 설득했지만 하후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됐고, 나한테 뭐 줄 수 있는데?”
하후진은 낭인이다. 그리고 낭인은 어떤 일이든 공짜로 해주는 법이 없다.
낭인의 생태에 익숙한 강엽이 잽싸게 말했다.
“나흘에 한 번씩 대련하는 건?”
“이게 누굴 호구로 보나.”
씨알도 안 먹히자 당우경이 뒤이어 나섰다.
“이만 냥은 어떻소?”
이만 냥이라면 은천패 기준으로 웬만한 의뢰 서너 건을 합친 금액이었다. 마냥 무시할 돈은 아니다.
그러나 하후진은 인상을 썼다.
“돈 말고 다른 거.”
“...본가가 만든 최고급 요상약과 해독약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본가의 약은 무림 최고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성수장의 것을 제일이라 치지만, 그건 본가의 약이 소량만 만들기 때문이지. 본가의 약이야말로 무림 제일이외다.”
“영약.”
강엽이 투척한 대형 떡밥에 당우경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아무리 혈라분을 복용한 교령의 시체가 탐난다고 해도 영약을 내놓겠다니?
“상품의 백년하수오는 어때?”
“아, 이건 좀 끌리는데... 거기에 좀 더 얹어봐. 사흘에 한 번씩 비무를 해준다며?”
“나흘에 한 번이라고 했는데?”
“전우 사이에 사소한 건 넘어가자.”
“....”
그게 어딜 봐서 사소한데?
강엽이 내심 투덜거릴 때 당우경이 눈을 질끈 감고 질러버렸다.
“불침단(不侵丹)!”
“수, 숙부님! 그건...!”
불침단이 뭔지는 몰라도 당묘정이 저리 놀라는 것을 보면 범상치 않은 물건임은 확실했다.
하후진이 뚱하게 물었다.
“그게 뭐요?”
“...독에 대한 내성을 길러주는 약이에요.”
당우경으로부터 무언의 허락을 받은 당묘정이 한숨처럼 대답했다.
백서희가 놀라서 물었다.
“당문에 그런 약이 있다고?”
“본가에도 물량이 많진 않아요. 처음으로 만든 것도 오 년 전이고... 지금은 임상을 끝낸 뒤에 공을 세운 무사들에게 포상으로 나누어주고 있어요.”
독공(毒功)의 대종사답게 당문의 혈족들은 어느 정도 독에 대한 내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독공을 익힌 것은 아니다. 방계 출신의 하급 무사들은 한계가 뚜렷했다.
불침단은 하급 무사들의 내성을 길러주기 위해 만든 비약이었다.
“이름 그대로 만독불침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지만 독에 대한 내성은 굉장히 강해져요. 어지간한 벌독이나 뱀독에도 잘 죽지 않고... 극독에 중독당해도 단숨에 죽음에 이르진 않고요.”
“그건 엄청난데.”
무림 고수라고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한 것은 아니다. 공력으로 잠시 억누를 수 있을 뿐. 공력이 다 떨어지면 중독당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예, 엄청나죠. 귀한 약재를 많이 써서 본가에서도 매년 서른 알밖에 만들지 못하는데....”
심지어 서른 알 전부를 당문에 보관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림맹이나 구파, 팔가를 비롯한 당문의 우방에 선물로 보내기 때문이다.
당묘정이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냐는 듯 따가운 눈총을 보내자 당우경이 짐짓 근엄하고 엄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그깟 불침단이 대수겠느냐. 형님께서도 이해해주실 것이다.”
실로 사명감 넘치는 목소리였지만, 시체를 놓고 아웅다웅한 모습을 떠올리면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본인도 자신의 추태를 아는지 차마 조카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뒷짐을 진다.
하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그걸로 하겠수다.”
졸지에 배신당한 강엽이 충격받은 얼굴로 돌아보자 하후진이 얼른 말을 보탰다.
“대신 세 알을 받아야겠수.”
손을 들어 자신과 강엽, 백서희를 가리킨다.
백서희가 바로 손을 들었다.
“난 이 거래 찬성! 아, 시체 그까짓 거 대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드려야죠!”
대의가 아니라 당문의 비약을 위해서였지만 그걸 가지고 트집 잡는 사람은 없었다.
대세가 기울어지자 강엽도 체념했다.
“...어쩔 수 없지.”
“으음, 불침단 세 알이라....”
당우경은 상당한 부담을 느끼는지 쉬이 대답하지 못했으나, 하후진은 아쉬울 게 없다는 태도였다.
“못 주쇼? 그럼 말고.”
“아니, 잠깐! 그런 게 아니라...!”
밀고 당기는 흥정에 당우경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대가문 태생으로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본 적이 없는 그가 언제 이런 거래를 해봤겠는가?
무림 명숙으로서 경험을 쌓은 것과 별개로 이런 흥정은 시전상인만도 못할 수밖에.
당묘정이나 암야대라고 다를 건 없어서, 결국 불침단 세 알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교령의 시체를 넘겨받았다.
“아, 이거 원래는 각서까지 써야 하는데... 설마 활수명의나 되는 양반이 가문과! 본인의 명예를 걸고! 사기를 치진 않을 테니 불필요한 절차는 넘어갑시다.”
“...눈물 나게 고맙구먼.”
뭔가 사기당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당우경은 찝찝해졌지만 꼬투리를 잡을 구석이 없었다.
그렇다고 거래를 물리자니, 비약을 복용한 교령의 시신을 다시 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마당.
이후 세부사항을 논의하고 거래를 끝마친 하후진이 씩 웃었다.
“시원하게 거래 끝났으니 우린 가보겠수. 그 불침단인지 뭔지는 노주의 숙정방으로 보내주쇼!”
“당 소저, 나중에 다시 봐요!”
“....”
눈앞에서 교령의 시체를 놓친 강엽이 아쉬워했지만 이내 미련을 털고 포권을 쥐었다.
일행이 사라지자 당묘정이 당우경을 흘겨보며 새침하게 말했다.
“가문에 돌아가면 아버지께 다 말씀드릴 거예요.”
“걱정 말거라. 형님께서도 이해해주실 게야.”
“정말요? 올해 화산파 장문인께서 고희(古稀)를 맞이하셔서 불침단 일곱 알을 보내겠다고 하셨는데요?”
“...추가로 만들어야지.”
불침단을 만드는 당문의 의원들이 들었다면 한숨을 푹푹 내쉬었을 대화였다.
당우경도 도끼눈을 뜬 당문주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을 흘렸지만, 관제묘 안쪽에 누워있는 교령의 시체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허허, 오랜만에 몸이 근질거리는구나. 이 친구 몸엔 어떤 비밀이 있을지 참 궁금해.”
과연 당문의 혈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당우경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조카이자 제자인 당묘정은 눈을 반짝이는 숙부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잘했다.”
거리가 충분히 벌어지자 강엽은 그렇게 말했다.
교령의 시체를 놓쳐서 아쉬워하는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뜻밖의 수확이었지.”
하후진이 희희낙락하게 웃었다.
“인정.”
백서희도 격하게 공감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그래도 그걸 포기할 줄은 몰랐어. 처음부터 저 녀석이랑 작당한 거잖아?”
그렇다.
강엽이 당우경과 교령의 시체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중간에 하후진이 흥정한 것은 사전에 짠 계획이었던 것이다!
“교령의 시체는 필요 없었어?”
“멀쩡하지 않았거든.”
염왕도문의 절기 열뢰.
경혈에 심어놔서 한꺼번에 격발하는 내가중수법의 묘리는 교령의 경맥을 완전히 찢어놓았다.
심지어 단전까지 영향을 미쳐서, 비약으로 인해 이질적으로 변한 진기도 버티지 못하고 타버렸다.
일찌감치 그 사실을 알아낸 강엽은 교령의 시체를 가져가봤자 의미가 없음을 파악하고, 하후진과 모의해서 시체를 팔아넘긴 것이다.
“당우경은 그것까진 모르겠지. 경맥이 찢어졌다는 건 알겠지만, 딱 거기까지일 거고.”
“한마디로 사기잖아?”
“그래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교령의 시체를 다른 시체와 바꾼 것도 아니고, 그냥 강엽에게는 쓸모가 없어 팔았을 뿐이었다.
백서희가 눈을 흘겼다.
“와, 그렇구나. 거짓말은 안 했구나. 결함이 있는 물건을 무려 비약을 받고 팔아넘긴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신가요?”
“...크흠.”
솔직히 사람이라면 양심이 찔리지 않을 수가 없긴 했다.
당우경이 교령의 시체를 탐내기에 팔긴 했는데 가문의 비약을 주겠다고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대신 술법이 필요할 때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그걸로 상부상조해야지.”
“덤으로 당문이 알아낸 성과도 얻고?”
“...뭐, 나도 연구한 걸 알려줄 거니까.”
그렇게 말한 강엽이 걸음을 멈추고 자성검을 뽑아 땅밑에 비스듬히 찔러넣었다.
공력을 쏟아붓자 흙더미가 폭발하듯 날아가며 그 아래 묻힌 시체가 드러난다.
앞서 탈출을 시도했다가 목숨을 잃은 교위의 시체.
“난 이놈한테서 알아내야지.”
혈공진기와 비슷한 성질을 지닌 비약의 기운.
모르긴 몰라도 흡혈귀를 모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만은 직감적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