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50화 (150/450)
  • 24화. 부름 (3)

    금파검 능정각.

    그가 찾아왔다는 소식은 강엽에게도 뜻밖으로 다가왔다.

    하물며 낭왕의 전갈을 들고 왔다니?

    “짐작되는 구석 없냐?”

    은천패 낭인으로서 명성을 떨친 하후진도 낭왕에게 관심을 받은 적은 없었다.

    심지어 강엽은 아직 은패도 되지 못한 동천패 아닌가.

    ‘뭐, 동천패 같지 않은 놈이지만.’

    무공만 보면 금패로 올라가도 무방했다.

    그러나 낭인패의 등급은 실력이 아니라 공적에 따라 매겨지는 것.

    실력이 출중해도 의뢰를 완수해서 낭인전의 벌이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면 낭인패의 색깔은 바뀌지 않는다.

    ‘그동안 이놈이 공을 쌓은 것을 생각하면 금패로 올라가기는... 살짝 부족한가?’

    은패로 올라갈 요건은 홍가려를 호위한 의뢰로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로 흑접을 토벌하고, 홍가려를 노린 자들을 찾아서 일망타진하고, 양견회주의 의뢰를 받아 혈교도들도 박살내고....

    중간에 있던 흑룡교의 일은 의뢰와는 상관없이 간 것이니 뺀다고 해도, 지금까지 이룬 것만 놓고 봤을 때 승급은 당연했다.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구만.”

    “뭐가?”

    뜬금없는 말에 강엽이 미간을 찌푸리자 하후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네가 한 의뢰들 말이야. 몇 개 하진 않았지만 하나같이 굵직한 의뢰들이잖냐? 이것들 다 합치면 낭인전 수수료는 얼마야?”

    그 말에 강엽은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두들겨봤다.

    “대충 육천 냥쯤?”

    “...수수료만?”

    낭인전에게 줘야 하는 수수료는 의뢰비의 일 할.

    즉 강엽은 세 건의 의뢰로 육만 냥이라는 거금을 벌어들인 것이다.

    “흑접 토벌이 일만 냥에, 그 뒤에 홍가려에게 받은 의뢰가 일만 냥, 양견회의 의뢰가 사만 냥. 도합 육만 냥이니 수수료는 육천 냥이지.”

    “내 기억이 맞다면 은인패에서 은지패로 오르는 데 이천 냥이 필요한데. 은천패로 오르려면 사천 냥이 추가로 필요하고.”

    “....”

    “....”

    “그럼 은천패는 되고도 남는 거 아냐?”

    중간에 낀 백서희가 의문을 제기하자 하후진이 끙하고 앓는 신음을 흘렸다.

    “그렇지. 의뢰비가 몇 만 냥이나 되니 이렇게 조건을 채우는구만.”

    문제는 은패로 오르려면 승급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강엽이 바빠서 심사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딱히 서두를 생각은 없는데. 은패가 되는 게 그렇게 급한 문제도 아니고.”

    어차피 지금 쌓은 수수료는 은패가 되면 한꺼번에 정산되는 만큼 승급 심사를 조금 늦게 본다고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인마, 그거 다른 낭인들이 들으면 울화통이 터질 소리다.”

    낭인패의 등급은 곧 낭인의 가치. 강엽이 워낙 특수한 사례라서 소홀히 할 뿐이었다.

    강엽도 인정했지만,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일하지 않을 때도 무공 수련에 술법 연구에 정신이 없었다. 오죽하면 흡혈귀의 능력 중에 몸을 두 개 만드는 것이 있었으면 싶을 정도였다.

    “물론 나도 언제까지나 동천패에 머무를 생각은 없어. 슬슬 은패에 올라설 생각이다.”

    똑같은 실력을 지녔어도 동패와 은패는 전혀 다른 위치였다. 강엽이 은천패, 나아가 금패에 오른다면 위상도 확연히 달라질 터.

    “하지만 은패에 오르는 거랑 낭왕의 전갈은 다른 문제겠지.”

    사실 낭왕이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의외였다.

    강엽이 쌓은 공로가 상당하다지만 천하팔존인 낭왕이 관심을 가질 정도였던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일단은 낭왕의 사절을 만나볼 일이었다.

    “단목 방주, 손님은 어딨지?”

    “일단 빈객당에 모셨습니다. 본방에서 사고가 발생해서 당장은 뵙기 힘들다고 말씀드렸고요.”

    갑작스러운 방문인 만큼 이쪽도 상의할 시간이 필요했다. 단목정은 강엽이 경미한 상처를 입었기에 치료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둘러댔다.

    “날이 저물면 만나지. 장소는... 연못 옆에 정자가 있던가? 그쪽이 좋겠어.”

    하후진이 살짝 손을 들었다.

    “나도 같이 갈까?”

    대체 낭왕이 어떤 용무가 있길래 금패급 낭인을 사절로 보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백서희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빤히 바라봤다.

    “...뭐, 상관없겠지.”

    독대를 요구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굳이 혼자 갈 필요도 없긴 했다.

    * * *

    금파검 능정각은 젊은 사내였다.

    세간에 알려진 나이는 이립이 조금 넘지만 동안이라 그런지 강엽과 동년배로 보인다.

    고섭풍의 안내로 온 그가 휘파람을 불면서 짓궂게 웃으면서 포권을 쥐었다.

    “금파검 능정각이다. 갑자기 찾아왔는데도 극진히 환대해줘서 고맙다. 덕분에 편히 쉬었어. 아, 그리고 이건 내 낭인패.”

    허리춤에 걸려있는 낭인패를 빼서 보여준다. 순금의 낭인패엔 인(人) 자가 새겨져 있었다.

    흑룡교의 일로 봤던 야차마곤 도광륜과 대등한 낭인.

    초음을 펼쳐 능정각의 체내를 샅샅이 훑어본 강엽은 그가 중단전을 개방했으며, 하단전엔 야차마곤 이상으로 많은 내공을 축기했음을 알아봤다.

    “강엽이오. 이쪽은 내 동료들이고.”

    차례로 백서희와 하후진, 단목정을 소개했다.

    고섭풍도 있었지만, 이미 능정각을 응대했기 때문에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었다.

    단목정은 강엽이 자신을 동료라고 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예를 표했다.

    “숙정방주인 단목정입니다. 귀한 분께서 본방에 방문해주시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숙정방주께서 이런 미인이실 줄은 몰랐군요. 옆에 계신 소저도 굉장한 미모를 지니셨고. 미인은 많이 봤는데도 개안하는 기분입니다.”

    “과찬이십니다.”

    단목정이 겸양하는 반면 백서희는 강엽이 이미 소개를 했기 때문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능정각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고 하후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자염도 네 소문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 네 손에 죽은 일월신교의 마인들이 그렇게 많다며? 그쪽엔 일거리가 넘칠 텐데 사천까지 온 이유가 있나?”

    “특별한 이유가 뭐 있겠수? 그냥 지겨워서 떠난 거지.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그렇군. 사천은 마음에 드나?”

    “지금까진 그렇수다.”

    “다행인걸.”

    씩 웃은 능정각이 말을 이었다.

    “사천엔 일월신교는 없어. 대신에 혈교가 심심찮게 목격되고 있지. 당분간은 일거리는 끊이지 않을 테니까 오래 머물러줬으면 좋겠다.”

    “...혈귀들이 목격된다고?”

    “그래, 여기 오기 전에 노주 분타에 들렀는데, 너희가 혈귀들을 주살했다지? 근데 너희가 죽인 놈들 말고도 곳곳에서 혈귀들이 목격되고 있어.”

    근자에 갑작스레 출몰했기에 아직 민간에 널리 소문이 퍼지진 않았다.

    하지만 성도 분타에 머물며 사천 각지의 정보를 접하는 능정각은 사태를 심상찮게 보고 있었다.

    “뭐, 대부분은 붉은 옷을 걸친 놈들이지. 교령은커녕 교위도 잘 보이지 않아. 그래서 너희가 교령을 죽였다고 들었을 땐 정말 놀랐다.”

    강엽은 교령만 네 명을 봤지만, 원래는 만나보기 힘든 존재였다.

    대방파에서도 주요 전력으로 취급받는 절정고수들인 만큼 하찮은 일엔 투입하지 않기 때문.

    시비가 따라준 차를 호로록 음미한 능정각이 말을 이었다.

    “이번이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였지. 아마 너희가 받은 의뢰랑 엮여서 그렇지 않나 싶은데...?”

    “그럴 것이오. 우리가 덮친 곳엔 교위만 있었으니까. 지원으로 교령을 부른 거겠지.”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리라.

    능정각도 본론을 꺼내야 할 때임을 자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혈교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할 때가 있겠지. 오늘 내가 온 건 낭왕의 심부름 때문이야. 그분은 귀영, 네가 오기를 바라신다.”

    “이유는?”

    “그런 게 필요한가? 낭왕이 부르면 와야지.”

    “그럼 거절한다고 전해주시오.”

    “뭐라고?”

    “할 일이 많아서. 당신 말대로 혈교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면 대비해야지 않겠소? 별 이유도 없이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거라면 갈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이봐, 귀영. 말조심해.”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능정각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사뭇 정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공훈을 세운 것도 알겠고, 그만한 능력이 되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상대는 낭왕이야.”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여덟 명의 절대고수.

    낭인전이라는 대방파의 주인.

    “금패급인 나를 사절로 보낸 것만 해도 너에 대한 예우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아니면 그런 것까지 꼬치꼬치 알려줘야 움직일 정도로 네가 특별한가?”

    웃음기가 가신 눈동자엔 한기가 뚝뚝 떨어졌다. 살기나, 기세를 발한 것도 아닌데 깊디 깊은 심연을 마주한 것마냥 단목정과 고섭풍은 숨도 쉬지 못했다.

    강엽은 달랐다.

    “나를 낭왕의 아랫사람인 것처럼 말하는군.”

    눈앞에 들이닥친 무형의 압력을, 피식 웃음 짓는 것만으로 손쉽게 와해시켰다.

    정도는 다르지만 하후진과 백서희도 영향을 받은 기색은 없었다.

    능정각이 이채를 띠었다.

    ‘셋 다 은천패 이상인가?’

    사천에서 단 둘뿐인 금패의 낭인이 심부름꾼으로 쓰였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마음에 안 들 수밖에.

    그래서 꼬투리를 잡을 겸 살짝 심술을 부렸는데 이리도 쉽게 대응할 줄이야. 강엽은 물론 하후진과 백서희에 대한 마음속 평가가 상향되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강엽의 말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지그시 노려보며 추궁했다.

    “방금 그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낭인이 낭인전에 속한 존재요?”

    “그야....”

    순간 할 말이 궁해진 걸까.

    자신 있게 한소리 내뱉으려던 능정각이 말을 잇지 못하자 강엽이 코웃음을 쳤다.

    “엄밀히 말하면 낭인은 낭인전에 속한 게 아니지. 계약을 맺고 일거리를 가져갈 뿐.”

    그렇기에 낭인은 언제든 수틀리면 낭인전을 떠날 수 있다. 낭인들 사이에 등급의 고하는 있을지언정 상하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낭왕이 나를 불렀다고 무조건 응할 의무는 없소. 내가 하는 일을 내팽개치면서는 더더욱.”

    당장 낭왕이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판국이다. 만약 대륙 동쪽 절강성이나 복건성 등에 산다면 오가는 데만 한 달은 족히 걸리리라.

    “그러니 내가 자리를 비울 만큼 중요한 일인지 알아야겠지.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되어야 할 테고.”

    “강엽의 말이 맞수다.”

    훨씬 오랜 시간 낭인전에 몸을 담은 하후진조차 강엽의 말을 거들었다.

    “우리가 낭왕에게 복종할 이유는 없수. 낭왕이 이 녀석을 부른다면 그만한 이유를 대야 해.”

    낭인들이 일을 하던 중에 죽는다고 해도 낭인전은 복수하지 않는다.

    낭인과 낭인전엔 금전만 오갈 뿐, 동문(同門)의 정이나 규율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게 없다면 돌아가시오.”

    “낭왕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나도 그러고 싶진 않소.”

    “후우....”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진한 한숨. 훤히 드러낸 이마를 쓸어올린 능정각이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요즘 후배들은 참 맺고 끊는 게 확실하단 말이야. 나 때는 그런 게 없었는데. 오히려 낭왕을 뵙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겼지.”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겠지. 하지만 우린 아니우. 낭왕을 안 만나도 아쉬울 게 없수다.”

    “좋아. 인정하지. 내가 실수했다.”

    “그럼....”

    “하지만 어떤 일인지는 말 못해줘. 왜냐하면 나도 왜 낭왕께서 귀영을 찾으시는지 모르니까. 귀영에게 맡기실 일이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뿐이야.”

    “낭왕의 의뢰인가?”

    강엽이 눈을 빛냈다.

    그냥 부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다른 사람들을 제쳐두고 의뢰를 맡길 줄이야.

    “이건 내 짐작이지만... 아마 승급 심사를 겸한 의뢰일 거다. 낭왕께서 후배들에게 일을 맡기실 때는 대개 승급을 겸한 경우니까.”

    “원래 승급 심사는 그렇지 않을 텐데?”

    하후진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은패에 오르는 데 낭왕이 개입한단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당연히 특별한 경우지. 원래는 금패만 해당하는데.”

    금패에 올라서부터는 공적을 쌓는 것뿐 아니라 낭왕의 심사를 따로 받아야 한다.

    때문에 각 성에 한두 명 있는 금패급 낭인들조차 대부분 금인패일 뿐, 그 이상은 드물었다.

    운남, 사천, 귀주 등지가 모인 대륙 서남부에서는 능정각과 더불어 사천의 두 명뿐인 금패급인 진멸신권(盡滅神拳)만이 금지패였다.

    “금전적 이익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건 정말 좋은 기회라고. 낭왕께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종종 가르침을 주시니까. 네가 강한 건 알겠지만, 천하팔존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뻥 차버리진 않겠지?”

    “확실히... 그건 구미가 당기는군.”

    물론 낭왕을 만난다고 가르침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기회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난 함께 못 간다. 사천의 포정사를 북경까지 호위하는 의뢰를 받아서 말이야.”

    포정사라면 일성의 행정을 책임지는 지엄한 신분이다. 종이품(從二品)의 품계에 해당하는 벼슬.

    물론 포정사를 호위할 사람이 능정각만 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인이 포정사의 호위대에 끼는 것만 봐도 금패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었다.

    “그럼 낭왕은 어떻게 찾아가라고?”

    “여기로 가 봐.”

    능정각의 소매에서 곱게 접힌 양피지가 나왔다.

    “미리 말하지. 낭왕께선 한 곳에 오래 머무시지 않아.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바꾸신다. 너무 늦게 찾아가면 뵐 수 없을 거야.”

    “나 혼자 가야 하오?”

    “동행인은... 한 명만 데려가. 번잡한 걸 싫어하는 분이라서 우르르 몰려가면 질색하실 거다.”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능정각이 조언하지 않았어도 떼거지로 몰려갈 생각은 없었다.

    ‘휘주(徽州) 황산(黄山)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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